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163화 (160/170)

팀 게임 (4)

약 1년 전쯤, 프로게이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스킬을 극한으로 갈고 닦으면 시스템에선 잡아낼 수 없는 능력치가 추가 부여된다.

스킬을 단련하다 깨달음을 얻으면 인게임 내에선 확인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해 그 위력을 조금 더 높여준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공식 입장으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허나 여전히 적지 않은 선수들이 자신이 벽을 넘는 순간을 직접 경험했다 말하곤 했다.

“내 집중력이 스킬의 백퍼센트, 그 이상을 끌어내더라니까?”

이런 이야기가 선수들 사이에 돌때면 대개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한쪽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정치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밤낮으로 연습하는 부류.

또 한쪽은 그저 집중력이 극한에 다다랐기에 느꼈던 착각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부류.

데니스는 이 두 부류 중 후자에 속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S.솔리드가 어떤 곳인가.

지금은 비록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한 때 세계대회를 우승했으며 의심할 여지없는 북미 최고의 팀이다.

‘만약 그런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우리 팀 선수들 전원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고로 스킬에 숨겨진 힘이 존재한다는 소문은 거짓이다.’

이것이 데니스가 소문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지금.

코앞에서 엠퍼러가 뿜어낸 검기의 위력은 그 소문을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렬했다.

쐐액하고 바람 가르는 소릴 내며 날아드는 푸른 검기는 보고 있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본능이 상대의 공격을 흘리라고 소리쳤지만 데니스는 끝내 방패를 세우고 버티기로 했다.

피하고자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뒤에 있는 아군이 쓸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 검기에 휩쓸리고도 무사할 사람은 아마 자신 외에는 없을 테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으윽···!”

신음과 동시에 터지는 방패 위로의 충격.

방패를 빗겨나간 검기는 그대로 뒤쪽 사선으로 이어져 건물을 발겨놨다.

그야말로 미친 위력.

공방 밸런스를 두루 잡는 아크나이트의 공격력이 이렇게나 뛰어나다면 누가 공격 위주 클래스를 하겠는가.

그만큼 지금 엠퍼러의 손에서 뿜어진 공격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집중해!”

압도적 위력에 놀라는 것도 잠시, 팀을 조율하는 위치에 있던 케빈이 소리쳤다.

생각지도 못한 위력에 아주 잠깐 반응이 느려진 사이 괴물이 접근하고 있었다.

엠퍼러의 검이 머리 위로부터 떨어져 수직으로 쇄도하자 데니스는 다급히 방패를 붙잡았다.

가공할 위력의 검기에 직격당하면 실드나이트라도 버틸 수 없었다.

그러나 엠퍼러의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고 엉뚱한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Fuck!"

가벼운 동작으로 데니스를 속여 넘긴 엠퍼러의 타깃은 그 뒤에 있던 제리였다.

제리는 다급히 마력 방벽을 전개, 방어에 나섰지만 날 선 엠퍼러의 공격을 받아내기엔 부족했다.

본래 아크위자드는 방어보단 공격에 특화된 클래스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도질당한 제리의 체력 바를 보호하기 위해 솔리드 힐러의 스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엠퍼러! 무려 다섯 명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게 같은 인간의 플레이 맞냐?

-엠퍼러! 그는 정말 신이야!

-신이시여. 왜 저런 자식을 북미엔 보내주지 않으셨습니까.

-당황하지 마라! 상대는 고작 한 명이야! 프로씬에서 5:1은 불가능해!

-불가능? 킹한솔에게 불가능은 없다.

*

흐름이 좋다.

게임을 하다 보면 일 년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그런 날이 있다.

무얼 해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날.

생각한 대로 모든 플레이가 이뤄지는, 컨디션이 최고조에 다다른 날 말이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고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갔다.

팀의 이번 라운드 작전은 간단했다.

버프를 둘러친 내가 전속 전진, 상대 팀이 버프 공략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두고 이어서 팀이 합류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임엔 틀림없었다.

전판에 우리가 밀린 이유는 상대가 버프를 컨트롤 할 것이란 사실을 읽지 못해서였으니까.

버프 컨트롤을 방해하는데 성공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비벼볼만한 싸움이었다.

다만 이 작전엔 한 가지 문제가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생존 유무였다.

1대 5의 전투.

S.솔리드는 어디 뜨내기를 모아놓은 3류 팀이 아니다.

한 때 나와 함께 세계를 제패했던 일류 팀.

멤버 구성이 그때와 조금 바뀌긴 했지만 이번 라운드엔 과거의 영광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웠던 데니스, 제리, 케빈이 모두 활약 중이었다.

