브레이커! - 3
< 1 >
AT&T파크의 수용인원은 41,915명.
쿠어스필드의 수용인원은 50,398명.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구장에 직접 나와 야구를 관람하는 팬의 수엔 한계가 있다는 뜻이지 뭐. TV와 인터넷 중계를 통해 경기를 보는 팬이 훨씬 많다는 당연한 소리고.
오늘도 AT&T파크는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관중이 가득하게 들어찼지만 중계를 보는 팬은 그 수십 배였다.
하지만 구장? 집? 사무실? 펍? 어디서 경기를 보든 마운드 위의 곰냥이 한 마리에게 눈을 떼기 어렵다는 점은 모두 똑같았다.
그 곰냥이가 미쳐 날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곰냥이 오늘은 또 삼진 페이스로 분위기 달구네.
▶ 메이저리그에 삼진 관련된 기록이 뭐 있냐?
▶ 탈삼진 통산 1위 놀란 라이언 5714개.
▶ 장난해? 저 곰냥이가 깰만한 거로.
▶ 라이브볼 시대로 보면 한 시즌 최다 383개. 이것도 놀란 라이언이 보유한 기록이다.
▶ 올 시즌 곰냥이 삼진이 몇 갠데?
▶ 전반기 137K. 그 뒤로 다저스 전에서 16K. 파이어리츠 전에서 퍼펙트게임 했을 때 17K. 레즈 전에선 좀 부진했다. 6K.
▶ 그럼 176K. 오늘 6회까지 15개니까 191K.
▶ 야! 그럼 아직 절반도 못한 건데…… 기각!
▶ 원래 삼진 퍼레이드 하던 투수는 아니었잖아.
▶ 지난 경기까지 159이닝을 던졌는데 176개면 이닝 당 한 개가 넘는데 삼진 못 잡는 투수도 아니지. 자이언츠가 올해 몇 경기나 남았는지 몰라도 시즌 300K는 넘기겠다. 한 시즌 300K로 타자들 농락하는 투수가 그렇게 흔해?
▶ 자이언츠 성적은 어제까지 57승48패 승률 0.542다.
▶ 무섭게 치고 올라왔네.
▶ 올스타전 끝나고 폭주모드.
▶ 스톤햄 부상 아니었으면 올해 몰랐겠는데?
▶ 스톤햄 돌아오니까 리키가 부상이라 올해는 아무래도……
▶ 어쨌든 올해 자이언츠 선발진에서 꿋꿋하게 자기 역할 다하는 선수는 곰냥이 하나야. 오늘 경기까지 57경기 남았으니까 앞으로 10번은 더 나올 거고 경기 당 10K만 잡아도 300K는 거뜬하다.
▶ 곰냥이 올해 성적이 어떻게 되지?
▶ 14승3패. ERA 1.68만 봐도 미친 거야.
▶ …… 진짜 벤클만 잘하는 게 아니었네.
▶ 그럼 노히터만 두 번에 퍼펙트 하나를 거저먹었겠냐?
▶ 인생시즌 보낸다고 말하기엔 이제 2년차. 1-2년 후엔 어떤 모습일지 겁난다. 메이저리그 혼자 하는 거 아냐?
▶ 나도 야구 혼자 할 거라는데 한 표.
▶ 자이언츠가 만약 곰냥이 팔아먹으면?
▶ …… 지금 7회 초 삼진 두 개로 드디어 17K. 구속이 100.4마일로 나왔는데 저런 투수를 팔아? 2년차를?
▶ 뭐냐? 7회에 100마일을 넘겼어?
▶ 진짜 곰이네.
▶ 잠깐만. 이 미친놈들아. 왜 한 경기 최다탈삼진 20개는 생각을 안 해? 7회 17K면 남은 이닝에 4개만 더 잡아도 신기록인데.
▶ 아!
▶ 아!
▶ 아!
“조,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온 건지 알고 있나?”
“저도 모르게 힘이 좀 들어가서……”
“하하하!”
우리 투수코치께서 웃긴 웃는데 표정이 괴이하다.
‘이 곰탱이를 어떻게 족쳐야 하나?’라는 표정이 맞는 것 같아.
