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138화 (135/170)

엠퍼러 (1)

아크나이트, 내가 죽기 전까지 가이아 프로씬에서 쭉 다뤄왔던 탱커계열의 밸런스 클래스.

실드나이트보다 방어는 부족하지만 그만큼 공격에 가담을 할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물리 방어력이 강하기 때문에 웨폰마스터나 무도가에게 상성으로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이다.

가이아의 프로리그 시스템상 라운드마다 직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지만 1개의 시합을 기준으로 직업을 교체하는 건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슬슬 2개 이상의 클래스를 다루기 시작하는 프로 선수들이 늘고 있었다.

당연히 장비를 획득하는데 2배 이상의 노력이 들지만 이렇게 다수의 클래스를 확보해두면 시즌을 진행하는데 있어 상당히 유리한 점이 많았다.

암살계가 강한 팀을 상대로 할 땐 탱커를 꺼내고, 마법계가 강한 팀에겐 암살자를 꺼내는 식의 전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S.솔리드와의 결승전을 앞두고 내가 유니크가 아닌 엠퍼러 캐릭터를 조율하는 것을 보고 팀원들은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그간 실적을 쌓지 못했더라면 ‘형 뭐 잘못 먹었어요?’ 라거나 ‘한솔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라는 소릴 들었을 테지만 스타서퍼에서 필드 공략을 하며 꾸준히 엠퍼러를 활용했기에 그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우, 쉣!”

방패밀기에 나가떨어진 제레미가 팔뚝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

“이건 반칙이지!”

팀원들과 매일 함께하는 일대일 훈련.

언제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연습이지만 오늘은 특히 더 했다.

제레미는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억울한 얼굴이었다.

“진짜 더럽게 단단하다. 상대 팀으로 만났으면 토했을 거 같아.”

유니크로 연습에 어울렸을 땐 느끼지 못했던 방어력에 제레미는 혀를 내둘렀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준이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엠퍼러요. 결승전보다 블랙이글스 전에서 쓰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맞아.”

난 녀석의 질문에 긍정을 표했다.

아크나이트 특성상 암살자가 강한 팀을 상대로 활용하는 게 더 유리했다.

둘 중 암살클래스 수준이 더 높은 건 블랙이글스였고 마법사 레벨이 높은 쪽은 S.솔리드였다.

블랙이글스엔 실력있다 할만한 마법사가 타우러스뿐이었지만 S.솔리드엔 제리를 비롯해 마이클이 있었다.

3년차에 접어들며 완숙의 경지에 이른 S.솔리드 마법사 듀오의 실력은 김민준 유호영 페어와 비교해 강점이 상당했다.

“상성만 따지면 그렇지. 하지만 블랙이글스 전에서 아크나이트를 미리 쓰면 의미가 없거든.”

“의미가 없다니요?”

최상급 프로 선수라는 것들은 하나 같이 괴물이다.

지금은 내가 그 괴물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긴 하지만 죽기 전까지 나는 이들의 플레이를 그저 바라만 보는 위치에 있었다.

이번 시즌 월드챔피언십만 해도 그런 장면이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이세준을 상대할 때 딱 한 번 썼던 연계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고 나온다거나, 우리가 쓴 전략을 짧은 시간 내에 분석, 역이용하는 것들이 대표적이었다.

내가 만약 미리 엠퍼러를 꺼내 활약했다면 처음 겪는 생소함에서 얻는 이점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S.솔리드는 내 포지션 변경을 보고 짧은 시간 안에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팀이었다.

“정말 괜찮아? S.솔리드···마법사 레벨이 높은 팀이던데. 똑같이 유니크로 나가는 건?”

“그래. 네 말이 틀린 적은 없지만 이번엔 밀러 말이 맞는 것 같아. 게다가 아크나이트로 나가면 다인스킬 위력도 떨어지지 않겠어?”

밀러는 물론이고 김정수까지 나서서 우려를 표했다.

“음. 이 부분은 설명이 좀 필요하겠네. 훈련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씻은 다음에 모입시다.”

*

결승전을 어떻게 진행할 지를 브리핑하는 자리.

감독과 코치는 물론이고 대표까지 의자에 앉아 이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서준혁 대표는 이따금 폰을 들어 내 모습을 촬영하곤 했다.

어디에 보낼 물건인지 왠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번에 아크나이트로 시합에 나간다고?”

“연계는 괜찮겠어? 그동안 쭉 제레미랑 호흡 맞춰왔잖아.”

감독과 코치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연계는 괜찮습니다. 다인스킬을 써야한다면 그간 필드 공략을 하면서 정환이, 대환이랑도 꾸준히 호흡을 맞춰왔으니까요. 물론 제레미와 연계 했을 때를 보면 공격력은 좀 떨어집니다만 탱커계열 특유의 단단함이 있습니다. 그 말은 밀러의 부담이 덜하단 얘기죠.”

“음, 하지만 S.솔리드는 마법사 레벨이 높은 팀이라고 들었는데?”

팀에서 우려하는 부분은 역시 이게 제일 컸다.

