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의 근성 (3)
다시 태어나 프로게이머에 재도전한 이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위험한 순간은 없었으리라.
눈을 부릅뜨고 달려드는 보리스의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머리칼이 조금씩 휘날렸다.
사람이 주먹을 휘두르는데 머리칼이 잘린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해하겠는가?
저 공격을 정통으로 맞는다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뒤따를 것이란 소리다.
내가 지금까지 상대 선수들에게 해왔던 행동이지만 당하는 입장이 되니 여간 살벌한 게 아니었다.
이게 이렇게나 무서운 거였군···.
주고받는 공방으로 발생한 풍압은 음울한 소릴 내며 주변을 흔들었다.
“위기! 위기입니다! 유니크가 처음으로 수세에 몰렸습니다!”
-오 안돼···.
-피해! 피하라고!
-유니크 너마저 지면 스타서퍼는 끝장이야!
-하느님 제발!
뿌득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분명한 피해가 체력 바에 발생했다.
갓 뎀!
막는다고 막았는데 왼팔의 느낌이 이상했다.
뼛속을 울리는 게 꼭 진짜로 부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가이아엔 고통을 실현하는 시스템이 구현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골절상까지 재현하는 기능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충격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 계열 스킬을 얻었나?
무도가의 스킬 중엔 내력을 이용해 상대의 뼛속부터 박살내는 무서운 스킬들도 존재했다.
다만 그런 스킬이 등장하기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
기억대로라면 내가중수법은 최소 2년은 더 지나야 등장할 테지만 이미 많은 게 바뀌어 버린지라 단언할 순 없었다.
만약 저게 내가중수법이면 맞딜에서 내가 불리해.
교룡뇌조로 치명타를 때려 녀석을 일격에 기절시키지 않는 이상 이 데미지 교환은 내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운룡비형을 쓰며 거릴 벌리자 보리스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나는 내 사거리로 놈을 끌어들이며 열양지와 항마장으로 반격에 나섰다.
장대비가 지면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 얄팍한 소리는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맞췄다면 더 묵직한 소리가 났을 터였다.
그리고 불현 듯 날아드는 반격, 이번 공방 역시 나의 손해였다.
일방적인 체력 교환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보리스의 표정이 차츰 펴지기 시작했다.
나와 처음 손을 섞을 때 녀석의 표정이 악귀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띄는, 여유를 지닌 모습이었다.
게임을 완전히 잡았다고 여기는 모습이었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넣고 있는데다 체력도 앞서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린 아니었다.
하지만 진정한 프로라면 월드챔피언십 무대, 그것도 결승에서 저런 여유를 부리진 않았을 거다.
가이아를 막론하고 결과가 나기 전까진 승패를 알 수 없는 게 이 바닥 룰이니까.
승부수를 띄울 때가 왔군.
*
-유니크도 오딘한텐 안 되네.
-시대가 변했어. 이젠 유럽이 주도하는 질서를 맛볼 차례다.
-유럽이 주도하는 질서 ㄴㄴ. 오딘이 주도하는 질서 ㅇㅇ.
-ㅋㅋㅋㅋㅋ 그게 맞지. 유럽 팀 중에 오딘 같은 팀 오딘 말곤 하나도 없음.
-아 세월이 야속하다. 유니크 형님 전성기 시절엔 이런 일이 없었는데!
-ㅋㅋㅋㅋㅋ 유니크 나이가 몇인데 뭔 전성기 타령임. 그냥 실력으로 개발린건데?
-여물어라 애송이들···.
“유니크 계속해서 체력이 밀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어요. 유니크의 데뷔 이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패배하게 되는 걸까요?”
“결과는 끝나기 전까지 속단할 수 없지만 이런 그림이 이어진다면 뒤집기 힘들어 보이는 건 확실합니다. 그리고 만약 유니크가 패한다면···. 오늘 스타서퍼는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힘들겠죠.”
“말씀드리는 순간! 쐐기를 박으려는 보리스의 맹타!”
‘뭐야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잖아?’
연신 공방을 주고받던 보리스의 입가엔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도핑의 위력은 확실했다.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정상을 놓쳐본 적 없는 최강의 선수.
유니크를 상대로도 밀리지 않고 있었으니까.
처음 가이아를 시작했을 때 보리스는 유니크를 동경했다.
아마 무도가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킹 오브 몬스터.
가이아 리그를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전설적인 선수 아닌가.
지금 양상을 봐도 그랬다.
