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력 (1)
그룹스테이지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메이저 지역에서 참가권을 따낸 세계 유수의 팀들이 캘리포니아로 모이기 시작했다.
프로게이머는 스포츠 선수에 비해 시차 적응에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곤 하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특히 시간대가 완전히 뒤바뀐 상태로 경기를 치르면 아무래도 컨디션 난조가 올 수 있는 부분, 때문에 미국 반대편에 있는 많은 팀들은 보다 일찍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생체리듬을 현지 시간에 맞추기 시작했다.
2연속 대회 우승을 노리는 우리 팀은 보름 전부터 캘리포니아 호텔에 자릴 잡았고 이 소식을 들은 다수의 북미 팀이 연습경기를 요청해왔다.
S.솔리드 역시 그런 요청 팀들 중 한 명이었다.
-이번엔 다를 거야.
-매 번 그 소리 하더라.
제리와 제레미는 신나게 채팅을 주고받으며 입씨름에 열을 올렸다.
-정말로 이번엔 다를 거야. 이번엔 우리가 얻어갈 게 더 많거든!
북미뿐만 아니라 중국, 유럽까지.
많은 팀들과 본선에 앞서 스크림을 가졌지만 역시 가장 인상적인 건 S.솔리드였다.
그들은 여전히 북미 최고였지만 우리와 연습할 땐 도전자의 마음가짐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력으로 싸움을 걸어왔다.
“칼을 갈았네.”
물흐르듯 연계를 맞추며 달려드는 솔리드의 공격에 김정수는 혀를 내둘렀다.
S.솔리드는 이번 월챔을 위해 자신들이 준비한 것들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스크림을 준비하는 팀들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탄다.
첫째는 자신들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전략을 숨겨 상대를 교란하는 방식.
언젠가 맞붙게 될 상대에게 거짓 정보를 심어 대응하기 힘들게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어떤 전략을 내부 평가전으로만 시뮬레이션 하면 그 연습량에 한계가 있어 전략을 갈고 닦기 힘든 부분은 있다.
하지만 그것을 미리 선보여 상대가 대비하는 것이 더 손해가 크다고 판단할 경우 주요 플랜을 감추는 방법을 쓰곤 한다.
두 번째론 모든 패를 꺼내 어떤 게 가장 강력한 지 확인함과 동시에 그것을 연마하는 흐름.
사실 연습경기에선 이 두 번째 흐름을 타는 팀이 훨씬 더 많은 편이다.
그리고 상대가 우리 팀보다 강하다고 판단될 경우엔 굳이 첫 번째 방식을 택해서 얻을 장점이 별로 없기도 하고.
본인들이 가진 카드 중 가장 확실한 게 무엇인지를 찾으려면 모든 카드를 써봐야 알 수 있다.
S.솔리드는 스타서퍼가 자신들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 새 시즌에 맞춘 다양한 전략들을 들고 나와 우릴 괴롭혔다.
그 과정에서 S.솔리드는 엔트리에 많은 변화를 줬다.
신인에게 경험치를 먹이려는 게 아니고 정말 실전에서 통할만한 레벨이라고 판단된 녀석들을 이용해 경기를 굴렸다.
이건 북미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S.솔리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 년 상당한 숫자의 천재 신인들이 S.솔리드 연습생이 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자질이 좋은 선수가 많네. 경험치가 쌓이면 무서워지겠어.”
“뭐, 당장 터질 확률은 낮겠지만.”
프로게이머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정상에 설 수 없는 게 사실.
S.솔리드 원석과 손을 섞어본 우리 팀 선수들의 반응은 대부분 동일했다.
“아직 우리에게 비빌만한 레벨은 아니야.”
“그건 확신할 수 없겠는데?”
“왜요?”
“너희가 조금 전에 했던 시합 데이터다.”
게임을 예의주시하던 코치가 우리에게 중간 결과를 건넸다.
“S.솔리드는 엔트리에서 신인 기용률을 확실히 높였다.”
“네.”
“덕분에 개인전에선 우리가 압승하는 그림이 많이 나왔지만 팀전에선 어땠지?”
“팀전도 저희가 이겼잖아요.”
“시합 전체 결과를 보면 그렇지만 세부 지표는 달랐어.”
코치가 건넨 데이터를 유심히 살피자 선수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으음···.”
“경기 시간을 보면 알겠지만 솔리드와 스크림을 거듭할수록 우리의 팀전 경기 시간이 길어지고 있어. 상대가 우리의 경기 속도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야. 심지어 몇 개 라운드는 뺏기기도 했지?”
이야길 듣던 민우진의 어깨가 움찔했다.
정석 대 정석 싸움에서 패배의 원인 제공을 한 게 다름 아닌 그였기 때문이다.
새 시즌에서 인원수가 네 명에서 다섯 명으로 늘면서 팀전 정석은 2힐러로 굳어진 추세, 하지만 민우진은 이번 스크림 포인트에서 헤맬 때가 많았다.
주요 포인트란 게임을 복기했을 때 승패를 갈랐던 핵심 지점을 뜻한다.
만약 다른 판단을 했다면 승패를 바꿀 수 있을만한 승부처.
