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3)
충격.
5라운드를 지켜본 스타서퍼 팬들은 침묵에 빠졌다.
-이거 힘들겠지?
-난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눈물은 잘못된 베팅에 녹아버린 돈 때문이더냐?
-꺼흐흑 ㅠㅠㅠㅠㅠ
-5라운드 당하는 거 보니까 어질어질하다.
-포기하지마!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있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자.
-팀 격차가 좀 많이 나긴 하더라.
-킹니크는 정말 잘했지만 선수 평균이 오딘이 너무 높아 ㅜ
-근데 이걸 팀 탓할 수도 없다는 게 문제임. 막말로 유니크가 다른 팀 어딜 이적하든 오딘이 지는 그림이 안 그려짐.
-아 이렇게 유럽한테 주도권 넘어가면 1년 ㅈ같아서 어떻게 버팀?
-가붕이 살 맛 안 난다···.
관중은 더는 희망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충격에 빠진 게 관중만이 아니란 점이었다.
벤치로 돌아와 땀을 훔치는 팀원들 역시 말이 없었다.
조금 전 격돌에서 명확한 수준차이를 느낀 것이다.
유호영은 자신이 패배의 원인 제공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낯빛이 어두웠고 끝내 무력한 패배를 하고만 다른 애들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얘들아! 아직 게임 끝난 거 아니야! 다들 기운 차려!”
코치가 연신 박수를 쳐보지만 분위기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려고 노력이라도 했을 터였다.
“한솔아. 애들 상태가 많이 안 좋은데?”
코치가 SOS를 쳐보지만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오히려 나야말로 지금 팀원들의 기분을 더 잘 알았다.
압도적인 피지컬, 타고난 재능차이에 밀려 벽을 느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시 태어나면서 슈퍼능력을 갖고 시작했기에 잊고 있었지만 나야말로 1군 바닥 깔개였던 사람이다.
본래 한 번 수렁에 빠지면 실컷 얻어터지기 전까진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다.
다만 팀원들 상태가 메롱이라고 마냥 손을 놓을 순 없었다.
리더인 나는 어떤 식으로든 승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교체를 해야겠습니다.”
“누구를?”
“밀러 대신 우진이. 그리고···호영이 대신.”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정신 못 차리고 있던 유호영의 눈에 초점이 살짝 돌아왔다.
“혀, 형! 저 멘탈 안 나갔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제레미가 필요합니다.”
“우리 형이 이제야 나를 필요로 하는군!”
벤치를 달구고 있던 제레미는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왔다며 벌떡 일어섰고 유호영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됐다.
호영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리더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지금 게임 내에선 제레미의 컨디션이 훨씬 좋을 게 뻔했으니까.
“작전은?”
“3인 오우거 공략. 버프는 김민준이 받고 저랑 제레미는 혹시 모를 오딘의 가디언 러쉬를 견제할겁니다.”
“내 책임이 막중하군.”
작전을 들은 제레미가 고갤 끄덕였다.
정대환, 김민준, 민우진의 3인 오우거 공략.
강화 버프를 김민준이 받는 동안 나와 제레미는 오딘의 발을 묶는다는 계획.
“만약 또 버프 공략하기 전에 오딘과 마주치면 어떻게 하죠?”
정대환의 물음에 난 대답을 주저했다.
사실 답이 없는 문제였다.
5라운드 패배의 원인 중 하나가 싸우기 전에 오딘 본대와 마주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무사히 가디언 버프를 따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녀석들이 다시 한 번 가디언 공략을 노리길 바랄 수밖에.”
*
“어쩌면 오딘에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6라운드! 드디어 시작합니다.”
“스타서퍼에선 클래스 변경이 있었습니다. 하이프리스트를 비숍으로 교체했고 엘레멘탈 마스터 대신 무도가를 넣었군요?”
“헤븐메이커도 S.솔리드를 떠나기 전까진 확실한 1승카드로 불리었을 만큼 실력 있는 선수죠. 그 동안은 팀전에서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데 이 중요한 순간에 등장했습니다.”