피지컬이 밀리는 가운데서도 유니크의 디펜딩 능력은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강렬한 연타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근성은 경의를 표할만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보리스는 승부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그간 유니크에게 쏟아진 모든 관심과 화려한 조명을 뺏어오고 싶은 강렬한 충동.
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유니크를 꺾는다면 자신은 새로운 절대자가 되는 셈이었다.
‘이제 그만 버티고 편히 쉬라고!’
내력이 폭발하며 공격을 펼치던 그 순간, 보리스는 유니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는 체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이지만 유니크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발악하기는···.’
필살의 내가중수법으로 쐐기를 박으려는데 투두두- 하는 소리와 함께 유니크의 소매가 불을 뿜었다.
마법사도 아니고 대체 무도가가 불을 뿜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흠!”
처음으로 보리스의 몸이 굳으며 팔이 매섭게 움직였다.
유니크의 소매에서 튄 불꽃의 정체는 암기였다.
‘어디 이따위 잡기를!’
암기.
암살계 직업의 주력 무기 중 하나지만 프로리그에선 볼 수 없는 장비였다.
스탯이 고만고만한 초보 시절엔 충분히 위력적인 무기지만 캐릭터 육성이 끝나는 후반부엔 독에 대한 내성도 강해지고 위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포격사의 라이플 공격도 막아내는 판에 암기의 위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보리스는 다른 톱클래스 무도가와 마찬가지로 독에 대한 내성을 충분히 갖춘 상태였다.
그러나 유니크는 반드시 공격을 적중시키겠다는 듯 우직하게 암기를 쏘아냈다.
강침으로 된 암기가 비처럼 쏟아져 보리스의 시야를 덮었다.
그리고 장력을 방출하며 암기를 튕겨내는 틈을 번개가 파고들었다.
유니크의 트레이드마크인 교룡뇌조였다.
보리스는 공격을 피하는 대신 맞받아치는 쪽을 택했다.
콰르릉-!
굉음이 지나간 자리,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유니크가 피를 토하며 연신 뒷걸음질 쳤다.
보리스도 편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유니크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와아아아아!!!!!!
-씨바아아아아!
-됐다! 됐어!
-죽여버려!
-드디어 저 괴물놈이 뒈지는 걸 보는구나 ㅋㅋㅋㅋ
일그러진 얼굴로 수세에 몰린 유니크.
프로리그에선 단연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가 고통에 이를 악무는 모습은 스타서퍼 팬들에겐 충격을, 오딘 팬들에겐 광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대로 승패가 결정된다면 오딘의 시대가 열리리란 걸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뭐해 보리스! 빨리 들어가!
-한방 남겨놓고 휴식시간 왜 주는 거임?
-빨리 끝내! 빨리 끝내! 빨리 끝내! 빨리 끝내! 빨리 끝내!
승리가 분명 코앞에 있었다.
상처입고 비틀거리는 괴물의 왕.
팬들은 머뭇거리는 보리스를 연신 재촉했다.
하지만 보리스는 손끝을 꼼지락거릴 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저래?
-똥마려워졌어?
-그게 아니야 멍청이들아.
-그게 아니면 뭔데.
-1인칭 시점으로 봐봐!
-1인칭?
보리스의 시점으로 관전하라는 얘기가 배틀아레나에 퍼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의 분위기가 잦아들었다.
-왐마. 눈빛 보소 ㄷㄷ
-독기 바짝 올랐누;
-빨리 마무리 하라고 한 얘기 취소다. 지금 들어가면 물린다 ㄹㅇ루다가.
-이게 사람이야 독사야···.
-프로는 눈빛부터 다르네;;
선수의 시선이 되어 경기를 지켜보는 오딘 팬들은 공격을 망설이던 보리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리스를 노려보는 유니크의 눈빛은 경기를 포기한 선수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맹수를 연상케 하는 강렬한 눈빛.
오딘의 팬들은 보리스의 시야를 빌린 것일 뿐, 직접 유니크와 마주한 것이 아님에도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 천천히 해.
-어차피 게임 거의 잡았어. 남은 시간은 1분도 안 돼.
-그냥 이대로 말려죽이자!
-말려 죽여! 리스크 감수할 필요 없어.
-안전빵 하는 것도 프로의 덕목 중 하나임 ㅎㅎ;
오딘 팬들은 유니크의 의지를 확인하고선 삽시간에 태세를 전환했고 보리스는 유니크 주변을 천천히 배회하며 경기가 종료되기만을 기다렸다.
59초.
47초.
35초.
시간이 점차 줄어들며 잠시 숨죽이던 관중들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다.
유니크의 불패신화가 곧 깨질 판이었다.
