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라고? - 4
< 1 >
나는 어릴 적 인수분해를 징그럽게 못했다.
인수분해가 안 되니 방정식은 물론이고 고등수학 입문이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 과목이라도 낙제가 있으면 야구도 할 수 없는 게 원칙.
그래서 선생님께 특별지도도 받아보고 위 세 포식자에게 헬프 요청도 해봤지만 개념을 깨우치지 못한 탓에 성과가 없었다.
당연히 수학시간이면 머리를 쥐어뜯기만 했는데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물었다.
“넌 다른 과목은 점수 좋잖아? 수학만 왜 그래?”
“인수분해를 못하겠어.”
그때 녀석의 대답은 기가 막혔다.
“=0을 붙여서 처음부터 방정식으로 생각해. 방정식은 다항식을 0으로 만드는 수를 찾는 거잖아.”
미친. 그게 쉬우면 왜 고민을 하냐고?
그냥 웃고 말았는데 그날 밤 터무니없게 원리를 깨달았다.
진짜 다항식 옆에 =0을 붙이고 인수분해. 쪼갠 식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해당숫자를 넣어보면 된다는 것 하나에서 출발해 인수분해 과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유레카!
난 낙제를 면하고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지난 경기에서 했다.
퍼펙트를 해내며 집중했던 순간(사실 그때는 퍼펙트인 것도 몰랐지만) 간질거리는 느낌이 왔었다. 스트라이드를 넓히며 투구 폼을 조정하던 과정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아주 조금씩 최적화에 다가가는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사막의 신기루 같았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멀어지는 신기루.
결국 9회 말 마지막 타자를 잡을 때까지 그 느낌의 실체를 잡아내지 못했는데, 내가 퍼펙트게임을 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나가 그 느낌을 곱씹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이틀 전 레즈와의 2차전에 다시 기회가 왔다.
1회부터 두들겨 맞아 실점을 하고 더 이상의 실점을 막기 위해서 전력투구를 할 때였다. 그립의 감각, 투구를 시작하며 중심이동과 힘의 전달, 마지막 릴리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몸에 꼭 맞으면서도 동시에 매우 편안한 느낌.
그런데 그때는 이미 7회였고 욕심을 부려선 안 될 때였다.
어제야 불펜투구를 했다간 애쉬비 코치가 또 심장을 부둥켜 잡을 테니 참았지만 오늘은 내가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달아나려는 느낌을 겨우 붙잡고 있는데 다시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거란 불길한 예감이 찾아왔거든.
끝내 하우어를 협박해 앉혀두고 투구를 시작했다.
투구를 시작하니까 확실히 느낌이 되살아났고.
그런데 지금 뭐라고? 100마일?
다만 놀랄 일은 또 있었다.
“언제부터 곰냥이가 도둑고양이가 됐지?”
헉! 이 목소리는?
하우어가 스피드건을 가져와보자며 설레발을 치는 바람에 뒤에서 다가오는 소리를 못 들었다.
“하하! 잠깐 어깨만 푼 겁니다.”
“왜? 이젠 하루 쉬고 다시 선발로 나가게?”
“절대 아닙니다. 딜리버리 조정 중인 거 아시잖아요. 하루를 쉬면 그 하루만큼 느낌이 사라져서……”
“좋아. 그런데 방금 100마일은 무슨 소리야?”
젠장! 하우어가 말한 걸 애쉬비 코치가 다 들은 모양이다.
이 자식이 왜 설레발을 쳐서.
“코치님 진짜예요. 제가 이 녀석 공을 몇 개를 받아봤는데 느낌을 모르겠습니까? 미트에 파고드는 소리 자체가 달랐어요.”
“100마일을 넘긴 것 같다고?”
“네. 미트 안에 장갑 하나로는 못 받겠는데요.”
결국 미니 쇼케이스가 벌어졌다.
휘파람을 불며 스피드건과 여분의 장갑을 가지러 간 하우어가 동료들 몇에게 100마일 타령을 해댄 탓이다.
이거 오늘 경기는 다 뒷전인 거 아냐?
감독님 얼굴까지 보이는데.
“몇 개 던졌나?”
“딱 두 개 던졌는데요.”
“포심 열 개. 나머지 다섯 개씩 던져봐.”
애쉬비 코치도 궁금하긴 했나?
꽤 많이 허락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글러브 안에 든 공을 잡으며 그 느낌을 다시 떠올렸다.
방금 전에 던진 공이라 그런지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와인드업-키킹-스트라이드-다리, 허리, 어깨까지 이어지는 힘을 담아 릴리스.
퍼엉!
주변이 조용했다.
구경 온 동료들도 말은 없었고 나도 그들보단 공에 신경을 썼다.
퍼엉!
퍼엉!
어깨엔 전혀 무리가 없다.
100구, 200구도 던질 것 같은 기분이다.
퍼엉!
포심 10개를 채웠는지 하우어가 사인을 바꿨다.
