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3)
톱클래스 선수가 다른 선수에 비해 더 무서운 점 중의 하나는 한 번 기회를 잡으면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는 데 있다.
유호영은 자신에게 흐름이 넘어왔음을 직감, 숨도 쉬지 않고 스킬을 퍼부으며 트리톤을 몰아붙였다.
-와 ㅁㅊ;; 무딜링호흡;;
-무호흡딜링 ㅂㅅ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딜링호흡은 뭔데
-무딜링호흡이면 딜량 0이다;;
다이나믹한 플레이에 관중이 감탄하는 사이, 유호영은 더욱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형의 말대로다! 방어력은 탱커 평균에 한참 못 미쳐.’
자신의 공세에 비틀거리는 상대를 보며 유호영은 며칠 전 유니크와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잘 들어. 트리톤의 속도는 명백히 반칙이야. 아크나이트가 저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으면 누가 암살 클래스를 하겠어? 안 그래?”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죠?”
“선수 피지컬이 캐릭터 스탯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분석에 따르면 트리톤의 비정상적인 파괴력은 속도에 치중한 아이템 세팅과 스킬에 있었다.
상대의 페이스를 흔들고 공격을 적중시킬 수만 있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 게임 시작 전 유니크의 설명이었다.
물론 이런 정보를 다 알고 있어도 지금까지 실행에 성공한 마법사는 없었지만 미리 준비 된 유니크의 작전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결승전에서 벽람초원이 나올지 안 나올진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지만 만약 나온다면 호영이 네가 맵을 전담하게 될 거야.”
“제가 벽람을요?”
“예전에 들여온 엘마용 날씨 조정 스킬 기억해?”
“어···혹시 70만 달러나 주고 사들여서 감독님 열 받았던 그거요?”
“그래 그거. 그걸 이용해서 새로운 판을 짤 거야. 예전엔 써먹을 수가 없었는데 이젠 재료가 다 모였어.”
“···?”
“당장 연습을 시작하자. 백 번 설명하는 거보다 직접 써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
연습을 시작 했을 때, 유호영은 완전히 뒤집어진 초원을 보며 크게 놀랐다.
스킬과 아이템이 만들어낸 시너지의 위력이 자신의 예측을 크게 웃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뭐가?”
“형이 이 모든 퍼즐을 오래 전부터 맞추고 있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밑그림을 그리다보니 구체적인 모습이 떠오른 거지. 처음부터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던 건 아니야.”
누구보다 정한솔을 동경하는 유호영이지만 이 설명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제시한 방법대로 플레이한 결과는 실로 파괴적이며 참신했다.
그 누구도 천대받던 기후 마법을 이용해 지형을 이용한다는 발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수천만 명이 플레이하는 가이아이다 보니 누군간 이와 같은 밑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언컨대 실전에서 통할 정도로 위력을 끌어올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형은 역시 천재예요.’
유니크는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 부인했지만 유호영의 눈에 비친 리더는 분명 의심할 여지없는 역대 최고의 천재 프로게이머였다.
그런 유니크가 자신의 승리를 보장했다.
연습한 대로만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유호영은 침착하게 트리톤을 막바지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급히 승부를 내려다 회심의 일격에 당해 결과가 뒤집히는 경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아마 트리톤 정도 되는 선수라면 모르긴 몰라도 비장의 한수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수는 승부를 가를 운명의 시간을 맞이했다.
진흙 파도와 돌기둥에 정신 못 차리고 압박당하던 트리톤의 마력이 순간 크게 솟구쳤다.
“아! 마력이 튑니다! 트리톤! 회심의 반격 준비!”
“드래고---온! 드래곤 브레이크! 트리톤 승부수를 띄웁니다!”
용의 숨조차 끊어 놓는다는 일격이 다시 한 번 터지자 트리톤의 주변을 둘러싼 진흙 벽이 사방으로 비산함과 동시에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진흙 해일 따위로는 어찌할 수 없는 충격파가 사방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며 오딘 팬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아, 이 집 음식 잘하네.
-일부러 쫄깃하게 운영하는거 보소?
-이번엔 ㄹㅇ루 이겼어.
-무조건이지 ㅋㅋㅋㅋㅋㅋㅋ
-트리톤이 노린 거 같은데? 스킬 범위 생각하면 블링크로도 못 피할 거리였음;;
-역시 황제···.
트리톤이 첫 번째로 드래곤 브레이크를 썼을 때, 유호영의 체력은 26퍼센트까지 떨어졌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7할이 넘는 체력을 소모시킨 셈이다.
