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도 있는 법이야 - 1
< 1 >
“출발이 좋군.”
“도박이 아니었어요.”
한 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는 많아야 1500명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부에서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서포트하는 프런트 직원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한다면 외부에는 훨씬 더 많다.
전국방송, 지역방송을 가리지 않고 메이저리그를 중계하는 방송사를 먼저 꼽아야 한다. 방송사 외의 언론도 시즌 내내 각 구장에 전담기자를 배치해 여러 가지 소식을 전하고.
또 하나 뺄 수 없는 분야가 전문가들이다.
세이버 매트릭스가 일반인의 손에 의해 탄생한 이래 꼭 야구관계자가 아니라도 전문가들은 넘쳐흘렀다.
그 수많은 전문가들이 비시즌에 하는 일은 다음 시즌 월드시리즈에서 누가 우승할지 예측하는 것이다. 그 예측을 위해 각 구단이 스토브리그에서 맺은 계약부터 검토한다.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웠는지 팀의 색깔에 선수가 잘 어울릴지 온갖 추측이 춤을 춘다.
그런데 올해 자이언츠에 칭찬은 없었다.
작년에 투타 양면에서 약점을 노출해 지구 최하위로 떨어지고도 특별한 보완이 없었다는 혹평만 많았다. 루키 투수 둘이 후반기 빼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선발진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평가였다. 그 루키들을 믿는 거라면 도박이란 말까지 나왔으니 뭐.
타격과 수비 역시 작년보다 나아진 게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자이언츠가 보여주는 성적은?
다저스 전에 2승1패 위닝 시리즈.
로키스 전에 2승1패 위닝 시리즈.
D 백스 전에 2승2패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162경기 중에 고작 10경기.
아직은 전문가들 예측이 맞았다, 틀렸다 평가할 건 아니지만 적어도 투수 기용에서 자이언츠가 도박을 했다는 말은 수정해야 한다.
데니스 리키 1승1패.
미누 조 2승.
단순히 승리만 볼 게 아니라 피칭내용이 모두 훌륭하다.
리키는 패배가 기록된 경기도 퀄러티 피칭을 했고, 미누 조는 2승을 거두는 동안 16.2이닝을 던져 고작 3실점. ERA 1.66이다.
이래도 도박을 했다고?
“워낙 비난만 많아 내 귀가 따가울 정도였으니 하는 말이지. 오죽하면 존슨이 내게 전화를 다 했을까.”
“구단주가요?”
“그 친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손자들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야구에도 관심이 늘었어. 자이언츠 경기는 몽땅 챙겨보는 모양이야. 오늘부터 AT&T파크에도 나올 걸.”
“구단주가 팀에 관심을 많이 가지면 좋은 일이죠.”
관심이 있어야 응원을 하고 투자도 한다.
구단주 금고를 열려면 그 관심은 환영해야 한다.
“구단주 지갑 빼올 생각뿐이군.”
“당연히 기분 좋게 지갑을 맡길 수 있게 해야죠.”
구단의 투자는 필수다.
이젠 페이롤 수치가 뒤에서 순서를 세는 게 훨씬 빠를 정도가 됐지만 두각을 드러내는 루키들을 장기계약으로 묶어야 하니까.
FA신분을 얻었을 때 잡으려고 하면 늦는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던 일이지 않나.
< 2 >
따악!
따악!
피칭머신 한 세트를 때려내고 물었다.
‘미네. 좀 어때?’
[130Km 속구만 때리는 수준이죠, 뭐.]
‘윽!’
도무지 타격의 발전이 없었다.
지난 두 경기 승리를 챙기긴 했는데 타석에서 안타는 딱 한 개.
그래서 타격훈련을 제대로 시작했다. 매 경기 전력투구를 한다고 인식된 탓에 이젠 불펜투구에도 제한이 걸려 개인훈련 시간에 마땅히 할 것도 없다.
러닝과 스트레칭, 쉐도우 피칭 등의 기본훈련과 전술훈련 뒤엔 피칭머신 앞에 서는데 여전히 몸이 뻣뻣하다.
[미누. 타격까지 잘하고 싶어요?]
‘내가 타격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먹겠다는 게 아니잖아.’
[음, 좋아요. 영상을 한 번 봐요.]
어? 그동안 투구 폼만 보여주던 영상이 바뀌었다.
이젠 내가 타석에 들어간 모습이다.
‘확실히 굳어있긴 하네.’
겨울부터 자이언츠를 뺀 29개 구단의 타자들 영상을 몰아보느라 눈알이 빠질 뻔한 덕분에 타자를 보는 안목도 조금 늘었다.
아무리 봐도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다.
[이제 미누의 피지컬에 맞춰 이상적인 타격 폼을 입혀볼게요.]