-멤버를 둘이나 바꿨네.
-5라에서 멘탈이 갈렸나봄.
-오딘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냐.
-20퍼? 30퍼···?
-그거라도 나오면 다행이게.
-그나마 다행임. 지금 빌드 완전히 갈렸음.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딘은 가디언 쪽으로, 스타서퍼는 오우거로 향하고 있습니다.”
“버프의 질은 가디언이 우세지만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요. 흥미진진합니다. 스타서퍼의 무도가 페어가 오딘의 독주를 저지하러 달리고 있습니다.”
폭풍전야.
처음 이 작전을 강행했을 때 5라운드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강했다.
가디언 견제를 하러 왔더니 오딘은 오간데 없고 버프를 먹으러 간 우리 본대가 호되게 당하는 광경 말이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저 앞에서 움직이는 오딘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견제를 위한 소수 정예가 아닌 다수.
이번엔 우리의 계획이 맞아들었다.
이제 중요한 건 어디까지 견제를 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나는 제레미와 눈빛을 교환하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바람이 좌우로 갈라지며 좁은 다리가 보였다.
환영 도시의 끝에 다다르면 2차선 철제 다리가 길게 늘어져 있다.
가디언의 영역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암살계는 전 클래스 중 가장 이동속도가 빠르다.
덕분에 우린 먼저 다리 위를 점령할 수 있었고 오딘 녀석들은 다리 위에 선 우릴 보고 무기를 겨눴다.
“겨우 둘? 나머진?”
“오우거나 잡으러 갔겠지.”
“차라리 잘 됐어. 여기서 저 두 녀석을 쓰러트리면 스타서퍼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야.”
“주제 파악을 해라. 한솔이형이랑 내가 지키는 이상 너흰 못 지나가.”
서로 들을 수 없는데도 우린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고 이내 공격이 시작됐다.
2차선 도로는 넓은 거 같으면서도 다수가 움직이기엔 적합하지 않은 장소.
특히 아군을 때릴 수도 있기에 장거리 마법을 퍼붓는 마법사는 손발이 묶인 셈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우릴 잡기 위해 오딘은 셋이 협공을 하는 그림이 됐다.
실드나이트인 크라운, 5라운드에서 이미 붙어본 보리스와 카이저였다.
“조심해.”
“걱정 마. 이 정돈 껌이지.”
제레미는 날랜 동작으로 카이저의 공격을 흘리며 보리스를 향해 교룡뇌조를 뿌렸다.
내가 보리스의 움직임을 열양지로 묶어둔 타이밍이었다.
어흑하는 소리와 함께 보리스가 난간에 부딪치자 그 틈을 실드나이트가 파고들어 커버했다.
짧은 교전이었지만 우리의 분명한 득점이었다.
-할만한데?
-이 정도면 가능성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3:2인데 안밀리는 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계.해.제!!
-헤븐메이커가 이 정도로 팀전을 잘하는 줄 몰랐네;
-솔리드는 언제나 너흴 기다리고 있다. 돌아와···.
제레미와 내 호흡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 동안 스타서퍼에선 김민준, 유호영 페어가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나와 제레미도 그에 못지않게 팀플이 좋았다.
다만 전술이나 클래스 선택 등의 이유로 활약할 기회가 없었던 것 뿐.
제레미는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하며 오딘의 집중력을 흔들었다.
마치 한 몸이 된 것 같은 플레이 속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프로는 피지컬이 깡패라지만 아군의 의도를 캐치해 협력하는 건 오랜 연습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오딘의 실력이 급상승한 시기를 고려하면 팀플 호흡이 잘 맞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형! 이 게임 잡을 수 있겠는데?’
제레미가 눈빛으로 그리 말하던 찰나였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상대 실드나이트의 벽이 벗겨지더니 제레미의 몸이 들썩였다.
뒤편에서 날아온 아크위자드의 기습 공격에 당한 것이다.
빌어먹을!
방심으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
조금 전 실드나이트와 아크위자드의 연계는 감히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이었고 그만큼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다.