문제는 민우진이 그런 승부처가 올 때마다 실수를 한다는 점에 있었다.
민우진은 다른 팀원들과 비교해 한 가지가 도드라지게 부족했는데 바로 담력이었다.
그에겐 중요한 순간에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과감함과 판단력이 다소 부족했다.
“코치님. 다음번엔 우진이도 잘 할 겁니다.”
팀의 맏형인 김정수가 그를 위로했고 코치도 그를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
그의 나이 올해 열여섯, 스물을 넘긴 친구들도 피드백을 세게 하면 주눅이 드는데 어린 친구들은 오죽하랴.
그러나 본선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
이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감독은 스크림이 끝나고 난 뒤, 나를 조용히 호출했다.
“우진이 말이다. 새가슴 금방 고치는 건 힘들어 보이지?”
“아마도요.”
회귀하기 전까지, 지금껏 많은 선수들을 봐왔지만 이 새가슴이란 게 어느 정도 타고나는 부분이라 쉽게 고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극복하는 선수는 많아야 열에 한두 명 정도.
만약 운이 좋아 민우진이 그 한두 명에 들어간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팀이 너무 강하니까 이런 문제도 다 생기는구나.”
감독은 허탈한 투로 중얼거렸다.
국내를 떠나 해외까지 포함해도 스타서퍼가 돈이 모자라는 팀은 아니다.
최근 엔터 사업이 조금 주춤하다곤 하나 세계 대회 우승, 헤르메스의 폭발적인 사업 성장세가 맞물려 이미 많은 기업에서 후원 문의가 들어왔고 원래 재정 상태도 건실한 편이었다.
만약 민우진이 빅게임에서 흔들리는 약점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우린 주저 없이 다음 플랜을 준비했을 터였다.
재능은 비록 떨어질지언정 강심장인 친구를 영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린 민우진의 약점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다 패고 다녔기에 우리 팀에 문제가 있을 거란 걸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스크림을 할 당시엔 민우진의 약점이 부각되지 않았었다.
VT스타즈, DT게이밍, 그 어느 팀과 붙어도 우린 압도적 승리를 거뒀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세계 톱클래스에 속하는 S.솔리드와 붙자 우리도 몰랐던 약점이 드러났다.
우리로선 난데없는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2힐러 체제를 바꿔보면 어떨까? 밀러 한 명만 두고 기동성을 높여 치고 빠지는 식으로 말이야.”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무립니다. 감독님.”
기동성을 높이려면 재빠른 친구들이 필요한데 우리 팀엔 재료가 부족했다.
하다못해 다크레인저라도 한 명 더 있으면 제법 재밌는 구성이 될 텐데 우리팀에 발이 빠른 녀석이라곤 나와 제레미 뿐이었다.
“으아악!”
감독은 괴성과 함께 머릴 박박 긁었고 우린 그렇게 그룹스테이지 조추첨식을 맞이했다.
*
월드챔피언십 그룹스테이지.
전 세계 크고 작은 리그에서 활약하는 수백 개 팀 중 겨우 열여섯 개 팀만이 오를 수 있는 긴장감 넘치는 무대.
배틀아레나에 모인 수십만 관중의 환호 속에 메이저 지역 1시드로 선발된 각 팀의 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S.솔리드의 주장 데니스의 차례가 되자 함성이 상당했는데 중국 측의 함성도 만만찮았다.
이번 응원을 위해 엄청난 인원의 중국 유저가 배틀아레나 티켓 예매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이야 이거 완전 별들의 전쟁 아니냐?
-유럽은 별에 끼기 좀 약한 듯?
-ㅋㅋㅋㅋ;;
-꼴에 메이저 지역이랍시고 시드권 세장 챙겨가는 거 진짜임?
-아 님들 너무 놀리지 마세요. 그러다 유럽 화내면 어떡해요. ㅋㅋㅋㅋㅋㅋ
-올해는 다르다! 올해는!
-올해는 오딘이 있다 이 말이야~.
팬들이 웃고 떠드는 가운데 무대 위로 올라오는 날 보며 데니스가 찡긋 눈인사를 했다.
“잠은 잘 잔 것 같네.”
“이번에 뽑은 애들 실력 되게 좋더라.”
“뭐···아직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좋은 선수들로 성장해 줄 거라고 믿고 있어.”
스크림에서 꽤나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탓인지 데니스의 얼굴은 밝아보였다.
어차피 각 1시드 팀들끼린 만날 일이 없는 상황.
그말인즉, S.솔리드는 최소한 팀전의 중요도가 올라가는 토너먼트에서나 우리 팀을 만날 거란 뜻이었다.
“한솔, 혹시 알나스르랑 스크림 해본 적 있어?”
“알나스르? 아니 없는데.”
“그래? 흐음. 아무튼 만나게 된다면 조심하는 게 좋아.”
“무슨 일인데?”
“어제 스크림 요청이 들어와서 우리가 한 번 손을 섞어봤거든.”
“그런데?”
“강해.”
데니스의 표정에서 상대의 강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팀 보다도?”
