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LB의 새끼 고양이-1화 (프롤로그) (1/188)

프롤로그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회.

누구에게든 그런 기회가 삶에서 한 번쯤은 찾아온다.

재능, 환경, 또 찾아온 기회를 받아들이는 자세완 무관하게.

남보다 우월한 재능이나 그 재능을 뒷받침할 잘 갖춰진 환경이 대단히, 굉장히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란 놈이 살랑살랑 눈웃음을 칠 때, 미친 척 들이대보는 배포도 있어야 한다.

당장 눈앞에 화사한 꽃길이 펼쳐지는 건 아니라도.

그 길이 항상 진심으로 바라던 방향이면 더더욱.

결론이 뭐냐고?

<베이스볼 매니지먼트와 계약하시겠습니까?>

자다 꿈꾸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이 홀로그램에 Yes라 대답했다고 내가 미친 건 아니란 뜻이지 뭐.

진짜다.

좀 믿어주라!

조민우.

2032년 크리스마스에 깜짝 선물을 받았다.

AT&T파크의 세 악마견 - 1

< 1 >

메이저리그에서 각 디비전 우승을 보장하는 승률은 얼마나 될까? 한마디로 정답은 없다.

7할을 넘어서는 미친 승률로 우승하는 경우도 있다.

1906년 시카고 컵스는 155경기에서 116승 36패 3무란 성적을 거두며 승률만 7할6푼3리로 이 부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01년에 시애틀 매리너스가 똑같은 116승을 거뒀어도 162경기를 치러 승률은 7할1푼6리.

반면 1위 팀의 승률이 5할을 갓 넘어 리그 종료까지 우승팀의 향방을 점칠 수 없던 경우는 너무 많았다. 그런 경우 선수들은 물론 코칭스태프, 구단 직원과 팬들까지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순위에 다들 심장을 움켜쥔다. 뭐 쫄깃함은 배가 되지만.

아무튼 진짜 경우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은데 그래도 확실한 건 5할 승률이 분기점이란 사실이다.

2035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초반엔 그 분기점인 5할에 근접하기도 했지만 이젠 4할 승률마저 무너졌다.

선발진은 보강을 못한 채, 작년 시즌 주축타선에서 네 명이나 이탈이 생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FA로 놓친 두 명에 다시 두 명의 트레이드 여파가 너무 컸다.

선발진과 타선 양쪽에 동시에 생긴 균열이었다.

빈자리를 내외야 백업으로 활약하던 선수와 조금 급이 떨어져도 트레이드된 선수를 기용해 어떻게든 메워보려 했지만 무게감이 달랐다. 게다가 선발진은 여전히 스톤햄을 빼곤 발전이 없었다. 스톤햄마저 평균자책점 2점대로 겨우 두 자리 승수를 채웠을 정도니 뭐.

3할대로 곤두박질 친 성적.

자이언츠 팬들은 구단과 코칭스태프를 격렬히 비난했다.

리빌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메이저리그 30개 팀에서 최하위권을 달리는 승률. 자이언츠의 오랜 팬들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몰락이었다.

“한계에 부딪혔군.”

“베이커 감독의 요청을 더 빨리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단장보좌인 페릴의 대답에 자이언츠 단장 요한슨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듣기 거북해도 사실이었으니까.

리빌딩을 결정하고 올해 어려울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현장에선 이미 5월부터 리버캐츠의 자원을 콜업해주길 요청했는데 자신이 묵살했다.

조금 부진해도 부진한대로 선수를 쓰는 게 낫지, 리버캐츠에서 선수를 올리기 시작하면 마이너리그 옵션도 소모하고 서비스타임 관리도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설마 4할 승률이 무너질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현실은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다.

특히 안 좋은 쪽으로!

“두 달만 있으면 확장 로스터인데.”

“그 두 달 안에 팬들이 이 방까지 쳐들어올 겁니다.”

굳이 쳐들어와서 뭘 할 거란 말은 필요 없었다.

자유분방한 기질이 미국에서 탑으로 꼽는 샌프란시코 시민들이지만 원래 스포츠팬이란 열정으로 먹고산다.

열정이 애착이 되지만, 애착이 또한 분노로 바뀌는 것도 순간이다.