갑작스레 적 레벨이 올라간 격이니 제레미가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헉.”
거기다 더 나쁜 건 아크위자드의 공격이 화력 스펠이 아니란 점에 있었다.
아크위자드의 특징은 강한 화력, 그리고 뛰어난 디버프.
제레미는 공격당한 순간 팔을 허우적거렸고 누가 봐도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적 암살자들이 놓칠 리 없었다.
난 다급히 항마장과 열양지를 뿌리며 제레미에게 달려드는 두 암살자를 견제했지만 전부 막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보리스의 쌍장이 제레미의 가슴을 강타했고 끈 떨어진 연처럼 구른 제레미는 실드나이트의 차지까지 얻어맞았다.
멀쩡하던 체력이 순식간에 레드존으로 떨어졌다.
나는 다급히 힐을 써 제레미의 기력회복을 도왔지만 한 번 넘어간 기세는 쉽게 되찾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체력이 떨어지면 움직임이 둔화된다.
제레미가 커버하던 공간은 고스란히 내가 맡아야 했고 그것은 이제 3:1을 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kill! kill! kill! kill! kill!
-킹딘! 갓딘!
-진짜 유니크 저 새끼만 없으면 유럽이 우승 10번은 더 한다.
-미친놈인가; 그럼 북미지;
-응 유럽이야~.
-우승 가자!
-유럽 우승! 유럽 우승!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나는 다시 한 번 자연의 기운이 폭발하길 빌고 또 빌었다.
사실 몸에 남아있는 기운이 많은 건 아니었다.
5라운드에서 그 가공할 폭발력을 보여준 자연의 기운은 이전에 없던 속도로 소모됐고 이제 남은 건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운이 또 한 번 따라주지 않는다면 3:1을 막아내는 건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어지럽게 들어오는 손발을 쳐내는데 뒤쪽에서 제레미의 외침이 터졌다.
“형! 버티지마!”
버티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제레미가 리타이어 되면 도저히 승리 각이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제레미의 외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틸! 차라리 스틸을 노려! 돈도 많이 썼잖아!”
스틸.
상대의 오브젝트 공략 마지막을 노려 버프를 빼앗는 행위를 뜻한다.
제레미는 3:1로 버티는 건 승산이 없다 판단, 스틸을 외친 것이다.
마력을 퍼부어 제레미의 체력을 채워주는 것까지도 생각했지만 결국 제레미의 판단이 더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선 다리를 내주고 버프 공략의 마지막을 노리는 게 최선이었다.
“뒤를 부탁한다.”
난 제레미에게 마지막 오더를 내리며 그림자발자국을 펼쳤다.
갑자기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오딘 녀석들이 당황하며 추격의 손길을 뻗었지만 제레미가 그것을 받아쳤다.
비록 체력은 바닥났지만 마력은 아직 남아있기에 스킬을 아낌없이 쏟아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레미의 초상화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
-스타서퍼 연속 우승 못 함?
-2연속 우승이 이렇게 어렵네.
-S.솔리드만이 유일한 2연속 우승팀이다. 부럽지?
-느그 팀 준결승따리잔아.
-어? 가디언 친다.
-오딘 왜 무리수 둠? 그냥 가만히 버티고 있어도 인원 수 빨로 이기는 거 아님? 차라리 점수 거점이나 따놓지.
-저게 맞는 판단일 수도 있음.
-또또또 브실들 ㅈㄹ났네;
-아니 생각해 봐. 스타서퍼가 어디 잡팀도 아니고 오거 버프 달고 오면 화력이 어떻겠냐? 게다가 유니크도 아직 살아있잖아. 버프 낀 네 명하고 맞짱 뜨면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거임.
-일리 있음. 레이저가 버프 달고 올 건데 화력 조짐.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저러다 스틸 당하면 어떡하려고 저러냐.
-아니 병. 형신이야? 아크위자드가 무도가한테 스틸당하면 ㅅㅂ 코박고 죽어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유니크래도 아크위자드 제치고 스틸 가능하냐?
-데미지 차이 나서 안 되지. 그리고 오딘 나머지 애들도 방어 가담할 거임.
