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139화 (136/170)

엠퍼러 (2)

제2회 월드챔피언십 결승전.

전년도 챔피언인 S.솔리드와 스타서퍼의 경기를 보기 위해 배틀아레나의 30만 관중은 물론이고 수천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TV며 PC앞에 모여 있었다.

고작 세계대회 2년 만에 이런 성장을 거둘 수 있던 이유는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올린 e스포츠 시장의 규모, 세계 제일의 IT기업으로 불리던 지오의 영향력이 컸다.

21세기의 혁명이라 불리는 VR게임의 출발, 그리고 독점.

가이아는 다른 수많은 게임과 달리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게임 시장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RPG를 중심으로 한 게임은 지금도 수없이 많지만 현실처럼 생생한 감각을 전해주는 게임은 가이아뿐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너무나 생생한 감각 탓일까.

몸이 굳은 팀원들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왔다.

우리 팀 중에서 그나마 멀쩡한 건 나와 정수형뿐이었다.

“무슨 생각해?”

웬만해선 입이 쉬질 않는 제레미도 이때만큼은 조용했다.

“형이랑 나는 이번이 두 번째잖아.”

“그렇지.”

“그래서 난 긴장 안 할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더라고. 그래서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봤는데?”

제레미는 주변을 잠시 둘러보더니만 아무것도 아니라며 말을 삼켜버렸다.

비록 입을 통해 말을 들을 순 없었지만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S.솔리드와 스타서퍼의 차이.

승패를 예측하는 거의 모든 기사엔 스타서퍼는 유니크와 헤븐메이커를 제외하면 평균전력에서 S.솔리드의 아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에이스가 제 몫을 하지 못하면 승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걸리는 부담은 둘째 치더라도 팀원들 실력이 부족해 긴장된단 이야길 지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축하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랐는지 대기실 위쪽이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그 진동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운을 뗐다.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것만큼 팀원들 실력이 약한 건 아니야.”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제레미는 눈을 번쩍 떴다.

“아니 그런 이야길 지금 해도 돼?”

팀원들이 들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슬쩍 둘러보니 다들 시선은 딴 곳을 보고 있지만 귀는 이쪽을 향해 열려 있었다.

“못할 말 한 건 아니잖아? 우리가 준비함에 있어서 소홀했나?”

“그건 아니지. 우리 훈련량을 소홀하다고 치면 북미 팀은 전부 코 박고 죽어야 해.”

“연습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승산 있어.”

조용히 이야길 듣고 있던 김정수는 박수를 치며 팀원들 어깨를 두드렸다.

“들었지? 우리 에이스가 연습한 만큼만 하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길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승산이 있다고 했죠.”

유성철이 태클을 걸었지만 김정수는 아무래도 상관없단 표정이었다.

“한솔아. 이제 슬슬 올라갈 시간인데 승리를 위한 팁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런 팁이 있으면 진즉 줬지.

하지만 김정수도 그걸 알고 던진 말이었다.

여기선 없는 팁을 짜내기보단 긴장을 풀만 한 우스갯소리가 한 번이 필요했다.

“개인라운드 결과는 팀전에서 얼마든지 뒤집어줄 수 있으니까 최대한 아프게 때리고 와.”

내 말에 모두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 얼굴이었다.

져도 좋으니 최선을 다하라는 것도 아니고 아프게 때리고 돌아오라니,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프게 때리고 오라고?”

“어떻게 때려야 더 아픈지는 알려줬잖아. 다들 기억하지?”

순간 팀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훈련하며 겪었던 인상적인 통증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다.

스타서퍼뿐만 아니라 가이아 프로 선수라면 데미지와 고통이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체력을 덜 깎더라도 훨씬 더 고통을 줄 수 있는 공격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통이 심해지면 집중력이 떨어지며 평소 나오지 않을 실수가 벌어진다.

상대의 실수를 끌어내기 위해 더 아프게 때리는 것만을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선수도 있었다.

고통은 역시 아크나이트지.

나는 다시 태어나기 전에도 아픈 곳을 골라 떼리는덴 제법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아크나이트는 무도가에 비해 그런 플레이가 보다 편한 쪽에 속했다.

상식적으로 주먹보단 날붙이에 당하는 게 더 아프지 않겠는가.

“아프게 공격해야 상대하는 입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반응이 늦어지거든.”

“확실한 팁 맞아?”

“전신접속기 초기에나 돌던 이야기 아니야?”

가이아 선수들이 새로운 접속기에 익숙해진 이후, 점차 고통에 몸을 사리는 사람들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매번 상대가 공격할 때마다 몸이 움츠러드는 선수는 자연스럽게 리그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탓이다.

