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파크의 세 악마견 - 2
< 1 >
민우와 하우어는 숙소로 돌아갔지만 감독과 코치들은 또 할 일이 남았다. 당분간 백업포수가 확정인 하우어는 몰라도 가능하면 민우는 투수진에 빨리 합류시켜야 했다.
부실한 선발진인데 그나마 한 명이 경기 도중 팔꿈치 통증을 호소해서 단기 DL에 올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밀검사 후 시즌아웃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
베이커 감독의 호흡기 언급은 그냥 엄살을 떤 게 아니었다.
“확실히 포심과 서클 체인지업 투 피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먹힐 수준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포심과 체인지업만 봤을 때 당장 선발진에 끼워야 합니다.”
민우에겐 후한 평가.
하지만 자이언츠 전체로 보면 참혹한 평가였다.
메이저에 갓 콜업된 투수를 상황 살피지 않고 바로 로테이션에 넣어야할 정도의 선발진이라니.
감독부터 다른 코치들이 애쉬비 투수코치의 말에 반박을 못할 정도로 자이언츠 투수진은 붕괴 상태였다.
“좋아. 스프링캠프에서 94마일 나오던 포심이 이젠 95마일까지 올라갔고 제구도 되니까. 내 눈에도 포심은 당장 마운드에 세워야 해. 스플리터도 스프링캠프 때보단 훨씬 좋아졌던데, 적응은 잘 할 것 같은가?”
메이저리그엔 해마다 새로운 투수가 마운드에 선다.
공들여 키운 유망주에게 기회도 주고, 다른 팀에서 트레이드된 선수를 상대로 로또 긁기도 한다.
다만 그 중에 얼마나 살아남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트리플A에서 숱한 무력시위를 감행했어도 막상 메이저 마운드에 서면 얼어붙는 투수가 얼마나 많았는데. 흔히 새가슴이라 불리는 투수들이 압박감을 견디지 못했다.
조의 95마일 포심은 훌륭한 공이 분명하다. 다만 그보다 빠른 97-98마일을 던지면서도 마운드 적응에 실패하는 선수들도 있으니 문제다.
그래서 베이커 감독이 물은 건 조의 멘탈이었다.
“이 선수 재밌는 게 뭔지 아실 텐데요.”
“트리플A 첫 경기 벤클에서 영웅이 됐다는 얘기? 발단은 하우어가 상대타자와 먼저 치고받은 걸로 아는데.”
콜업된 선수의 히스토리를 모르면 직무유기다.
앞에 구단에서 보낸 선수 리포트도 얌전히 놓여있고.
다만 벤클의 영웅과 마운드에서 활약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조가 홈 플레이트에 바짝 붙던 타자에게 4타석 내내 몸 쪽 공으로 승부했던 게 발단이었죠. 트리플A도 루키 길들이기가 상당한 거 아실 겁니다.”
“흠……”
왜 모르겠나.
마이너리그는 평생직장이 아니다.
언제든 빅 리그에 올라올 테고 한 번 맺어진 먹이사슬이 뒤바뀌긴 쉽지 않다. 루키 길들이기는 그래서 시작된다.
나중에 언제 또 만날지 모르니까.
트리플A에서 주눅이 들었는데 메이저라고 바뀔까?
할 수만 있다면 천적관계는 고정시켜 놓는 게 좋다.
“일단 공격적인 투구를 하고 또한 성적 자체도 나쁘지 않습니다.”
“…… 13경기 8승 3패면 훌륭하지.”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게 아니다.
빅 리그에서도 똑같이 던져줄 수 있다면 신인왕에 도전한대도 인정할 수준이지.
“평균자책점 2.64에 최근 3경기는 아예 1점대입니다. 3패가 있지만 타선이 안 터졌다 생각하면 준수하죠.”
“자네 생각은 이번 컵스와 경기부터 투입하잔 뜻이겠지?”
“네. 아껴둘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부터 당장 시카고 컵스와 3연전이 시작된다.
오늘 하루 천금 같은 휴식을 얻었지만 안심하고 6회를 맡길 투수가 둘뿐인 상황에서 투수진의 피로는 말도 못한다.
다행히 내일은 스톤햄이니 그나마 안심이고.
이틀째는 두 달 전에 콜업돼 거의 2선발인 리키.
마지막 경기를 조에게 맡기잔 뜻인데, 괜찮을까?
팔꿈치 통증을 호소한 투수야 이미 DL에 올렸으니 별개. 그래도 다른 선발이 둘에 조와 함께 파드리스에서 트레이드된 하웰도 있는데?
“굳이 선발 보직을 줘야 하나?”
“매 경기 7회를 막아낸 투수를 셋업으로 돌리실 겁니까?”
“혹시 반발이 있더라도 무시하자?”
“오히려 길어지는 휴식을 반길지도 모릅니다.”
4할 벽마저 무너진 팀 승률.
지원을 기대하기엔 참담하게 망가진 타선.
