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리즈 시절은 언제입니까? (1)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했으며, 실력으로도 단연 최고였던 S.솔리드에게 위기가 닥쳤다.
“S.솔리드가···휘청이고 있습니다!”
데니스가 무너지자 팽팽하던 균형이 순식간에 깨졌다.
방어력은 모든 클래스 중의 최고인 실드나이트다.
그런 실드나이트가 하늘을 날더니 차량을 들이받았다.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그 광경을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기에, 그들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는 평소보다 느렸고 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응속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제리도 데니스가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갈 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갓 뎀···.”
제리는 호락호락 물러날 생각이 없었지만 이미 승패는 기울어진 뒤였다.
자신을 지켜줄 데니스는 멀었고 내 검은 너무 가까웠으니까.
“쓰러집니다! 무릎을 꿇고 마는 아그니!”
“인피니트 슬래셔가 제대로 터졌습니다!”
“아, 혼신의 힘을 다해보지만 공격이 닿지 않습니다.”
“3년간 수많은 선수들을 지켜봤지만 정말 압도적인 방어력입니다! 결국 유니크가! 아니 엠퍼러가! 스타서퍼를 정상으로 데리고 갑니다!”
“···우승! 스타서퍼 우승!”
완벽방어 성공률 72퍼센트.
마지막 남은 S.솔리드의 기둥, 데니스를 쓰러트리는 순간 차단막이 걷히며 쩌렁쩌렁한 환호가 울렸다.
스타서퍼가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
2부리그로 출발한 팀이 세계대회를 석권했다.
월드챔피언십이 종료된 후, 며칠 동안은 이 이야기가 e스포츠 포털 기사란에 도배됐다.
우승을 하고 나서 크게 변한 건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것은 돈에 대한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엔 진짜 배고플 때도 있었는데.’
K퀘스트 시절엔 식사도 눈치를 봐가며 먹어야 했고 외출을 해도 지갑에 돈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누가 숙소에서 몰래 과자라도 먹으려 하면 나눠 먹자고 달려드는 아귀들이 출몰하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났다.
이번 월드챔피언십 우승 상금은 작년보다 대폭 오른 1800만 달러.
우리 팀은 엔트리를 다 채우지 못해 아홉 명뿐이었고 그 덕분에 각자 2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상금을 챙길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기 전 해외를 전전하며 어렵게 모았던 돈의 몇 배나 되는 돈이 수중에 모여 있었다.
헤르메스는 우리 팀의 유일한 스폰서로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렸고 이것을 본 다른 기업들이 그린 엔터와의 계약에 관심을 보였다.
팀도 재정이 탄탄해지자 숙소를 신축, 빵빵한 시설투자에 공을 들였다.
우리도 다른 팀처럼 2군 연습생을 비롯해 인원이 늘어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성남의 게이밍하우스는 더 늘어날 식구를 생각하면 조금 작은 감이 있었다.
나를 비롯한 우리는 더 이상 돈 때문에 배고프지 않았다.
혹시나 너무 배가 불러 팀원들이 나태해지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럴만한 게 나와 제레미를 제외하면 다른 팀원들은 이제 막 출발한 상태였기에 한참 더 벌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이대로 3, 4년 정도 세계무대를 휩쓸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배가 부를 이유는 없었다.
팀의 주가가 절정으로 치솟자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났다.
우승팀에 유망주가 몰리는 현실이야 이미 S.솔리드에서도 봐왔던 일이니 익숙했다.
하지만 기존 프로 선수들이 이적 의사를 밝히는 건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한솔아 어떻게 생각해? 우리도 이제 12인 로테이션을 마저 채워야 하지 않을까?”
감독과 코치는 이번 기회에 좋은 선수들을 추려 팀전력을 보강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이적을 원하는 선수들 중에 내 맘에 차는 선수는 딱히 없었다.
유성철, 유호영, 김민준, 정대환 등등.
이미 우리 팀에 모인 선수들은 장차 세계 톱클래스에 오를 재목이었다.
현재 국내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떠올려보면 더원, 이세준과 동급의 레벨이란 뜻이다.
현재 인원으로도 세계 대회를 제패하는데 성공했다.
굳이 성급한 결정으로 우리 팀의 가능성을 낮출 필욘 없단 생각이 들었다.
“이적 문의를 해온 선수 중에 특별히 최상위 레벨로 보이는 선수는 없던데요.”
“유민환은? 유민환은 K퀘스트 기둥인데?”
“유민환 선수요. 잘하죠.”
분명 성실하고 실력도 좋은 선수다.
유민환이 아니었음 K퀘스트는 승강전에서 놀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유민환은 나이가 걸렸다.