그럼 팜-체인지업부터.
퍼엉!
스핀-커터도.
퍼엉!
마지막 가장 웃긴 이름 베어-팜.
퍼엉!
투구를 모두 마치고 뒤로 돌아서자 애쉬비 코치의 곁에 감독님이 나란히 서서 내게 말했다.
“조, 잠깐 이야기 좀 하지.”
< 2 >
“구속이 얼마나 나왔는지 궁금한가?”
“흐흐. 당연하죠. 던질 때 느낌이 좋았어요.”
내 대답에 베이커 감독도 애쉬비 코치도 웃기만 한다.
감독이야 투수 출신이 아니라고 들었으니 모르겠지만 애쉬비 코치는 내가 말한 느낌이란 게 뭔지 알 텐데.
그래도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았다.
“100.7마일이 최고였어.”
“…… 와우!”
“자네가 던지고 자네가 감탄을 해?”
“솔직히 실감이 안 나요. 대학 때 평균구속이 92마일이었던 투수에게 4년 만에 너 100마일 던진다면 실감 나겠어요?”
“하하하!”
“허허!”
이 양반들 좋아서 웃는 거 맞지?
암, 팀에 100마일 강속구 투수가 나오면 좋아해 줘야지.
마주보며 웃고 있는데 베이커 감독이 내게 고해성사를 했다.
“2034시즌이 끝난 후 FA선수 둘을 놓치고 구단에서 콜과 프레이디까지 팔아치울 때 난 사실 불만이 많았어. 팀 타선의 주축을 내주기엔 자네랑 하웰, 케인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했거든. 실제 자네 투구를 봤을 때도 제구가 좋다는 장점 외엔 크게 특별할 게 없어 보였고. 한데 내 눈이 확실히 틀렸었다는 걸 인정해야겠어.”
진짜 고해성사 맞아.
그렇다고 맞장구치며 ‘네. 감독님 틀렸습니다.’ 할 순 없고.
“혼자 해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미스터 호프만 이야긴가? 나도 감사하게 생각해.”
“밸런스를 잡는 과정은 여기 애쉬비 코치 도움도 컸고요.”
“내 재계약에 굉장히 도움이 될 말이야. 프런트에도 꼭 그렇게 전해주게.”
“패키지 계약을 제안할까요?”
한참을 키득거리며 웃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기분. 좋다.
뭐 작년과 올해 성적도 있고, 남들은 평생 야구를 해도 이루지 못할 기록도 세워 동료들이 날 보는 시선마저 달라졌지만,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들어보긴 처음이니까.
야구를 하면서 항상 천덕꾸러기였던 나 아닌가.
내가 출전하는 경기엔 타자들의 방망이도 힘 있게 돌아가지 않던 걸 아는데, 이젠 메이저란 무대에서 감독과 코치가 공개적으로 날 인정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어.
이 기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진짜로.
“좋아. 스트라이드 넓힌 투구 폼이 이제 안정됐다고 보고 그 느낌을 확실히 몸에 각인시키는 것도 잊지 마.”
“네. 흔한 말로 몸이 기억해야죠.”
역시 애쉬비 코치는 투수 출신이고 투수코치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기억해둘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단, 올해는 전력투구 금지야.”
“……?”
감독님이 덧붙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지? 완투를 해도 구위가 떨어지지 않는 게 내 최고장점이란 평가를 받는데 100마일 찍어두고 아끼란 말인가?
“조만간 사무국에서 또 약물검사가 나올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야. 구단이나 코칭스태프는 자네를 믿어. 믿지만 약물논란이 계속되는 선수는 이미지 관리가 어려워져. 누가 뭐래도 자넨 흥행성이 있는 선수고 프로라면 그 흥행성도 유지하는 게 옳아.”
“알겠습니다.”
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리버티 미디어 쪽에선 자이언츠의 흠집을 잡기 위해 편향된 기사를 쏟아내는데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
보수적인 야구 인사들은 나 때문에 촉발된 투수 퍼포먼스도 여전히 반대하는 입장이라 터무니없는 의혹도 부풀릴 거고.
오늘 투구는 더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물러났다.
이젠 동료란 이름의 원수들을 상대해야겠네.
“조가 구속만 늘어난 게 아니지?”
“네. 공이 살아있어요. 팜-체인지업을 비롯한 브레이킹 볼은 홈플레이트 앞에서 시작한 변화가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계속됩니다. 하우어가 포구가 좋은 선수인데도 힘들어 하던데요.”
“케인이 마스크를 쓰려면 포구 훈련을 더 해야겠군.”
“그렇죠.”
베이커 감독은 갑자기 페릴이 생각났다.
2010년대 자이언츠 왕조를 다시 건설해 보겠다는 꿈을 키우던 젊은 단장보좌. 어쩌면 꿈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강견. 지금도 대단하지만 계속 진화 중인 투수.
