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LB의 새끼 고양이-50화 (50/188)

에이스의 자격 - 2

< 1 >

아! 메츠와 2차전이 끝나고 제시와 로건을 만났다.

제시는 그나마 내 에이전트가 된 탓에 가끔 문자라도 주고받는데 로건은 크리스마스 휴가 때 아니면 통 볼 수가 없었으니까.

다만 이번에도 내가 먼저 연락을 한 건 아니다.

“켁! 아보! 아보!(항복!)”

덕분에 목을 졸려도 할 말이 없었다.

월스트리트에서 잘 나가는 애널리스트가 요즘 한가한가?

고등학교 때부터 암벽에 미쳐 살았던 작은 형이긴 한데 아직까지 이런 팔뚝 힘은 사기잖아? 그래도 내가 명색이 투수라고. 나도 못 풀어내는 팔뚝으로 고객 목이라도 휘감으면……

수익률 가지고 로건에게 시비 거는 고객은 없겠네.

“뉴욕까지 와서 내가 연락 안했으면 그냥 가려고 했지?”

“내가 그렇게 나쁜 놈 같아?”

“응.”

제길! 그런 대답은 망설이는 척이라도 해줘.

“이 자식이 요즘 잘 나가거든.”

“뉴욕에 와서 형도 안 찾을 정도로?”

“형이 뉴욕에 있다는 걸 기억은 했을까?”

제시는 아예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콱! 에이전트 계약 해지할까?

아냐. 살해당할 거야.

그래도 반격을 해야……

“내가 시즌권 보내줬는데 둘 다 구장에 와보긴 했어?”

“어제, 오늘 네가 뛰기는 했냐? 아니면 내가 샌프란시스코까지 네 경기를 보러 가야 해?”

“TV로 꼬박꼬박 챙겨보는 거에 만족해라.”

“……”

반격? 이건 뭐 바늘 끝도 안 들어간다.

생각해보면 누구를 말로 갈구는 거나 몸으로 팬케이크를 굽는 거나 모두 위의 두 형과 누나의 영향이 크다.

형들에겐 굴리기 좋은 막내.

누나에겐 아예 처음 생긴 동생.

형이나 누나가 있던 사람은 알겠지만 끔찍했다.

귀엽다며(?) 달달 볶고.

대들면 주먹만 한 녀석이 까분다며 달달 볶고.

어디 가서 맞고 들어오면 날 건드린 놈들에게도 명복을 빌어줘야 하지만 나 역시 강하게 커야 한다며 굴려댄 셋이다.

내가 덩치가 커진 후에도 1:1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괴수의 피지컬을 가진 삼총사. 큰 형 스테판은 이제 결혼도 하고 조카도 있으니 좀 부드러워졌을라나.

어쨌든 둘의 말엔 틀린 게 없었다.

잘 나가봐야 29살의 로건이나 27살의 제시나 아직 개인생활을 맘껏 누릴 형편은 아니겠지. 내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야구에만 파묻히는 거랑 뭐가 달라.

이럴 땐 대충 머리 긁적이면 넘어가야 한다.

“또 어릴 때처럼 훈련에만 매달리며 사냐?”

“뭐 훈련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시험 전날에도 운동하고 공부하던 놈이지.”

“그러다 몸살로 911을 불러야 했던 놈.”

젠장! 기억력도 좋아. 흑역사 다 나오겠네.

혹시라도 이 원수들이 나와 관련된 인터뷰 같은 걸 하게 되면 막아야 한다. 좋아하던 여자애 울린 이야기까지 할 거야.

“그건 고열 때문이었잖아.”

“무리를 했으니까 고열이 났지. 이젠 너 몸이 재산이다.”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난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뜬금없이 생긴 피부색 다른 동생을 잘 챙겼던 이들이다.

대학 때도 틈틈이 내게 송금을 해줬고, 루키리그부터 시작한 마이너리그 시절에 에드만 내게 지원을 한 게 아니었다.

개인 인스트럭터가 필요할 거라며 도와주려 했었다.

영감님 이상의 인스트럭터가 어디 있냐며 거절했지만.

형제간에 감동할 게 그렇게 없어 겨우 돈이냐고?

웃기는 소리! 어려울 때 그저 말로 힘내라고 하는 것보단, 어설프게 입으로 응원하는 것보단, 적지만 나눠쓰자고 손을 내밀어줄 때 눈물 나게 고마운 법이다.

꼭 눈물 젖은 빵을 먹어봐야만 그 고마움을 알면 바보고.

내가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3년.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에드와 형제들 덕분이다. 이건 진짜다.

“스테판도 있으면 우리 넷 다 모이는 건데 아쉽네.”

“프로젝트 때문에 바쁠 걸. 시애틀에 가면 연락해봐.”

자이언츠 인터리그에 매리너스가 포함됐던가?

원정으로 가게 되면 잊지 않고 연락을 해야지.

가볍게 맥주 한 병 마신 게 전부지만 내게 가족이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즐거웠다.

그런데 자리를 끝내기 전 로건이 뜻밖의 소리를 전했다.

“양키즈가 널 눈독 들인다고 하더라.”