“음. 가이아는 부등호가 성립되는 게임이 아니지만 내 느낌으론 팀전은 그쪽이 더 강한 것 같았어.”
팀전이 더 강하다니.
“전적···알려줄 수 있어?”
“9대 1. 그것도 1승은 상대가 새로운 전략을 실험하다가 발생한 사고였어.”
데니스는 덤덤한 얼굴로 답했지만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9대 1이라니.
민우진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단단한 정석 조합을 구가한 S.솔리드와 스타서퍼의 승률은 4:6으로 우리 팀의 근소 우위였다.
그런 S.솔리드를 압도적 격차로 찍어눌렀다?
내 머릿속에 빨간 비상등이 켜지는 순간 사회자가 팀 이름을 호명하며 구슬을 뽑아줄 것을 주문했다.
젠장, 지금 뽑는 게 낫겠다.
그룹 스테이지는 개인전 비율이 높은 5판 3선승제.
게다가 조 2위까진 본선토너먼트로 올라가게 된다.
만약 백은하가 지휘하는 알나스르와 우리가 같은 조가 되면 적어도 토너먼트에선 반대편으로 이동, 결승까진 만날 일이 없었다.
나는 알나스르의 이름이 나오길 바라며 조심스레 구슬을 뽑았다.
-야이! 우리팀 뽑지마아아아아-!!!
-아이고! 유니크가 중국 죽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맘 편하게 보고 있습니다. 충성충성.
-든든하다! 유니크 방패!
코리안 퍼킹 어쩌고를 연발하던 관중 몇 명이 조용히 밴당하는 광경과 함께 그룹 A조 명단이 완성됐다.
“그룹 A조를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팀 스타서퍼! 팀 슈퍼 호넷! 팀 오버로드 게이밍! 마지막으로 팀 슈퍼스타!”
-이야. 유니크 대진운은 언제나 레전드다.
-개꿀조 ㅋㅋㅋㅋㅋㅋ
-코 파면서 게임해도 올라갈 듯.
-아니 근데 원래 메이저 1시드는 꿀 조 받음;; 호들갑 좀 떨지 마.
슈퍼 호넷은 북미, 오버로드 게이밍은 중국, 슈퍼스타 팀은 호주 리그 소속이었다.
당장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알나스르는 S.솔리드와 같은 조였고 데니스는 벌써부터 쉽지 않겠단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가 눈여겨본 또 하나의 팀.
유럽 3시드로 진출해 예선을 퍼펙트로 깨부수고 올라온 오딘은 중국 1시드가 속해있는 네버다이 워리어와 같은 조에 속해 있었다.
-사랑해요! 유니크!
-스타서퍼의 위엄을 보여줘라!
-개꿀 매치 ㅅㅅㅅㅅㅅㅅ!!!
“자 조 추첨이 모두 마무리 됐는데 인터뷰를 한 번씩 듣고 가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먼저 전년도 챔피언 팀 주장으로 나오신 유니크 선수에게 질문드리겠습니다. 오늘 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별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내 대답에 관중석이 술렁였다.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답변을 해주셨는데요. 팬분들은 상당히 편한 조가 아니냐며 좋아하셨거든요.”
“우린 이미 준비가 됐습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우릴 꾸준히 언급하는 팀과 붙고 싶었습니다.”
나의 답변에 관중들이 크게 웃어댔다.
최근 블랙이글스는 SNS를 통해 연신 우리 팀에 대한 도발을 펼치고 있었다.
뭐 누가 주도하고 있을 진 안 봐도 뻔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혹시 그 팀이 북미에서 안티 팬이 가장 많다고 유명한 그 선수가 속한 팀일까요?”
“네.”
타우러스와 피케, 사이클론이 속한 블랙이글스 또한 강팀 중의 하나.
블랙이글스는 네버다이워리어와 함께 팀 오딘과 같은 조였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팬분들에게 그룹스테이지에 임하는 소감 한말씀 해주신다면요?”
“그룹 스테이지는 본선으로 가는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전력을 다 보여드릴 수 없을 것 같아 살짝 아쉽지만 그래도 멋진 경기력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자신감 보소 크크.
-이 맛에 스타서퍼 팬 합니다.
-??? 저건 그룹스테이지에서 같이 게임하는 다른 팀들을 무시하는 발언 아님?
-또또또 분위기파악 못하고 나대는 선비;;
-그룹스테이지에서 스타서퍼 한 번이라도 이기고 그딴 소리해라 ㅡㅡ
내 발언이 불편했던 일부 관중이 고개를 들다 조용히 얻어터지며 사라졌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타서퍼가 경계하는 팀을 하나만 꼽는다면 누굴 선택하시겠습니까.”
-몰라서 물음? 당연히 S.솔리드지.
-아 사회자 양반 ㅋㅋ; 이건 누가 봐도 블랙이글스 아닙니까.
-겜알못만 모아놨나. 당연히 네버다이 워리어임.
서로 자기가 미는 팀이 경계대상 1호라며 목청을 키우는 가운데 나는 담담히 그 팀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 그 팀도 나와 만나길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스타서퍼의 경계대상 1호는 알나스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