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주 - 1
< 1 >
생각할수록 바보 같은 리키다.
언젠가 칼 립켄 주니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역대 최장기록인 2632경기 연속출장 기록을 가진 전설. 메이저리그에 깨지기 어려운 기록들이 많지만 내 생각에 최고는 바로 저 기록이다.
비슷한 활약을 한 투수로는 27시즌을 선발로 뛰며 통산 최다탈삼진, 통산 최다 노히터, 통산 최다 300탈삼진 등의 믿기 어려운 기록을 가진 놀란 라이언을 꼽아야겠지.
그럼 길고 긴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저 두 명의 기록이 가장 눈부신 이유가 뭘까? 아무리 빅 리그에 괴수가 많아도 저런 철인들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누구나 부상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고.
이 세상에서 확실한 건 세금과 죽음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언제, 누가, 어디서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할지 아무도 모른다.
스톤햄이 없는데 자신까지 이탈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했을까?
팀의 5할 승률이 무너지면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라도 일어나?
아마 녀석은 지금도 감독이 전에 말했던 ‘올해도 포스트시즌을 집에서 TV로만 보고 싶은 선수 있나?’란 말을 떠올리고 있을 거다.
자이언츠가 가을야구를 못하게 되면 자기 탓이란 자괴감에 빠질 지도 모르고.
그렇게 놔둘 순 없지.
팩트 폭행 살인마 리키에게 자괴감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미네.”
[내일 출전해도 아무 문제없어요.]
“이젠 내가 물어볼 질문까지 미리 아는 거야?”
[제가 미누를 만난 게 벌써 천 일이 넘었어요.]
“……”
진짜네. 천 일이 뭐야?
올해 크리스마스면 만으로 4년이다.
이젠 숨 쉬는 것만큼이나 미네의 존재가 자연스러운데 내가 부른 이유 정도 아는 건 이상할 게 없지.
[이론상 이틀에 한 번씩 완투가 가능한 사람이 미누죠. 하루쯤 로테이션을 앞당긴다고 문제되진 않아요.]
“생각 같아선 진짜 이틀에 한 번 나가고 싶다.”
[자책 심한 사람 아니라면서요.]
“자책이 아냐.”
[…… 그냥 리키를 위해?]
“아니. 가을야구 나가서 놀려먹으려고.”
[츤데레.]
“…… 내가?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전에 절 츤데레라고 부른 거 기억도 안 나요?]
아! 미네가 새침한 표정과 말투를 할 때가 있어 한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배운 단어를 써먹었던 게 기억난다.
츤데레의 진화형인 시발데레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기억나. 미네가 원조 츤데레지.”
< 2 >
파이어리츠 감독은 자이언츠 라인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시즌 전반에 자이언츠를 끌고 왔던 두 신예 중 한 명이 팔꿈치부상으로 장기 DL에 올랐단 소식은 들었다.
그래서 오늘 선발은 자이언츠 불펜 중 이닝소화능력이 있는 카니시나 놀라, 또는 파머스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누 조?
“조 선수가 자이언츠와 다저스 3차전에 나오지 않았나?”
“맞습니다. 완봉승을 거뒀죠.”
곁에 있던 타격코치도 감독의 기억이 맞음을 확인시켜줬다.
“5-6이닝 던진 것도 아니고 완투를 한 투순데 겨우 사흘 쉬게 하고 마운드에 올린다? 자이언츠가 우릴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냐?”
인터넷을 보면 파이어리츠 잔혹사란 말이 나돈다.
1970년대와 90년대 초반엔 전성기를 누렸고, 비록 스몰 마켓임에도 5번의 월드시리즈 우승경험도 있는 강팀이 파이어리츠였다.
하지만 그 뒤론 20년간 5할 승률을 못 넘겨본 약팀의 대명사.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다 2013시즌부터 와일드카드를 얻고 부흥기에 들어가긴 했는데 그마저 잠깐이었다.
다시 20여년의 암흑기를 겪으며 메이저리그 팬에게 ‘리빌딩만 매번 20년인 팀’이란 오명을 쌓고 있다.
당연히 자이언츠가 파이어리츠를 가볍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 섞인 의문이 들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감독실로 들어오는 사람은 투수코치였다.
문을 열기 전 감독의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네. 자이언츠도 지금 상황이 많이 곤란한 것 같던데요.”
“스톤햄 복귀하면서 치고 올라가려다 제동이 걸렸다?”
“그렇죠. 리키가 DL에 올랐으면 승격이나 트레이드 소식이 들려야 정상인데 아직 잠잠하고요.”
“하긴. 또 어떻게 보면 기횐데 투덜거릴 것도 없지.”
사실 조라는 2년차 투수의 구위를 생각하면 내일 경기는 꽤 어려울 걸 예상했다. 하지만 그 투수가 로테이션을 바꿨다.