-근데 아까 헤븐메이커가 얘기 한 거 보면 뭐 준비한 거 아닌가···.
-응. 그딴 거 없어.
-희망고문이야~. ^^
“오딘이 가디언 공략을 시작합니다.”
“유니크의 생존 유무 때문에 버티기 쪽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네요.”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여기서 버프만 따낸다면 오딘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됩니다.”
폭음이 연달아 울린다.
실드나이트가 방어하는 사이 아크위자드와 암살자들이 가디언의 체력을 착실히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은 건 분명 나를 견제하고 있는 탓이었다.
나는 그림자 발자국을 유지하며 그늘 속에서 때를 기다렸다.
5라운드에서 유호영의 죽음이 분기점이었다면 이번 라운드는 가디언의 공략이 끝나는 순간이 될 터였다.
가디언의 체력이 마침내 1할 아래로 떨어지자 전장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상대 아크위자드는 마력을 잔뜩 모아 마지막 공격 타이밍을 준비했다.
단일 화력으론 무도가가 아크위자드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 공격이 실패하지만 않는다면 스틸을 당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오딘도 잘 알고 있기에 아크위자드 주변엔 힐러와 실드나이트가 눈을 부릅뜨고 대기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때가 도래했다.
-딜 중지! 딜 중지!
-막타 나가신다!
-유럽 우승!
-유럽 우승!
아크위자드의 머리 위에 떠오른 거대한 화염구가 열기를 흩뿌리며 가디언을 향해 돌진했다.
용으로 변한 불꽃, 드래곤 브레스였다.
모두가 오딘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난 고작 스킬 한방에 게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제레미가 스틸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난 이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누가 이기는지 보자.
난 그림자 발자국을 품과 동시에 자색팔찌의 힘을 이용해 스킬 한 개의 위력을 강화시켰다.
열양강기의 포탄. 봉황포였다.
용의 충격, 교룡뇌조, 항마장, 열양지.
몇 년 동안 많은 스킬에 내 손에 들어왔지만 내 주력기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이 네 가지 스킬의 공통점은 위력이 준수하면서도 마력 효율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
그러나 나와 정반대로 플레이하는 선수가 이번 대회에 있었다.
마스터 디코이 팀의 브리드였다.
유럽의 자랑이라던 그 무도가는 하나 같이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고데미지 스킬을 애용했다.
그 때 생각했다.
연비 나쁜 스킬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물론 실전에서 쓸 일이 거의 없긴 했다.
굳이 연비 나쁜 스킬을 쓰는 게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거의 쓰지도 않을 스킬을 구해달라고 하는 건 재정적으로 팀에 상당한 부담이었다.
가이아의 인기는 몇 년 새 급성장했기에 이제 전설 스킬은 밸류가 낮아도 그 몸값이 이전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럼에도 팀은 내 요구를 들어줬고 그렇게 구해온 스킬이 화력으로 무도가 최상위 카테고리에 위치한 봉황포였다.
“유니크의 등 뒤로 붉은 날개가 펼쳐집니다!”
“봉황포! 봉황포입니다!”
-오우, 이 타이밍에 새로운 스킬;
-근데 봉황포로 드래곤 브레스보다 딜 더 못 넣잖아.
-ㅇㅇ;; 어림없음.
-자색팔찌로 강화해도 부족함.
-솔직히 강화 좀 한다고 아크위자드보다 화력 세면 누가 마법사 함. 다 무도가했지.
-오딘도 강화할 줄 알아 ㅋㅋㅋㅋㅋ
나도 안다.
강화 좀 한다고 데미지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또 한 번 강화가 붙으면 어떨까?
그것도 보통 강화가 아닌 대강화가.
◈영원급 업적 - 무신의 시련 돌파
영웅의 시험대에 숨겨져 있는 무신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돌파했습니다.
보상 : 영원급 이하 스킬의 대강화 기회 1회 획득.
무신의 업적으로 강력해진 특급 봉황포가 가디언을 향해 날았다.
