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퍼러 (5)
일명 왕의귀환.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가 좋은 편인 아크나이트에 스킬을 몰아주는 올인형 조합.
가이아 프로리그가 시작된 이래 이런 식으로 한 명의 에이스에게 힘을 몰아주는 전략은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대상이 아크나이트였던 적은 좀처럼 없었다.
아크나이트는 일단 근접 클래스, 붙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기에 아크위자드나 다크레인저 같은 장거리 클래스에 비해 훨씬 운영이 까다로웠다.
그렇다고 암살자처럼 민첩한 것도 아닌지라 거릴 좁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탱커에게 힘을 몰아줄 바엔 암살자나 마법사에게 몰빵을 하는 게 더 이익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와중에 왕의귀환을 처음 제대로 사용한 팀은 34년도, 중국 상하이나이츠였다.
참고로 상하이나이츠는 내가 중국에서 활동할 때 계약했던 팀이다.
내가 입단하기 전만 해도 리그 6위에 머물렀던 상하이나이츠는 왕위귀환을 사용하기 시작해 중국대표로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는 업적을 이뤄냈다.
중하위권 팀이 월드챔피언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
그 원동력의 기초를 제공한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왕의귀환 전법은 나의 아이디어였고,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팀은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렇게 들으면 행복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기량 저하로 주전경쟁에 밀려 해외 팀으로 이적한 후에도 내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의사소통 문제부터 시작해 은근히 견제하는 시선들까지.
중국에서 내 역할은 그저 고기방패였다.
그것도 5라운드 팀전에서나 가끔 불러주는 초라한 위치.
선수의 입지는 성적과 출전 빈도로 다져진다.
겨우 5라운드에만 가끔 얼굴을 내미는 선수가 입지가 있을 리가 있나.
왕의귀환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코치님. 이 조합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뭔데? 아크나이트 올인 조합?”
당시 중국 코치는 내 제안서를 보고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간신히 자리나 지키던 녀석이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니 말이다.
“아크나이트? 조합의 구심점이 누군데? 설마 너냐?”
“예···.”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자신감이 부족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매일 시합이 있을 때마다 출전 여부도 불투명한 서브 멤버인데다 마음 맞는 친구도 몇 명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십새꺄. 너 우리 팀이 만만하냐?”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코치는 내게 그리 말했다.
“예?”
“너 같은 삼류 선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조합을 감독님이 허락해줄까? 게다가 이 명단은 뭐냐. 너 빼고는 전부 우리 팀 주전 선수들 아니냐. 기가 막혀서.”
“하지만 코치님. 검증할 기회를 한 번만 주시면···.”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 코치는 날 유독 싫어하던 인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감독은 날 좋게 봐줬단 점이다.
나는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다고 생각해 비굴할 정도로 테스트에 매달렸고 끝내 감독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한솔아. 이번 테스트 결과가 좋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힘든 프로생활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겠냐?”
“괜찮습니다. 감독님. 정말 자신 있습니다.”
그때 나는 테스트 결과가 신통찮으면 선수생활을 은퇴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좋은 성과를 낼 자신도 있었지만 그만큼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테스트가 열린 그날, 난 조합의 성능을 몸소 증명하며 어렵사리 팀의 신뢰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비주전 선수가 주축이 된 팀이 테스트에서 상하이나이츠 주전멤버를 상대로 라운드 승리를 따낸 것이다.
“왕의귀환이라···생각보다 쓸만한데? 다들 동의하지?”
“감독님. 저거 순전히 장비빨 아닙니까.”
코치는 어떻게서든 내 활약에 흠집을 내려 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런 조합을 구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역시 비시즌 기간 던전에서 획득한 방패의 덕이 컸으니까.
하지만 결과가 증명해줬기에 난 팀전 주전 자리를 당당히 차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다시 살아나기 전 내 프로 인생에서 유일하게 잘나가던 시기였다.
그다지 길진 않았지만.
조합을 제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하위권에 머물던 상하이나이츠는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팀의 주인공이 한국인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구단주는 거금을 들여 장비를 새로 구입, 내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플레이어를 데려왔다.
내가 쓰던 방패보다 훨씬 좋은 물건과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상호작용 가능한 스킬까지.
상하이나이츠는 더욱 강력한 팀으로 거듭났다.
나만 빼고.
“무슨 생각 하세요?”
잠시 과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건 유성철이었다.
“미안.”