“20초 남았군.”
보리스가 유니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가이아 프로리그는 선수 간에 쓸데없는 감정싸움이 이는 것을 막기 위해 소리를 차단하도록 되어 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지 상대가 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굴은 그대로 보이기 때문에 간단한 대화 정도라면 입모양을 통해 유추하는 게 가능했다.
“다 끝난 거 같은데 서로 힘 빼지 말고 가자고.”
“···누구 마음대로?”
“네가 톱클래스 선수인건 인정하지.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승패를 뒤집을 순 없어.”
남은 시간은 겨우 15초.
이젠 유니크가 아니라 게임의 신이 온다 할지라도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체력 차이는 무려 두 배.
더블 스코어를 뒤집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나도 짧았다.
“좋은 승부였다.”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괴물을 상대로 한 승리.
전율을 느끼며 한껏 승리의 미소를 지으려던 그 순간 보리스는 한기를 느꼈다.
승리가 바로 코앞인데 대체 웬 한기란 말인가.
원인은 신체였다.
미소를 지으려는데 입꼬리에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딱딱한 나무토막이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저도 모르게 욕이 치미는데 더 급한 건 눈앞까지 다가온 유니크의 주먹이었다.
끝나기 전까진 방심하지 말라고, 안 배웠어?
눈빛으로 그리 말한 유니크는 세상에서 가장 매서운 공격을 쏟아냈다.
그야말로 상대를 죽일 기세로 쏟아낸 공격.
샌드백 신세의 보리스에겐 너무나도 끔찍한 충격이었다.
한참이나 앞서 있던 체력 바는 어느새 초록에서 노랑으로, 순식간에 레드존을 향해 치달았다.
완벽하게 압도했던 경기였다.
그런데 갑자기 마비라니.
불현듯 아까 피부에 스쳤던 암기가 떠올랐다.
이런 맹독이 존재한다는 보고는 받은 바 없지만 가능성이라면 그것뿐이었다.
‘씨팔.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보리스는 말을 듣지 않는 신체를 일깨우기 위해 혀를 깨물며 발악했다.
눈은 충혈 되고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이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번 떠나간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보리스의 체력 바가 산산조각 난 순간, 유니크는 데뷔 후 처음으로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이 소릴 지르고 있었다.
“세상에! 유니크가 경기를 역전합니다!”
“이 어려운 걸 유니크가! 에이스가 해냅니다! 오딘에겐 월드챔피언십 진출 이후 처음 겪는 라운드 패배! 스타서퍼에겐 꼭 필요했던 1승입니다!”
-우와아아아악-!!!
-ㅅㅂ 이겼다아아아아아!
-ㅅㅂ 욕 아님. 속보 줄임말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걸 이긴다고?
-믿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믿고 있었다고!
-속보) 보리스 선 채로 죽음.
-소리 벗고 팬티 질러!
-대가리 딱 대! 대가리 딱 대! 대가리 딱 대! 대가리 딱 대!
-좋은 승부였다 ㅋㅋㅋ
-ㅋㅋㅋㅋㅋ 진짜로 좋은 승부였다.
-아 ㅋㅋㅋ 입 털다가 지는 거 실화냐고.
-디펜딩 챔피언 가즈아ㅏㅏㅏ
믿을 수 없는 역전승.
선수들도 팬들만큼이나 흥분해 있었다.
유니크가 무대를 내려오는 그 짧은 틈을 참지 못하고 우르르 달려든 스타서퍼 선수들은 리더를 두들기며 뛰어다녔다.
“끼에에에엑!”
“역시 에이스!”
“우리 형! 우리 형! 우리 형!”
“야 이! 아파! 그만 해! 괴물 소린 누가 내는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초상집 분위기였던 팬들과 선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승리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날뛰는 선수들을 제어하는 건 코치의 몫, 장승표 코치는 선수들을 다독이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얘들아!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진정하고 다음 라운드 준비하자!”
“옙!!!”
“크흠. 한솔아. 수고 많았다!”
유니크는 활짝 웃는 한편 고갤 돌려 오딘 쪽 벤치를 바라봤다.
패배를 예상치 못했던 걸까.
감독은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괴성을 터트렸고 나머지 선수들도 잔뜩 움츠러든 분위기였다.
팀이 말리는 상황일수록 감독과 코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선수의 멘탈을 케어할 의무가 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패배한 선수를 질책하는 건 감독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간단한 기본조차 무시하는 팀이 이끄는 팀이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을 떠올리자 들떠있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두고 봐. 우리가 니들 따위에게 무너지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