포스트시즌도 아니고 정규리그에 로테이션을 당긴 투수라면 공략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타순이 한 바퀴 돌 때쯤엔 구위가 떨어지겠죠.”
“최대한 많이 던지게 해야겠군.”
< 3 >
오늘 경기에 내가 라인업에 오른 걸 보고 걱정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리키의 부상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 구른 시간이 몇 년인데 모를까.
팔꿈치 이상을 느끼면서도 강행한 무리한 등판.
몸이 재산이고 무기인 메이저리거는 절대 피해야할 일이었다.
스톤햄이 당장 내게 다가왔다.
“괜찮겠어?”
“그럼요. 전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안 해요.”
“…… 리키가 바보였다고 까는 거야?”
“최상급 멍청인데 까도 돼요.”
특히 미워할 수 없는 멍청이라 더 화가 난다는 말은 아꼈다.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내 오글거리는 건 취향도 아니고.
“파이어리츠가 어떤 작전으로 나올 것 같아?”
“누구나 생각할 방법 하나뿐이죠. 완투 후에 고작 사흘 쉬고 출전하는 투수는 빠른 승부를 노릴 테니까요. 파이어리츠는 그 반대로 제 투구 수를 늘려야 승산이 높고요.”
“맞아. 자칫하면 뻔히 알면서도 끌려갈 수가 있어.”
“제가 끌려 다닐 스타일은 아니잖아요?”
빙긋 웃어주니 스톤햄도 따라 웃는다.
동료들에게야 구박받고(주로 리키!) 씩씩대는 일이 있어도, 경기에 나가선 오기로 똘똘 뭉친 게 나라는 걸 잘 아는 탓이지 뭐.
하다못해 주심의 루키 존 적용에도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았던 걸 알 텐데 더 이야기하면 잔소리다.
감독은 어제 통화를 해서인지 내게 당부하는 말도 없었다.
애쉬비 코치 역시 전적으로 내게 맡긴다는 뜻인지 불펜투구만 잠시 지켜보다 갔고.
1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동료들끼리 어떤 이야기가 오고갔는지 파이어리츠 타자들이 나를 괴롭히는 게 먼저가 아니다.
리드오프 터너가 벌써 투수에게 공을 8개나 던지게 하고 있다.
그리고.
“베이스 온 볼스!”
저러면 차라리 안타를 맞는 게 낫다.
승부는 승부대로 어렵게 하고 볼넷으로 진루를 시키다니.
예전에 잭 선장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파이어리츠는 기껏 유망주 열심히 키워 다른 팀에서 포텐 터지게 해 코치들 속 터지게 만들던 팀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리빌딩만 20년을 하던 리빌딩 달인이라고.
그 말에 배를 잡고 웃어댔는데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투수 리포트를 보면 올해 메이저로 콜업된 선수.
저렇게 도망가는 피칭만 하는 투수를 올려야할 정도면 팜이 단단하진 않다는 뜻이니까.
갑자기 카니시가 생각나네.
카니시도 좋은 구위를 가졌지만 승부를 꺼려하다 투구 수는 늘어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향이 강한데.
그래도 불펜으로 가선 마음이 편한지 훨씬 잘 던지고 있다.
좀 더 심장이 튼튼해진 뒤엔 다시 선발진 합류도 가능하겠지.
따악!
“와아아아!”
“터너! 달려! 너도 고든처럼 거북이냐?”
이번엔 앰브로즈의 타구가 우중간을 갈랐다.
2루타에 1루에서 홈까지 여유 있게 들어오고도 고든과 비교당한 터너가 덕아웃에 들어와 페티트의 목을 졸라댄다.
“죽어!”
“안 돼. 거북이에게 죽으면 수치사야.”
후! 진짜 원수들이다.
어쨌거나 경기는 쉽게 풀어갈 것 같다.
< 4 >
1회 초에만 3점을 뽑아낸 자이언츠.
덕분에 마운드에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깨는 충분히 풀어뒀지만 연습투구를 몇 개 던지고 타석에 들어서는 파이어리츠 리드오프를 확인했다.
그런데.
‘미네.’
[맞아요. 팀에서 출루율 1위인 코사 매켄지예요. 또 장타율도 좋아서 3번에 주로 서던 타자죠. 파이어리츠가 강수를 뒀네요.]
‘선구안이 가장 좋은 선수로 힘을 빼겠단 거네.’
스톤햄과 예상했던 방향으로 스토리가 흘러간다.
차분하게 와인드업.
딱!
“파울!”
응? 지켜보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타격?
바깥쪽. 존에 걸친 공을 커트했단 건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보고 최대한 잘라내겠단 뜻이다.
많이 던지게 하고 밋밋한 공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작전.
내가 경기당 볼넷이 두 개도 안 되는 걸 알기에 때리려는 거다.
딱!
“파울!”
볼 없이 투 스트라이크.
내겐 나쁠 게 없는 상황이다.
