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퍼러 (4)
교룡뇌조를 흉내 내라.
그것이 내가 김민준에게 건넨 조언의 정체였다.
연계에 후두두 깎이는 체력 바를 보며 제리는 어떻게든 자세를 잡으려 애를 썼다.
억울한 얼굴의 제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마법사가 교룡뇌조를 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뻔하다면 뻔한 페이크에 제리가 걸려든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너무 뛰어난 탓이 컸다.
내가 S.솔리드에 몸담은 2년간, 솔리드 선수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그 속에서 가장 힘든 과정을 꼽아보라면 단연 나와 하는 일대일 훈련이었다.
나는 팀을 위해, 그리고 우승을 위해, 선수들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그들을 몰아붙였고 훈련 중에 숨이 턱 막혀 주저앉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돌이켜보면 용케 안 도망가고 버텨낸 게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참여하는 일대일 훈련이 힘든 건 훈련시간이 긴 탓도 있지만 생생한 고통이 끊임없이 전해져 오는 게 큰 이유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수들을 괴롭힌 스킬은 바로 교룡뇌조였다.
뇌격의 힘이 담긴 조법, 정타를 허용하면 몸이 굳어 제대로 된 반격을 하기 힘든 스킬이다.
S.솔리드 선수들은 그렇게 2년에 걸친 시간 동안 교룡뇌조의 모든 것을 맛봤다.
‘그래도 저렇게 놀랄 줄은 몰랐지만.’
조금 전 제리가 보인 회피 동작은 나와 훈련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더라도 교룡뇌조는 피해야 한다.
이것이 나와 대련했던 솔리드 선수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교룡뇌조가 터지면 뇌격에 의해 반응속도가 조금씩 늦어지게 된다.
톱클래스 프로게이머 간의 대결에서 이 차이는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암살자의 공격이 좀 빠른가?
후속타로 들어오는 용의 충격과 열양지의 연계를 생각하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공격을 막아야 했다.
다른 건 다 허용해도 교룡뇌조는 막는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내가 팀을 떠날 즈음엔 S.솔리드 내에 교룡뇌조를 정타로 허용하는 선수가 좀처럼 없었다.
365일 밥만 먹고 디펜스 훈련을 하는데 이 정도를 못해내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대일 훈련에서 내가 애를 먹은 건 아니었다.
상대방이 특정 스킬을 크게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면 그걸 역이용해 이득을 보기도 쉽다.
지옥의 이지선다.
S.솔리드 선수들은 2년 내내 그런 훈련을 해왔다.
만약 제리가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면, 그저 평범한 A급 선수였다면 교룡뇌조에 이렇게 놀라듯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S.솔리드를 떠난 지도 벌써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마치 어제 교룡뇌조에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회피했다는 건 그만큼 제리의 기억력이 좋고 지독한 훈련량이 밑바닥에 깔렸음을 의미했다.
만약 지금 김민준의 상대가 제리가 아니라 그저 그런 선수였다면 이렇게 완벽히 속임수에 걸려들진 않았으리라.
“레이저! 고속 어택!”
“도무지 아크위자드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공세입니다!”
눈속임 공격에 자세가 무너진 제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김민준의 연계는 거의 완벽했다.
쉬운 난이도의 연계 공격이었기에 실수할 여지가 없었고 그렇게 들어간 공격은 제리의 체력 바를 그대로 폭격했다.
쐐애액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제리의 체력 바를 확인한 김민준은 한 걸음 더 파고들었다.
마법사의 전투라면 거리를 벌리는 게 상식인데 이 녀석은 틈만 나면 거리를 좁히고 들었다.
복싱을 했던 습관이 남아있는 탓이다.
나는 민준이와 수없이 많은 일대일 훈련을 하며 이것을 굳이 고치라고 조언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전성기 시절의 김민준 역시 이런 인파이트 방식을 겸비해 세계 최강의 전투 마법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가 복싱을 통해 갈고 닦은 뛰어난 동체시력은 가이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아그니! 대위기! 체력이 30퍼센트도 남지 않았습니다!”
“스타서퍼의 우승이 코앞에 있습니다!”
-우승을 우리에게!
-레이저!
-이대로 끝내버려!
흥분한 중계진, 관중의 외침이 경기장을 들끓게 했다.
제리는 이미 자세가 무너졌으며 김민준은 여전히 공세를 유지할 마력이 남아있었다.
모든 지표가 김민준에게 웃어주는 상황이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제리의 눈빛이 아직 죽지 않은 탓이다.
