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파크의 세 악마견 - 4
< 1 >
나가서 깽판 한 번 치라는 말에 날 또 미친놈 쳐다보듯 한다. 별 수 없이 하우어에게 어깨동무를 해서 멀리 구석으로 끌고 갔다.
메이저에 친구가 둘 있는데 하나는 순둥이고, 하나는 곰탱이니 나도 참 앞날이 훤하다.
구석에서 천천히 설명을 늘어놨다.
“새비지가 단순 타박상 같긴 한데 감독이 절대 경기에 오래 두진 않아. 부상부위가 무릎이거든. 너라면 2주짜리 DL을 잘못해서 시즌마감으로 만들 일 있겠냐?”
“……”
“무슨 말인지 몰라? 너는 어차피 오늘 데뷔전을 치른단 뜻이야. 네가 떨든 말든 경기 출전은 바뀌지 않는다고! 데뷔전을 망치고 싶어?”
“그럼 깽판을 치라는 건 무슨 뜻이야?”
아! 이 자식이 그렇게 손발을 맞춰놓고도.
답답하다.
“네가 져야할 마음의 부담을 감독부터 선수들까지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해? 절대 아니야. 다 알아.”
“그 말은……”
“이제 알았냐? 오늘은 네가 어떤 깽판을 쳐도 아예 면죄부를 이마에 붙이고 경기에 나간다고.”
드디어 하우어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리버캐츠의 미친 슈나우저라 불렸던 그때의 눈빛이다.
벤클 세 번쯤 하고나니 아예 상대팀이 슬슬 피하게 됐던 리버캐츠의 삼대 악마견에 하우어는 항상 선봉이었다.
포수의 위치상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럼 리버캐츠 때처럼?”
“더 날뛰어도 돼!”
“…… 너 왠지 즐거워 보인다?”
“올해 자이언츠에게 남은 게 뭘 것 같아?”
“뭔데?”
야구는 공수 양쪽에서 영리하게 잘하는 녀석이 이런 부분에선 뇌가 미치도록 청순한 게 참 미스터리다.
“자이언츠에 디비전 우승 가능성이 있냐?”
“미션 임파서블!”
“와일드카드 쟁탈전은?”
“윌리 메이스가 당장 재림해도 힘들지.”
윌리 메이스? 참고로 그는 24번의 올스타 선발, 12번의 골드글러브, 2번의 리그 MVP를 차지한 그야말로 자이언츠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스타였다.
그 사람은 외야수였는데 하우어의 우상인 건 몰랐네.
“그럼 이번 시즌을 팬들의 기억에 남길 방법이 뭘까?”
“…… 그게 깽판?”
“루키의 패기가 어우러져야지. 또 디비전 우승이든 와일드카드 경쟁이든 전부 자이언츠 허락을 받으라고 경기마다 고춧가루를 뿌리는 거야.”
“……”
하우어 표정을 보니 난 이제 미친놈 확정이다.
뭐 어쩔 수 있나.
“진짜야. 고춧가루만 제대로 뿌려주면 돼.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는 자이언츠만 빼고 매 경기 선두가 바뀌는 혼전상황이잖아. 그 치열한 선두다툼 후반에 자이언츠가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다면 어떨까? ‘디비전 우승을 하고 싶어? 자이언츠 허락을 받아!’ ‘와일드카드라도 얻고 싶어? 역시 자이언츠의 허락을 받아!’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어때? 너나 나 혼자면 힘들겠지만 리키까지 루키 셋이 조금 파이팅하면 못할 것도 없어. 리버캐츠에서 우린 이미 성과를 보여줬고. 그러려면 네가 지금처럼 뻣뻣하게 굳어선 곤란하지.”
“…… 진정한 깽판이네.”
“그럼 이제 떨지 마. 주눅도 들지 말고.”
눈빛이 달라진 하우어를 덕아웃으로 보내고 나도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제 밤 자이언츠란 팀에 대해 생각해봤다.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한 팀. 이제는 내 팀이다.
‘베이스볼 매니지먼트’와 계약에 의해 3년 전의 모습은 찾기 어려운 나지만 야구는 혼자 할 수 없다.
팀이 함께 승리해야 한다. 아직 스톤햄이나 프린츠 등 중심을 잡아주는 핵심멤버가 남아있을 때 루키들이 얼어붙는 대신 파이팅을 보여줘야지.
< 2 >
전광판에 호레이스 스톤햄의 소개가 떠올랐다.
올 시즌 18경기에 나와 10승 5패.
평균자책점 2.71에 WHIP 0.96
타선지원만 받았다면 특급투수의 기록이다.
누군가는 스톤햄의 이번 시즌 성적을 순수하게 안타까워했고, 누군가는 자이언츠에 있기 아깝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 말하든 지금 자이언츠 부동의 에이스였다.