하루하루 마운드에 올라갈수록 개인 커리어가 뭉텅이로 깎여나가는 상황인데 루키의 등판을 고까워할 리 없다.
그게 투수코치 애쉬비의 판단이었다.
< 2 >
어제 AT&T파크에 처음 도착해 감독과 코치들 앞에서 투구 검증을 받았고, 오늘은 선수들과 인사를 나눴다.
프린츠도 만났고, 두 달 전 콜업된 리키와 재회도 했다.
다른 선수들 역시 표정이 밝지는 않았어도 막 메이저에 올라온 루키를 모두 환영해줬다. 거의 스프링캠프에서 봤던 선수들이라 크게 낯설진 않았다.
표정이야 자이언츠 성적을 생각하면 좋을 수 없고.
사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주위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소리라도 질렀을 거다.
‘내가 빅 리그에 올라왔어!’ 라고.
올해 성적은 나빠도 자이언츠는 엄연한 메이저리그 팀.
구분을 해도 엄연히 빅 마켓에 속하는 팀이었고 경기장, 부대시설, 라커룸 등 모든 것이 마이너완 비교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선수들.
이들은 성적이야 어쨌든 25인 로스터에 든 메이저리거.
이제부터 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분노하게 될 것이다. 가볍게 악수만 나눈 선수도 있고 주먹을 들이밀며 활기찬 환영을 보내준 선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색깔이 모두 같길 기대할 순 없다.
리버캐츠에서처럼 동료를 만들어 가면 되는 거지 뭐.
그런데 들뜬 나를 공황상태로 몰고 간 건 애쉬비 코치였다.
몸을 풀기 위해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던 내게 불쑥 다가와서 뭐라고?
“진짜 컵스와 세 번째 경기에 제가 선발이라고요?”
“왜? 자신 없나?”
“자신 문제가 아니라 일단 셋업으로 투입 아닌가요?”
내가 이런 질문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먼저 MLB의 세분화된 투수운용부터 봐야 한다.
선발과 클로저 사이에 셋업맨이 있는데, 이 셋업맨도 나누면 분류가 다양하다.
첫째, 프라이머리 셋업맨(Primary setup man)
주로 마무리투수(Closer)가 등판하기 전인 8회를 담당하는 투수다. 불펜에서 마무리 다음으로 가장 강력한 구원투수이며 마무리 투수의 공백이 발생했을 때 마무리 후보 1순위 선수로 보면 된다. 가끔 경력이 많은 마무리 투수보다 그 앞에서 나오는 젊고 쌩쌩한 셋업맨의 구위나 성적이 더 좋을 때도 생각보다 많다.
홀드라는 스탯이 생기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포지션으로 MLB의 차고 넘치는 선수 풀과 상향평준화된 타격수준이 만들어낸 보직이다. 예전 같으면 중간계투 한 명이 막을 걸 두 명 이상 동원해야 막을 만큼 현대야구에서, 특히 하위타선의 타격기술향상이 두드러진다는 증거니까.
둘째, 스윙맨(Swingman)
선발과 중간계투 사이에서 전천후로 뛰며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투수다. 주로 5선발 경쟁에서 아깝게 탈락한 선수가 맡게 되며, 선발진에 구멍이 생기면 5선발로 승격되는 경우가 많다. 불펜 투수 중에서는 3번째 서열을 차지하며 구원투수로 등판할 경우 선발과 프라이머리 셋업맨 이전인 6-7회 사이에 투입된다. 스윙맨까지는 보통 승리조(필승계투조)로 구분된다.
승리조 스윙맨은 단기전에 불펜으로 고정되며 팀 사정에 따라 없는 경우도 많다. MLB에서는 선발과 불펜에 대한 온도차가 큰 편이고, 선발관리는 최대한 칼같이 해준다. 그런 이유로 스윙맨이 많다는 건 그만큼 선발진의 이닝 소화능력이 떨어진단 뜻이라 좋은 의미는 아니니까.
대체로 이 역할은 메이저에 갓 올라와서 보직 확정이 되지 않은 루키 선발 투수가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도 세컨더리 셋업맨(Secondary setup man), 롱 릴리프(Long relief), 원 포인트 릴리프(One-point relief), 패전처리 투수(Mop-up relief) 등 역할은 다양하다.
그럼 내게 알맞은 자리는?
딱 봐도 둘째! 잘해야 스윙맨의 역할이 맞고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리키도 먼저 콜업돼서 먼저 스윙맨의 역할을 했다. 작년보다 성적이 좋고 워낙 자이언츠 선발진이 구멍투성이라 선발로 돌아섰지만 나완 경우가 다르다.
리키는 프랜차이즈, 난 얻어온 케이스니까.
로또 긁기가 아무리 좋아도 대뜸 선발이라니.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자이언츠 사정이 그만큼 급해.”
“…… 덕분에 제가 횡재를 했군요.”