경기가 이미 시작됐는데 딴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3년 내내 무패 신화를 이룩했다지만 이게 어디 보통 무대인가.
자그마치 월드챔피언십 결승전, 그것도 매치포인트다.
아직 자만하기엔 이르단 생각이 번쩍 들었다.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 장차 톱클래스에 오를 어린 유망주들을 이곳에 모았다.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 그들이 성장을 마치기까지 팀을 이끄는 것은 리더인 나의 몫이었다.
“그럼 가볼까.”
버프가 하나둘 들어오자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한 걸음을 떼자 발이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쭉쭉 나갔다.
아크나이트가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스킬의 힘이 컸다.
이번에 헤르메스에게 건넨 500만 달러엔 장비뿐만 아니라 스킬에 대한 값도 포함되어 있었다.
-곧 마주친다···.
-붙었다!
최후의 전투를 벌일 장소는 환영도시 중앙의 점수 거점.
만약 유럽팀이었다면 초반 손해를 보더라도 오브젝트를 노릴법했는데 S.솔리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애초에 북미리그 스타일 자체가 오브젝트 컨트롤보단 꽝하고 붙는 쪽을 선호하기도 했고 S.솔리드 입장에선 우리에게 점수 거점을 내주기 싫었을 것이다.
S.솔리드는 우리에게 점수 거점을 내주고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거점을 점령할 수 있는 발판을 두고 양 팀이 격돌했다.
S.솔리드의 조합은 실드나이트, 아크위자드, 엘레멘탈마스터, 비숍.
마법사 전력이 강한 팀이 구사하는 전형적인 정석 조합이었다.
“엄청난 강공! 비록 개인전에선 쓴맛을 봤지만 S.솔리드가 이렇게 무너질 팀이 아니죠!”
제리와 마이클이 쏟아내는 마법이 포탄처럼 날아들자 어린 팀원들이 힉 소릴 내며 내 뒤로 숨기 바빴다.
나는 침착하게 방패를 앞으로 내밀며 타이밍을 잡았다.
거금을 주고 구매한 이 방패엔 자색팔찌처럼 특수한 능력이 깃들어 있었다.
공격을 완벽하게 받아낼 때마다 플레이어의 스탯을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효과였다.
물론 공격을 ‘완벽하게’ 막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마 재능이 철철 넘치는 선수라 해도 상대의 공격을 완벽히 받아낼 확률은 열 번 중에 잘해야 두세 번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 해도 방패의 사기적인 능력을 고려하면 500만 달러는 너무 싼 가격이었다.
게다가 방패뿐만 아니라 이번 시합을 위해 필요한 다른 스킬들까지 거래하지 않았던가.
이만한 유니크 장비를 싼값에 구할 수 있던 건 헤르메스가 순전히 이 방패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탓이 컸다.
공격을 완벽히 차단할 때마다 스탯이 오른다는 문구가 그들에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패로 공격을 천 번 이상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
그것이 이 백금방패의 각성시키는 비법이었지만 아무 정보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긴 쉽지 않았다.
-숨기만 해서 어떻게 이길 거야!
-답답하네!
-마력을 빼두려는 전략인가? 어쨌든 공격을 잘 막기만 하면 솔리드 마법사들의 마력이 바닥날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거점을 뺏겨버렸는데?
거의 호흡 한 번에 열 발씩 쏟아지는 마법을 버텨내고 있을 때, 미소 짓는 제리의 얼굴이 보였다.
스코어 3:1. 벼랑 끝에 몰리면 제아무리 심장이 튼튼해도 긴장이 될 법한데 녀석은 웃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웃을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 게임을 잡았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저렇게 쉽게 거점 내주면···.
-가망이 없지.
-심지어 저쪽 탱커 겁나게 단단해 보인다.
S.솔리드의 방어를 제일 앞에서 책임지는 선수는 데니스.
의심할 여지없는 북미 최고의 방패였다.
“성철아! 지금!”
“옙!”
여유를 찾아가는 솔리드의 기세를 꺾기 위해 유성철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발밑의 마력이 요동치며 새로이 판을 짜기 시작했다.
음양사의 특기인 결계였다.
다른 클래스의 버프는 주로 캐릭터에 직접 작용하는 스킬이 많지만 음양사는 범위 결계를 이용한 버프가 주력기였다.
결계가 발동하자 우리 팀의 몸놀림이 한결 가벼워졌다.
돌풍을 일으키며 돌진하자 데니스가 커다란 타워실드를 앞세워 몸을 부딪쳐왔다.
