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武神) (5)
세 개의 보물 중 무신결을 고른 건 내게 최고의 선택이 됐다.
압도적 피지컬로 나를 몰아붙인 노인이지만 그에겐 결정적적으로 무서운 한방이 없었다.
내가 무신결을 골랐기 때문이다.
노인은 시험의 내용이 어떤 보물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다.
만약 내가 무신결 대신 권법이나 보법을 선택했다면?
노인은 전력으로 권법이나 보법을 사용하며 시험을 진행했을 터, 만약 그랬다면 나는 아마도 버틸 수 없었을 거다.
물론 무신결을 사용한 노인도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다.
가이아는 프로게이머는 물론이고 NPC와 전투할 때도 나름 현실적인 반응을 보인다.
급소를 때리면 NPC라도 멈칫거리기 마련인데 이 노인은 그런 반응이 전혀 없었다.
무신결이 정신력을 강화시켜준다고 했으니 고통을 경감시켜주거나 경직을 무마시켜주는 능력이 부여된 게 틀림없었다.
솔직하게 만약 내가 평범한 유저였다면 노인을 이길 수 있었을까?
그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불과 3분이지만 그 시간동안 내가 받은 압박감은 리그나 월챔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레벨이었다.
이 괴물 노인에게 가이아가 그동안 기록한 모든 유저의 데이터가 깊이 녹아있는 느낌.
현역 톱클래스 선수도 이런 AI를 상대로 훈련한다면 실력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털썩 주저앉은 나를 향해 다가온 노인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스킬박스를 건넸다.
“심득을 얻은 것을 축하하네.”
[영원급 스킬 - 무신결 / 무도가]
-정신력과 신체 활력을 강화시켜 신체에 걸리는 디버프 스킬의 저항력을 크게 올린다.
영원급.
그 세 글자를 보는 순간 전신에 작은 떨림이 일었다.
드디어 나왔구나!
영원급은 전설급보다 한단계 더 높은 레어리티.
물론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비벼볼 수도 없을만큼 극적인 차이를 만드는 건 아니라지만 현재 시점에서 무신결이 가이아 최고의 스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대의 앞날에 행운이 깃들길.”
다소 상투적인 끝맺음과 함께 흩어지는 노인의 잔상을 보며 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잠깐! 내 아이템은!
시험을 치르기 전, 황룡을 잡지 않았던가.
그것도 VT스타즈와 협력해 간신히 잡아낸 녀석.
갑자기 안개에 둘러싸이는 바람에 장비 획득을 못한 게 생각이 났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빛과 함께 안개가 걷히자 침울한 얼굴로 황룡 주변을 돌고 이던 VT스타즈의 생존자들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니크!”
“돌아왔구나!”
날 잡아먹으려고 들던 건 이미 싹 잊었는지 녀석들이 날 보며 반가운 티를 냈다.
VT스타즈의 생존자는 단 두 명, 그들 역시 황룡을 잡자마자 몰려온 안개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상황을 주시하던 중이라고 했다.
내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노인과 대결해 무신결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이십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더라도 계속 기다렸을 게 분명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를 아이템 루팅 순간을 그냥 포기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용케 기다렸네.”
“죽었다면 파티장이 자동으로 우리한테 넘어왔을 텐데 가만히 있는 걸 보고선 아직 죽지 않았단 걸 알았거든!”
녀석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장비 획득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제단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고랭커 유저들이 피를 쏟은 걸 봤기 때문이다.
우리길드는 비록 진입은 늦었지만 오히려 그게 도움이 된 경우라고 봐야 했다.
만약 스타서퍼가 제일 먼저 던전에 들어왔다면?
모르긴 몰라도 제단에 도착할 때까지 그 정도 전력을 보존하긴 힘들었을 터였다.
스타서퍼는 손쉽게 뚫고 들어왔지만 이곳이 절대 쉬운 던전은 아니었단 뜻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황룡의 몸에 손을 갖다 대자 광채가 피어났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씩이나 말이다.
★전설급 업적 - 영웅의 시험대 선봉 공략
영웅의 시험대를 제일 먼저 공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공략대의 업적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입니다.
보상 : A급 이하 장비 특수 강화 기회 1회 획득.
◈영원급 업적 - 무신의 시련 돌파
영웅의 시험대에 숨겨져 있는 무신의 시련을 성공적으로 돌파했습니다.
보상 : 영원급 이하 스킬의 대강화 기회 1회 획득.
생각지 못한 행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장비 강화, 말 그대로 장비를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다.
다만 이런 특수한 업적을 통해 얻은 강화 기회는 대장장이 스킬을 익힌 유저들의 강화보다 한 단계 더 높은 효과를 보이곤 했다.