“그럼 누구를 올려야 할까?”

“첫째, 빌의 무릎이 안 좋습니다. 당장 백업포수를 바꿔야죠. 또 프린츠를 비롯해 불펜의 피로가 너무 심합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사실 다행입니다. 지난 경기 패배도 선발이 4회를 못 넘겼고, 앞서 3연전에 소모됐던 불펜의 피로가 누적된 탓이거든요.”

“투수는 지난달에 리키를 불러줬는데?”

“선발과 롱릴리프로 등판이 너무 많았습니다.”

요한슨이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서비스 타임 3년 이내의 선수들을 마구 굴리던 과거의 관행이 사라지고 분업화가 이뤄진 메이저리그. 하지만 그것도 팀이 정상적일 때 말이다.

지금처럼 팀의 사정이 어려울 때 피로가 좀 쌓이고 등판 수가 많아도 견뎌야 한다는 게 요한슨의 생각이었다.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나가는 선수가 얼마나 된다고 시즌 중반에 벌써 이 모양이란 말인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이미 자신이 너무 늙었단 뜻인지도 모른다.

시대에 뒤처진 자신.

진작 내려와야 했던 걸까?

2014년을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와는 거리가 먼 자이언츠의 우승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써먹을 트레이드 카드는 없을까?”

“와일드카드를 포기하지 않은 팀들이 지금 자이언츠에서 눈독들일 선수야 너무 뻔합니다. 스톤햄을 비롯해서 전부 트레이드 불가자원이죠. 요한슨! 서비스타임 아끼려다 우린 역대 메이저리그 최저승률 기록을 갈아치울지도 몰라요. 자이언츠가 말입니다!”

단장보좌인 페릴은 답답했다.

작년 챔피언스시리즈에 나가려고 올-인을 할 게 아니라 리빌딩 작업에 착수했어야 정상이다. AT&T파크에 처음 나서 부진했던 투수들에게 기회도 더 줬어야 했고. 겨우 서너 경기 치러보고 별 성과가 없자 기존 선수들만 혹사시켰다.

와일드카드를 지키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올드스쿨 경향의 단장.

자신은 그의 아래서 배웠다.

일개 전력분석관에 불과하던 자신을 그가 키웠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자이언츠가 회생하려면 작은 욕심은 묻어둬야 한다. 마이너리그 옵션 한 장? 서비스타임 1년? 자이언츠란 말 그대로의 거인을 살리려면 그깟 것들은 정말 사소한 일이다.

요한슨은 자기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이봐, 세이우드.”

“네.”

페릴이 태블릿에 파묻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요한슨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탓이다.

“자이언츠가 한때 짝수해의 전설을 가졌던 건 알지?”

“압니다.”

알고말고.

2010, 2012, 2014의 월드시리즈를 연이어 제패했다.

2016년은 팜 뎁스 강화에 소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그 전설도 막을 내렸지만.

단장이 그때의 영광을 재현하길 바랐던 것도 잘 안다.

하지만 86년을 이어간 밤비노의 저주, 71년 동안 계속된 염소의 저주까진 아니어도 20년 넘게 자이언츠는 반지와 인연이 없었다.

딱 20년째였던 작년에도 페이롤에 묶여 선발진 보강을 못한 탓에 짝수해의 신화는 시작도 못해봤다.

“2017년, 아니 정확히 말하면 2016년 후반부터 시작된 자이언츠 암흑기를 내 손으로 많이 거둬들였어.”

“불만 질러대던 불펜이 지금은 자이언츠가 최고죠.”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나머진 자네가 맡아.”

“…… 그건 무슨 말입니까?”

이 영감이 저녁 내내 담배만 뻑뻑 피워대더니 잠깐 정신이 이상해졌나?

“위는 신경 쓸 것 없어. 내가 맡을 테니. 지금부터 구단 운영을 자네 구상대로 해보라는 거야.”

“……”

“기회이자 시험이야. 2-3년 내에 성과를 보이라는 재촉은 하지 않아. 대신 자이언츠를 웃음거리로 만들진 말게.”

이 영감 농담이 아니다.

명목상의 단장으로 앉아 위에서 내려올 압력은 자신이 커트할 테니 마음껏 저질러보라는 뜻이다.