얼핏 보기에 투박한 디펜스지만 게임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겐 달리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라인 하난 끝내주는군.
웬만한 공격을 거의 다 틀어막는 라인을 커다란 타워실드가 가로막는다.
시험 삼아 검으로 몇 번 방패를 찔러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데니스와 방패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제리와 데니스는 끊임없이 마법을 쏟아내며 날 괴롭혔다.
만약 이것이 일반적인 팀플레이였다면 우리 팀원들은 날아드는 공격을 커트해야했다.
아무리 아크나이트가 탱커라고 하지만 3:1을 방어하는 건 상당히 가혹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팀은 아랑곳없이 오직 내 버프스킬을 유지하는 데만 집중했다.
-아니 뭐하는 거야!
-유니크 혼자 처맞고 있잖아!
-도와주라고! 팀게임인데 답답하네!
이쯤 되자 S.솔리드도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챈 것 같았다.
분명 수비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임에도 굳이 나서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로 나만 내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뭔가 있군.’
데니스의 눈빛은 꼭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뒤쪽에 있던 팀원들에게 공격의 템포를 늦출 것을 주문했다.
내가 홀로 분투하는 것에 숨겨진 의도가 있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우연이지만 오늘 들고나온 왕의귀환을 막기엔 제법 괜찮은 전략이었다.
방패의 특수능력을 이용해 스택을 쌓으려면 아무래도 상대가 공격을 많이 퍼부어주는 쪽이 유리했으니 말이다.
이대로 S.솔리드의 공격 템포가 죽어버리면 내가 스탯을 쌓는 속도도 자연스레 느려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상대가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나는 그것을 이용해 경기를 풀어나가면 그만이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힘차게 지면을 박찼다.
느닷없이 내 속도가 3배쯤 빨라지자 데니스의 시선이 흔들렸다.
-코앞에서 놓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크나이트 아니었어? 무슨 속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데니스 옆을 통과, 내 검은 무서운 속도로 딜러를 향해 날았다.
목표는 마이클이었다.
미안하다 마이클, 네가 가장 가깝고 제일 만만하거든.
“으헉!”
데니스 바로 뒤에 꼭 붙어있던 마이클은 벼락처럼 터진 검격에 비명을 질렀다.
이게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으면 바닥이 피로 흥건할 정도로 깊숙한 공격.
선혈이 튀진 않는다지만 고통은 남기에 마이클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무너지지마!”
데니스가 소리쳐 보지만 한 번 흐름을 탄 내 기세를 막긴 역부족이었다.
눈깜짝할 사이 4연격, 사각 궤적을 그리며 마이클에게 치명상을 안겼다.
무릎이 고꾸라지며 다운되려는 찰나, 날카로운 타이밍의 힐이 마이클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혼돈의 연속, 상황이 급박해지자 데니스의 손이 다시 빨라졌다.
데니스뿐만이 아니었다.
제리도, 마이클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력을 조절한단 개념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S.솔리드! 엄청난 기세로 공격을 퍼붓습니다!”
“어떻게든 상대의 에이스를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의지!”
S.솔리드의 공격은 아주 필사적이었다.
솔리드에서 2년 동안이나 함께했지만 이런 맹공은 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팀의 슈퍼에이스였던 내가 이제는 적이 되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래! 다 퍼부어버려!
-유니크만 쓰러트리면 저런 애송이들! 별거 아니라고!
-유니크 아니라 엠퍼러라니까?
-아무튼 다 죽여!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내게 날아드는 검과 마법이 제발 쓰러져 달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S.솔리드에게선 보기 드문 절절한 공격이었다.
내가 말한 건 이미 다 잊어버린 거냐!
훈련을 함께할 때마다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 있다.
어태커는 언제 어느 순간에서든 마음가짐에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몸이 굳는 것은 물론이요 공격이 무뎌져 상대에게 피할 틈을 허용한다고 말이다.
지금 S.솔리드의 공격이 딱 그런 꼴이었다.
나를 잡아야 한다는 마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공격의 밸런스가 깨지고 말았다.
덕분에 스탯 빵빵하게 채우고 갑니다.
완벽 방어에 성공할 때마다 조금씩 오르는 스탯.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오르는 힘에 포효했다.
“이젠 내 차례다!”
그날 수천만 시청자는 처음으로 가이아의 비밀 하나를 깨달았다.
실드나이트도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