The Last (4) 完
한계까지 강화된 봉황포가 가디언을 파괴하는 순간, 필드 위를 강한 진동이 휩쓸었다.
“버프 탈환! 스타서퍼의 선택은···! 헤븐메이커입니다!”
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한 번 제레미를 불러냈다.
아직 게임이 끝난 게 아닌 상황.
오딘은 다섯 명이 뭉쳐있는 반면, 우리 팀은 둘과 셋으로 갈라져 있기에 아차하는 순간 게임이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공방전.
지금 우릴 잡지 못하면 라운드 패배가 확실하다는 것을 오딘도 잘 알기에 매서운 공세가 쏟아졌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이미 가디언을 잡느라 마력이 크게 소진됐을 텐데 어떻게 이 정도 공격을 해내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두 번은 안 당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회를 부여받은 제레미의 플레이는 전에 없이 날카로웠고 결국 우린 팀원들이 합류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끌 수 있었다.
“스타서퍼! 아직 게임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Holy Fuck!
-유니크 제발 은퇴 좀 해줘라! 같이 좀 먹고 살자!
-유니크 나이가 몇인데 은퇴해 ㅋㅋㅋㅋㅋㅋ
-응~. 앞으로 월챔 10번은 더 먹을 거야~.
-저거 독과점법 위반 아님? 커리어 혼자 다해먹으려고 --
-미친놈들 ㅋㅋㅋㅋㅋ
-커리어에 독과점이 있었냐?
-ㅋㅋㅋ 아 웃다가 침 흘렸네.
-유럽 단체 멘붕잼. 우효!
-가디언 뺏긴 거 레전드네. 유리한 상황에서 저 지랄로 던지면 어떻게 이기겠단 거임?
-보리스 저 새끼 강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뭐하는 거야···.
-딜러 똥 지렸다. 진짜. 수준차이 넘사.
-딜러 차이라뇨. 유니크 혼자 다 한 거임. 불편하니까 묶지 마세요.
-악질 유니크 맘;;
-기분 싸해진다. 이거 설마 지나?
-그럼 이길 줄 알았냐?
-오딘이 이긴다고 생각한 흑우 없제?
-ㅅㅂ 이거 다 각본임. 첨부터 다 짜여져있던 거임. 가이아 이 악마 새끼들.
-유니크 딜링이 말이 안 됨. 무도가잖아! 이거 진짜 정밀 검사 해봐야 됨;;
-아 제발···! 이번 한 번만 우승하게 해달라고!!!!!
-안 돼. 우승시켜줄 생각 없어. 돌아가 ^^
6라운드 승부의 마침표.
오딘의 마지막 생존자의 체력 바가 터져나가며 스타서퍼의 승리가 확정됐다.
*
“정말 잘했다! 정말 잘했어!”
“얘들아. 수고했어!”
평소 감독이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자리라고 입에 달고 다니던 박감독은 보기 드물게 흥분한 상태였다.
물론 제일 흥분한 건 관중이었지만.
어찌나 함성이 큰지 배틀 아레나를 무너트리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이제 딱 라운드 하나 남았다!”
“쟤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이온음료를 들이키던 민준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느려진 거 같은데요. 1라운드 때랑 비교하면 뭔가···느낌이 그래요.”
“어! 나도! 나도 그거 느꼈는데.”
“느려졌다고?”
“살짝 느려졌나?”
“티가 좀 많이 나던데.”
“민준이 얘기 들어보니까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형! 형 생각은 어때요?”
팀원들은 오딘의 피지컬이 떨어졌다는 주제를 나누다 말고 내게 답을 요구했다.
대답을 내놓는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다.
“이유가 뭔진 몰라도 피지컬 저하는 뚜렷해.”
“거 봐.”
“그럼 우리 우승하는 건가?”
“당연하지!”
오딘이 침몰하고 있었다.
피지컬 하나로 세계 정상을 노리던 팀에서 피지컬을 빼면 뭐가 남겠는가.
하지만 이상한 건 체력 저하 속도였다.