오늘은 다시 하우어가 미트를 꼈다. 마운드에 오르기 전에 녀석과 사인을 정하면서 말해둔 게 있다. 바깥쪽 공으로 투 스트라이크를 빨리 잡자는 작전이었다. 일단 바깥쪽 낮은 코스는 어떤 타자에게도 껄끄러운 법이니까.
배트가 쉽게 나오지 못할 거란 판단에 했던 말인데, 1번 타자부터 저렇게 적극적인 타격을 한다면 차라리 더 좋지.
퍼엉!
“볼!”
윽! 너무 뺐나?
그럼 한복판의 승부는 어때?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딱 공 4개였다.
바깥쪽 공만 3개를 보면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한다.
그래서 한복판 하이 패스트볼에 스윙 각도가 안 나오지.
“헛스윙! 리드오프로 섰던 첫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나는 매켄지 선수입니다. 사흘 휴식 후에 등판하는 투수라고 보기엔 조 선수의 구위가 전과 다를 게 없습니다. 조 선수 이전 경기가 다저스 전이었는데 무려 16K 완봉승을 거뒀거든요.”
“네. 오늘도 첫 타자를 상대로 굉장히 쉽게 삼진을 뽑아냈습니다. 매켄지 선수 출루율을 보면 파이어리츠 내에선 가장 선구안이 좋은데 바깥쪽 낮은 공만 3개를 보며 속았어요. 몸 쪽이나 한복판의 공은 예상해도 높이까진 생각을 못해요. 자신도 모르게 스윙이 낮아진 거죠.”
“지난 경기를 보면 조 선수 포심의 수직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진 게 느껴지던데요.”
“전체적으로 던지는 구종마다 무브먼트가 좋은 선수죠. 또 구속까지 1마일 이상 상승했으니 더 때리기 어려워요. 오늘 휴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출격했는데 저 구위가 만약 9회까지 이어지면 뭐 파이어리츠에겐 재앙이겠는데요.”
첫 타자를 쉽게 잡아내서일까?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다. 스트라이드를 넓히며 바로 큰 효과를 볼 거란 기대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제구도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다저스 전에선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씩 조정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겠고. 매니지먼트 특전 중에 숙련도가 빠르게 오른다는 항목이 있었는데 그 영향인 건가?
2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퍼엉!
“스트라이크!”
저 친구는 커트할 생각도 안 하네.
아예 생각하고 나온 구종이 있는 것 같은데.
퍼엉!
“볼!”
바깥쪽 공엔 아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스윙을 했던 게 아니라 매켄지처럼 높은 공에 속진 않을 거고.
그럼 어디 이건?
퍼엉!
“스트라이크!”
프런트도어 스핀-커터.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에 깜짝 놀랐나?
몸을 비틀어 피하려던 공인데 홈플레이트 쪽으로 꺾어졌으니 조금 황당하겠지. 이 공을 때릴 자신 없으면 바깥쪽 공에 배트를 내밀어! 어서!
딱!
“파울!”
그렇지. 스핀-커터를 눈에 익게 해주긴 싫다고.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 5 >
한국인들도 이젠 미누 조란 선수가 미국인이란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저 한국계일 뿐 미국인이라고.
그래도 메이저리그를 보며 마땅히 응원할 한국 선수가 없는 상황이라 미누 조의 출전경기는 모두 챙겨보는 편이었다.
▶ 베이커 감독이 미친 거 아냐? 지금 월드시리즈야?
▶ 그러게. 무슨 정규시즌에 사흘 휴식 등판이야?
▶ 원래 선수 혹사시키기로 유명한 감독이잖아.
▶ 아재요. 그 베이커가 아니에요. 피부색부터 달라요.
▶ 20년 만에 야구 보는 아재 구박하지 말자.
▶ 미친! 매켄지 공 2개는 차이 나게 헛스윙이네.
▶ 방금 조가 던진 거 구속 얼마 나왔냐?
▶ 97.4마일.
▶ 다저스 전에 완투하고 힘도 안 빠졌나?
▶ 4-5회는 가봐야 알지. 이제 25살. 젊잖아.
▶ 저런 선수는 다저스에서 뛰어줘야 제 맛인데.
▶ 네. 다저스 팬 들어가시고요.
▶ 여기 다저스 팬이 삼분의 일인데 무슨.
▶ 베리 켄트도 삼진. 두 타자 연속 삼진이다.
▶ 진짜 쉽게쉽게 잡네. 오늘 삼진 신기록 또 갱신하나?
▶ 설마 또 9회까지 던질라고?
▶ 사흘 간격 완투? 어디 끌려가 해부당하지.
인터넷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걸 난 몰랐다.
평범하게 타석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노림수가 있는 타자들을 상대로 그 허를 찌르는 맛이 짜릿했을 뿐이다.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후! 1회 세 타자 연속 삼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