감독의 입장에선 노히터나 퍼펙트나 팀이 쌓는 수많은 승리와 똑같은 1승이라 가볍게 생각했지만, 오늘 조의 투구가 다시 한 단계 성장한 걸 보니 이젠 무서울 지경이다.
“페릴이 알면 좋아하겠어. 알아서 관리하겠지.”
< 3 >
세이프코 필드.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인데 오늘 진귀한 구경을 했다.
시애틀 기후 특성이 부슬비가 워낙 자주 내려 관중보호 차원에서 개폐식 지붕이 설치된 곳이 세이프코 필드. 지붕을 여닫는 장면을 실제로 본 것이다.
“체이스 필드에서도 봤던 건데 신기해?”
“브루어스랑 경기했던 밀러 파크도 돔 구장이잖아.”
“막상 닫는 장면은 본 적이 없어서. D백스랑 경기할 때는 처음부터 열려있었고 브루어스랑 할 때는 닫혀있었고.”
“난 네 녀석이 더 신기해. 어떻게…… 컥!”
하우어가 또 구속 이야기를 할 분위기라 잽싸게 옆구리에 일격을 날렸다. 한참을 컥컥댄 녀석이 고개를 들고 으르렁거린다.
“날 죽일 셈이냐?”
“매년 꽃 들고 찾아가마.”
“오지 마. 아니, 그런 무서운 말 좀 하지 마!”
리버 블로우 한 방에 막 말을 더듬을 거면서 왜 그랬어?
꼭 폭력을 쓰게 만들어요. 주먹을 얼굴에 들이밀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데 이래봐야 10분만 지나면 또 서로 목을 조르며 툭탁거린다.
그래서 자이언츠 덤앤더머 소리를 듣는 거라고. 이 바보야.
뭐 나도 기꺼이 엉겨 붙으니 할 말은 없다만.
일단 경기가 시작한 후에야 우린 조용해졌다.
매리너스는 작년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에서 2위를 했지만 와일드카드 획득에는 실패한 팀이다.
올해도 아직 포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LA 에인절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에 밀려 와일드카드 순위 3위에 머무는 중이고. 어쩌면 자이언츠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오늘 경기도 꽤나 치열할 것 같다.
역시나.
따악!
“유후! 터너! 넌 멋진 놈이야!”
“터너! 리드오프가 공은 좀 봐줘야하는 거 아냐?”
매리너스 투수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오늘 경기 초구였는데 상대 리드오프에게 안타를 맞았으니 기분이 좋으면 이상하겠지.
내가 리드오프에게 맞아봐서 저 기분 알아.
그래도 홈런은 아니니 나보단 나은 거라고.
문제는 터너가 탁월한 수비와 평균 이상의 타격으로만 올스타 단골이 된 게 아니란 점이다.
일단 터너는 출루를 하면 투수를 꽤 괴롭힌다.
1루와 거리를 벌리며 언제든 도루를 할 의도를 비추거든.
막상 도루 1위를 해본 적은 없지만 도루 순위권 내에서 도루자는 가장 적은 선수가 터너다.
투수에겐 신경에 굉장히 거슬리는 주자를 내보냈다.
바로 리드를 넓히기 시작했다.
견제구만 연속 두 번이 들어가고.
난 저런 경우 도루 하려면 하라고 신경 꺼버리는데 말이지.
견제훈련은 꼬박꼬박 해도 실력이 늘지 않으니 후속타를 맞지 말자는 주의로 선회했다.
투수가 너무 주자에게 신경 쓰면 다음 타자만 유리하니까.
지금도 앰브로즈에게 첫 투구가 위험했다.
한복판에 몰린 공이었는데 앰브로즈 너 뭐하냐?
저 투수 자기가 실투한 걸 알았는지 인상이 더 구겨진다.
다시 1루에 견제구. 리드는 넓혀도 중심을 뒤에 두고 있었는지 터너의 복귀는 재빨랐고 세이프 콜이 나왔다.
저 투수 뭘 잘못 먹고 나왔나?
야구란 게 하다보면 별 일 다 겪는 건데 반응이 너무 신경질적이다. 리드오프 초구 안타 좀 맞은 게 어때서? 리드가 넓어? 주자가 루에 나가면 투수 신경 긁는 건 당연한 의무 아닌가?
따악!
그럼 그렇지.
멘탈 흔들리면 더 맞는 게 야구지.
“터너 멈춰!”
“앰브로즈 자식 쳐도 왜 좌익수 앞이야?”
우리 동료들?
안타를 쳐도 구박하는 인간들이다. 원수들.
일단 무사 1루와 2루. 분위기 좋다.
그런데 투수가 2루의 터너를 보며 뭐라고 하는 것 같아.
뭐냐? 왜 글러브를 집어던져?
오늘은 나 시애틀 시내에 나가야 해.
매리너스 선수들 집어던지고 시내에서 테러당하라고?
후우!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