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캐츠 산(産) 악마들 - 3
< 1 >
[다이아몬드 백스, 자이언츠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며 와일드카드 쟁탈전에서 선두 유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다저스를 상대로 루징 시리즈.]
[다시 연패를 거듭하는 자이언츠, 4할 승률 또 무너지나?]
[드래프트 상위 픽을 노린 Cheat. 그 Cheat에 루키들을 방패로 내세운 자이언츠에게 실망한다.]
역시나 언론에서 자이언츠 두드리기에 나섰지만 감독은 꿋꿋하게 루키들을 선발라인업에 올렸다.
확장로스터가 적용된다 해도 9명의 라인업에 경기 시작부터 루키들을 4-5명씩 투입하는 메이저리그 팀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1-2명이고 그마저도 중간에 교체 투입하는 경우가 많다. 언론은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쉽게 말해 탱킹 아니냐고.
루키를 넣고 성적이 좋았다면 상관없다.
그런데 8월 성적표와 비교하면 9월은 많이 암울하다. 중반까지 반타작도 못했으니까. 사실 그마저 올해 자이언츠 평균값은 되는데도 언론은 물고 뜯고 씹어대기에 바빴다.
내 성적? 두 번을 더 나가 1승 1패를 했다.
미쳤던 평균자책점도 2점대로 올라갔고.
“덴버는 이 무렵이면 시원하지 않나? 왜 이리 더워?”
“괜찮아. 오늘 네가 선풍기 돌리면 시원해질 거야.”
하지만 이제 주눅 든 녀석들은 없다.
워낙 기존의 주전들이 덕아웃 분위기를 자유분방을 넘어 정신병동으로 만들어놨고 우리도 거들었거든.
여기서 우리란 나와 리키, 하우어를 말한다.
제대로 실력발휘 못하고 시무룩한 녀석들 케어한다고 꽤 신경을 썼던 보람이 있다.
감독과 코칭스태프도 노력을 많이 했다.
경기결과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않고, 코치들이 맨투맨으로 붙어 타격과 수비 등에서 노하우를 풀어놓았다.
전부 뜯어고친다는 생각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의 변화로 시작해 큰 흐름을 만들어가게. 가끔 곁에 가서 들어보면 코치 같은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영감님이 정말 대단한 양반이다.
자신이 메이저리그의 살아있는 전설이면서 새로 구종을 만들어 전수할 정도로 인스트럭터 능력도 뛰어난 거니까.
아무튼 오늘은 덴버란 동네에 왔다.
로키산맥에 자리 잡아 원마일시티로 불리는 곳.
하지만 야구팬들에겐 투수들의 악몽 ‘쿠어스 필드’가 더 유명한 곳. 나는 처음 와보는데 LA나 샌프란시스코처럼 북적이는 느낌은 거의 받지 못했다. 원정길에 다닌 도시들 중 가장 조용한 편이다. 원정이래야 몇 군데 가지도 않았지만.
“여기가 그 쿠어스 필드구나. 로키스가 내셔널리그 팀 홈런 1위인 게 이 구장 덕분이라고?”
“원래 투수력보단 타자들이 강한 팀이야.”
리키가 오늘 선발인데 크게 긴장을 안 한다.
이 자식 아예 마음을 비운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 같다.
작년 빅 리그에 처음 올라와 무너졌던 리키는 이제 없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패배의식이 녀석을 순둥이로 만들었다면 이기는 방법을 알게 된 후엔 달라졌으니까. 입담으로 자이언츠 최강 라인업을 짜면 요즘은 리키가 4번 타자다.
아무튼 녀석에겐 자신감이 가득 채워졌다.
한 경기 내준다고 흔들리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플레이 볼!”
1회 초 자이언츠 공격의 시작이다.
오늘 라인업은 리드오프로 앰브로즈가 출전한다.
지난 경기에서 2루수로 투입돼 공을 한 번 더듬긴 했었지만 볼넷을 두 개나 골라냈다. 실책이 아예 없는 선수도 있나?
감독은 오히려 선구안이 좋다면서 앰브로즈를 1번에 세웠다.
그런데.
따악!
앰브로즈! 너 이 자식 파이팅!