‘스윙이 부드럽네.’
[누군가 떠오르지 않아요?]
‘…… 앨버트 푸홀스?’
[맞아요. 카디널스 시절의 푸홀스죠.]
미쳤다. 앨버트 푸홀스라니.
게다가 그의 카디널스 시절이라니.
타율 0.299 출루율 0.366 장타율 0.541에 32홈런, 99타점, 99득점의 성적이면 지금도 메이저리그 타자의 상위 10%에 들어갈 수치다.
그런데 저 기록은 푸홀스가 카디널스 시절에 기록했던 커리어 로우 성적들만 나열한 거라면 이해가 될까?
부상을 입은 해도 있고 슬럼프에 빠졌던 기간도 있지만, 그걸 다 포함해서도 카디널스 10년간 푸홀스는 몬스터 시즌을 보냈다.
‘너무 목표가 거창하다.’
[미누의 피지컬에 맞추면 가장 이상적이에요. 미누가 키는 좀 더 크지만요.]
‘설마 그래서 이제야 보여주는 거야?’
[전 미누가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해부당하길 바라진 않거든요.]
뭔가 섬뜩한 말이다.
난 지금 분명히 주목받는 루키 중 하나다.
작년에 제법 화려하게 데뷔했고, 올해도 두 경기에 출장해 소포모어 징크스 따윈 없다며 투수 스탯을 재는 각 데이터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타격까지 푸홀스 수준으로 한다면?
안드로이드가 아닌지 해부하자고 덤비고도 남지.
[풉! 농담이에요. 긴장하지 말아요.]
‘농담처럼 안 들려서 그래.’
[솔직히 말해 타격까지 능력치를 분배하기엔 미누의 투수로서 스탯이 너무 낮았어요. 아직도 종합평점 80짜리 투구는 없잖아요.]
‘맞는 말인데 지금 불펜투구도 금지라……’
훈련을 더하고 싶지만 고집을 부릴 명분이 없다.
4-5일 휴식의 로테이션을 지키며 중간에 투구훈련은 1-2번으로 제한하는 게 일반적인 방침인데 난 요주의 대상이기도 하니까.
‘전 80구 체력소진이 없어요!’라고 외쳐?
젠장!
그런데 미네가 황당한 말을 덧붙였다.
[능력치 조정을 할 수는 있어요.]
“조정? 어떻게?”
나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 내서 외치고 말았다.
다른 머신에서 훈련하던 동료들이 전부 쳐다본다.
뭐 미친놈 취급 받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넘어가자.
[아이언 맨 특전의 세부사항을 조정해서 타격 능력치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당연히 패널티도 감수해야 돼요.]
‘구체적으로 말해봐.’
[지금 체력소진 없는 투구가 80개잖아요?]
‘그렇지.’
[5-60개로 낮추고 남은 능력치를 타격 쪽에 돌리는 거죠.]
유, 유레카?
아, 이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지.
Awesome! 이게 가장 적당한 표현이네.
얼마나 낮출까? 사실 80개의 공짜 투구는 선발투수가 120개 안팎의 투구를 할 체력을 가져야 한대도 과한 수치가 맞다. 매 경기 120개를 던진다면 혹사라고 하겠지만 난 불펜피칭 한 번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20개만 낮추면 타격이 얼마나 향상될까?’
[잠시만.]
미네가 계산을 하는 모양인데 마구 행복해진다.
더도 안 바란다. 딱 2할 타율만 가자.
[2할은 넘겠어요. 꾸준히 훈련을 해주면 2할 중반은 되겠죠.]
‘충분해.’
[승리투수가 됐을 때 랜덤으로 나오는 Slugger! 보너스랑 결합되면 아마도 OPS가 투수 중엔 가장 높아질 걸요.]
‘좋아. 당장 적용해줘.’
< 3 >
이젠 AT&T파크의 홈 팬과 경기를 한다.
6승4패. 자이언츠 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경기를 싹쓸이한 다저스에게 지구 1위는 내줬지만 무려 6할 승률이다.
자이언츠의 작년의 출발과는 너무 대비되는 성적에 AT&T파크에 관중들이 가득 찼다. 역시 홈이 편하다니까. 야유보단 응원과 환호의 목소리가 높은 게 훨씬 낫지.
“리키! 사인해줄래요?”
“그럼요.”
“페르시! 쿠키 좋아해요?”
“없어서 못 먹어요.”
여전히 리키는 여자 팬들에게 인기가 많다.
피앙세까지 있는 페르시가 그 다음 순위고.
페르시는 쿠키까지 한 바구니 선물을 받았다.
부럽다. 나도 쿠키 좋아하는데. 잘 먹을 수 있는데.
왜 여자들은 저런 녀석들을 좋아할까?
