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게임 (2)
수십만 관중이 모인 배틀아레나에서 내 승리를 의심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월드챔피언십은 가이아 오픈 4년차 시즌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대회.
내가 벌써 다시 태어나 새롭게 프로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4년에 달하는 시간이 흘렀다.
4년.
전성기가 비교적 짧은 e스포츠 특성상 절대 짧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여전히 개인전 무패를 유지중이었다.
팀전에서 미끄러진 적은 있지만 그마저도 팀원들의 잘못이지 내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긴 어려웠다.
자만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유니크는 매번 이기기만 하니까 재미가 없어.
-아닌데? 맨날 이겨서 좋은 건데?
-내버려 둬. 패배자들이 뭘 알겠어.
-난 유니크 은퇴할 때까지 무패로 은퇴하면 좋겠음.
-솔직히 이기고 지고 하는 평범한 선수였으면 지금처럼 빨릴거 같음?
-유니크···그는 신이야!
-우린 지금 킹니크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관중들이 쏟아내는 압도적 칭찬을 슬쩍 살피며 다음 라운드 작전토론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맵이···.”
“십만대산!”
십만대산이란 글자가 대형스크린에 뜨는 순간 우리 벤치와 관중석이 하나가 되어 포효했다.
뾰족하며 발을 딛기 어려운 괴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이 맵은 예로부터 탱커의 무덤이었다.
아무래도 민첩성이 떨어지는 탱커는 움직임에 큰 제약을 받는 맵, 때문에 나설 수 있는 직업이 마법사와 암살자뿐인데 상성을 고려하면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이 거의 암살자로 한정되는 형태였다.
그리고 스타서퍼와 S.솔리드 사이의 암살계 클래스 차이는 제법 격차가 있는 편이었다.
오늘은 내가 아크나이트를 들고 나왔지만 우리 팀엔 나뿐만 아니라 제레미라는 걸출한 무도가가 또 있지 않은가.
팀원들 중 나와 제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제레미는 자기 역량 한도 내에서 나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공격과 방어, 스킬의 딜레이 관리, 상대가 주로 쓸 수 있는 스킬 예측하기, 강도 높은 체력 훈련까지.
내 곁에서 모든 걸 쪽쪽 빨아들인 제레미는 적어도 가이아 내에선 인간병기나 다름없었다.
다수의 환호는 바로 그런 점에서 기인했다.
S.솔리드 팬들마저 이 매치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응이었다.
-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시펄. 여기서 십만대산이 뜬다고? 하필 맵공개인 2라운드에서?
-운도 실력이야 ㅋㅋㅋㅋㅋㅋ
-오늘부터 스타서퍼 팬 하세요 ^^;;
-스타서퍼 팬을 하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다. 모름?
-여기서 왜 대산이 나오냐고. 아;;
스타서퍼를 외치는 압도적 응원 속에 S.솔리드는 스페셜을 내보냈다.
스페셜은 나와 제레미가 떠난 이후 영입된 무도가로 그 재능이 북미에선 알아주는 친구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북미 한정이었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제레미의 발이 괴석을 구름 밟듯 하더니 삽시간에 양측의 거리가 좁혀들었다.
빠르다 빨라.
제레미의 대승보는 내가 지닌 운룡비형에 비해 속도는 조금 쳐졌지만 묵직한 맛이 있는 스킬이었다.
빨리 움직이는 게 미덕인 암살자가 묵직한 맛이 있으면 그게 뭐가 좋으냐고 할지 모르지만 대승보는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일단 상대 동작 방해에 대해 좀 더 저항력이 강한 편이며 공격형 스킬과 연계할 때 파괴력이 좀 더 붙는 걸출한 장점이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제레미의 주먹에서 뿜어진 장력이 바위를 터트리며 공격의 시작을 알렸다.
-살벌하네;
-맞으면 간다!
-많이도 필요 없다. 한대만!
제레미는 의도적으로 더 화려한 공격을 퍼부었다.
상대의 집중을 흐트러트리려는 속셈이 밑바닥에 깔린 움직임이었다.
사방에서 바위 파편이 날아다니는데다 스치면 체력이 소모될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스페셜의 시선이 좌우로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용...용각! 제레미의 날카로운 용각!”
“스페셜 선수! 얼굴이 일그러집니다!”
용각.
이름 그대로 용이 발길질하듯 강력한 발차기 스킬.
용의 충격과 비교하면 살짝 느린 게 흠이지만 바위로 시야가 어지러운 상태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세준이었다면 제레미의 용각을 피하거나 흘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스페셜은 아직 그 레벨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컥!”
묵직하게 옆구리에 틀어박힌 용각에 스페셜의 눈이 부릅떠졌다.