올 시즌도 이미 끝났고 그의 나이는 내년이면 스물다섯.
1부 리그에서 이미 인지도가 있는 각 팀의 에이스들.
유민환이나 남영민 같은 1세대 에이스 선수들의 기량이 하락하는 시점이었다.
“시즌 시작까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제가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학교를 다니며 이름도 없이 지내던 유호영, 정대환을 찾아온 나였기에 팀에서는 내 스카우트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럼 다들 푹 쉬고 나중에 보자.”
월드챔피언십 종료와 함께 우리 팀은 3주간의 휴가에 들어갔다.
휴가가 너무 긴 것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내내 고생한 팀원들에게 이 정도 휴식은 필요했다.
가이아는 일 년에 5개월로 다른 e스포츠에 비하면 리그 일정이 짧은 편이다.
하지만 비시즌엔 리그 개막을 대비해 장비와 스킬 파밍하느라 시간을 쏟는 관계로 이때가 아니면 쉴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쉴 땐 제대로 쉬어. 게임하지 말고.”
“옙~.”
코치의 말에 슬며시 웃는 팀원들을 보니 벌써 촉이 왔다.
비록 숙소는 휴가 중에 비겠지만 결국 게임에서 만나 파티를 돌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
-형 오늘 게임 안 해요?
-응. 안 해.
-아, 왜요. 또 몰래 부캐 키우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게임할 거 그러지 말고 같이 하죠?
휴가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안 지났다.
아무리 내가 인간 건전지래도 쉴 땐 쉰다.
그런데 유호영을 비롯한 팀원들은 매일같이 같이 게임하자며 날 불러댔다.
나도 그런 요구에 웬만하면 응해주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나는 지금 꽃밭 한가운데 있었다.
물론 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양옆으로 두 아저씨도 함께였다.
“휴가 도중에 불러내서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자네가 볼 땐 어떤 거 같아?”
“어. 음.”
나는 말을 아꼈다.
모니터 속에서 날쌔게 움직이는 친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친구 이름이 뭐였죠?”
“소림이?”
양소림.
곧 데뷔하게 될 걸그룹, 나이트캣의 리더.
채린이가 연습생 생활을 하기 한참 전부터 그린 엔터 소속으로 활동해왔다고 했다.
“괜찮은데요? 지금도 플래급은 될 것 같고요.”
휴가 중에 뜬금없이 서대표, 감독과 가이아 랭크게임을 구경하고 있는 이유.
내년에 있을 여성부 리그 때문이었다.
지오는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한 스텝으로 이미 각 대륙 4대 메이저리그에 여성부 리그가 열릴 것이라 공언한 상태였다.
“다른 친구들은?”
“말을 아끼겠습니다.”
내 말뜻을 알아들은 서대표의 얼굴은 영 탐탁지 않았다.
“그래도 리그에서 호성적은 거둘 수 있겠지?”
“꼭 그룹 전원을 팀으로 만들지 않는다면요.”
서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건 어젯밤이었다.
데뷔 예정인 걸그룹의 여성부 리그 출전 준비를 도와달란 내용이었다.
전혀 뜻밖이었다.
만약 그린엔터에서 여성부 리그에 참전한다면 팀을 따로 만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예상의 중심엔 채린이가 있었다.
한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귀한 여성 그랜드마스터 유저.
그녀에겐 세계 어느 팀을 가든 에이스 역할을 해낼 만한 재능이 있었다.
만약 그린 엔터에서 여성부 리그에 참전한다면 채린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인원을 모으는 게 베스트였다.
그러나 대표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갑자기 걸그룹 멤버 전원을 팀에 얹어 여성부 리그 참전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어떻게 안 될까?”
“1군 엔트리를 짜려면 열두 명까지 선수를 영입할 수 있습니다. 저 다섯 명을 빼도 자리가 일곱 자리나 남죠. 그런데 대표님. 저 친구들 대다수는 출전 기회조차 못 받을 겁니다. 병풍 인원이라고 욕만 먹을 텐데요.”
서채린, 그리고 조금 전에 경기를 지켜본 양소림.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 인원은 솔직히 수준 미달이었다.
랭크에 올리면 플래나 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여성부 리그가 남성부에 비해 레벨이 낮다한들 실버, 골드라면 문제가 있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이 그룹이 데뷔 전부터 가이아 플레이로 인지도를 얻었거든. 아직 리그 시작 전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까 연습을 좀 도와주면···.”
서대표는 그리 말하며 날 바라봤다.
“그렇게 보셔도···.”
재능이 없어도 일정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그룹 데뷔가 목전이지 않은가.