“플레이볼!”
심판의 콜과 함께 컵스의 1번 타자가 배트를 들었다.
랜스 데이비스. 우투우타의 2루수. 타율 2할9푼1리에 3할 중반의 출루율, 12홈런, 도루도 17개가 있는 선구안이 좋은 컵스 부동의 리드오프.
선수 리포트에서 읽었을 내용이 잠시 떠올랐다.
하지만 스톤햄은 시선을 타자가 아닌 새비지에게 던졌다.
정확하겐 그의 오른쪽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해 눈에 보이진 않아도 배터리로 오랜 시간을 함께 뛴 경험이 말해준다. 새비지가 지금 무리하고 있다고.
경기를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한다.
새비지와 싸인에 몇 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초구!
퍼엉!
“스트라이크!”
몸 쪽으로 꽉 찬 패스트볼이었다.
심판의 콜을 듣고 배트박스를 살짝 물러난 데이비스는 스트라이크를 그냥 지켜봤다는 자책감보단 의문을 먼저 품었다.
‘초구부터?’
리포트에서 본, 그리고 자신이 몇 번이나 승부를 해본 스톤햄의 투구 스타일이 아니었다. 2030년대는 상대팀 에이스에 대한 분석이 아예 난도질 수준이다.
그 분석도, 자신의 경험도 지금껏 말해왔다.
스톤햄의 최대 강점은 스트라이크 존을 최소 4분할해서 원하는 위치에 공을 집어넣는 제구력이라고.
그래서 항상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으로, 이른바 상대타자를 빡치게 하는 투구가 스톤햄의 방식이었다.
한데 지금은?
‘이유는 몰라도 마음이 급해?’
제2구. 한 번 더 지켜본다.
파앙!
“스트라이크!”
바깥쪽 슬라이더. 절대 걸치는 공은 아니었다.
그가 조급하다. 이건 시험해볼 가치가 충분하고 넘친다.
존에 걸치는 공으로 승부는 자칫 투구 수를 늘릴 위험이 있기에 스톤햄이 승부를 빠르게 가져가려 한다면?
오히려 그 투구 수를 늘려서 조바심을 부추긴다.
제3구. 딱!
제4구. 딱!
제5구. 딱!
커팅 플레이가 시작됐다.
< 3 >
“쯧! 초구부터 스톤햄답지 않았어.”
컵스의 1번 타자에게 투 스트라이크를 뺏어내고 3구부터 연속 3개의 공이 커트당하는 걸 보더니 프린츠가 한 말이다.
“무슨 말이에요?”
“스톤햄의 피칭스타일. 항상 경계와 경계를 넘나든다고 칭찬받았는데, 오늘 초구부터 달라진 걸 들켰어.”
그 말을 들은 내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저 타자, 원래 저렇게 배트를 짧게 쥐고 있었던가?
커트로 상대투수의 진을 빼는 작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선구안이 좋아야 하고 배트 컨트롤이 능숙해야 한다. 더구나 변화구가 잘 긁히는 투수를 상대론 언 땅에 삽질이다.
그 삽질에 제 발등을 찍고 마는 멍청한 짓이고.
스톤햄 정도의 투수에게 커팅 플레이?
당연히 멍청하다 욕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방망이를 짧게 쥐고 존을 좁게 보며 잘라내고 있다.
“젠장맞을! 말해줘야 하지 않아요?”
“네가 타임 부르고 올라갈래?”
“……”
“이봐, 하이데거! 스톤햄은 자이언츠의 에이스야. 1회 초부터 팀의 에이스에게 쪼르르 올라가 지적을 해대라고?”
“……”
아! 에이스의 품격. 에이스에 대한 대우.
한 경기 질 수는 있어도 에이스의 자존심을 떨굴 순 없다.
이건 스스로 지키고 팀에서도 지켜줘야 할 자존심. 타협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스톤햄도 이미 자기 실수를 알았어.”
“네?”
내 반문에 대한 대답은 관중석에서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스톤햄! 넌 오늘도 최고다!”
6구와 7구도 연이어 커트해낸 타자가 8구, 외곽에 송곳처럼 꽂힌 커브에 꼼짝 못하고 삼진을 당하자 터진 함성이었다.
함성을 듣는 난 잠깐 골이 띵했다.
이런 게 바로 메이저리그 레벨인가?
상대의 실수를 읽어 배트를 짧게 쥔 타자부터, 바로 자기 투구 스타일을 찾아 반격하는 투수까지. 내가 베이스볼 매니지먼트와 계약해 구속이 늘고, 구위가 좋아졌어도 아직 부족하다는 점이 바로 이런 부분일 거다.