이제 리그에 남은 선수들은 하나같이 강골, 웬만한 공격엔 눈 하나 꿈쩍 않는 선수이거나 몸놀림이 좋아 어지간하면 맞지 않고 시합을 이끌어가는 선수들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말했다.

“진짜 아프면 얘기가 다르거든.”

반신반의하는 선수들에게 이제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보여줄 차례였다.

*

전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시작된 결승전 제 1라운드.

경기장은 몹시도 소란스러웠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죠? 스타서퍼의 유니크 선수가 클래스를 변경해서 나왔습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요.”

“큰 무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한 전략일까요?”

“아마 그렇겠지만 쉽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두 개 이상의 클래스에 도전한 프로 선수는 많았지만 완벽하게 소화했다고 평가받는 선수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성공적으로 두 개 이상의 클래스를 다루는 선수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상급 레벨에선 찾을 수 없는 게 사실.

현재 복수의 클래스를 다루는 선수들은 전부 1부리그에서도 아래쪽에 위치한 선수들이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최상위 레벨로 오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탓이다.

“이거 S.솔리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S.솔리드는 유니크를 잡기 위해 맞불작전을 선택했는데 오히려 상성에서 불리한 싸움이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린 그를 엠퍼러 선수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요?”

“시청자 여러분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번엔 유니크로 하시죠. 하하.”

-아크나이트라니, 제정신인가?

-엠퍼러···낯이 익은 닉네임인데.

-1년 전에 마스터 이상 찍어봤던 애들은 다 알 걸? 장비는 초보자 티가 나는데 압도적인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그게 유니크 세컨드계정이었다는 거지?

-그래.

-아니 근데 잘 다룰 수 있긴 한가? 최상위 티어 유저가 복수 클래스 다루는 건 무리인 게 맞다고 다들 인정한 거 아님?

-그렇긴 한데 유니크라면 다를지도 모르지.

-얼씨구. 아예 그냥 마법사도 하겠다고 하지 그래 왜.

-유니크. 그는 신이야!

-완성도를 어느 정도 챙겼으니까 나왔겠지. 아니고서야 미쳤다고 월챔 결승전에서 클래스체인지 하겠어?

유니크가 클래스 변환에 성공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가운데 경기가 시작됐다.

유니크의 상대는 스페셜이란 닉네임을 쓰는 데릭 슈미드.

S.솔리드의 무도가 라인을 책임지는 핵심 인원이었다.

정령의 화산에서 펼쳐지는 제 1라운드.

한솔은 달려드는 상대를 보며 왜 솔리드에서 이 녀석을 냈을까 의구심을 품었다.

북미 원정 스크림에서도 이미 실력을 확인했지만 스페셜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북미 최고의 팀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실력이 있지만 그게 전부였다.

벌써 무도가로서 3년 간 뛴 한솔에게 스페셜의 동선을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른손을 뻗어오는 스페셜의 공격을 방패로 차단, 그와 동시에 한솔의 검이 빛살처럼 뿜어졌다.

“유니크 시작하자마자 앞서나가기 시작합니다!”

“허투루 들고 나온 게 아니란 걸 조금 전 공방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페셜 선수는 현재 사이클론에 대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드거든요!”

“그런 선수의 공격을 유니크, 힘도 거의 들이지 않고 막아냅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다시 반격이···!”

방패로 흘림과 동시에 반격한다.

아크나이트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자질이지만 눈으로 쫓기도 어려울 만큼 빠른 공방속에서 이걸 해낸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빌어먹을. 아크나이트가 이렇게 빠를 리 없는데···!’

스페셜은 근접전 공방에서 상당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이아에서 가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직업군은 단연 암살계다.

저 아래 브론즈 티어부터 천상계에 이르기까지.

암살자의 민첩성이 제일 뛰어나단 사실은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셜의 공격은 유니크의 방패 너머에 전혀 닿질 못했다.

열 번 공격하면 열 번 막히는 상황, 스페셜은 마력고갈과 함께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스크림 때보다 더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스타서퍼와 스크림을 시작하기 전만 해도 스페셜은 유니크를 극복할 수 있는 상대라 생각했다.

설령 넘어서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재능이면 충분히 비빌 수는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결과는 전혀 달랐다.

유니크, 그는 일대일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같은 무도가임에도 어떻게 이 정도로 차이가 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공격을 한 대를 적중시키면 두 대가 돌아오는 수준의 날카로운 반격, 놀라우리만큼 정교한 스킬 사용까지.

스페셜은 처음으로 압도적 재능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S.솔리드 원년멤버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한 괴물의 실체였다.

‘그래도 그땐 체력을 깎을 수라도 있었다고!’