프로게이머와 아이돌, 어느 한쪽도 여유 부리면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표님. 둘 다 잡으려고 하다 아무것도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박실장이랑 똑같은 이야길 할 줄이야···.”
나한테 의견을 구하기 전에 이미 대표는 감독에게도 같은 이야길 했던 모양이다.
“우린 무조건 여성부 팀을 만들 예정이야. 그런데 일부 멤버들만 겸업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분위기라는게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 듯했다.
같이 활동하는 멤버들끼리 누구는 따로 활동을 한다면 아무래도 이질감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기이한 건 원래 그린 엔터는 게임단이 주력사업이 아니었단 점이다.
게다가 저 연습생들, 이제 곧 데뷔할 예정인 저 친구들은 몇 년 전부터 걸그룹 데뷔만을 바라보며 연습한 사람들이다.
그 점을 서대표가 모르지 않을 텐데 이렇듯 강행군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놓은 건 박감독이었다.
“요즘 시장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 K-POP으로 불리던 국가 고유의 브랜드 파워가 많이 내려갔어. 예전 같은 수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된 거지. 하지만 게임 쪽은 달라. 파이 자체가 엔터 시장보다 훨씬 크고 아직 국가 파워도 건재해.”
기업은 자선 기부 단체가 아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직원들 밥줄을 이어가려면 계속 새로운 동력원을 찾아야 했고 지금 그린 엔터의 시선은 게임 산업으로 향해 있었다.
“그럼 이제 저희 그룹 사업은 접는 겁니까?”
“그래도 해온 게 있는데 그렇게 무 자르듯 할 순 없지. 그래도 대표님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누구 덕분에 게임 쪽이 블루칩이 됐거든.”
한참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던 박감독이 나를 보며 씩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한솔아.”
“왜 그렇게 느끼하게 부르시죠.”
“느끼하다니···. 크흠. 아마 당분간은 내가 여성부 팀을 겸임해야 할 것 같다.”
“축하드립니다.”
팀을 두 개나 맡으면 상당히 바빠지겠지만 나와는 상관없었다.
분명 나와는 상관없어야 했다.
“지금 우리 엔터 인원으론 팀을 꾸리기에 문제가 있다며.”
“누가 봐도 무리죠.”
“새로운 선수를 충원해야 하지 않겠니.”
“무슨 이야길 하시려고···.”
“우리 회사에서 선수 보는 눈은 네가 제일 좋잖니. 동료 좋다는 게 뭐냐. 한 번 도와다오.”
“아···저는 훈련이 바빠서.”
대표님 부탁이야 거절 못 해서 나왔다지만 이러다 꼼짝없이 휴일을 반납할지도 모른단 위기감이 들었다.
아니, 휴일만 반납하면 다행이었다.
“어허.”
도망치려는 날 붙잡는 감독의 아귀힘이 강력했다.
게다가 날카롭게 꽂히는 대표의 시선까지.
“어떻게 안 될까? 자네가 여성부 팀을 도와주면 채린이와 만날 시간도 더 늘어나잖나. 합법적으로.”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난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거 대표님이 하실 말씀이 아니잖아요···.”
걸그룹 연애 스캔들이 사건사고로 취급되는 정돈 나도 잘 안다.
대표가 직접 할만한 이야긴 아니었다.
“어? 거기 세 분! 무슨 얘기 하고 계셨어요?”
연습을 마치고 나온 나이트캣 친구들을 본 순간 나는 침묵을 지켰다.
제레미에게 맡겼으면 얼씨구 좋다며 일대일 과외도 해주겠다고 나섰을 거다.
그만큼 대단한 매력을 가진 멤버들이었다.
“자, 주목. 여긴 다들 잘 알지?”
“네~.”
“여성부 리그 참여를 대비해서 정한솔 선수가 너희 훈련을 도와주기로 했다.”
완전히 막무가내구만.
그런데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채린이가 반기는 이유는 알 것 같은데 다른 친구들도 박수를 치며 엄청 환영해주는 게 아닌가.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한솔 오빠.”
“어허. 훈련 기간 동안 호칭은 코치님으로 통일이다.”
“네에~.”
활짝 웃으며 고갤 꾸벅 숙이는데 도무지 거절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친구들, 완전히 게임 광팬이었다.
게임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멤버들이었기에 겸업 제안에 잡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겸업하면 보너스는 나오냐고 대표에게 물어보려던 찰나 주먹을 쥐고 손을 번쩍 드는 이가 있었다.
채린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코치님!”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이미 많은 게 달라졌지만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과거의 내가 하지 않았던 선택을 함으로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니 쓸데없는 걱정인 듯했다.
저 활짝 웃는 얼굴 어디에도 먹구름이 낄 틈새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