물론 월챔 결승은 평소엔 좀처럼 접해볼 일이 없는 7판 4선승제.
풀라운드까지 가면 15분짜리 팀전을 연거푸 세 번이나 치러야 하는 구조다.
하지만 가이아는 e스포츠.
직접 육체를 움직이는 스포츠가 아니기에 저 정도로 체력이 급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팀원과의 손발이 안 맞거나 반응속도가 살짝 느려지는 정도.
그러나 오딘의 체력 저하는 그 정도가 심했다.
월드클래스급 선수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민첩했던 녀석들이 6라운드 막판엔 뛰어난 1부 리그 선수들 급이 된 것이다.
피지컬이 떨어졌는데도 뛰어난 1부급 선수라고 하면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본래 오딘의 피지컬 레벨은 탈 인간급.
어찌 보면 우리가 여기까지 판을 끌고 온 게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약효에 관한 부분은 아직 미심쩍었다.
유럽 XG에서 강제로 약을 먹었던 과거를 떠올려보면 분명 이상했다.
본래 약효라는 게 이렇게 솜사탕마냥 사라지는 물건이 아니다.
체내에 잔존하는 약물은 그 효과를 짧게는 몇 달 이상 유지시켜주기에 긴 리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선수들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쓰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지속 시간이 짧은 각성제 같은 물건을 개발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더 위험하다.
저들 마음대로 원하는 타이밍에만 잠깐잠깐 도핑을 할 수 있단 뜻이니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열을 식혔다.
이제 체내에 남아있는 자연의 기운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운이 꽉 차있던 때와 비교하면 거의 한 줌 수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기운이 소멸하면 더는 기운이 회복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내게 무한의 체력을 불어넣어주던 자연의 기운.
그것이 사라진다면 이번 월챔 7라운드가 내 마지막 전성기가 될 터였다.
나쁘지 않지. 아니, 오히려 좋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마지막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하는 약쟁이 녀석들 아닌가.
“물론 반드시 이겨야겠지만.”
나도 모르게 속내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는데 팀원들이 걱정하지 말라며 힘을 실어줬다.
“당연히 우리가 이기지!”
“저 정도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요.”
“고맙다. 얘들아.”
“응? 어디 아파? 평소엔 고맙단 소리 잘 안하는 사람인데 흐음.”
“한솔이도 힘든 경기를 치르다보니 감성적이 된 모양이야.”
“두유노 수장이 이거 왜이래. 평소처럼만 하자고! 평소처럼만!”
“그래. 평소처럼만 하자.”
나는 씩 웃으며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반드시 이기자!”
“하나, 둘, 셋!”
“스타서퍼!”
“파이팅!!!”
*
[뜨거웠던 월드챔피언십. 그 현장을 돌이켜 본다.]
[e스포츠의 별에 등극한 남자. 유니크 특집 (1)]
[스타서퍼는 어떻게 강팀이 되었나.]
[e스포츠 정신을 지켜낸 진정한 영웅 10인]
[세계 3억 유저가 함께했다! 데이터 세계를 깨고 나온 가이아의 도약]
월드챔피언십이 끝나는 순간.
막대한 양의 기사가 인터넷 포탈에 쏟아졌고 그 대문을 장식한 건 스타서퍼였다.
피지컬이 떨어지기 시작한 오딘이 끊임없이 단련해온 우릴 막는 건 어림도 없는 일.
그 커다란 차이는 결국 우릴 월챔 우승이란 결과로 이끌었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게임인 가이아.
그리고 그 가이아 최고의 대회를 연속 제패한 한국.
유저 커뮤니티는 축제 분위기 속에 이 기쁨을 만끽했다.
딱 1시간 동안만.
-조작? 조오작?!
-약물?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오딘이 약빨러라고?
-ㅁㅊ ㅋㅋㅋㅋㅋ
게임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 커뮤니티를 흔든 대형 폭탄.
유럽 팬의 강력한 지지를 받던 오딘의 불법 도핑 기사가 터졌다.
지오 본사에서 열린 공식 기자회견으로 인해서였다.