< 2 >

콜로라도 로키스.

어느 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홈구장에서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팀이 로키스다. 쿠어스필드라는 극단적인 타자친화형 구장에 적응한 선수들과 가끔 원정을 온 선수들이 같은 컨디션으로 부딪히길 바랄 순 없으니까.

듣기론 로키스 선수들마저 원정을 다녀오면 고지적응훈련을 한다던데 원정팀은 어떻겠나.

작년 시즌에도 로키스와 원정 경험이 있었다.

시리즈 전적은 2:1로 승리를 거뒀지만 출전한 선수들의 평균자책점은 대기권을 뚫고 올라갔다. 리키도 그때 5이닝을 던지며 매 이닝 점수를 내줬을 정도다. 타선이 미쳐서 폭발하지 않았으면 위닝 시리즈를 기록하지도 못했을 거다.

아무튼 이번 시리즈 2차전엔 내가 선발출전이다.

몇 점으로 막아야 잘 던졌다고 하려나. 타선이 뒤는 받쳐줄 수 있을까? 쿠어스필드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된다.

그런데.

“숨쉬기가 귀찮아진 거냐?”

“너야말로 팔다리 네 개 중 어떤 게 귀찮은지 말해라.”

로키스 타자들 타격영상을 뒤적거리는 바로 옆에서 또 리키랑 하우어 이 원수들이 툭탁거리고 있다. 아니 툭탁거리는 건 너희 마음인데 그걸 왜 내 방에 와서 하냐고! 이건 뭐 덩치나 작은 녀석들이어야 공간을 내주지.

나도 조금(?) 큼직하지만 메이저리거 중 아담한 녀석은 없다.

몸에 문신이나 몇 개 새기고 무리지어 밖으로 나가면 당장 경찰에 신고 들어갈 놈들이 내 방을 차지하고 안 나간다.

여기 어디 꿀 발라놨냐?

이 자식들은 달래 봐도 안 되고 협박을 해도 안 먹힌다.

그렇다고 진짜 팰 수는 없으니 일단 진지모드!

“리키! 너 내일 선발이다. 비행기 타고 와서 안 피곤해?”

“괜찮아. 안 그래도 내일 경기 때문에 이야기 중이다.”

음, 투수와 포수. 배터리의 대화는 항상 필요하지.

괜히 투수가 포수를 마누라라고 표현하는 게 아니다.

만약 투수가 과묵한 사람이라면 진짜 와이프와 대화보다 자기 포수와 대화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일단 경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건 투수와 포수.

포수는 투수보다 타자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 읽기에 투수를 리드할 수 있고, 투수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도 포수다.

다만 투수는 포수가 전하는 정보에 무조건 따르는 게 아니다.

자신의 판단과 엇갈리면 어느 쪽을 따를지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의 근거엔 서로간의 신뢰가 큰 몫을 차지하고.

대화가 없는 배터리? 마음이 통하지 않는 배터리?

그런 관계의 배터리라면 기다리는 결과는 파탄뿐이다.

“좋아. 이 데이터를 활용하면 도움이 될 거야.”

숙제를 내줘 쫓아야겠다.

“뭔데?”

“로키스 타자들의 대표적인 타격 폼 세 가지.”

리키와 하우어만 눈이 동그래진 게 아니라 페르시랑 나머지 녀석들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달라붙었다.

“뭐야? 전력분석팀에서 준 자료야?”

“오늘 받았어?”

“내가 만들었어.”

사람들은 보통 타자의 타격 폼이 고정됐다고 생각한다.

함부로 타격 폼을 수정해서는 안 되는 걸로 알고.

일부분만 맞는 말이다.

타협할 수 없는 무게중심 이동 등을 빼면 타격 폼에도 변화를 준다. 스탠스도 변화시키고 배트를 짧게 혹은 길게 쥘 때 스윙을 가져가는 각도도 달라진다.

또한 스윙 각도는 투수의 구종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노리는 공이 싱커나 스플리터 등 종 변화구일 때와 슬라이더처럼 횡 변화구일 때 스윙을 달리 가져가는 타자들이 많다.

아니, 많은 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다.

타자라고 분석하고 연구하지 않는데 살아남을 정도로 메이저리그가 만만한 곳은 아니니까.

문제는 이걸 내가 만들었단 거겠지.

당장 내 태블릿을 뺏어간 하우어가 30개 구단별로 정리된 데이터를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타자들이 특정 구종을 노릴 때 가져가는 타격 폼과 스윙 각도 분석 괜찮지?

“이런 건 언제 만든 거냐?”

“작년 콜업됐을 때부터.”

“미친.”

뭐 미쳤단 소리가 나올 것까진 예상했다.

그런데.

“솔로의 밤을 이런 걸 만들며 보낸 거냐?”

리키 너 이 자식! 나 또 뼈 맞았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숨이 안 쉬어지네.

대꾸도 못하고 한숨을 몰아쉬는데 이번엔 페르시 차례다.

“자이언츠 타자들도 분석했어?”

“진짜. 30개 구단 데이터가 전부 있네.”

이건 앰브로즈.

난 그냥 편하게 대답했다.

