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검승부 (2)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무대는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발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이곳의 이름은 유구의 천칭.
가이아에서 유일하게 장외패가 가능한 맵이다.
천칭 중앙의 석조기둥을 사이에 두고 나와 이세준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팬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팬들이 이 매치업을 기다려왔다.
사실 이세준과 시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그러니까 내가 K퀘스트에서 방패를 들고 있을 땐 제법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결과야 말할 것도 없이 모두 완패.
당시 히드라스피릿을 장착하고 무대를 휩쓸던 이세준은 그야말로 사신 같은 존재였다.
‘옛 생각 솔솔 나네.’
감독과 코치는 망설임 없이 날 버림패로 이용했다.
그땐 사실 억울하기도 했다.
이세준 같은 특급 암살자만 아니면 승률이 5할은 나오던 때였다.
1승 카드는 아니라지만 충분히 저격용 카드로 나름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매번 던지는 패로 소모됐으니 말이다.
그것이 선수 사이 정치 결과물이었단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세준에게 매번 얻어터지는 와중에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녀석을 꺾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을 멈추지 않았단 점이다.
만약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평생 돋보였던 적 없는 내가 그렇게 오래 프로 생활을 이어갈순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건 아니고. 엄청 아팠거든.
다시 얻어터져가며 연구하라면 솔직히 자신없었다.
그만큼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제법 힘들었던 시기다.
옛 생각을 털어내며 천천히 중앙으로 나가는데 이세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르는 선수지만 오늘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이 엿보였다.
천하의 이세준도 긴장을 다하네.
애써 평범한 척 해보지만 내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 미묘한 표정은 과거에 내가 이세준을 상대로 나서며 지었던 표정과 똑같았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자, 그럼 가볼까!”
나의 몸이 전장 위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이세준의 발이 빨라졌다.
그림자발자국을 이용해 크게 한방 먹여주려는 찰나, 이세준의 눈이 금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통찰안인가?
안광이 저렇게 빛나는 스킬은 대게 시간에 제약이 있는 스킬이 많다.
마력이 소모되거나 유지시간이 짧기에 일단은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피한 쪽을 응시하며 이세준의 고개가 따라왔다.
마력 소모량으로 비교하면 이세준의 통찰안이 한 수 우위에 있는 상황, 나는 은신을 푼 뒤 열양지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
녀석이 열양지를 막아내는 사이, 거리를 좁히고 들어간 나는 인파이트를 시도했다.
히드라스피릿을 가지고 있던 시절의 이세준은 인파이트에서 무적에 가까운 힘을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이클론이 그림자발자국을 가지지 못한 것처럼, 이세준의 미래 역시 바뀌었다.
용의 충격과 교룡뇌조로 압박하자 이세준의 손이 잔영을 남기며 여러 개로 늘어났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연타에도 이세준의 체력 바는 요동이 없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디펜스 능력이었다.
“겨우 이 정도냐!”
공격을 연달아 커트하던 이세준이 날 도발했다.
선수들 사이에서 하는 말은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입모양은 그대로 보이기에 독화법에 익숙한 사람이면 간단한 말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나는 희게 웃으며 공격의 템포를 한단계 더 올렸다.
피지컬의 극한,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의 스킬 연계가 펼쳐지자 이세준의 체력 바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공음과 함께 들어오는 이세준의 주먹을 흘림과 동시에 아웃사이드 킥으로 녀석의 다리를 공략했다.
쩍하는 소리가 수차례 반복 되자 녀석의 이마에 잔땀이 맺혔다.
로우킥이 들어오면 무릎이나 정강이로 방어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 이세준은 널리 알려진 대로 로우킥 방어를 시도했지만 움직임이 어색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도 이런 최상위레벨의 근접전을 해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나만큼 빠른 선수가 어디 흔한 게 아니다.
게다가 너와 난 경험의 밀도부터가 달라!
이세준의 피지컬은 의심할 여지없는 세계 톱클래스.
순수한 속도 면에서 이세준이 내 공격을 따라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 생까지 합쳐 10년에 걸쳐 쌓아올린 내 인파이트 경험치가 이세준의 것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이형환위를 쓰며 전후방 이지선다까지 걸리자 체력 바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세준의 반격도 제법 날카로웠지만 이미 전장의 흐름은 내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대로 게임을 굳힌다.
우위를 점해 그대로 압살하려는 순간, 불길한 감각이 왼손 끝을 타고 올랐다.
뭐지?
용의 충격을 뻗은 왼손과 이세준의 손바닥이 충돌한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을 맨손을 때리는데 왼손 감각이 이상한 걸 느꼈다.
완벽하게 공격 주도권을 손에 넣은 상황, 조금만 더 흔들면 승기를 굳힐 수 있기에 물러서기 아쉬웠다.