“월드챔피언십이 끝나자마자 이런 기자회견을 하게 되어 대단히 송구합니다. 저희는 오후 14시 27분. 유럽 게이밍 팀 오딘의 불법 도핑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아니 시발 올림픽 수준 검사를 했다면서 어케 피했음?
-오딘 그는 신이야!
-도핑까지 했는데 쳐발린 신도 있네.
-병. 신.
-ㅋㅋㅋ
-ㅋㅋㅋㅋ 병신이래.
-아 그래서 왜 안 걸렸다는 거임.
“저희가 확보한 증거에 따르면 오딘은 검사결과에 드러나지 않는 브레인 도핑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약물이 아닌 뇌에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와 도랏맨;
-게이머가 게임을 해야지 생체실험을 쳐하고 있었네 ㅋㅋ
-허미.
-오~. 일렉트릭 맨~.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지랄 말라고.
-그럼 스타서퍼는 도핑 팀을 이겼단 거임?
-미쳤네;;
-야. 설마 우리 애들도···?
-ㄴㄴ 그건 아님. 스타서퍼는 클린하다잖아.
-또또또. 유럽 새기들 어떻게든 분탕 치려고 --
-도핑했는데 개 처바른 거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오딘이 행한 불법 행위는 증거를 잡기 매우 쉽지 않았지만 이 모든 일의 내막을 확인하는데 스타서퍼 소속의 나이트버드 ‘유성철’ 선수가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니 겜 하다 말고 어딜 잠수 탔나 했더니···.
-숙소에 쳐들어가서 가드를 두들겨 팼어?
-현실 무도가 ㄷㄷ;;
-여러분? 가이아가 이렇게나 유익한 게임입니다. 호신술 배우고 싶으면 당장 캡슐 구입 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이게 다 실화라고?
-레전드 개판 대회.
-미친놈들만 모여있는 거 가터;
-이걸 이겼다는 게 제일 어이없지.
“···저희 지오는 이번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 깊은 책임을 느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가이아를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유저 여러분, 그리고 전 세계 e스포츠 유저 분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세계 1위에 어울리는 게임이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스포츠는 물론 스포츠 업계에까지 영향이 미친 핵폭탄.
이 대형 폭풍이 각종 커뮤니티를 쓸어담고 있는 사이, 우린 다급히 병원으로 이동했다.
유성철이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서였다.
“야 이 새꺄! 몸! 몸은 괜찮아?!”
“아, 네. 아무 문제없습니다. 말없이 움직여서 죄송합니다. 감독님.”
“너는 진짜···.”
제일 먼저 병실로 달려간 박감독은 기차 화통처럼 소릴 지르더니 성철이의 손을 꽉 잡으며 그의 건강부터 챙겼다.
하고 싶은 말이 제법 있었는데 날 보며 씩 웃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회견 내용만 보더라도 꼭 그 때 자릴 비워야 했던 모양.
만약 성철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우린 오딘을 꺾었을지언정 그들의 진정한 음모를 잡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고 불법 도핑이 일어날 수 있는 스포츠라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저···자리를 옮기시는 게 좋겠는데요.”
성철이에게서 자세한 내막을 듣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본사 직원이 소곤거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병원 주변으로 기자들이 진을 쳤다는 것이다.
“유성철 선수 몸엔 이상이 없다고 하니 저희가 조용히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우승 분위기를 만끽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일단은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안 그랬다간 오늘 하루 내내 도핑관련 문의에 시달릴 판이었으니까.
안내를 받아 밖으로 이동하는데 헐레벌떡 복도 끝에서 달려온 직원들이 날 붙잡았다.
그중엔 아는 얼굴도 있었다. 니콜라이였다.
“유니크 선수!”
“오랜만입니다. 니콜라이씨.”
상당히 급하게 달려왔는지 연신 헐떡이던 그가 뱉은 첫마디는 감사인사였다.
“정말, 정말로 고맙습니다.”
“사건 해결은 성철이가 다 했는걸요.”