그런 스킬을 다시 한 번 터트렸으니 오딘 팬들이 승리를 확신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불과 몇 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결과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당연히 꺼졌어야 할 유호영의 초상화 불빛이 여전히 멀쩡했다.
만약 HP가 0이 됐다면 그의 사진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불이 꺼졌어야 했다.
-뭐임?
-왜 불 안꺼져?
-안 죽었냐?
-안 죽었네!!!
-이런 시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관중은 패닉에 빠졌다.
-어떻게 살아남았냐???
-방어가 개미쳤는데;;
-아니 이렇게 갑자기 역전을 한다고?
-아니 ㅅㅂ꺼 이게 뒤집힐 게임이야?
-조작 아니야? **!!
-스타서퍼 몰아주기 또 시작이네 ㅈ망겜 밸런스.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에 오딘 팬들은 분노를 토한 반면, 스타서퍼 팬들은 익룡소릴 내며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믿고 있었다고!
-어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형 나죽어! 형 나죽어! 형 나죽어! 형 나죽어! 형 나죽어! 형 나죽어! 형 나죽어!
-암! 스타서퍼는 킹니크 원맨팀이 아니다 이 말이야.
-쓰레기 직업 버리고 오늘부터 엘마로 갈아탑니다···.
-조금 전 방어 개 소름 돋았음 ㄷㄷ;
조금 전 트리톤의 강공을 유호영은 4중실드와 두터운 흙벽으로 완벽히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유롭게 트리톤을 응시하며 날린 그의 한마디는 관중의 반응에 마침표 역할을 했다.
“한 번 당한 공격에 두 번 당하진 않아!”
-멋.있.다!
-키아아아아아!!!!!
-눈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잖아!
그리고 이어진 벼락같은 마무리 공격.
유호영은 마력 고갈로 인해 생긴 트리톤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연달아 들어오는 흙기둥의 충격에 트리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대로 토사의 바닷속으로 잠기고 말았다.
[YOU WIN!!]
-오 신이시여!!
-오딘이 이긴다고 배팅한 흑우들 없제~?
-ㄹㅇ루다가 ㅋㅋㅋ
-머리에 총 맞은 넘 아니고 누가 스타서퍼 거르고 오딘에 배팅함?
-그런 인간은 월챔 볼 자격 없지 ㅋㅋㅋㅋㅋ
-일동 일어섯!!!!!
누군가 외쳤고 그와 동시에 배틀 아레나 관중 절반이 벌떡 일어나 유호영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일반 관중뿐만이 아니었다.
VIP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프로 선수들 역시 유호영에게 찬사를 보냈다.
-미스틱! 당신은 우리에게 최고의 플레이를 선물했다!
-같은 프로 선수로서 전율이 이는 경기였다.
-미스틱은 가이아는 피지컬 만으로 하는게 아니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어.
마법사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트리톤을 그가 완벽히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마법사 유저로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였다.
*
“나이쓰!!!!!!”
“이겼다!”
유호영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 우리 팀은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팀원들의 표정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똑같았다.
이제 곧 내려올 녀석의 머리칼을 잔뜩 헝클어 놓기 전엔 멈추지 않겠단 기세였다.
그리고 잠시 뒤, 유호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우악스런 손길에 악소릴 냈다.
“올! 호영이 오늘 컨디션 살아있네!”
“오늘 경기력 죽이더라?”
“한 붠 당한 공격에 두 붠 당하진 않아.”
“야!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
“네가 했는데에~. 리플레이 보여줄까~.”
“그렇게 느끼하겐 안 했다고!”
“호영아. 잘했어!”
“형! 형 말대로 완벽한 설계였어요!”
“그래그래. 최고였어.”
한쪽 분위기가 업 되면 반대쪽은 가라앉기 마련.
이제 오딘의 벤치 분위기는 더 이상 걷잡을 수 없는 심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감독은 빌미만 주면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인데다 누구하나 트리톤을 위로해주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약물 팀이라도 그렇지 팀원간의 유대조차 없는 콩가루 팀이었을 줄이야···.
선수 경기력이 개판을 쳐서 감독이 머리 끝까지 화가 나는 건 리그 도중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티를 시합 도중엔 내지 않는 게 좋은 감독이라지만 모든 감독이 좋은 감독을 데리고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선수들조차 지고 돌아온 동료에게 괜찮아. 운이 안 좋았던 경기라며 위로 한마디 해주지 못하는 팀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진 피지컬의 우위만으로 상대방을 용케 찍어 눌렀지만 가이아는 피지컬만으로 전부 해결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팀원간의 조화, 작전, 서브 역할을 맡는 분석팀과 감독의 재량까지 모든 게 승리에 영향을 미친다.