지금껏 가이아를 하며 저런 눈빛을 한 선수를 수도 없이 봐왔다.
물론 연기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십중팔구 숨겨진 한 수를 가진 선수들이 보이는 눈빛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지금은 더 들어갈 필요 없어.
네가 유리하잖아. 지표를 보라고!
제리가 너보다 마력도 더 손해 봤어.
체력과 남은 시간, 모든 게 네게 유리하단 말이야.
잠시 살길을 내어주고 그쪽으로 튀어나오는 상대를 잡아내면 수월하게 게임을 굳힐 수 있어!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외쳤지만 내 조언이 무대 위의 녀석에게 닿을 리 없었다.
김민준은 뒤로 뺄 생각이 없다는 듯 과감하게 발을 내디뎌 제리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불꽃이 튀었다.
발밑에서부터 올라온 것 같은 수직 공격.
제리가 쏘아 올린 각도 큰 어퍼컷에 소름이 쭉 솟았다.
내가 S.솔리드에서 훈련할 당시 자주 써먹었던 패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픽 하고 스치는 소리를 뒤로 하며 제리의 마법이 뿜어졌다.
굵은 장대비 소리를 크게 틀어두면 이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은 연타가 김민준을 휩쓸었을 때, 승부의 추가 크게 기울었다.
“레이저! 흔들립니다!”
“필사적인 방어! 하지만 조금 전 공격의 데미지가 크게 남은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공격을 몇 대를 날렸는데 그거 한 방 맞았다고 비틀거려! 제대로 싸워!
-아 놔. 끝났네.
-급소 맞은 거랑 같은 거야;; 턱 맞으면 몸에 힘 쫙 풀림.
-지금 디펜스도 거의 반사적으로 하는 거지. 기절했을지도 몰라.
어퍼컷을 허용한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복싱 유망주였던 김민준이 미처 피하지 못할 정도의 날카로운 공격.
그것은 제리의 실력이 한층 더 성장했음을 알리는 결정적 증거였다.
“아그니! 벼랑 끝에 매달려있던 S.솔리드를 구해냅니다!”
가공할 포효가 장내에 터졌다.
그것은 마음 졸이며 경기를 지켜보던 S.솔리드 팬들의 의지였다.
“분위기가···넘어갔다.”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듣지 못한 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코치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선 입을 급히 틀어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 미안하다. 얘들아.”
“뭐 코치님도 사람인데 실수할 수 있죠. 그리고 분위기 넘어간 것도 사실인데요.”
제레미의 대답에 코치의 얼굴은 한층 더 흙색이 됐다.
“그래도 민준이 주눅 들게 하면 안 돼. 잘했다고 격려부터 해주자고.”
김정수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이야기했고 나 역시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아직 뒤에 기회가 남아있으니 부담 없이 게임하라고 말은 했지만 당사자는 내가 게임을 망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무대를 내려오는 녀석의 표정이 몹시 침울했다.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그를 짓누른 것이다.
잘했다고, 좋은 플레이였다고 말해 주려는데 나보다 먼저 다가간 사람이 있었다.
“생각보다 선전했어! 너는 말이야. 이 형님이 바라던 것보다 더 훌륭한 게임을 했다고. 짜식 어깨 펴!”
김민준의 어깨를 땅에 못질하듯 두드리는 녀석은 제레미였다.
새삼 많이 변했단 생각이 들었다.
S.솔리드 때는 팀의 막내라 그런지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미지였는데 스타서퍼에선 더 어린 팀원들이 있어서 그런지 중간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적당히 때려요. 어깨 빠지겠네.”
“인상 풀어. 전 세계 수백만 관중이 지금 우리 지켜보고 있다고. 그리고 아직 게임 진 거 아니다?”
그리 말한 제레미는 민준이의 기분을 풀어주는 한편 곧장 내게 다가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제리는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역시 엔트리는 정해둔 대로 갈 거지?”
난 고갤 끄덕였다.
큰 대회를 앞두고 상대의 수를 짐작해 인원 구성을 미리 짜두는 것은 달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실제 시합에선 변수라는 게 있기 마련이기에 예상한 대로 흐르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오늘 스타서퍼에겐 해당사항 없는 일이었다.
잠시 뒤, 전광판에 스타서퍼가 준비가 됐음을 알리는 초록 테두리가 올라오자 배틀아레나가 크게 술렁였다.
-뭐야? 지금 레디 누른 거임?
-작전시간 3분 아니야?
-월챔 결승전에서 30초만에 칼레디를 박아버리는 팀이 있다?