< 2 >

“뭐라고 하셨습니까?”

모리스 코치의 말에 난 반문을 하고 말았다.

올해 기회가 온다면 확장로스터에나 합류할 줄 알았는데.

“AT&T파크로 가라는 내 말이 어려웠나?”

“아직 9월 아닌데요?”

“자이언츠 사정을 몰라서 물어.”

알죠. 승률 3할대로 망해가죠. 아니 이미 망했죠.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일 아닌가요? 한때 MLB의 바퀴벌레라 불리던 ‘지지 않는 야구’의 자이언츠를 되살리려 노력했지만 작년에도 실패했고 올해는 뭐.

그래도 리키가 올라간 건 이해하는데 자이언츠가 키운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날 8월부터 메이저에?

“투수 중에 누가 DL에 올랐나요?”

“피로가 누적된 선수들이 잠시 내려올 거야.”

“알겠습니다.”

“가면 사고 치지 말고.”

내 화려한 전적을 말한다.

트리플A 첫 경기 벤클에서 날아다닌 뒤로 난 출전정지 처분을 받은 걸 제외하면 12경기에 출전, 로테이션을 지켰다.

문제는 출전 때마다 분위기가 좀 살벌했다는 점이다.

힛 바이 피치 볼을 겁내지 않았다.

홈 플레이트에 붙어서면 설수록 몸 쪽 공을 던졌다.

상대팀 감독에게 ‘저 자식, 자기가 돈 드라이스데일인 줄 착각하는 게 아니냐?’라는 말까지 들어봤다.

돈 드라이스데일은 LA다저스의 영구결번 선수다.

그와 같은 시기에 뛰었던, 역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영구결번 선수 올랜도 세페다가 남긴 명언이 있다.

- 그가 맞히기 전에 타자가 먼저 맞혀야 한다.(안타를 때려야 한다.)

그만큼 위협구와 빈볼을 잘 던졌던 선수.

난 새크라멘토 지역신문 인터뷰에서 돈 드라이스데일과 비교해주셔 감사하다고 인사까지 했다. 누가 뭐래도 58이닝 무실점 경기까지 해내고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 선수니까.

앞으로도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지.

그런데 그게 상대팀 선수들에게 더 불을 질렀다.

아니, 트리플A 퍼시픽 코스트 리그에 속한 모든 선수에게.

쉽게 말해 트리플A의 초짜가 터줏대감들을 향해 맞기 싫으면 붙지 말라고 도전한 셈이다.

난 공공의 적이 됐다.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처음 올라가 달달 떨 새싹에게 응원을 해주진 못할망정, 너무하십니다.”

“13경기를 뛰며 벤클만 3차례를 일으킨 놈을?”

다 신입 길들이기 하려던 놈들이잖아요! 라고 항의하려다 참았다. 벤클에 항상 따라붙는 선수퇴장으로 제일 머리 아팠던 건 누가 뭐래도 코칭스태프였으니까.

대신.

“성적은 나쁘지 않았잖아요.”

“8승을 거뒀으니 나쁘진 않지. 좋지도 않고.”

어? 제가 내려간 후에 역전된 건 제 탓이 아니죠.

뭐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할 필요 없다.

AT&T파크로 간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무조건 감사합니다.”

“…… 가면 벤치 분위기가 썩 좋진 않을 거야. 그래서 나랑 감독님은 네게 기대를 하고 있다.”

“루키의 파이팅을 보여주라고요?”

“너, 리키, 하우어가 만들어낸 리버캐츠 분위기를 자이언츠의 벤치에 심어보라는 뜻이야.”

뭔가 좀 쑥스럽다.

에이시스와 첫 경기 후 우린 잘 뭉쳐 다녔다.

그렇게 뭉치며 꼭 하나둘 다른 선수들을 불러 함께 하는 분위기로 이끌었고. 넉넉하지 못한 생활에 숙소에서 맥주나 한 병 마시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그리고 칭찬 한 번 더. 하이파이브 한 번 더.

실수가 나오든, 경기에서 지든 시무룩하기보단 더 까불던 우리는 리버캐츠의 세 덤헤드(dumbhead)로 통할 정도였다.