엄청난 격통.
아무리 프로 선수래도 내가 실제 맞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하는 이 고통은 익숙해지기 쉽지 않았다.
기계가 아닌 이상에야 고통이 몸을 때리면 몸이 굳기 마련, 스타서퍼 선수들은 이 찰나의 시간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알았다.
왜냐고? 많이 맞아봤으니까.
게다가 나한테 당해본 횟수로 따지면 제레미는 인간샌드백 달인이었다.
제레미는 그간의 설움을 이 자리에서 풀려는 듯 무자비한 페이스로 스페셜의 전신을 난타했다.
-저, 저런 병신새끼!
-야 이 개새끼야! 뒤로 빠져! 빠지라고!
-아오! 저딴 놈도 프로라고;;
경기를 직관하는 팬들은 심한 욕설을 할 경우 언어소통에 제약을 받고 더 심한 경우엔 퇴장을 당하기도 한다.
비싼 돈 내고 와서 블라인드 당하기 싫으면 매너준수는 기본이다.
그럼에도 솔리드 팬들은 욕을 참지 못했다.
평정심을 지키기엔 스페셜의 대응이 너무 무기력했다.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은 스페셜은 끝내 페이스를 되찾지 못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경기.
S.솔리드의 준결승 진출이 멀어지고 있었다.
*
스크림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우리 팀은 확실히 개인전에선 유리를 점했다.
제레미에 이어 유성철까지 한판을 따내며 우린 솔리드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다만 셧아웃까진 무리였다.
아쉽게도 4라운드에서 게임을 내주며 3:1의 스코어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정도만 해도 이미 충분한 격차였다.
월드챔피언십이란 큰 무대와 3:1이란 스코어.
강심장을 지닌 선수들도 실수를 할법한 상황이다.
관중들 대다수가 우리의 준결승 진출을 예상하는 상황.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끝날 것만 같지 않았다.
무대 너머 솔리드 벤치에 아직 여유가 흐르는 것이 그 근거였다.
“우리에겐 기회가 많이 남았고! 저쪽은 한 번 뿐이다. 일단은 정석 조합으로 탐색전을 펼치자.”
내가 상대 팀을 살피는 사이, 장코치는 힐러 둘을 필두로 한 정석조합을 추진했고 모두가 고갤 끄덕였다.
민우진이 팀전 주요 포인트에서 헤매는 건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지만 마땅히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팀이 무능해서 그간 대비책을 만들지 못한 게 아니었다.
스타서퍼의 클래스 풀을 생각하면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조합이 정석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신인을 영입한다면 변화를 꾀해볼 수 있겠으나 대회 도중인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슨 카드를 준비했는지 볼까.
환영도시에서 시작된 5라운드, 우린 전속력으로 중앙 거점을 향해 달렸다.
최근 연이은 오브젝트 몬스터의 강화 패치로 인해 세계의 흐름은 리스크를 지고 오브젝트를 사냥하기보다 거점을 공략하는 전략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부턴 주의하면서 가자.”
S.솔리드의 마법사 전력은 결코 무시하기 힘든 수준.
김민준이나 유호영이야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지만 제리와 마이클, 콜린으로 이어지는 라인도 만만찮았다.
게다가 과거 레전드크루에게 당했던 기억이 인상 깊었는지 포격사에게 라이플을 들려 대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온갖 버프를 받아 강화된 탄환이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날아온다고 생각해보라.
주먹으로 맞아도 아픈데 탄환에 저격당하면 게임 승패를 떠나 상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진다.
백은하가 붐을 일으킨 뒤로 포격사를 위시한 조합은 메이저 대열에까진 들지 못했어도 종종 팀전에서 나오는 전략이었다.
특히나 5인 체제가 된 이후로는 그 위력이 더욱 강해져 한 번만 공격이 들어가면 상대 하나를 끝장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우린 건물을 방패삼아 조심스레 거릴 좁혀나갔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팀원을 잃으면 승부가 크게 기울기에 다소 답답한 전진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전장엔 S.솔리드가 먼저 거점을 점령했단 메시지가 울렸다.
“전방 150미터 이내 이상 무.”
“이제 뛰자.”
유호영이 마력 스캔으로 전방을 탐색, 내가 방패에 마력을 불어넣음으로서 뛸 준비를 마쳤다.
남은 거린 200미터.
이 정도면 방어스킬을 앞세워 단숨에 거점까지 치고 들어갈 수 있었다.
“Go!"
대열을 맞춰 다인스킬에 몸을 맡기자 순풍이 등을 밀기 시작했다.
경쾌한 발걸음도 잠시, 거점이 눈에 들어오자 뭔가 이상하단 점을 눈치 챈 팀원들이 소리쳤다.