‘상대의 버프 획득을 방해해도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기에 더 달려들고 싶었지만 이쯤에서 만족하고 옆 건물의 1층 창으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나를 맞히지 못한 포격사의 공격이 창밖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으리라.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반대편을 향해 뛰었다.

깨진 창문 틈으로 푸른 화염구 수십 발이 날아들었다.

건물이 무너질 듯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기껏 상대의 발을 묶어놓고 건물에 깔려죽는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반대편으로 쭉 내달려 방패로 벽을 부수고 탈출하자 뒤쪽에서 추격의 발소리가 들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이곳에서 제거하겠다는 솔리드의 속내가 느껴졌다.

건물 안으로 들어왔나?

발소리로 미루어보아 최소 한두 명은 건물 안으로 뒤따라 들어온 것 같았다.

이게 되려나.

전생까지 통틀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

나는 검에 마력을 잔뜩 주입해 일도양단의 기세로 건물을 갈랐다.

파각-!

전설급스킬 용의 서리가 휘둘러지자 검이 울음을 토했다.

검기가 관통한 사선에서 먼지가 뿜어져 나오더니 굉음이 나기 시작했다.

건물 붕괴였다.

내가 직접 했지만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허미 ㄷㄷㄷㄷㄷ

-이건 말이 안되는데;

-저런 미친 새끼!

-대체 무슨 스킬임?

-마법사도 아니고 탱커가 건물을 부순다고?

-아크나이트는 이제 탱커가 아니라 딜러입니다 ^^;

-개새끼들! 밸런스 조절 이따위로 할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제리 죽었다.

-내 평생 제일 잘한 일은 정한솔의 팬이 된 것이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이 들어와 있던 제리의 초상화가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 말인즉 조금 전 붕괴로 제리가 깔려죽었단 뜻이다.

나도 모르게 검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1대 5의 싸움에서 상대의 주력 딜러를 끊어냈으니 흥분이 고조되는 건 당연했다.

상대도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추격의 발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갑작스레 제리가 끊긴 상황에서 섣불리 추격하다간 같은 신세가 될 수 있겠다 생각했을 터다.

나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한 번 호흡을 다잡았다.

아직 압도적인 유리를 점한 건 아니었다.

제리의 초상화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케빈의 클래스는 비숍, 그리고 비숍의 주력기는 바로 부활 아닌가.

깔려죽었던 제리가 다시 살아났으니 더 욕심을 부리다 손해를 볼 수 있었다.

아직 내가 죽지 않았고 저쪽은 비상수단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이 빠진 상황.

이 정도만 해도 기대 이상의 이득이었다.

조심스레 다른 건물로 몸을 피하는데 머릿속에 강렬한 영상이 피어올랐다.

“윽!”

어지러움 속에서 날아든 한줄기 빛살.

그것이 내 이마를 뚫고 지나가 내 몸뚱이를 벌렁 쓰러트리는 광경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유성철의 능력이 발동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땅을 구르듯 그자릴 피했고 뒤이어 날아든 공격이 내 머리가 있던 곳을 꿰뚫었다.

머릿속에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날아든 현실의 공격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단 점이었다.

공격이 투명해?

포격사의 공격이 날아들었음을 건물과 엄폐물이 박살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초장거리 투명 저격이라니.

S.솔리드가 준비해온 필살기가 틀림없었다.

-방금 스킬 옆에 투명이라고 붙어있던 거 아님? 그런 거 같은데?

-맞음. 우리 눈엔 이펙트가 보이지만 엠퍼러 눈엔 안보였단 거임.

-거짓말 하지마;; 안 보이는 걸 어떻게 피해?

-엠퍼러···그는 신이야!

-이제 S.솔리드는 완벽하게 불리해졌다. 조금 전 공격에 투자한 마력이 극심하고 부활도 없거든.

-이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엠퍼러는 초능력자였던 게 틀림없다!

-ㅋㅋㅋㅋㅋ 아 진심 개소리인데 개소리말곤 설명이 안 되는 게 레전드다!

프로게이머 뿐만 아니라 모든 승부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격언이 있다.

끝내야 할 때 끝내지 못하면 반드시 화를 입는다.

기회가 왔을 때 승부에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상대에게 기회가 넘어간다는 뜻이다.

조금 전 공격을 회피하는 데 성공함으로 이번 라운드의 흐름이 우리에게로 완벽하게 넘어왔다.

팀전에서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할 필욘 없다.

충분히 시간을 끌자 어느새 달려온 팀원들이 S.솔리드 본대를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조졌다 조졌어;

-정한솔!!! 끝까지 우리 앞길을 막는구나!