공만 가지곤 평점조차 매길 수 없는 부분!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지켜보던 프린츠도 대단하다.
“문제는 새비지야.”
“…… 그러네요.”
커팅 플레이에 당연히 뒤따르는 건 포수의 움직임이다.
공이 뒤로 튀든 옆으로 튀든 마스크를 벗고 뛰어야하는 포수의 숙명. 겨우 1번 타자 한 명 상대했는데 몸이 무거운 게 덕아웃까지 느껴졌다.
“2-3회 내로 감독이 교체하겠어.”
하우어에게 넌 오늘 경기 분명히 출전한다고 말했지만 예상보다 그 시간이 훨씬 짧아질 것 같다.
고개를 돌려보니 배터리 코치가 벌써부터 하우어를 붙잡고 뭐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하긴, 새비지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을 텐데 모를 리 없지.
1번 타자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2번 타자도 스톤햄의 공을 잠시 지켜보는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커트마저 제대로 못해내고 땅볼 아웃.
3번 타자는 초구부터 배트를 내밀어 플라이 아웃.
삼자범퇴로 이닝이 끝나고 공수가 교대됐다.
공수교대를 했대도 나야 오늘은 지켜보는 것 외엔 덕아웃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 사실은 처음 맞이하는 메이저리그 경기장 분위기에 긴장해서 얼어붙었어야 정상이지.
그런데 신기하다.
평소보다 더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선수들의 열기도, 관중들의 함성도 마이너리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데 흥분되는 것도 아니고 긴장도 안 돼?
“조! 살짝 멍한 기분이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말을 건 사람은 스톤햄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멍한 느낌인 걸.
“아, 네. 멋진 투구였어요.”
“Liar! 첫 타자에게 바보짓을 했는데 몰랐다고?”
“……”
“프린츠가 알려줬을 거야.”
요즘 메이저리거는 부업으로 점도 치나?
“네. 피칭 스타일이 바뀐 걸 들켰다고 했어요.”
“너무 급하게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갔지.”
“공격적인 피칭이 좋은 거 아닌가요?”
“풋! 네 스타일이라?”
내 질문이 어이없는지 스톤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다 같을 순 없잖아. 구위로 찍어 누르는 피칭,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피칭, 철저히 범타로 유인하는 피칭. 그 투구가 모두 가능하면 난 이미 사이영 상을 서너 번 탔겠지.”
“……”
“다 자기 스타일이 있고, 그 스타일에 따른 밸런스가 있어.”
“컵스랑 3차전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가요?”
이제 1회를 던진 선발투수.
잠깐이지만 그의 말대로 밸런스를 잃었던 투수.
아직 남은 이닝을 생각하며 집중해야할 투수가 갑자기 곁에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영리한 친구네. 3차전에서 긴장할 것 없이 그냥 새크라멘토에서 했던 네 투구를 하라는 뜻이야. 애쉬비 코치 말로는 네가 벤클도 겁 안 내고, 타자 턱밑으로 지나가는 공을 던진다던데. 여기서도 똑같이 해.”
“바짝 붙으면 헤드샷도 하나 날려주고요?”
“희생양 한 명 생기면 알아서 방탄모라도 구비하겠지.”
“큭큭큭!”
오전에 인사할 때는 가볍게 악수만 주고받았는데 우리 에이스가 생각보다 재밌는 사람인 걸 몰랐네.
“처음 빅 리그에 콜업되면 긴장도 안 돼. 아까 네 표정에 드러난 것처럼 그냥 멍하지. 나도 그랬거든. 그러다 실제 경기에 들어가면 포수 미트도 제대로 안 보여. 조금 지나면 관중들 고함소리만 들리고.”
“루키들이 두들겨 맞는 이유겠네요.”
“리키가 딱 그랬는데 작년보다 훨씬 좋아졌어. 새크라멘토에서 널 만나고 달라진 거라던데. 하우어까지 셋이 리버캐츠의 삼대 악마견이라고 불렸다지?”
맹세코 내가 지은 이름은 아니다.
빌어먹을 기자들이랑 상대팀에서 붙인 이름이지.
그래도 아니라고 부인할 순 없다는 게 조금 슬프다.
“퍼시픽 코스트 리그가 잠시나마 평화로워졌다고 전부 좋아하고 있을 거예요.”
“여기서도 그런 파이팅을 보여줘. 그럼 돼.”
“고마워요. 스톤햄.”
“별 말씀을.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벌써 내 투구를 할 시간이네. 조금 있다 보자고.”
여름에 가장 시원한 구장을 갖고도 가장 더위 먹은 타선.
자이언츠 타자들의 1회 말 공격 역시 삼자범퇴였다.
아! 스톤햄에게 말해주는 걸 잊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오늘 경기부터 깽판 칠 슈나우저 대기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