선구안이고 나발이고 로키스 선발의 초구를 잡아당겨 좌익수 앞의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래. 좋은 공이 왔으면 치라고 선구안이 필요한 거지.
오늘 왠지 분위기가 괜찮을 듯?
따악!
얼씨구? 2번으로 올라갔던 페티트까지?
쿠어스 필드의 분위기가 단박에 끓어오르는 게 느껴진다.
“앰브로즈! 달려! 달려!”
페티트의 안타가 로키스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를 정확히 갈랐는데 우익수가 공을 잡았을 때 앰브로즈는 이미 3루 베이스를 밟고 있었다.
녀석은 멈출 생각도 없었다.
베이스 코치의 팔도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고.
로키스 우익수 어깨가 강하단 리포트를 본 것 같지만 그래도 얼마만의 선취점 득점인데 포기할까.
촤아아아악!
앰브로즈! 너 슬라이딩 하나 예술이다.
포수의 미트를 향해 연계도 없이 한 방에 날아오는 공을 봤는지, 옆으로 몸을 틀면서 손만 홈플레이트를 향해 뻗는다.
그나저나 저 우익수 진짜 어깨가 좋긴 좋네.
저 어깨로 투수를 하지 왜 우익수야?
일단 주심 콜은?
“세이프!”
Wahoo!
대략 최근 10경기에서 첫 선취점 득점이다.
쿠어스 필드라 잘 맞췄든 어쨌든 단박에 덕아웃의 분위기가 확 밝아졌다. 모두 앰브로즈의 첫 안타와 첫 득점을 매우 열렬히 축하해줬다.
“뇌진탕으로 바로 교체되겠군.”
최근 자이언츠 최강 이빨로 등극한 리키의 촌평이다.
저도 풀스윙으로 때리던 놈이.
그런데!
따악!
헤죽거리던 덕아웃의 모든 눈이 한 점에 모아졌다.
감상을 묻는다면 뭐, 크고 아름답다?
“…… 이 루키들 또 약 빨았네.”
“너희들 약기운 떨어지면 종종 모이냐?”
오늘의 3번은 하우어.
타선에 루키들이 징검다리로 배치됐는데 2루에 페티트를 놔두고 펜스 정중앙을 훌쩍 넘겨버렸다.
홈에서 펜스까지 거리가 126미터라고 했던가?
갑자기 로키스 선발투수가 불쌍해진다.
아웃 카운트 하나도 없이 3실점.
문제는 이건 오늘 경기의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 2 >
“로키스 타선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오늘 자이언츠는 어제까지완 또 다른 모습이죠? 지금까지 양 팀에서 나온 득점이 모두 17점입니다. 자이언츠가 9점. 로키스가 8점. 아직도 7회라 얼마나 득점이 더 나올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네. 로키스 선발 몰튼 선수는 1회를 못 버티고 내려갔고 자이언츠의 리키 선수도 5회를 던지긴 했지만 매회 점수를 내줬어요. 양 팀 투수만 벌써 7명이 올라왔습니다.”
“쿠어스 필드가 투수들에게 악몽이긴 해도 이 정도면 솔직히 예상에 없던 난타전이거든요. 8월에 살아났던 자이언츠 타선인데 9월 들어서는 루키들 위주로 라인업을 짜며 다시 올해 초반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루키들이 슬슬 빅 리그에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또 어떻게든 때려내면 계속 자신감이 붙는 게 타격입니다. 위축되지 않고 자기스윙을 부드럽게 가져가면 다음 경기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쿠어스 필드에서 3연전이 자이언츠 루키들에게 각성의 기회가 될 거란 말이군요. 일단 오늘 경기를 승리하게 되면 가능성은 더 커집니다.”
도시 자체는 덴버보다 샌프란시스코가 더 큰데 구장만은 쿠어스 필드가 AT&T파크를 압도한다. AT&T파크의 수용인원이 4만2천 명이 조금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쿠어스 필드는 5만 명이 넘으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평일 경기인데 빈자리가 많지 않다.
덴버 시민들이 야구를 참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귀가 따가울 정도의 함성만 봐도 그렇고.