S.솔리드가 마법라인이 강하다는 것, 굳이 상성 우위를 점하는 유니크를 포기할 정도의 메리트가 있느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월챔 시작 전에 솔리드와의 스크림요. 그 때 우리 팀의 승리 플랜은 저와 제레미의 기동력을 이용한 대형 오브젝트 신경전이었습니다.”

“그랬지.”

“첫날 저희는 3:1로 개인전 라운드를 틀어막은 시합을 제외하면 전패했습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지···.”

“하지만 결승전에선 이런 그림이 나오질 않습니다. 7판 4선승제니까요. 개인전을 다 잡아도 무조건 팀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스크림을 전부 마쳤을 때 저희 승률은 3할이었습니다. 대형오브젝트로 난전을 유도했는데도 그 정도죠.”

“그럼 더욱 이해가 안가는데? 아크나이트는 무도가보다 기동력이 더 떨어지는 거 아니었어?”

감독의 지적에 고갤 끄덕였다.

“떨어집니다. 하지만 다들 간과하신 게 하나있죠.”

스타서퍼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가 놓친 포인트가 있었다.

“그건 바로 상대 팀이 우릴 더 의식하고 있단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와 제레미의 암살계 라인을요.”

“암살계···라인?”

“첫날, S.솔리드의 팀전 조합은 실드나이트 하나에 마법사 셋이었습니다. 그랬던 게 연습 경기 마지막 날에 이르러선 힐러 하나에 마법사 하나, 탱커 둘로 바뀌었죠.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명확합니다.”

“흐음.”

“마법사를 다수 기용하는 조합으론 우리 팀을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겁니다. 대형오브젝트라는 변수가 생겼으니까요.”

스크림 첫날, 오우거로드에 손도 대지 않았던 시절의 S.솔리드 화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아무리 마법사가 암살계에 취약하다곤 하나 데니스라는 최강 탱커가 호위, 디버프를 던지며 마법사 셋이 화력을 뿜어내는데 접근조차 어려운 양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오우거로드를 끌어들인 이후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법사의 화력이 세다한들 그것은 유저를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거대한 덩치에 아무리 두들겨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오우거로드는 S.솔리드의 작전을 무너트리는 핵심요소였다.

“S.솔리드의 마법사 라인이 강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마법사만 강한 건 아니죠. 정확히 분석하자면 그 팀은 암살계 라인을 제외한 전 라인이 두텁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장코치는 알아들었어?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한솔이 네 말은 S.솔리드는 마법사뿐만 아니라 탱커쪽도 전력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팀에 대한 맞춤 전략으로 탱커에 무게를 두고 나올거다 라는 말을 하려는 거잖아? 맞아?”

“네.”

S.솔리드는 결승전에서 암살계 봉쇄를 위한 탱커 중심적 조합을 준비해올 거라는 게 내 예상이었다.

이야길 들은 감독은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만약 예상대로 안 될 경우엔? 그래. 예상이 적중했다고 하자고. 하지만 클래스 변경은 경기 내내 유지해야 해. 저쪽에서 다시 마법사 비중을 높인 전략으로 나오면 우린 손해만 보는 거 아니야?”

“클래스는 고정이지만 장비는 라운드마다 바꿀 수 있습니다. 마법저항력 위주로 세팅해서 대응하면 무도가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마법사 상대로도 1인분은 할 수 있습니다.”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감독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무난한 반응이었으며 코치는 일리가 있다는 쪽, 팀원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그간 이뤄놓은 커리어가 탄탄한 건 이럴 때 좋았다.

1부 하위 팀 말석이나 전전하는 선수는 월챔에 올 일도 없겠지만 갑자기 클래스 변경 이야길 꺼내면 헛소리 하지 말라며 쓴소리나 들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도와줄만한 일이 있나?”

잠자코 듣고 있던 대표가 불쑥 끼어들었다.

만약 대표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직접 나서서 요청이라도 해야할 판이었는데 다행스런 일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도와주겠다고 나섰으니 더 확실한 서포트를 기대할 수 있었다.

“있습니다.”

“그래. 부담가지지 말고 시원하게 얘기해 봐.”

나는 말을 하다말고 잠시 팀원들을 돌아봤다.

팀원들은 무슨 얘길 하려고 저러지? 하는 얼굴이었다.

“그동안 대표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저희를 지원해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알아주니 고마워.”

“하지만 팀원들이 타 팀 선수들에 비해 속을 썩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속을 썩이지 않는다?”

“예. 제 기억이 맞다면 저희는 아직 대규모 보급 요청을 드린 적 없는 걸로 압니다.”

물자보급.

가이아 프로팀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가장 신경 쓰는 단어중 하나다.

프로 선수들이 리그를 치르며 제일 중요시하는 물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장비, 두 번째가 스킬이다.

최상위 팀은 필드 공략을 통해 웬만한 물품을 자급자족 할 수 있다지만 그럼에도 시즌을 치르다보면 웃돈을 줘서라도 잡고 싶은 물건들이 시장에 풀리곤 한다.