할 말이 없긴 하다. 구속 100마일을 넘겼다고 개인면담까지 했던 게 며칠 지나지도 않았으니 어쩌겠어.
그때 분명히 100마일 공은 다음 시즌에 보여주자고 했거든.
그래도 7이닝 17K라는 끝내주는 투구를 진행 중인데 세쌍둥이가 사고 쳤을 때처럼 주눅이 들어야 한다니 서럽다.
그 와중에 동료란 인간들은 전부 내 뒤에 모여서 나 혼나는 모습이 즐거운지 키득거리고 있단 말이지?
7회까지 점수도 겨우 4점 내놓은 주제에.
“설마 내리진 않으실 거죠?”
“내린다면 들을 생각은 있고?”
“전 제 뒤에 있는 사악한 무리와 다릅니다.”
“와! 방금 들었어? 우리보고 사악하대.”
“틈만 나면 마사지를 빙자한 고문을 가하는 녀석이.”
“프린츠! 8회엔 네가 올라가 곰냥이 승리를 날려버려.”
내가 언젠간 덕아웃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 말 거다.
그래서 이 동료란 인간들의 실상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기왕 사고 친 김에 기록이나 세워봐.”
어? 너무 쉽게 넘어가는 분위기다.
분위기는 분위기고 살짝 몸을 돌렸다.
하! 이 인간들이 갑자기 시선을 돌리고 모른 척을 해?
“오늘 특별히 스트레칭 자세점검이 있겠습니다.”
“……”
“……”
< 2 >
“조 상태는 어때?”
“긴장이라곤 모르는 친구잖아요. 지금도 덕아웃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어요. 확실히 레즈 전엔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았던 모양입니다. 뭐 안 좋은 게 7이닝 2실점이었지만요.”
애쉬비 코치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사실 아무리 지시를 어겼다 해도 조를 마운드에서 내린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AT&T파크에 폭동을 일으킬 일 있나? 단지 조가 기록에 너무 긴장하지 않게 해줄 의도였는데 그마저 필요한 선수가 아니었다.
2016년 맥스 슈어저가 2실점 완투승과 함께 달성한 20K.
그 이후론 어느 투수도 그 영역에 발을 딛지 못했다. 내셔널리그에서 최강이라는 지금 다저스의 원투펀치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의 투저타고 현상은 한 경기 12-13K면 언론이 호들갑을 떨도록 만들었으니까.
어쨌든 그런 대기록의 갱신을 사정거리 안에 두고도 진짜 코치가 마운드에서 내릴지나 걱정하는 투수. 경기 끝나고 보자며 동료들을 굴릴 궁리나 하는 투수. 그런 녀석이 긴장으로 몸이 굳을까봐 걱정했다는 게 우습다.
베이커 감독 역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난 참 좋은 선수를 많이 만나봤어. 스톤햄만 해도 정말 좋은 선수지. 그래도 대부분 예상범위 안에 있었거든? 성장이나 하는 행동이나 조처럼 예측불가인 선수는 처음이야. 감독이 선수를 이끄는 게 아니라 업혀 다니는 기분이라고.”
“저는 오죽하겠습니까?”
팀 배팅, 수비 시프트 등 전술훈련을 제외하면?
코치가 필요 없는 선수다. 개인훈련은 쫓아다니며 말려야할 정도로 열심이고 팀을 하나로 묶는 중심 역할도 훌륭하다.
계속 자이언츠에 남는다면 몇 년 후 클럽하우스 리더는 정해졌다고 봐야 맞을 거다.
7이닝 2실점이 컨디션 난조인 선수.
투수코치 입장에선 자괴감까지 느낄 대상 아닐까.
“그런데 나쁜 것만은 아냐. 업혀 다니는 재미도 괜찮은 것 같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자이언츠와 반대로 로키스 덕아웃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안타 두 개를 어떻게 뽑아냈는지 모를 정도로 상대투수의 구위에 압도당한 타자들의 얼굴이 밝을 리 없었다.
2회 홈런을 때려낸 셰필드 역시 4회와 7회엔 삼진으로 허무하게 물러났을 정도니 다른 타자들은 말해 뭐하겠는가.
8회 초 공격은 6번 타자부터 시작.