또 투수들만 싫어하지 관중은 화끈한 타격전을 좋아한다.
따악!
“와아아아아!”
신기한 건 자이언츠 9월 성적이 별로인데 이곳 쿠어스 필드까지 찾아온 자이언츠 팬이 있다는 사실. 양쪽에서 내지르는 환호와 야유가 뒤엉키니 아주 전쟁터가 따로 없다.
홈구장도 아니고 원정을 와서 사인요청을 받을 땐 좋았는데 경기 끝나고 팬들 충돌이 걱정될 정도다.
그나저나 이런 소모전은 이겨줘야 좋은데.
결과에 매달리지 않는 건 내 개인기록인 거고 팀의 승리라면 이야기가 다르잖아.
일단 9회 초 공격이 상위타선에서 시작이었는데 2번 페티트가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갔다. 분위기 좋아.
다음은 오늘 홈런 1개 포함 4타수 3안타의 하우어.
“스트라이크!”
“파울!”
“파울!”
“볼!”
“파울!”
따악!
장타율이 무시무시한 녀석이 컨택 능력도 좋아 변화구를 연속으로 커트해내더니 패스트볼에 배트가 날카롭게 돌아갔다.
‘하우어! 수도승의 분노를 토해내는구나.’
크고 아름다운 무엇이 전광판을 때리고 떨어진다.
로키스 중견수는 아예 따라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 3 >
[쿠어스 필드를 수놓은 홈런 쇼! 자이언츠가 3일 연속 로키스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로키스의 패배에 미소를 지었던 D 백스, 홈경기에서 자이언츠를 맞아 충격적인 스윕 패배!]
[자이언츠 루키들의 선전 어디까지 이어지나?]
[기존선수와 루키들의 조화를 이뤄낸 자이언츠 벤치. 내년이 더 기대된다.]
어느 나라고 정치와 언론이 국민에게 욕 안 먹는 경우는 없다는데 이유를 알 것 같다. 물론 정치 쪽이야 큰 관심을 안 두고 살았던 내가 할 말이 없지만, 언론의 태세변환은 진심으로 감탄을 할 정도다.
9월을 딱 절반으로 잘라 앞뒤로 기사 타이틀을 비교하면 기자라는 인간들은 태생이 다중인격으로 보인다.
내가 이래서 구단에서 시키는 단체 인터뷰 이외엔 인터뷰를 안 한다. 제러드를 통해 인터뷰 요청은 몇 차례 왔는데 전부 거절했다. 나한테 불만이 많든 말든 상관없다.
“또 구단에서 기획기사 올렸어?”
“아니.”
모처럼 맞이한 휴식일인데 딱히 어디 나갈 데도 없었다.
그래서 숙소에 틀어박혔더니 하우어가 리버캐츠 동료 몇 명을 데리고 찾아와 같이 뒹구는 중이다. 하우어랑 나는 이왕 버린 몸이라 치고 너희들은 뭐냐?
생각해보니 리키 이 자식은 점심때부터 약속이 있다고 오전훈련 후딱 끝내고 때 빼고 광을 내던데. 지금쯤 어떤 여자를 만나 눈을 맞추고 있을까?
아, 생각하지 말자.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럼 괜히 눈 버려. 보지 마.”
“경기만 끝나면 태블릿 끌어안고 살던 게 누구신데요?”
“난 그래서 요즘엔 인터넷도 SNS도 안 하잖아.”
“네 SNS는 봐줄 여자도 없잖아.”
“SNS는 재밌는데.”
하우어랑 서로 “죽어!” “너부터!”를 외치며 발길질을 하는데 페르시가 끼어들었다.
네덜란드계로 거의 백금발 찰랑이는 머리에 사파이어 색 파란 눈을 보면 이 자식도 여자 많을 것 같은데.
왜 하루 있는 휴식일을 내 방에서 보내는 거냐?
화살을 페르시에게 돌렸다.
“너는 만날 여자도 없냐? 하우어는 이해하겠다만.”
“나를 왜 이해해?”
하우어가 곰처럼 씩씩거리지만 가볍게 무시.
