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4)
결승전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행운의 여신은 우리와 함께였다.
그러나 3라운드에선 잠시 응원 팀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제레미가 무도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플레이를 펼쳤음에도 라운드 승리는 오딘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오딘의 첫 승리였다.
솔직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구의 천칭은 마법사 클래스가 왕이 되는 전장.
그런 맵에서 마법사와 마주쳤으니 어느 누구도 제레미를 탓할 수 없었다.
-운이 좀 나빴네.
-아직 게임이 끝난 게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라!
-힘내라!
-저 친구 평소엔 말 많은 친군데 어깨 쳐진 거 보니 마음이 아프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이런 걸로 기죽고 그러냐!
-그래! 팀전에서 갚아주면 돼!
관중의 응원은 언제나 선수에게 힘이 된다.
패배를 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는 팬들의 환호에 제레미는 금방 우울한 얼굴을 거두고 기운을 냈다.
“아 너무 아깝네. 솔직히 한끗 차이였는데. 형도 봤지?”
한끗 차이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아쉬운 경기인 건 사실이었다.
암살계는 상성상 마법사를 잡기 유리한 포지션.
만약 맵이 천칭이 아니라 다른 맵이었다면 충분히 결과를 바꿀 수도 있었으리라.
김민준의 입술이 잠깐 달싹거렸지만 결국 열리진 않았다.
아마 ‘거봐요 내가 나갔으면 이겼을 텐데.’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도 끝내 말을 아낀 걸 보면 확실히 민준이가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직접 겨뤄보니까 어때?”
“솔직히 피지컬은 괴물들이야. 인정.”
제레미는 이마의 땀을 훔쳤다.
맵의 불리함이 아니었다 해도 상대는 괴물이었다.
순수 피지컬로만 따지면 민준이나 더원 같은 톱클래스 마법사 플레이어를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니까.
“노려볼만한 특징은 못 찾았어?”
상대에 대한 느낌은 역시 직접 겨뤄본 선수가 잘 아는 법.
제레미는 3분간의 격전을 더듬으며 말로서 그 느낌을 풀어냈다.
“페인트에 잘 속는 것 같긴 한데 반응속도가 너무 빨라서. 보고 막을 수 없는 걸 막아버리니까 페인트가 의미 없다는 느낌? 더 빠르게 공격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긴 하겠더라.”
“페인트란 말이지.”
“왼쪽이 오른쪽보다 아주 살짝 더 열리는 느낌도 있었어.”
오딘이 1라운드를 가져갔으니 어찌됐건 이번 결승은 한 번 이상은 팀전을 해야 했다.
그 때를 대비하자면 제레미의 느낌이 가장 생생한 지금 상대의 정보를 모두와 공유하는 게 좋았다.
상대 마법사의 약점을 논하는 사이, 스크린엔 4라운드 전장이 이름이 떠올랐다.
-ㅅㅂ;;
-조진거 아니야 이거?
-맵 운 왜 이러세요;;
-여신님; 직무유기하지 마세요;
-설마 관계자들 조작 친 거 아니지?
-어이 젊은 친구. 말조심 해.
-ㄹㅇ;; 그런 이야기 함부로 하는 거 아님.
-밴 당하고 싶어?
스타서퍼의 팬들이 저마다 다른 이야길 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맵 운이 따라주질 않는다!
4라운드 전장의 정체는 십만 대산, 우리에겐 최악의 상황이었다.
십만 대산은 기암괴석 봉우리를 넘나들며 싸워야 하는 이동이 제한되는 전장.
암살자에겐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더 이상 쓸 수 있는 암살자 카드가 없었다.
“젠장. 3라운드에 제레미를 낸 게 역시 실수였나?”
맵을 보고선 감독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였다.
만약 김민준을 내보냈다 한들 3라운드에 십만 대산이 등장해 민준이 패배, 4라운드에 천칭이 나온다면 쓸 수 있는 마법사 카드가 없는 건 똑같았다.
“젠장! 이 자식은 어딜 가서 아직도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감독은 결국 참지 못하고 씨근덕거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감독이 말하는 이 자식이 유성철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유성철의 기량은 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던 상황.
만약 녀석이 아무 문제없이 자릴 지켰다면 3라운드 카드는 분명 김민준이 됐을 터였다.
전장에 맞춰 클래스를 내야 하는 시합 특성상 클래스에 여유를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벌거벗은 기분이군.”
감독은 관중들이 나누는 채팅창을 보며 말했다.
채팅창에선 우리가 낼 선수가 누구일까를 두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는데 가장 많이 언급 되는 인물이 눈에 띄었다.