“우린 언제든 다른 유니폼을 입을 수 있으니까.”

< 3 >

2033년 드래프트에서 날 지명한 팀은 자이언츠가 아니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였고, 파드리스 산하의 루키리그에서 출발 더블A를 거쳐 트리플A로 승격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트리플A 승급 소식을 듣고 며칠 되지도 않아 내가 트레이드되었단 통보를 들었다. 덕분에 한 해에 스프링캠프를 두 곳으로 나눠 참가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날 지명해준 파드리스.

빅 리그 데뷔를 시켜준 자이언츠.

두 팀에 내가 불만은 없다. 불만은 무슨. 고마워한다.

하지만! 난 언제 어떤 상황이든 팀을 옮길 수 있음을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밤마다 미네의 도움을 받아 영상을 분석하고 타자들의 타격 폼에서 약점을 찾을 때, 자이언츠라고 제외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자이언츠에 남아도 동료가 떠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구단이 올해 로스터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는데 그걸 무조건 믿을 만큼 난 순진하지 않다.

당장 어제 로건이 양키즈가 날 눈독 들인다고 알려줬다.

딜이란 상대가 부르는 가격과 내 기대가 충족되면 언제든지 성사될 수 있다. 메이저리그는 커다란 비즈니스 시장이니까.

당연히 예외 같은 건 없었고 지금 녀석들이 보는 건 지난 9달 동안 분석이 끝난 데이터다. 뭐 앞으로도 계속 모으겠지만.

“당연한 거지. 조금 씁쓸하긴 해도.”

“씁쓸할 거 없어. 우리가 자이언츠에서 몽땅 FA를 선언하면 그 페이롤을 구단이 어떻게 감당할 건데?”

리키 이 자식의 팩트 폭력은 정말.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건 이 중에 최고다.

하긴. 이 자식과 처음 만났던 때가 기억난다. 자기는 원래 던지던 스플리터를 과감히 버리고 커브로 갈아탔다며 그저 내 투구를 봐주겠다고 했었다.

수년을 던진 구종을 갈아 치우는 결단력은 어디서 나올까?

냉정한 현실인식. 그거 말고는 마땅한 대답이 없다.

“리키 말이 맞아.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말고 이 데이터나 이용해서 내일 경기에 써먹을 수 있으면 써먹어. 단 너희 방에 가서!”

“…… 이 자식 우리 쫓아내려고 귀한 걸 풀었네.”

와! 리키. 난 너처럼 감 좋은 녀석이 정말 싫어!

얼른 가버려. 데이터 분석을 본다고 내일 경기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서 연구나 해.

서로 뭘 더 묻지는 않았다.

영원히 같은 팀에 남을 순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트레칭 방법이랑 이런 데이터는 왜 공유하느냔 질문? 거기에 대한 대답?

모두 닭살만 왕창 돋을 뿐이니까.

영감님만 해도 체인지업은 팀 메이트에게 배웠다.

거기에 정말 많은 연구와 훈련을 더해 영감님만의 팜-볼을 만들어냈지만 처음 체인지업 그립을 알려준 건 일단 동료였다.

배운 사람은 대기록을 세우고 전설이 됐는데 가르쳐준 사람은 이름도 잊힌 아이러니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 내 방을 차지한 이 원수들이 원래 가진 재능은 날 훌쩍 뛰어넘으니까.

뭐 그래도 괜찮다.

녀석들에게 미네까지 있는 건 아니니까.

< 4 >

따악!

“See-Ya! 넘어갔습니다. 3회 위기를 잘 넘겼던 리키 선수인데 4회에 셰필드 선수에게 홈런을 맞고 맙니다. 역시 쿠어스필드는 쿠어스필드죠. 리키 선수 작년부터 자이언츠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좋은 투수인데 쿠어스필드에서 성적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에요. ERA가 조금 높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일반인이 생각하기엔 쿠어스필드가 패스트볼 투수에게 불리할 것 같은데, 변화구가 주력인 투수에게도 좋다고 말하긴 곤란하거든요. 공기밀도가 낮아 구속은 올라가는 대신 회전에 의한 공기역학적 움직임은 적어집니다. 커브가 떨어지는 각도부터 슬라이더가 휘어지는 각 역시 훨씬 밋밋해져요. 리키 선수의 주력 구종 둘이 커브와 슬라이더 아닙니까.”

“네. 방금 홈런을 맞은 공도 커브였죠.”

로키스의 4회 말 공격이 끝난 후 스코어 3:2

이 미친 구장은 1점의 차이는 언제 뒤집혀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막상 2점짜리 홈런을 맞고 덕아웃에 들어온 리키는 그렇게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이곳 쿠어스필드에서만 볼 수 있는 호흡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날 보더니 씩 웃기까지? 저 자식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모르겠다.

셰필드가 리키의 공과 함께 정신까지 펜스 너머로 날려버린 거겠지. 난 내일 투구에나 대비해야 해.

‘미네.’

[네.]

‘이번 4회 홈런. 셰필드 스윙 좀 분석해보자.’

[그럴게요.]

아무래도 로키스는 저 셰필드를 조심해야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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