하우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저 녀석들이랑 내 차이가 뭘까?”
“사람과 곰?”
“죽어!”
배트를 집어 드니 하우어가 잽싸게 도망쳤다.
210파운드(95.3kg)의 리키가 곰이라고 놀려도 성질날 판에 몸무게가 나랑 차이도 없는 놈이 누구보고 곰이래?
뭐 나도 사인요청을 아예 못 받는 건 아니다.
주로 어린 아이들이라 문제지.
“미누! 사인해줘요.”
“그래. 친구는 이름이 뭐야?”
“마이클!”
“좋아. 마이클에게! 됐지?”
그것도 아직 혀 짧은 소리를 하는 4-5살 아이들.
아이들에게 사인도 해주고 동료들과 잡담도 해가며 준비를 하는데 반대편 덕아웃 위에서 환호성이 들린다.
오늘 우리 상대는 워싱턴 내셔널스.
작년 원정을 갔던 내셔널스 전에서 쉬어갈 곳이 없는 타선이 뭔지 실감을 하고 왔는데 올해는 그나마 홈에서 저들을 맞이한다.
타선에서 투수 자리에 지명타자를 세우는 아메리칸리그가 타격에선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내셔널스를 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의 타선이다.
아메리칸리그 팀과 인터리그를 치러봤으니 하는 말이다.
뭐 전부는 아니고 작년엔 AL의 중부지구와 경기를 가졌다.
올해는 3년 룰에 따라 AL 서부지구와 만나는데 설마 내셔널스 이상의 타선을 가진 팀이 흔할라고.
솔직한 말로 흔하다 해도 162경기 중 딱 20경기다.
베이 브릿지 시리즈(Bay Bridge Series)라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경기는 고정이다.
지역 라이벌 전이라 휴식일 없이 홈 2연전, 원정 2연전을 치른다.
나머진 3년 룰에 따른 지구단위 순환으로 4팀과 3연전 한 번, 1팀과 2연전 두 번을 갖는다.
뭐 인터리그 설명할 때는 아니고 저 환호성의 주인공이야 뻔하다.
디제이 바르가스.
내가 앨버트 푸홀스의 타격 폼을 입히기 위해 미네와 특훈에 돌입했지만, 저 친구의 현재 기록은 푸홀스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
작년 내셔널리그 MVP도 바르가스가 먹었다.
올해 내셔널스의 전력은 더욱 강화됐다.
작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다저스에게 4:2로 패한 원인이 투수력 부족이라 여겨 FA시장에서 선발만 둘을 업어갔으니까.
타선이야 뭐 저기서 더 올라가면 사기고.
그래도 자이언츠 전력 역시 부족하진 않다.
로테이션에 딱 맞게 스톤햄부터 출전이라 선발진도 강력하다.
세 번째 경기에 나설 내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지만 허무하게 난타는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스톤햄 자리를 슬쩍 바라봤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흔들흔들 박자를 타고 있다.
“팀 타율이 2할7푼을 넘었대요.”
곁에 가서 작은 도발을 날려봤는데.
“오늘 1푼쯤 낮춰주지 뭐.”
나를 살짝 돌아보더니 넘치는 자신감만 내보인다.
하긴, 모든 투수가 경기 전 목표는 퍼펙트게임이다.
“타자분석 많이 했어요?”
“어차피 가위바위보 게임이잖아. 의미 없어.”
“서로 약점 분석하고, 상대 분석에 대비해서 역공을 준비하고?”
“당연한 거야. 분석은 하되 분석에 의존하지도 마.”
결국 믿을 건 자기 공뿐이란 뜻이다.
이 사람은 참 한결같다. 내게 했던 첫 조언이 네 공을 믿으란 내용이었고 그 뒤에도 항상 행동으로 보여준다. 자기 공을 던졌으면 경기결과에 얽매이지도 않고 타자의 부진을 불평하지도 않는다.
올해로 나이 서른.
메이저리그 경력은 이제 10년이던가?
대단한 멘탈이고 자기신뢰의 표본이 맞다.
언제 이 양반도 내 방에 끌어들여 맥주도 좀 마시게 해서 흑역사를 한 번 들어봐야겠는데. 샌프란시스코에 자기 집이 따로 있어 구단숙소를 쓸 일이 없으니 원.
< 4 >
퍼엉!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 스톤햄의 투구는 깔끔하다.
1점을 내주긴 했어도 5회 투 아웃! 현재까진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다. 상대투수도 잘 던지긴 했지만 새비지에게 2점 홈런을 맞았거든.
스톤햄의 승리를 잘 챙겨주는 건 역시 새비지다.
이제 한 타자만 더 잡으면 5회도 끝이다.
그런데.
따악!
“스톤햄!”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벤치에서 일어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