어쨌든 벤치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다.

팀의 성적도 덩달아 상승했고.

“흐흐. 언제 컴백할지 모르는데 너무 부담주지 마세요.”

“잘려서 올 것 같으면 리치먼드로 가!”

“…… 더블A는 너무하잖아요!”

< 3 >

AT&T파크.

미국에서도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샌프란시스코 맥코비 만(McCovey Cove)에 지은 경기장. 어느 메이저리그 구장 과 비교해도 가장 아름다운 야구장으로 손꼽힌다.

내가 이 AT&T파크 마운드에 서게 됐다니.

“구장이 마음에 드나?”

자이언츠의 애쉬비 코치였다.

난 하우어와 함께 메이저로 콜업됐고, 하우어는 배터리 코치에게, 난 애쉬비 코치에게 인계(?)되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캠프에서 보고 반년이 넘었다.

“네. 미국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구장이니까요.”

“약간 투수 친화적이기도 하지.”

“그래서 더 사랑합니다.”

맞는 말이다. AT&T파크가 펜스도 높고 맥코비 만의 해풍도 있어 홈런 맞을 확률은 떨어진다. 대신 3루타는 더 많이 나오고, 심지어 올스타전에서 인사이드 파크 홈런까지 나오지 않았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출전기회는 금방 생길 거야. 꼭 여기서 데뷔할 거란 약속은 못하겠지만.”

“네. 원정에서 긴급 투입될 수도 있겠죠.”

“그 전에 투구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한 번 볼까? 스플리터를 향상시키라는 숙제를 줬는데 결과를 보자고.”

“Yes, Boss!”

환영이다.

리버캐츠에서 모리스 코치에게 나아졌단 칭찬을 받긴 했어도 실제 메이저리그 코치의 평가를 듣고 싶다.

게다가 메이저 콜업을 전달받고 들려왔던 메시지.

[매니지먼트 2차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거 끝내주거든.

휴식일에 맞춰 올라온 탓에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프린츠나 먼저 올라온 리키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훈련 마치고 들어갔는지, 아니면 요즘 혹사당하는 중이라 쉬고 있는지 모르겠다.

역시 공을 받아줄 녀석은 하우어다.

녀석의 포구와 송구능력 등도 테스트 대상일 테고.

약간은 썰렁한 경기장에서 먼저 하우어와 천천히 몸을 풀었다.

“어깨 잘 풀어.”

“알아.”

쉽게 대답했지만 하우어의 주의를 그냥 흘려선 안 된다.

여름이어도 좀처럼 25도 넘는 날씨를 구경하기 어려운 샌프란시스코라 훨씬 신경 써서 몸을 풀어야 한다.

바닷가인데다 북태평양 한류가 맥코비 만으로 지나가기 때문인데, 여름에 비가 적고 서늘한 게 지중해성 기후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캘리포니아에서 웬 지중해성 기후냐고?

사실인데 뭐. 마크 트웨인 영감님께서 ‘내가 보낸 가장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낸 여름이었다.’라고 했을 정도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준비됐나?”

“네. 적당히 어깨가 풀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애쉬비 코치가 둘을 불렀다. 그 뒤론 감독과 코치들 몇 명이 스피드 건까지 들고 나타났다.

그만큼 다급한 자이언츠 현재 사정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보인다. 휴식일에 감독과 코칭스태프 전원이 콜업된 선수를 테스트하러 나왔다니.

“안녕하세요.”

“미누 조, 승격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좋아. 자네가 자이언츠 마운드에 호흡기를 대주면 좋겠어.”

“……”

말문이 콱 막혔다. 아무리 언론에서 자이언츠 성적을 씹어댄다지만 대놓고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하긴, 감독이 느끼는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니겠지.

“포심부터 보지.”

“알겠습니다.”

마운드로 걸어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실전은 아니어도 메이저리그 구장에서 첫 투구.

이 자리에 서기 위해 난 최선을 다했다. 최선만 다해서 보장되는 자리는 아니지만, 부족한 재능을 채워줄 매니지먼트 특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 이젠 보여줄 차례.

60피트 6인치 너머로 하우어의 미트가 보인다.

그 미트를 보며 땅을 차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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