오로지 선수 개인의 능력에만 기댄 팀은 언젠가 문제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지금 오딘이 딱 그 꼴이었다.
“벌써 라운드 두 개를 땄네. 이 기세로 3라운드도 이기면 좋을 텐데.”
다소 흥분한 분위기속에 내가 3라운드 운을 떼자 팀원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3라운드는 누가 나가는 게 좋을까.”
“아, 뭘 당연한 소릴 하고 그래. 당연히 내가 나가야지.”
먼저 칼을 빼든 건 제레미였다.
3라운드는 다시 랜덤으로 전장이 선택된다.
때문에 맵의 상성은 잠시 제쳐두고 대인전 실력이 가장 뛰어난 선수를 내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형은 쉬세요. 3라운드는 제가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
제레미의 발언에 제동을 걸고 나선 김민준.
아무래도 두 녀석 모두 조금 전 유호영의 플레이에 자극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이걸 어떡한다?
둘다 어느 팀을 가도 에이스 대접을 받을 좋은 선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차이는 존재했다.
선수로서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점수로 종합한다면 김민준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점수를 받게 될 건 분명했다.
김민준의 플레이는 이미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퍼포먼스에 거의 근접한 상태였다.
제레미 역시 이레귤러 레벨이긴 하지만 과거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민준과 나란히 하기엔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3분을 전부 쓰며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레미 쪽도 유리한 부분이 있었다.
치고 빠지는 건 암살 클래스 전문이기 때문이다.
그럼 제레미로 가자고 해야 하나?
여기서 제레미를 내자고 하면 분명 꿍할 텐데.
실력이 뛰어날수록 자존심의 높이도 같이 따라가는 게 프로게이머다.
이런 상황에서 제레미가 선발되면 민준의 마음에 스크래치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리더로서 이런 상황에 누굴 밀어주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결국 나는 결정권을 코치에게 밀어버렸다.
어차피 코치도 민준이나 제레미, 둘 중 한 명 중에 고를 테니 어느 쪽이나 큰 상관은 없었다.
“어, 어···?”
갑작스레 결정을 맡게 된 코치는 당황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눈빛으로 내가 SOS를 보냈다.
-한솔아. 평소처럼 네가···.
-안 됩니다. 오늘은 코치님이 하셔야 됩니다. 팀 분열하는 거 보고 싶으세요?
-갓 뎀.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코치는 결국 결정하지 못하고 결정권을 다시 감독에게 넘겼다.
“뭔데? 아, 둘 다 나가고 싶대?”
“예···.”
“제레미! 김민준!”
“넵!”
“넵!”
“너희 이길 자신 있어?”
“그야 당연하죠. 누가 나오던 박살낼 수 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둘 다 자신 있다는 거네. 그럼 이렇게 하자.”
턱을 쓰다듬은 박감독이 결론을 내렸다.
“제레미가 형이잖아. 3라운드는 제레미로 간다.”
“이예쓰! 역시~ 감독님.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아···.”
감독의 결정에 제레미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고 감독이 이런 식으로 결정을 내릴 줄 몰랐던 민준은 해탈한 표정이었다.
애초에 감독에게 결정권이 넘어갔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건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다.
연예계에 오래 몸담았던 그는 위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력 차이라도 많이 나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다.
박감독이 보기엔 제레미가 나이도 많을뿐더러 데뷔를 일찍 했으니 어렵게 생각할 게 없는 문제였다.
“인마. 착각하면 곤란해. 민준이도 훌륭한 선수야. 지면 알지?”
“걱정 붙들어 매십쇼. 천칭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그럴 일 없습니다.”
“괜한 말 하지 마라. 부정 탄다.”
결정을 마친 박감독은 우리를 한데 모아 손을 겹치도록 했다.
“니들도 봤지? 쟤네 벤치 지금 완전히 맛이 갔다. 그냥 초상집이야. 이 기세를 몰아서 퍼펙트 한 번 해보자!”
“옙!”
“하나, 둘, 셋!”
“스타서퍼 파이팅!”
-퍼펙트 게임으로 가버렷···!
스타서퍼 관중들은 어느새 어깨동무를 파고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파이팅 넘치는 응원, 관중의 지지까지.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제레미가 무대 위에 오른 뒤, 곧바로 3라운드 전장이 공개 됐다.
[3라운드 - 유구의 천칭]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