김정환이었다.
-여기선 역시 템페스트 아니겠냐?
-오딘이 암살계 낼 거 생각하면 클래스 상성으로라도 먹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그냥 레이저 내면 안 돼?
-십만 대산에서 마법사를 왜 내. 사기 떨어지게;
-둥둥 떠다니다가 개 쳐맞고 낙사하는 꼴 보고 싶음?
-채팅 수준 봐라; 잘 들어라 얘들아.
-응. 안들을 거니까 꺼져.
-형이 그랜드 마스턴데;
-방구석 그마 출현.
-오늘 그마라고 떠벌인 애들만 줄 세워서 100만 명임.
-ㄹㅇ ㅋㅋㅋㅋㅋ
-나는 그마는 아니고 마스턴데 분석력은 그마급이거든? 한 번 들어봐봐. 스타서퍼에선 지금 낼 카드가 템페스트밖에 없어. 김정환은 중국에서도 오퍼가 들어올 정도로 뛰어난 아크나이트고. 여기서 레이저는 대가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고 김정수랑 김정환은 솔직히 격차가 크거든? 그러니 템페스트 등판 확정이란 얘기야.
-장문충 out.
-니가 챗창 전세 냈냐? 장문충 쳐내! 쳐내에에에!!!!
-근데 장문충 거르고 내용은 맞는 말 한 거 같은데?
감독이 발가벗은 거 같다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관중조차 이미 우리가 낼 수를 뻔히 알고 있지 않은가.
오딘이 우리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낼 수 있는 선택은 김정환이 거의 유일했다.
“성철이 이 자식 돌아오기만 해봐라. 김정···!”
“감독님.”
“응?”
나는 다급히 김정환을 호출하려던 감독을 불렀다.
“왜 한솔아.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혹시 묘수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기대하는 감독의 눈빛이 반짝반짝 부담스럽다.
아마 묘수랍시고 잘만 포장하면 힐러를 내자 해도 믿을 얼굴이다.
그러나 나라고 매번 묘수를 짜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정환이 말고 대환이를 내보내시죠.”
“어?”
팀원들조차 깜짝 놀랄 이야기였기에 난 감독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여기서 실드나이트인 정대환을 낸다?
스스로 승리 확률을 더 낮추는 행동이었다.
실드나이트가 암살계를 상대로 개인전에 출전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십만 대산에선 아니었다.
아크나이트와 비교해도 떨어지는 기동력으론 상대의 속도를 전혀 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감독도 그걸 알기에 재차 내게 제대로 들은 게 맞냐고 묻는 것이다.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대체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한 일이었다.
내가 여기서 대환이를 밀어붙이는 건 단지 포기하지 말고 버티라는 유호영의 당부 때문이었으니까.
“반드시라···.”
잠시 고뇌하던 감독은 이내 고갤 끄덕였다.
박감독이 내게 보내는 신뢰는 절대적, 그는 자세한 이유를 묻지 않고 내 요구를 들어줬다.
“정대환! 준비해!”
“감독님 제 이름은 정환이라니까요.”
“나도 알아! 너 말고 대환이 준비하라고!”
감독의 목소리가 커지자 당사자인 두 선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기 바빴다.
그리고 잠시 뒤, 전광판에 정대환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 놀람은 배틀 아레나 전체의 것이 됐다.
-?????????
-누구 판단이야 이거?
-감독 같은데?
-감독;; 머리에 총 맞았어?
-이유가 뭔데. ㅅㅂ 새끼야!
-내가 이딴 ㅂㅅ짓 보려고 비싼 돈 주고 직관하는 줄 아냐고!
-계좌 까봐야 돼. 저거 ㅡㅡ
-주작 반대! 주작 반대! 주작 반대! 주작 반대! 주작 반대! 주작 반대! 주작 반대! 주작 반대!
-뒷돈을 얼마나 받으면 결승전에서 이런 어메이징한 짓거릴 할 수 있냐?
-스폰서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놀람은 잠시 뿐.
분노한 관중의 욕설이 경기장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독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감독이 내게 향했어야 할 포화를 막아내는 사이, 나는 정대환에게 단 하나만을 부탁했다.
“시간을 끌어야 해. 호영이가 했던 것처럼 3분 꽉. 할 수 있겠어?”
“네.”
정대환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끌어야 한다면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날 별로 좋아하지 않던 녀석이었지만 이젠 그것도 옛 말, 이제는 팀원으로서 날 신뢰해주는 친구였다.