상대의 공격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암살계는 디펜스가 좋은 클래스가 아니다.

상대의 공격 템포에 맞춰 장풍을 쏘아내면 서로 체력을 어느 정도 교환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유니크가 아크나이트로 돌아온 지금은 체력을 교환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가로 세로 1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아크나이트의 방패가 신들린 것처럼 공격을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속도가 분명 더 빠른데도 공격이 전부 막힌다면 의미하는 건 한가지뿐이었다.

‘내 공격이 다 읽히고 있다?’

당황한 스페셜의 표정을 통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짐작한 한솔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엠퍼러로 처음 올라선 실전 무대.

예열은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한 한솔의 템포가 더욱 빨라졌다.

지금도 충분히 버거운 상태라고 생각했던 스페셜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어딜 때릴까?’

가이아는 게임이지만 낭심을 공격하거나 눈알을 찌르는 등의 행위는 반칙이다.

어린아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굳이 그런 급소를 때리지 않더라도 고통을 줄 수 있는 부위는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내가 오늘 들고나온 장비는 특수한 인챈트 처리를 해둔 상태였다.

마법을 부여해 더욱 효과적으로 상대를 괴롭힐 수 있도록 밑 작업이 되어 있었다.

검신에 발린 독은 스페셜의 육체를 서서히 잠식했고 이제는 관중들도 그 차이를 느낄 정도로 안색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쟤. 왜 저래?

-얼굴이 맛이 갔는데?

-뭐 잘못 먹고 나왔나.

‘뭔진 몰라도 당했다!’

몸의 이상을 느낀 스페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솔이 들고나온 독은 리그에선 쉽게 보기 힘든 것이었다.

굳이 독을 쓴다면 효과를 빨리 보는 것을 쓰는 게 나은 이유에서다.

던전의 보스들처럼 체력이 엄청나게 많아 천천히 중독시켜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몸이 무겁고 고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상대의 검이나 방패에 부딪히는 것만으로도 뼛속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맥없이 주저앉을 수 없던 스페셜은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스킬을 뿜어냈다.

검은 용이 주먹에 깃들어 포효하는 순간, 한솔의 방패가 빛을 뿜었다.

파워리플렉터, 동급의 근접 공격은 모조리 튕겨낼 수 있다는 최강의 반격기가 터진 것이다.

방패를 때림과 동시에 공격에 반사당한 스페셜은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

“스타서퍼가 1라운드를 차지하며 S.솔리드의 기선을 제압합니다!”

압도적인 격차로 1라운드를 마친 정한솔은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으로 무대를 떠났고 흥분한 관중들은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외쳤다.

-유니크!

-유니크!

-한국의 희망! 황니크!

-이제 엠퍼러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님?

-스페셜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무너질 줄이야!

S.솔리드 팬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아무리 상성에서 불리했다고 하지만 스페셜이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Fuck!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저 괴물을 어떻게 잡아야 하지?

-암살계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어.

무기력한 모습만 보였지만 스페셜은 북미에서도 2위에 랭크된 암살자였다.

-그렇다면 같은 탱커끼리의 싸움에선 승산이 있을까?

탱커계에서 제대로 된 공격이 가능한 클래스는 아크나이트와 버서커.

하지만 북미에서 뛰고 있는 선수를 모두 떠올려 봐도 지금과 같은 임팩트를 보여주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피케, 피케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멍청한 새끼. 괜히 마법사 잡겠다고 세팅 망치는 일만 안 했으면 더 멋진 경기를 보여줬을 텐데!

경기장 곳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VIP석에서 관전중이던 피케는 쓴웃음을 지었다.

피케가 속한 블랙이글스는 스타서퍼의 마법사 라인을 효과적으로 봉쇄하는덴 성공했지만 허를 찔려 결국 준결승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놀라운 선수다.’

피케는 벤치로 향하는 유니크를 보며 생각했다.

조금 전 그가 보여준 플레이는 아크나이트 디펜스의 완벽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만약 자신이 스페셜을 상대했다면 비슷한 수준의 디펜스 능력을 보였겠지만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인정하긴 싫지만 조금 전 경기에서 보여준 유니크의 실력은 결코 자신의 밑이 아니었다.

데뷔 이래 아크나이트만 다뤘던 자신이 클래스 숙련도에서 밀릴 줄이야.

항상 천재 소리만 들어온 피케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유니크와 다시 한 번 붙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피케뿐만이 아니었다.

1라운드를 관람한 세계 최고 레벨의 선수들은 언젠가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 정한솔을 기억했고,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유니크!

-유니크!

-우릴 우승으로 데려가 줘!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솔은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을 향해 해맑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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