“약혼녀는 시애틀에 있어. 하루 만에 다녀오긴 무리지. 뭐 남은 경기래야 이제 10갠데 끝나면 시간 많아.”
“…… 약혼녀가 있었어? 이 자식 인생 승리했네.”
“너는 스탠포드에서 애인 없었어?”
심장에 비수가 꽂힌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스탠포드가 수업만 쫓아가도 허리가 휜다고 하는데, 원래 시간이 없다는 건 시간이 아닌 여자가 없는 놈의 핑계다.
잘 나가는 녀석들은 할 일 다 하면서 연애도 한다.
하지만 난 그 핑계를 열심히 대며 살았다.
장학금도 타야하고 야구도 해야 한다면서.
그런 면에서 페르시가 진짜 인생 승리자다.
내 침대에서 굴러다니던 녀석들까지 내려와 페르시 옆에 붙었다. 남의 연애사에나 관심 있으니 휴식일에 내 방에 와서 굴러다니지. 이놈들아.
앰브로즈, 이튼. 너희 둘 말야.
물론 내가 할 말은 절대 아니다.
“나야 스탠포드의 데릭 지터였지. 약혼녀는 대학 친구?”
양심에 좀 찔리는 대답을 하고 얼른 질문을 돌렸다.
“미시간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실 어릴 때 같이 자랐던 친구라 별 감정이 없었다가 고등학교 가서야 눈이 맞았어.”
유럽 쪽이 미국보다 훨씬 개방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다. 페르시 역시 네덜란드계여서 그런지 사생활인 연애사를 서슴없이 늘어놨다.
아무리 봐도 솔로들 염장을 지르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운이 좋아 내년 개막로스터에 뽑히면 프러포즈 해야지.”
“후우!”
이건 나만 뱉어낸 한숨이 아니다.
하우어와 다른 녀석 둘도 함께 쏟아냈다.
25인 개막로스터의 합류에 대한 불안과 인생승리자 페르시의 염장에 굴복한 표시가 뒤섞인 한숨이다.
이제 2035년 자이언츠의 경기는 딱 10번 남았다.
전승을 해도 승률 4할 중반이 어려울 테니 올해 야구는 끝난 셈이다. 감독과 코치진이, 또 구단이 루키들에게 내리는 평가는 과연 몇 점씩 나올까?
이 안에서 내년 시즌 출발을 함께 할 녀석은 누굴까?
7승 4패인 내 성적은 루키로선 굉장하지만 구단이 바라보는 입장은 다를 수 있다. 보통 가을야구가 끝나면 또 다른 리그가 시작된다. 내년 시즌에 대한 구상을 하고 내보낼 선수와 지킬 선수, 데려올 선수를 선별해서 다른 구단과 트레이드에 들어가는 따끈따끈한 리그.
자이언츠가 내년에 바로 반등을 노린다면 가장 급하게 보완할 부분이 투수진이다. 대형투수가 팀에 들어오면 내 자리는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트레이드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할 거다. 필요하면 프랜차이즈 선수마저 사고파는 게 메이저리그인데 잠깐 반짝한 루키야 파리 목숨이지.
갑자기 다들 꿀꿀해졌다.
“내일 파드리스 전에 미트를 리키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던져야겠어. 구속이 2마일은 더 올라갈 거야.”
“왜 리키야?”
“이 자식 데이트하러 갔거든.”
“나는 투수가 던지는 공을 리키로 여겨야겠군.”
그래. 하우어 넌 내 영원한 형제다.
포수를 마누라라고 하지만 네가 마누라인 건 좀 무섭지.
자다가 고개 돌렸을 때 심장마비로 죽고 싶진 않거든.
그냥 형제로 퉁 치자.
생각해보니 파드리스는 내 친정팀이다.
파드리스 산하 더블A에서만 뛰었고 운이 좋아 스프링캠프에 한 번 참가한 게 전부라도 날 드래프트에서 뽑아준 팀.
전에도 자이언츠와 파드리스의 경기는 있었지만 내가 공을 던졌던 것도 아니라 무덤덤했는데 내일은 내가 던지네.
친정팀이고 뭐고 잘 던져야지.
로키스를 폭격한 후로 요즘 루키들이 제대로 미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