감독의 호출에 잠시 당황했던 대환은 이내 장비를 세팅하고 무대 위로 올랐다.
내가 회귀할 즈음엔 이미 정상에 올라 대한민국 최강의 방패로 명성을 떨쳤던 선수.
그런 대환이 방패를 바로 잡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드루와!”
*
가이아를 즐기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월드챔피언십으로 쏠린 시각, 시내를 바삐 움직이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택시를 타고 시내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눈에 띄는 특징 몇 가지만을 알고 있는 머릿속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 목적지는 대형 호텔이었다.
문제는 호텔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
그는 택시에 탄 채 몇 번이고 지나가는 호텔을 확인하며 고개를 가로젓길 반복했다.
택시 기사는 얼굴에 웃음꽃을 잔뜩 피우고 젊은 손님이 가자는대로 핸들을 돌리길 반복했다.
요금 걱정은 하지 말라며 조수석으로 얌전히 달러 수십 장을 내려놓은 손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영원한 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형 호텔이 있을만한 자리는 다 돌았는데도 아직 손님이 원하는 호텔을 찾아내지 못한 탓이다.
“정말 이게 전부 맞나요?”
“확실해. 내가 이 바닥에서만 15년째 일하고 있거든.”
15년차 기사가 하는 말이라면 틀림없이 사실일 터.
하지만 여전히 꿈에서 봤던 그 호텔은 찾아내지 못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그 장소를 찾아가야만 했다.
“혹시 자네가 못 보고 지나친 건 아닐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손님은 단호히 고갤 저었다.
팀 내에서도 동체시력 좋기로 소문난 그다.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해 살폈으니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긴 하던데···. 젊은 친구는 하는 일이 뭔가?”
“프로게이멉니다.”
“오! 나도 알아. 우리 애들이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하거든. 저거야 저거!”
기사가 가리킨 방향의 빌딩 전광판엔 배틀아레나의 놀라운 열기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월드챔피언십 장면임을 알아본 손님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가이아라고 아나?”
“물론 알죠. 저도···.”
현역 프로 선수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빛줄기 하나.
유독 호텔 벽면이 여러 색으로 반짝이던 기억이 수면 아래서 떠올랐다.
“기사님. 혹시 저런 전광판 달린 호텔은 없습니까?”
“스크린을 설치한 대형 호텔은···내가 알기론 없지.”
“정말 하나도 없습니까? 대형 스크린 근처에 위치한 호텔도 괜찮습니다.”
“음.”
고민하던 기사는 고갤 갸웃거렸다.
“에버 컨티넨탈 호텔이 스크린 근처에 있었던가?”
“에버 컨티넨탈요? 우리가 지나친 호텔인가요?”
“아니야. 들르지 않았지. 그 호텔은 내부 수리 때문에 영업을 일 년 이상 쉬고 있거든.”
“그곳으로 가주세요.”
“거리가 좀 되는데?”
“괜찮습니다.”
그는 왠지 그곳이 자신이 찾던 곳일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도시 반대편을 향해 달리고 나서야 손님은 긴 택시 여행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잔돈은 됐습니다.”
“갈 때 필요하면 또 연락해주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택시에서 내려 영업중지 중인 건물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그야말로 차가웠다.
“···개자식들.”
씨근덕거리며 호텔을 주시하는 그의 이름은 유성철.
월드챔피언십 결승을 앞두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프로게이머였다.
걸음을 옮기는 유성철의 눈에선 흡사 불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나서 처음 알았다.
자신에게 그렇게 커다란 승부욕이 있는 줄을.
월드챔피언십이 어떤 무대인가.
프로게이머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다.
게다가 다른 시합도 아니고 결승전.
그런 결승전을 자의도 아니고 타인에 의해 불참하게 됐으니 선수라면 열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던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내부를 관찰했다.
창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1층 로비엔 검은 양복을 빼 입은 남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영업을 쉬고 있는 호텔이라기엔 은근히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꽤나 삭막한 분위기로.
마치 이 커다란 호텔이 어떤 목적을 위해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계하는 남자들의 머릿수를 생각하면 정면으로 출입은 위험하다 판단, 성철은 호텔 주변을 배회하며 다른 출입구가 있는 지를 찾았다.
이런 대형 호텔엔 출입구가 몇 개 더 있기 마련, 원하던 뒷문을 찾아낸 그는 망설임 없이 경계를 서던 가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성철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왓···!”
갑작스런 기습에 가드가 당황한 찰나 성철의 벼락같은 주먹이 상대의 안면을 향해 날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