“물론 유성철 선수에게도 감사하죠. 그리고···오딘을 이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눈빛과 몸짓, 모든 것으로 니콜라이의 진심이 전해져왔다.
만약 성철이가 증거를 성공적으로 잡아냈다 한들 우리가 오딘에게 꺾여 패배했다면 가이아로서는 지금보다 더 큰 똥물을 뒤집어 쓴 격이 됐을 테니까.
병원 밖으로 안내하던 직원은 니콜라이가 우릴 붙잡고 있는 게 맘에 안 드는 눈치.
빨리 할 말 끝내고 자리 비켜달란 티를 팍팍 내자 니콜라이가 머쓱한 표정을 했다.
그래도 니콜라이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지 끈질기게 내 옆을 따라붙었다.
“저, 유니크씨. 혹시 은퇴 같은 거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은퇴요? 갑자기요?”
“너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 은퇴라···.
다소 복잡하긴 했지만 지금 내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후련했다.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묵은 체증이 확 씻겨 내려간 느낌.
물론 당장 은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연의 기운이 없더라도 몸이 따라준다면 선수 생활을 더 이어나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는 아직 배가 고팠다.
클린 게임 한 번 만들어 보려다가 총까지 맞고 죽었다.
월챔 트로피 몇 개는 더 들어도 괜찮잖아?
하지만 이대로 솔직하게 답하긴 아쉬웠다.
난 이번 일을 오롯이 우리 손으로 해결하게 만든 니콜라이에게 살짝 장난을 치기로 했다.
“은퇴는···조금 생각해 봐야겠네요. 그럼 나머지 얘긴 나중에.”
“예? 예? 안 됩니다! 유니크 선수! 다시 한 번만 재고를!”
가이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선수의 갑작스런 은퇴.
그 후폭풍을 떠올린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나로선 썩 맘에 드는 반응이었다.
니콜라이를 뒤로 하고 우린 그렇게 조용히 병원을 벗어났다.
다사다난했던 월드챔피언십의 마무리였다.
*
아름다운 휴양지를 다시 찾았다.
불법 도핑은 잘못된 거라고 외치다 사고를 당했던, 그 고성이 내 뒤를 떡하니 받치고 있었다.
내게 있어 썩 기분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팀원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경치 끝내준다!”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았어?”
“유럽은 형도 처음 아니야?”
녀석들의 반응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 똑같았다.
그만큼 경관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었다.
오딘과 격전을 벌인지도 어느새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자연의 기운이 없어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게 또 타고난 피지컬이 증발하는 건 아닌지라 문제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팀의 4연속 월드챔피언십 우승.
수많은 선수들이 단 한 번 해내기도 어렵다는 그 우승을 밥먹듯 올리고 있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우릴 알아봤고 하루가 다르게 위상이 커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힘든 강행군이었다.
이번 휴양은 오랫동안 쉼 없이 달려온 우리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그리고 이 장소를 추천한 게 나였다.
한 번은 이곳을 다시 들르고 싶은 마음이 예전부터 있었는데 마침 이번이 적기였던 셈이다.
이곳에 오면 내 죽음에 관한 비밀이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호숫가를 거닐고 있는데 저 멀리서 날 부르는 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식사 다 됐어요! 빨리 와요!”
“형! 빨리 안 오면 먼저 먹는다?”
나는 신나서 폴짝거리는 애들을 향해 알겠다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 말하고 숙소로 향하는데 길가의 비석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바위엔 호수에 대한 유례가 새겨져 있었다.
“호수의 정령이라···.”
어쩌면 호수에 산다는 정령이 물에 빠진 순간 불쌍해서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례에 따르면 호수를 지키는 정령은 용기와 정의를 상징한다고 했다.
제이슨 녀석에게 항의했던 내 행동은 아마 정령이 보기에 썩 맘에 드는 행동이지 않을까 싶었다.
보잘 것 없던 내게 기회를 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호수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후련했다.
모든 게 정리 된 것 같은 기분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눈길을 확 하고 잡아끄는 것들이 있었다.
호수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는 푸른 빛덩이들.
빙글 돌며 인사하는 빛을 보며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