확률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팀 하나가 일 년에 획득하는 물자 숫자와 서버 전체에서 나오는 물자의 숫자를 비교하면 총량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 프로급이 쓸만한 물건은 한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전혀 안 들어가진 않았는데?”

“그래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대규모’ 라고요.”

“이거 우리 에이스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걱정되는 걸?”

“어젯밤 헤르메스에서 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원한다면 다른 곳에 제시하기 전에 물건을 넘겨주겠다고요.”

“으음.”

대표의 얼굴에 순간 고민하는 빛이 어렸다.

헤르메스가 제시할 정도의 물건은 보나마나 상당히 높은 가격이 될 게 분명한 탓이었다.

“이번에 저희 결승 진출로 헤르메스가 상당히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품을 걷어낸 합리적인 가격에 지원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래서···그 합리적인 가격이란 게 대략 얼마쯤 되는 거지?”

그 질문에 나는 싱긋 웃었다.

“500만.”

“500만원?”

다들 정말 합리적이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밀러와 제레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어진 나의 한마디가 모두를 침묵시켰다.

“500만 달러입니다.”

*

“자자, 프로는 근성이야 이자식들아! 보급 없어도 될 놈은 된다!”

K퀘스트 코치는 입만 열면 개소릴 해대는 인간이었다.

저런 말을 했으면 팀원 모두에게 공평하기라도 하든지.

뒤로는 에이스에게 보급 밀어주는 걸 뻔히 아는데 왜 저런 말로 팀원들 속을 뒤집는지 참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자자, 이번 시즌 포스트시즌에만 올라가면 지원도 빵빵하게 나올 거다. 다들 더 열심히 해라! 그럼 우리도 올라갈 수 있다!”

모기업 지원 열악한 거야 누가 모르나.

그래도 최소한 경쟁할 수 있는 틀은 맞춰줘야 할 거 아닌가.

헛소리 좀 작작하라고 화를 내려다가 문득 꿈이란 걸 깨달았다.

“정말 생생하고도 좆같은 꿈이군.”

자리에서 일어나 세면부터 했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준혁 대표가 500만 달러를 지원해주기로 한 건 다행스런 일이었다.

월드챔피언십 결승무대까지 올라왔는데 여기서 투자를 머뭇거렸다면 실망할 뻔 했다.

500만 달러, 물론 적지 않은 돈이란 거 안다.

하지만 세계무대를 밟는 팀들 중 그 정도도 안 쓰는 팀은 없었다.

향후 2년 내로 4대 메이저 리그 최상위권 팀들은 연간 보급비용으로만 수백억씩 써대는 시대가 열린다.

자본력의 중요성이 점차 대두되며 일부 팬들은 개인의 실력보다 장비빨로 승부가 나는 좆망게임이라며 욕을 했다.

PVP게임을 이렇게 운영하면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운영진은 이러한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는 자본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게임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장비나 스킬에 의한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론 게임의 승리를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플레이어 개인의 역량입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필드 공략에 많은 투자를 한 상위권 팀들간 물자 차이는 미세한 수준이며, 이와 같은 보급 광풍이 열리게 된 원인은 프로 팀의 과열경쟁 덕에 벌어진 거란 논리였다.

운영진은 최근 물자를 놓고 벌이는 머니 경쟁에 거품이 끼어있음을 경고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달궈진 현금 트레이드 시장이 균형을 잡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프로 선수들이 작은 차이에도 얼마나 목숨을 거는지, 그리고 팀을 운영하는 주체들이 얼마나 대회 우승을 갈망하는 지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헤르메스가 제시한 가격은 정말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1퍼센트 차이에도 목숨 걸고 경쟁하는 프로들이다.

그러나 헤르메스가 제시한 물건을 제대로 활용하면 이번 시합에서 최소 3퍼센트 이상의 전력상승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스타서퍼가 헤르메스의 유일한 후원 기업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거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희는 진심으로 스타서퍼 팀의 우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우승하면 뭐 보너스 없습니까?”

“하하···위에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남자를 돌려보낸 뒤, 나는 손에 들어온 장비를 쓰다듬었다.

500만 달러의 물자 중에 내 것은 단 하나, 백금색에 고대 룬문자가 각인된 방패뿐이었다.

“형껀 그게 전부에요?”

유호영이 눈을 꿈뻑거렸다.

“전부야.”

“아니. 방패 하나 사는데 500만 달러를 썼다고?”

“팀원들 것도 있잖아.”

제레미는 불쑥 끼어들어 건네받은 장비를 요리조리 돌려봤다.

“이럴 거면 그냥 필드 공략할 때 형 거 챙겨두지.”

“내가 그렇게까지 할 순 없지.”

아무리 팀의 에이스라도 장비를 마음대로 분배하면 분란이 생기기 마련이다.

심지어 내 대회 주 포지션은 무도가 아닌가.

무도가 장비를 먼저 챙기는 건 제레미와 합의를 하면 될 일이지만 나중에 포지션 변환을 대비해서 아크나이트 장비까지 챙기겠다 하면 그건 분명한 월권이었다.

팀에 아크나이트가 둘이나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준비는 다 끝난 건가?”

“그래.”

조촐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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