만약 8회 공격이 또 삼자범퇴면 9회 초 공격은 9번 투수부터 타석에 들어가게 된다. 그나마 안타를 뽑아낸 3번, 4번에게 타선이 연결되지도 않는 상황.
20년 만의 기록갱신을 위한 희생양이 될 위기였다.
“어떻게 7회부터 구속이 올라?”
“진짜 저 친구 약이라도 하는 거 아냐?”
“괜히 엉뚱한 소리 하지 마. 지금도 신장과 체중이 늘고 있다는데 시즌 중에 구속이 오르는 것도 당연하지. 어쩌면 지금까지 조절하다 기록 때문에 리미트 해제한 걸 수도 있고.”
“미친……”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하지만 이해할 수도 있는 말이다.
퍼펙트? 대단하지만 혼자 달성한 기록이 아니니까.
상대투수 이외에도 23명이나 나란히 선 선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한 경기 이닝 21개 탈삼진이 나오면?
이전에 세워진 어떤 기록도 이름이 남지 않는다.
지금도 한 경기 19K를 달성한 투수가 누군지 아는 사람? 없다.
원래 이 바닥이 2등은 기억하지 않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리미트 해제할 조건이 되고도 남는다.
로키스는 그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거고.
7회 말 자이언츠 공격이 끝났다. 공수교대가 이뤄지고 타석에 들어가는 로키스 타자들은 마치 단두대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일단 맞혀. 땅볼이든 플라이 볼이든 상관없으니까.”
이미 승리는 머리에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 3 >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대충 예상은 했다.
좋은 공이든 나쁜 공이든 일단 배트가 나올 거라고.
방금도 공 하나는 빠졌는데 초구부터 바로 스윙이었다.
조급함.
내가 지난 경기에 저 조급함이 있었단 말이지?
절대 승부에서 조급하면 안 된다. 아쉬운 놈이 지는 게임이 야구니까. 이렇게 하나 확실히 배웠다.
하우어가 사인을 보냈다.
사실 이미 패턴을 의논했으니 필요도 없지만 상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보내는 사인이다.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바깥쪽 포심. 똑같은 패턴.
퍼펙트를 할 것도 아니고 때릴 거면 때려.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공 세 개로 쉽게 삼진을 잡아냈다.
방금은 패턴대로 몸 쪽 브레이킹 볼을 예측하며 휘두른 건데 막상 들어간 공은 중앙 하이패스트볼이었다.
이제 혼란은 더 깊어질 거다.
패턴대로 던지다 조금 반칙이지만 어쩔 수 없다고.
어쨌든 이제 18K. 앞으로 다섯 타자 중에 세 명이다.
7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대타다.
조금이라도 내 공에 익숙해진 타자가 아니라 대타?
그런데 홈플레이트로 바짝 붙는 게 힛 바이 피치 볼이라도 노리는 건가? 주자 내줘도 상관없는데.
딱!
“파울!”
딱!
“파울!”
배트를 짧게 쥐고 바깥쪽 포심을 적극적으로 커트.
패턴대로면 이제 노리는 건 중앙이나 몸 쪽의 브레이킹 볼.
딱!
“파울!”
다시 바깥쪽이었는데 속지 않는다.
저 정도 선구안과 컨택 능력이면 이미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어야 정상 아닌가? 뭐 그거야 로키스 사정이고.
“18K. 이제 조 선수의 개인기록은 갱신됐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이죠. 조 선수에게만 유일한 기록을 남기려면 삼진 3개가 더 필요합니다. 아, 로키스에서 대타를 기용합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나오는데요. 해밍스 카빌 선수예요.”
“와우! 카빌 선수 재활이 끝났나요? 아메리칸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로키스로 트레이드 됐던 선수죠. 2033시즌 AL 타격왕이었는데 부상으로 시즌을 접었다가 구단에 트레이드 요청을 해서 로키스로 둥지를 옮겼었죠. 2년이 넘는 재활을 끝내고 메이저에 복귀했습니다.”
“자이언츠의 신성 미누 조 선수와 3년 전의 AL 타격왕인 해밍스 카빌 선수의 맞대결이라. 팬들에겐 또 하나의 이벤트입니다. 누가 오늘 이런 경기를 예상했겠습니까?”