하지만 욕심을 내다 경기를 그르친 선수가 어디 한둘이던가.
다른 곳도 아니고 월드챔피언십이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터지기 전에 뒤로 물러서는데 순간 핑하고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란 생각을 하는데 파바밧하는 바람소리가 세차게 울렸다.
이세준이 맹렬히 보법을 밟는 소리였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백스텝을 밟았다.
똑같은 보법이지만 앞으로 달려드는 선수와 뒷걸음질치는 선수, 어느 쪽이 더 빠를지는 뻔한 일이었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내 몸 위로 이세준의 격공장이 연달아 터졌다.
차에 치인 것처럼 몸이 떠오른 순간 그림자발자국을 전개, 운룡비형을 밟으며 바람 속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통찰안을 가지고 있는 이세준에겐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 번 문 먹이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세준은 이를 악물고 따라붙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세준이 강한 스킬로 주도권을 쥐는 타입의 선수가 아니란 점이었다.
녀석의 플레이 스타일은 마력소모가 적은 스킬을 사용, 피지컬의 우위를 통한 갉아먹기 싸움이 전문이었다.
나와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내가 그간 보여준 어태커 플레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존재가 바로 이세준이었다.
지금 강공 터졌으면 엿될 뻔 했군.
간신히 시야를 회복한 나는 바닥을 구르며 공세를 뿌리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찢긴 무복사이로 드러난 왼팔이 시꺼멓게 죽어 있었다.
극독에 당했다는 걸 깨닫자 소름이 끼쳤다.
빌어먹을, 이럼 히드라 스피릿이 문제가 아닌데?
내가 이세준의 면장과 접촉한 순간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였다.
아무 전조도 없이 이런 위력을 낼만한 스킬은 하나뿐이었다.
무형독(無形毒)!
히드라 스피릿이 3타만 적중해도 상대를 골로 보내버리는 스킬이라면 무형독은 아주 조금만 상대에게 흘려도 곧바로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스킬이었다.
곧바로 체력 바가 터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기에 상대하는 입장에선 훨씬 까다로운 스킬이었다.
아니 운영진들은 밸런스를 발로 하나.
내가 넋 놓고 당한 건 무형독이 지금 시즌에 나올 스킬도 아닐뿐더러 원체 귀한 스킬인 탓이 컸다.
연이은 암살계의 너프, 탱커의 상향으로 저조해진 암살계의 승률을 보조하기 위해 운영진은 암살계 최상위 스킬을 서버에 풀기 시작했다.
근데 지금당장이 아니라 2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다.
유니크, 헤븐메이커, 사이클론, 이세준, 웨이우 등등.
기라성 같은 암살계 플레이어들이 프로씬을 주도하고 있는 마당에 이런 오버밸런스 스킬을 냈으니 예측하기 힘든 게 당연했다.
덜렁거리는 왼팔을 보고 있자 이세준이 씩 웃었다.
승기를 잡기라도 한듯 득의양양한 기세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더는 무형독을 쓰진 못할 거란 점이었다.
무색무취, 대응하기도 힘든데다 잠깐만 살이 닿아도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극강의 사기 기술.
그런 기술이 횟수마저 자유롭다면 밸런스 팀을 돌로 때려도 무죄다.
-비겁하게 독수를 써!
-치사하다!
-ㅋㅋㅋㅋㅋ 미쳤나. 무림인이세요?
-아 ㅋㅋㅋㅋ
-이기면 되지. 무슨 비겁 타령이야.
-비겁하다. 치사하다. = 게임을 너무 잘한다.
-칭찬 고맙고 ^^;;
-건방떨지 마라! 킹니크는 오른손 하나로도 이세준 정도 쳐바를 수 있으니까!
바람을 가르며 돌진해오는 이세준을 보며 자색팔찌의 효과를 사용했다.
현재 강화된 스킬은 용의 충격, 하지만 팔 하나로는 아무리 효율이 좋아도 이세준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필요해.
남은 시간은 2분 30초 정도, 이 정도 중독량이면 1분 후엔 감각이 돌아올 터였다.
그 사실을 이세준도 잘 알고 있을 터, 지금부터 1분이 1라운드의 승부처였다.
승부처라고 하기엔 좀 긴 감이 있지만 말이야.
자색팔찌가 울리며 열양지에 부여효과가 들어갔다.
오른손 검지로부터 붉은 강기가 쭉 솟자 이세준이 상체를 비틀며 회피했다.
“유니크! 너의 시대를 끝내겠다!”
오글거리는 녀석의 외침에 나도 모르게 험한 소리가 나왔다.
“엿이나 먹어!”
그 순간 이세준의 위를 타고 스쳐지나간 열양지가 채찍처럼 휘더니 녀석을 타격했다.