-억울하다아아앗!

모든 준비 조건이 갖추어지자 난 망설임 없이 전력질주, S.솔리드에게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팀원들이 함께하니 더는 눈치볼 필요가 없었다.

앞뒤로 공격을 당하는 S.솔리드의 손발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었고 보옥결계검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파괴적 한타의 시작이었다.

“엠퍼러! 그간의 게임은 힘을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기 엠퍼러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경기장이 온통 그의 이름으로 물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월드챔피언십을 시청하는 수억 시청자들의 눈과 귀가 내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엠퍼러!! 그가 마침내 이번 승부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

[이변은 없었다. 스타서퍼, S.솔리드를 꺾고 결승 진출.]

[끝을 모르고 성장하는 전설! 준결승전 엠퍼러의 믿기 힘든 기록들.]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경기를 지배한 스타서퍼의 에이스 엠퍼러.]

[음양사 나이트버드. 스타서퍼의 차기 에이스로 급부상하는 이 선수를 주목하라!]

[스타서퍼, 약점으로 지적 받던 힐러라인마저 궤도에 오르다!]

“정말 잘했다! 정말 잘했어!”

경기 직후, 감독과 코치는 우리들을 한데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

마지막 라운드는 모든 게 우리의 작전대로 들어맞았다.

인터넷은 온통 우리 기사로 도배되었으며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의 모든 선수가 재조명받을 정도로 엄청난 관심이 쏟아졌다.

웬만해선 흥분하지 않는 서대표도 좋은 티를 숨기지 않으며 우리에게 두둑한 보너스를 약속했다.

사실 우리 팀은 목표가 우승이었기에 준결승 승리 이후 이런 확언이 살짝 이상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이번 경기가 모두에게 자극이 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만큼 세계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이 기세가 결승전까지 이어진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 흥분을 단숨에 잠재워버리는 일이 뒤이어 터졌다.

팀 오딘과 알나스르의 준결승전.

스타서퍼와 S.솔리드의 준결승과 비교하면 살짝 주목도가 떨어지는 점은 있으나 그 관심이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가이아가 명실상부 세계 최고 게임이 된 후로 단 한 번도 1위를 한 적이 없던 유럽에서 처음으로 주연의 자질을 타고난 팀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딘이 우리 유럽을 세계의 주류로 만들어줄 것이다!

-기존 유럽 팀들과 오딘은 레벨이 다르거든.

유럽 팬들이 오딘에게 보내는 환호는 일방적.

S.솔리드가 떨어져 구심점을 잃은 북미 팬들 일부까지 가세하여 배틀아레나의 응원 양상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물론 알나스르의 기둥인 이세준이나 더원이 이런 편파응원에 휘둘릴 급은 아니었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사정이 달랐다.

두 에이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팀원들은 대부분이 올해 첫 세계 대회를 겪는 신인이었다.

게임할 땐 응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해도 무대를 내려올 때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일방적 응원을 겪어보면 절로 몸이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알나스르, 살짝 고전하겠는데.”

물론 알나스르가 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세준이나 더원 모두 과거의 나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만한 재능을 타고난 천재 프로게이머.

그리고 백은하는 한국을 능히 세계 챔피언으로 만들 수 있을만한 지략을 갖춘 코치였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치러진 사전 조사에서 한국 프로 팀들은 전부 알나스르의 손을 들었다.

다들 최근까지 더원과 이세준에게 먼지나게 맞아본 선수들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오딘은 아직 진짜 강함 팀을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물론 인기를 끌만한 실력을 갖춘 건 사실입니다만 그 힘이 세계 정상급 팀에게도 적용된다고 장담할 순 없지요.”

“더원이나 이세준 모두 세계 정상급 팀의 에이스에 어울리는 선수입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아시아에서 리그를 유지하는 국가들도 조심스레 알나스르의 손을 들었다.

양대륙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가운데 시작된 1라운드.

알나스르가 내민 카드는 이세준.

공교롭게도 오딘의 카드 또한 무도가였다.

지금껏 이세준은 같은 클래스 대결에서 나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선수였다.

당연히 이세준이 이길 거로 생각하며 시청한 1라운드.

유럽 팬들의 폭발적 응원과 함께 시작된 경기는 곧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보리스! 이세준을 철저하게 몰아붙입니다!”

“이세준 선수 얼굴을 보세요. 지금 이 시합이 얼마나 어려운지가 엿보입니다.”

번뜩이는 주먹에 얻어맞은 이세준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고통이 드러났다.

생각지도 않았던 그의 위기에 한국 팬들은 물론이고 나조차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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