현재 시중에서 억대에 팔리는 아이템에 이 기회를 사용한다면 더욱 엄청난 장비로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더 중요한 건 영원급 업적 보상이었다.
그냥 강화도 아닌 대강화 기회.
자색팔찌도 스킬을 강화하는 효과를 지녔지만 이건 비교가 불가능했다.
자색팔찌로 스킬을 강화시키면 스킬의 레어리티가 올라갈수록 그 위력이 떨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색팔찌가 탈 A급 장비라곤 하나 그래도 A급 카테고리에 속한 장비였다.
그러나 이번 업적 보상으로 얻은 기회엔 ‘대’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대강화는 단순히 위력뿐만이 아닌 마력효율, 스킬의 딜레이까지 조절되는 말 그대로 완벽한 스킬강화였다.
회귀 전에 7년을 플레이 했어도 전설급 이상 대강화를 손에 넣어본 적이 없었는데 단숨에 영원급 대강화를 얻게 됐으니 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더 욕심 부리면 먹다 체하겠는데?
이번 신규 던전에서 얻은 보상은 돈으로 따지기 힘들었다.
업적 보상과 무신결만 해도 가이아 유저라면 부러움에 배를 잡고 뒹굴고도 남을 정도.
다른 때였으면 보스에게서 장비를 뽑아낼 때 자연의 기운을 제법 불어넣었겠으나 이번만큼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이 정도면 이미 개인이 얻을 수 있는 보상 한계를 한참 초월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는 내 생각도 잠시, 다채로운 오색빛이 터지며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VT스타즈 인원들이 대체 뭐냐고 소릴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대박이야?!”
뭔진 몰라도 본능적으로 대박이 터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황룡의 천옥 목걸이 - 귀속]
등급:S
종류 : 장신구
특수 효과 : 전설급 이하 디버프 공격을 120초마다 1회 방어한다.
[체력 +192] [투지 +110] [인내 +85]
[보옥결계검 - 귀속]
등급 : S
종류 : 검
특수 효과 : 상대방의 방어 약점을 꿰뚫는다. 물리 방어도 70% 무효화.
[민첩 +95] [근력 +297]
[금색의 뿔 - 귀속]
등급 : S
종류 : 지팡이
특수 효과 : 적색 계열의 스킬 시전 속도 50% 증가.
[마력 +320]
황룡을 루팅해 획득한 S급 장비는 총 3개, 나머진 A급 장비가 8개로 모두 11개 장비.
세 개의 S급 장비는 누구에게 보여주더라도 군침을 흘릴만한 최고급이었고 A급 장비도 A급 최대 한계에 걸쳐있는 물품이 상당수였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좋아하던 VT멤버들은 이내 어떤 사실을 깨닫고선 서서히 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번 보스 공략 동안 내가 넣은 데미지 지분이 얼마였는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데미지 기여도만큼 내가 먼저 집어가겠어.”
녀석들의 입이 움찔움찔한다.
뻔하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이번 레이드에서 VT스타즈는 여덟 명 중에서 여섯 명이 사망패널티를 받았다.
녀석들이 넣은 데미지는 55퍼센트.
즉 11개 장비 중에 5개는 내가 먼저 집을 권한이 있었다.
S급 장비 3개가 내 품안으로 들어가자 녀석들의 눈이 죽은 생선처럼 우울해졌다.
“여섯 개면 우리 인원수대로 다 나누지도 못하는데···.”
“레이드 한 번에 장비를 다 구하는 던전은 없어. 가이아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일침을 가하자 그들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침묵을 지켰다.
저들이 저들만의 고민이 있듯이 나도 신경 쓸 거리가 남아있었다.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우리 길드원들이었다.
그래도 내가 길드장이고 저들은 스타서퍼 팀을 위해 발 벗고 나서준 친구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게 내 도리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점에선 내가 VT스타즈보단 고민거리가 적었다.
A급 장비를 몇 개 처분한 다음 골드로 나눠주면 적절한 감사의 인사로 충분했으니까.
장비가 모자라 서로 싸우게 될 VT스타즈에 비하면 훨씬 나은 셈이었다.
그나저나 이 장비들을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까.
이번에 획득한 S급 장비들은 전부 귀속, 한 번 착용하면 해당 캐릭터 외에는 쓸 수 없으니 신중한 결정이 필요했다.
마법사 전용 장비인 금색의 뿔은 논외로 두더라도 보옥결계검은 아크나이트, 웨폰마스터, 실드나이트에 이르기까지 검을 쓸 수 있는 클래스는 모두가 탐낼만한 압도적 장비였다.
또한 황룡의 천옥 목걸이는 모든 클래스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
무신결 또한 스킬박스 상태로 얻었기 때문에 이것을 어느 쪽에 몰아서 투자할 지를 고민해야 했다.