“어?”
“왜 아무도 없지?”
팀원들의 당황함을 뒤로 하고 나는 재빨리 한 걸음 더 치고 나가 거점에 올라섰다.
저격이 날아들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열을 깨는 건 위험천만한 행동이지만 어쩐지 매복은 없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점 주변엔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엔 그저 솔리드가 점령하고 남겨둔 발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뭐지?”
“이거 아무래도 당한 것 같은데.”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아차렸다.
S.솔리드는 작년에 우리가 써먹었던 전법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다.
“오브젝트 쪽으로 간 거 같아.”
“뭐?”
“오브젝트 러시는 요즘 메타가 아닌데요.”
“게다가 스크림 때 우리한테는 한 번도 오브젝트 러시 건 적이 없는데.”
스크림 당시 모든 패를 선보이며 작전을 점검한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숨겨뒀던 수가 있던 모양이다.
그 순간, 미미한 진동이 우리의 발아래를 스쳤다.
맙소사.
진원의 방향이 서쪽이었다.
서쪽은 자이언트 가디언이 있는 방향.
오우거로드에 비해 한층 더 공략하기 까다로운 난적 중의 난적.
공략이 어려운만큼 그 보상도 훨씬 강력했는데 자이언트 가디언의 공략 보상은 다름 아닌 게임 중 인원을 늘려주는 것이었다.
벤치에서 대기중인 인원이 쑥 하고 게임에 들어오는 말도 안 되는 보상이다.
“자이언트 가디언을 잡고 있다고?”
“뛰어!”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뛰자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가디언은 정말 극단적인 리스크를 진다.
잡기도 어렵지만 혹시나 잡아낸다면 6대 5게임이 만들어진다.
다인스킬의 등장 이후 팀전은 단 한 명의 차이만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왔다.
안 그래도 마법사 라인이 강한 S.솔리드에 추가 인원이 벤치에서 소환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거 불쾌해! 불쾌하다고!”
뒤를 쫓아오던 밀러는 연신 불쾌하다고 외쳤다.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진동은 강해졌고 마침내 도착했을 때 도시가 흔들리며 자이언트 가디언이 쓰러졌음을 알렸다.
[S.솔리드가 자이언트 가디언을 처치했습니다.]
갓 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가디언의 거대한 시체가 쓰러짐과 동시에 하늘에서 하얀 빛기둥이 뿜어졌다.
S.솔리드의 인원이 추가 되는 순간이었다.
“졌다···.”
밀러의 맥 빠진 목소리에 난 다급히 외쳤다.
“아직 게임 안 끝났어! 집중해!”
일말의 역전 가능성을 떠올리고 집중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
설령 이번 판을 진다하더라도 우리에겐 아직 6라운드, 7라운드로 이어지는 기회가 남아있었고 그 때 기회를 잡으려면 지금 이 순간, 더 많은 정보를 체력 바가 털리기 전에 모아야 했다.
상대의 장비 세팅은 어떤지, 어떤 조합으로 맵을 공략했는지, 알아낼 수 있는 걸 전부 기록해야 했다.
나는 호영이에게 다시 한 번 상대측 탐색을 주문했다.
“상대조합 확인했어?”
“실드 하나, 엘마, 포격사, 비숍하고 팔라딘이요.”
“추가인원은?”
“아크위자드요.”
S.솔리드의 영악한 플레이.
스크림은 물론이고 리그에서까지 꺼낸 적 없는 가디언 작전을 우리에게 걸었고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형···어떻게 하죠?”
바리케이드로 삼은 3층짜리 건물은 이미 상대 공격으로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가디언을 이렇게 빨리 잡아냈다는 건 뭘 의미하겠어.”
“···?”
“S.솔리드가 졸···아니, 엄청 잘한다?”
“아니 그거 말고.”
“그럼요?”
“세팅이야. 지금 솔리드는 아마도 몬스터 레이드용 특화 장비를 차고 오지 않았을까 싶어.”
“아? 세팅을 특화했다면···.”
“맞아. 인원이 한 명 더 늘긴 했어도 우리 생각만큼 극복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는 아닐 거야. 다행히 우리 조합은 방어 밸런스가 좋은 정석 조합이고. 한 번 버텨보자.”
개인전은 3분이지만 팀전은 15분이란 시간이 주어진다.
초반에 저격이 날아들까 싶어 조심하느라 시간을 좀 허비하긴 했지만 아직 10분이 넘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다시 우리가 재점령한 거점에서 나오는 점수를 한계치까지 뽑아내면 아슬아슬하게 비벼볼 수 있겠단 판단이 섰다.
“버프 돌려!”
아무래도 이번 5라운드는 굉장히 처절한 싸움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