“확실히 조 선수는 올해 메이저리그 흥행의 중심에 선 선수가 맞습니다. 단순히 배짱만 두둑한 투수가 아니라 실력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선수고요.”
< 4 >
오늘 한 타자에게 두 자리 수 공을 던진 건 처음이다.
차라리 시원하게 안타를 치고 나갈 것이지. 물론 지금은 내가 계속 유인구로 삼진을 노리는 중이라 타자 입장에선 공을 확실하게 보는 편이 유리하다.
많이 던져 공 끝이 무뎌지면 다음 타자가 땅볼이든 플라이 볼이든 삼진으로 물러날 확률이 줄어들 테고.
좋은 타자네. 패턴에 속지도 않는.
그럼 오늘 감춰둔 카드를 꺼내볼까?
이번 사인은 내가 직접 내렸다.
하우어의 미트가 고정됐고.
딱!
헐! 몇 개 던지지 않았던 베어-팜이 맞았다.
1-2루 사이로 빠지는 타구. 이거 차라리 안타가 되라고 빌어보면 어떨까? 벼락 맞을 소린가.
그런데 앰브로즈가 날 벼락 맞지 않게 구해줬다.
끝까지 따라가 글러브 끝에 걸린 공을 위로 튕겨 올려 1루.
“아웃!”
젠장! 삼진 하나 놓쳤나?
아니다. 이것도 조급증이다.
오늘 기록 못 세우면 다음 경기에 세우면 되지.
편한 마음으로! 이기는 게 더 중요하다. 안타를 안 맞았으니 내가 이긴 거야.
잊지 말자. 결과도 조급함을 버려야 얻는다.
다시 대타가 나왔다.
마음 편하게.
퍼엉!
“스트라이크!”
딱!
“파울!”
딱!
“파울!”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첫 대타가 누구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배트만 짧게 쥔다고 커트놀이를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억에 새겨두고 다음에 만날 때 조심해야할 타자는 첫 대타.
“어깨에 힘 들어가지?”
마음속으로 이제 8이닝 19K란 결산을 하며 덕아웃에 들어가는데 하우어가 날 기다렸다가 물었다.
“조금은.”
“넌 한 경기 27K도 할 수 있는 놈이야.”
“그래서 몸에 힘 빼라고?”
“숫자에 얽매이지 말라고.”
“당연하지.”
좋은 녀석들이 곁에 있어 마음이 느긋해지는데 도움이 된다.
야구를 평생 이 녀석들과 같이 할 순 없겠지만 영감님처럼 나중에 캠프라도 차려놓고 오늘 이야기를 할 수 있길 바란다.
< 5 >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9회 초 로키스의 첫 타자가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나며 조 선수의 기록갱신이 어려워지나 싶었는데 역시 조 선수 흔들리지 않습니다. 두 번째 타자를 다시 삼진으로 돌려세웠어요. 한 경기 20K 기록의 타이가 만들어졌지요?”
“네. 이제 26개의 아웃카운트가 나왔습니다. 솔직히 이제 경기 결과에 관심을 갖는 팬은 없을 겁니다. 마지막 27번째 아웃이 과연 삼진이 될 것인지 여부가 더 중요하니까요.”
[미누.]
‘응?’
[힘껏 던져요.]
‘힘껏?’
[네. 100마일 어차피 들켰잖아요.]
‘기록 한 번 세워봐?’
[인생 뭐 있어요? 감추고 살게.]
‘어? 미네 인생관이 바뀐 거 같다?’
[여잔 원래 변덕이 심해요.]
‘큭큭!’
웃긴 했는데 미네 말이 맞다.
인생 뭐 있어? 비장의 한 수를 남기며 영화 찍을 거 없이 정면승부도 해보는 거지.
퍼엉!
“스트라이크!”
퍼엉!
“스트라이크!”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27번째 아웃카운트 콜을 들으며 바로 뒤를 돌아봤다.
AT&T파크가 떠나갈 듯 함성에 휩싸였는데 내 귀엔 그 함성이 들리지도 않았다.
101.4라는 숫자만 눈에 들어와 박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