“기회긴 한데 자주 줄 기회는 아니지.”
애쉬비 코치는 딱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를 떴다.
혼이 빠져나간 나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은 건 프린츠였다.
“하이데거, 왜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아! 프린츠, 방금 엄청난 소리를 들어서요.”
“애쉬비 코치한테? 뭐 오늘 경기 선발로 뛰래?”
농담을 한단 말이지? 어디 충격 좀 먹어봐라.
“컵스랑 마지막 경기요.”
난 프린츠에게 애쉬비 코치가 드디어 스트레스 때문에 미친 게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진짜 갓 콜업된 루키에게 선발보직을 맡기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그런데.
“역시 이유가 그거였군.”
“…… 짐작했던 일이에요?”
“응. 리키를 콜업해서 한 달 만에 선발로 돌려야 했을 정도로 지금 선발진 상황이 안 좋거든. 사실 스프링캠프에서부터 징후가 보였어.”
프린츠는 캠프에서 다른 선수들 컨디션도 보고 있었나?
난 막 트레이드된 상황이라 정신없었는데.
“그래도 너무 빨라서.”
“어제 쇼 케이스를 또 했다며? 보여준 게 있으니까 도박하는 심정이라도 기회를 줬겠지. 투수운용에 대해선 애쉬비 코치 발언권이 꽤 높거든. 아무튼 멍 때릴 거 없어. 메이저에선 주는 기회를 잘 받아먹어야 커.”
“다른 선발들이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선발투수에게 로테이션은 의무이자 자존심이다.
선수기용이 아무리 감독의 절대적인 권한이라 해도 로테이션 수정을 할 때 선수 의사를 일단 묻는다.
내부 불협화음까지 만들며 선발 기회를 얻고 싶진 않다.
“지금 자이언츠 성적을 보면 빈말이라도 칭찬할 구석이 없어 보이지?”
“솔직히 그렇죠.”
“그런데 우리가 집안싸움 할 것 같아?”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보류했다.
겉은 멀쩡한데 속에서 곪는 경우도 많지만, 성적이 망가졌기에 여유와 너그러움이 실종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프린츠는 아주 모범적인 답안지를 내놓았다.
“성적은 나빠도 좋은 선수들이야. 루키에게 기회를 줘서라도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면 모두 환영할 거다.”
< 3 >
프린츠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간 뒤 난 매니지먼트 2차 결과를 다시 불러냈다. 아무래도 내 공이 캠프 때와는 또 달라졌단 사실을 애쉬비 코치가 알았단 뜻이니까.
프린츠도 내가 투구로 뭔가 보여줬기 때문이라 했고.
[매니지먼트 2차 결과가 나왔습니다.]
[패스트볼 : 포심]
구속 - 평균 95마일(92-96: 밸런스를 깨지 않는 수치)
컨트롤 - 70/80(이하 스카우트 리포트 평가방식)
무브먼트 - 70/80
종합평점 – 70/80
드디어 종합평점 70점을 달성한 포심.
스카우트 리포트에서 70점짜리 공이란 아무리 루키가 던진다고 무시할 게 아니다. 선수를 평가할 때 하나라도 70점 항목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받기 충분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루키에게 기대할 공을 넘어섰지. 무브먼트가 더 높아 영감님 라이징 패스트볼 급이 되길 바라는 건 욕심일까?
[체인지업 : 서클 체인지업]
구속 - 평균 82마일(80-84)
컨트롤 - 65/80
무브먼트 - 60/80
종합평점 – 60/80
역시 종합평점 60점을 채웠다.
스카우트 리포트 평가방식인 20-80스케일에서 60점은 ‘플러스 등급’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입지를 다진 A급 선수들의 주된 무기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실 55점만 돼도 ‘평균 이상(above-average)’이라고 불리는 등급이고, 이 정도의 툴을 한두 가지 이상 지니고 있으면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나,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70점의 포심과 60점의 체인지업을 갖췄는데?
뭐 구종이 아닌, 나라는 선수의 종합적인 평가에 대해선 매니지먼트도 말이 없으니 너무 자신해선 안 되겠지만.
명백한 약점도 하나 있다.
[패스트볼 : 스플리터]
구속 - 평균 90마일(88-92)
컨트롤 - 45/80
무브먼트 - 45/80
종합평점 – 45/80
딱 45점.
1차 결과 때와 비교하면 미친 상승인데 그래도 부족하다.
50점이 평균이라면 45점은 ‘평균 이하(below-average)’가 맞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부족한 능력치를 지칭하고. 아예 이보다 떨어지면 마이너리그 수준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명백한 메이저 수준 두 개, 메이저엔 살짝 부족한 수준이 한 개. 이게 어디야.
조민우! 자신감을 갖자.
또 특전도 업그레이드가 됐잖아.
모리스 코치에게 AT&T파크로 가라는 말을 듣고 매니지먼트 2차 결과와 함께 받았던 특전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