-레전드행 ㅋㅋㅋㅋ
-이러고 지면 상당히 쪽팔릴 텐데? ㅋㅋㅋ
-뭐. 레디 좀 빨리 누르면 압박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조금 전 경기에서 자신감을 회복했는지 S.솔리드 팬들은 다소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빠른 레디는 팀을 당황시키기 위한 잡스런 계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의 빠른 준비완료는 즉석에서 생각해 낸 계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헤르메스로부터 장비스펙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 그림을 그려왔다.
기밀 유지를 위해 다른 팀과 스크림을 할 수 없는 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작전 완성도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이건 된다!”
나와 함께 연습한 5라운드에 나설 팀원들, 그리고 연습을 함께한 스타서퍼 관계자 전원이 입을 모아 말했다.
이건 되는 전략이라고.
북미리그에 혜성처럼 등장해 스나이퍼 조합으로 백은하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나는 우리의 작전이 이번 월챔에서 전 세계 가이아 유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거라 확신했다.
“자. 그럼 한 번 휘저어 주자고!”
*
“결국 S.솔리드는 작전 시간을 꽉 채우는군요?”
“예. 시간을 덜 쓴다고 해서 점수를 더 주진 않으니까요.”
“스타서퍼. 괜히 섣부른 결단으로 실수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수?
-아니 이 양반들 실수하시네.
-북미 해설자라고 편파 지리네?
-아 근데 궁금하다. 대체 30초만에 무슨 전략을 짠 거지.
-30초만에 칼레디 박은 거 보면 미리 준비한거임.
“양 팀 선수들이 무대 위로 올라옵니다. S.솔리드는 무난한 밸런스 조합입니다.”
“스타서퍼 팀을 한 번 보시죠. 이 조합은 상당히 생소합니다. 적어도 제가 받은 데이터 상으론 스타서퍼가 이러한 조합을 시도한 적이 없다고 나오는군요.”
-뭐야?
스타서퍼 4인의 얼굴을 살핀 팬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아크나이트 엠퍼러를 필두로 하이프리스트, 엘레멘탈 마스터, 음양사로 이루어진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레이저가 없는데?
-잠깐. 스타서퍼 마법사 다인스킬의 키맨은 레이저야;;
-이게 무슨 조합이야?
스타서퍼의 경기를 관심 있게 지켜봐온 팬들은 스타서퍼의 엔트리에 경악했다.
팀전에서 마법사를 둘 이상 기용해 다인스킬을 노리는 전략이야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문제는 키맨이 빠졌단 점에 있었다.
키맨은 다인스킬의 소유권을 가진 플레이어를 의미한다.
스타서퍼의 다인스킬 키맨은 김민준, 김민준이 없으면 인원수가 맞아도 다인스킬은 쓸 수 없었다.
즉, 유호영과 유성철이 따로 놀게 된단 뜻이다.
-아니 다인스킬이 없는 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실력적으로 레이저가 더 낫잖아? 이거 엔트리 누가 짰냐.
-레이저 언급할 때가 아님. 어차피 다인스킬 버릴 거면 헤븐메이커를 썼어야지. 솔리드 라인업 봐봐. 또그니 또디세이아 나왔어.
-아···헤븐메이커 썼으면 마법사 개쳐바르는 각인데;;
-헤븐메이커 거르고 2부리그 뉴비 채용 실환가.
-입금 완료 ^^ 주작 ON.
-ㄹㅇ 뒷돈 받은 거 아니야? 겜 끝나고 계좌 조사 해야 함.
S.솔리드 팬은 물론이고 스타서퍼 팬들조차 이번 라운드는 실수를 인정하고 다음 게임부터 제대로 하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모두가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일부 눈썰미 좋은 스카우터와 톱레벨의 선수들은 이번 스타서퍼의 결정을 단순히 실수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 중요한 무대에서 스타서퍼가 아무렇게나 픽을 할 리 없지.
-조합을 잘 보면 다인스킬은 아니어도 상당히 시너지가 나는 클래식한 구성이야. 2시즌까지만 해도 이런 식의 구성이 나름 인기가 있었거든.
-조합의 핵심은 아크나이트인가?
-하이프리스트, 음양사, 엘레멘탈 마스터. 전부 버프를 걸어줄 수 있는 클래스고.
-어떤 식으로든 유니크, 아니 엠퍼러가 탄력을 받겠어.
그리고 잠시 뒤, 소수파가 예상했던 대로 게임이 흐르기 시작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탄력을 받겠다고 예상했던 그림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결과물이 나왔단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