목걸이와 결계검, 그리고 무신결까지.
보옥결계검을 생각하면 유니크보단 엠퍼러에 투자하는 쪽이 상승효과가 더욱 뛰어날 것으로 생각됐다.
장비와 스킬을 나누는 것도 가능했지만 시너지를 생각하면 손해 보는 일이었다.
어서 실전에서 장비를 써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
프로게이머뿐만 아니라 유저라면 누구든지 좋은 장비를 휘두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심지어 그 장비가 서버 최상위의 S등급 장비였으니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인벤토리에 들어온 번쩍이는 보물들.
스타서퍼의 월드챔피언십 연속 제패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
9월 초, 정규리그 일정이 끝나가는 시기.
나는 손에 팝콘을 들고 알나스르 경기 리플레이를 돌려보고 있었다.
프로게이머가 해외 경기를 챙겨보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해외에선 어떤 메타로 게임이 흘러가는지 등을 알 수 있고, 월드챔피언십을 바라보는 팀이라면 상대의 전략을 어느 정도 예측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원과 이세준이 가세한 알나스르의 경기는 재미있었다.
중동리그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
중동은 4대 메이저 지역엔 끼지 못했지만 경기는 화끈해 보는 맛이 있었다.
게다가 스킬이나 장비, 선수까지 메이저 지역에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을 보유했다.
재력이 충분하다면 팀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최고로 갖출 수 있으니 중동의 상승세가 가파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언제 자?”
늦은 시간까지 타 팀 경기를 모니터링 하고 있는 걸 지나가던 밀러가 발견했다.
“몇 개만 더 보고.”
내 대답에 그는 고갤 흔들었다.
벌써 새벽 3시, 그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지 하품하며 내게 인사를 하고선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일정이 끝나면 다른 팀 경기를 분석하는 건 회귀하기 이전부터 내 오랜 습관이었다.
실력 없는 선수가 살아남는 방법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리플레이 분석으로 보고 배울 게 많았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이 선수는 이것만 고치면 더 좋은 선수가 될 텐데 하는 것들이었다.
리플레이 분석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땐 내 실력 향상을 위해 시청했다면 지금은 우리와 마주칠 수 있는 다른 강팀의 약점을 찾는 시간이 된 것 뿐이다.
알나스르 다음엔 유럽이었다.
벌써 몇 년도 더 된 옛날, 1부 리그에 간신히 붙어 선수생활을 이어가던 시절엔 잠이 쏟아져 리플레이 분석을 양껏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솔직히 잠은 하루에 두 시간 정도만 자도 충분했다.
억지로 버티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 정도만 자면 아무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감독과 코치가 숙소에서 함께 생활을 했다면 무조건 자라며 나를 방에 가둬놓았을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경기를 다 보려면 시간이 배는 더 걸렸을 텐데 분석 팀이 정리를 잘 해준 덕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스타서퍼가 2부리그를 제패하고 1부로 단숨에 승격했을 때부터 서대표는 팀을 최고로 만들어주겠다는 소릴 입에 달고 다녔다.
전력 분석팀 또한 그 장담의 일환이었다.
S.솔리드 시절에 들었던 것을 토대로 짐작하면 일정 규모 이상의 분석팀을 운영하려면 한 해에 최소 20억 이상의 투자가 필요했다.
물론 고급 인력을 아낌없이 쓰면 예산은 두 배, 세 배로 늘어날 것이다.
스타서퍼 분석 팀이 보내주는 분석의 양과 질은 S.솔리드 시절에 받아보던 것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으니 서대표가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분석 팀은 우리 팀 선수들이 꼭 봐줬으면 하는 중요도 높은 분석부터 중요도가 낮은 팀까지 아주 세밀하게 데이터를 정리했는데 현재 내 손에 들린 데이터는 그 중요도가 C급 이하로 낮은 편이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 오면 살피지 않아도 괜찮은 레벨이지만 어차피 시간이 남으니 훑어본다는 느낌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며 해당 팀의 경기를 살피는데 뭔가 묘한 감각이 일었다.
“팀 오딘···.”
유럽리그 꼴찌를 맴도는 팀.
작년에도 승강전에서 2부로 갈뻔한 걸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기록으로만 보면 별 볼 일 없는 팀, 그런 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왜 이런 팀이 바닥을 구르고 있지?
자료를 살펴보니 멤버 구성이 특별히 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분석팀의 자료에 따르면 오딘은 최근 다섯 경기에서 상당히 좋은 활약을 펼쳤다고 되어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찜찜함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팀 오딘의 최근 경기를 전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기 분석이 완료됐을 때 난 이 감각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프로팀으로선 가까이 해선 안 될 구린 무언가가 이 팀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