제법 묵직한 타격, 이세준의 몸이 주르륵 밀려 나갔다.
-ㅋㅋㅋㅋㅋㅋ
-아니. 엿먹으라니;;
-경기 중에 욕해도 됨 ㅡㅡ?
-심판! 레드카드! 레드카드 주라고!
-저거 인격 모독이야!
-저 정도면 잘 줘야 경고 1회임. 2회 받아야 1라운드 제한 ㅇㅇ;;
자유자재로 꺾이는 열양지의 기세가 매서웠던지 이세준도 접근을 멈추고 견제로 돌아섰다.
체력은 41 대 65로 이세준의 우위, 접근은 막았다지만 열양지의 지속 사용으로 마력 소모가 컸다.
-발악하네;
-저렇게 시간 끈다고 해서 뒤집힐 판이 아님.
-체력도 밀리고 마력 차이도 심하네.
-이세준이 유니크의 무패를 깬다!
이세준은 열양지를 거리를 두고 피하기만 할 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았다.
이대로 마력 소모를 유도, 빈 탱크가 된 나를 요리하겠단 심산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질 때 지더라도 너한텐 안 진다.
아니, 못 진다!
다른 놈이면 몰라도 이세준한텐 질만큼 져봤다.
이번 월드챔피언십 제패가 힘든 일인 건 사실이지만 내 첫 패배를 여기서 할 순 없었다.
남은 마력은 고작 1할, 죽었던 왼팔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 시대를 끝내겠다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서 이세준에게 달려들었다.
날 꺾고 싶으면 너도 다시 태어나 보시든가!
거만한 태도로 우뚝 선 이세준을 향해 쌍수 합격을 시도했다.
왼손은 용의 충격, 오른손은 교룡뇌조, 스킬의 엇박자 타이밍을 이용한 연계는 웬만해선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세준은 보통 선수가 아니지 않은가.
재차 점화된 하이클래스 공방전에 관중 모두가 숨을 죽인 그 때, 강렬한 타격음이 연계 사이로 터지기 시작했다.
“흡!”
가장 먼저 이변을 느낀 건 이세준 본인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 챈 녀석이 발을 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지막 승부수, 마력이 10퍼센트도 채 안남은 시점에서 이 기회를 놓치면 패배뿐이었다.
동체시력의 한계를 넘는 공격이 이세준의 급소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어?
-?????
-저게 뭔데!
-스피드핵이야?
-속도가;;
-정···정형!
-정형에게 동남풍이 분다!
어딜 도망가!
교룡뇌조 사이로 터지는 빙결공격이 녀석의 몸을 둔화시켰다.
특이사항은 스킬간 틈새를 파고들 정도로 빨랐기에 보고 막을 수 없단 점이었다.
4시즌에나 도입될 스킬연계 시스템.
흔히 콤보라 부르게 될 물건이 최상급 장비의 도움을 받아 구현된 순간이었다.
*
<유니크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중국 600만 시청자가 유니크. 정형의 이름을 외쳤다.>
<킹오브몬스터, 은퇴할 때까지 지고 싶지 않다. 소감 밝혀>
<화제의 중심이었던 그룹 스테이지 D조, 하이라이트 분석>
<스타서퍼 vs VT스타즈. 그 치열했던 5라운드의 승부>
<0.1초를 다루는 자가 경기를 지배한다. 유니크, 신들린 플레이>
e스포츠 기사란이 유니크와 스타서퍼로 도배되고 있을 때, VT스타즈 팀이 묵는 숙소 분위기는 기괴하다 해도 좋을 만큼 조용했다.
진 팀의 분위기가 활기 넘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이 정도로 조용한 건 더욱 드문 일이었다.
원인은 세상 다 산 것처럼 침묵을 지키는 이세준이었다.
VT 코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에게 다가갔다.
어쩌다 게임을 지는 날엔 의자를 걷어차고 집기를 내던지는 등, 상식 밖의 행동을 벌이는 이세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나 조용했고 코치는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이 자식 설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아직 그룹스테이지 1차전이 끝났을 뿐이다.
팀의 에이스인 이세준이 흔들리면 남은 일정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본인이 들으면 고함을 치겠지만 2위여도 토너먼트 진출은 확정이기에 컨디션 조절이 우선이었다.
“세준아. 괜찮냐···?”
이세준은 대답이 없었다.
앞으로 가 슬쩍 얼굴을 확인한 코치는 깜짝 놀랐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운이 넘치던 녀석이 동태눈깔이 되어 있었다.
‘완전히 멘탈 나간 거 같은데. 놔둬야 하나?’
선수들 멘탈 관리 역시 코치의 역할 중 하나.
한참을 고민한 코치는 그를 위로하는 게 낫겠단 판단을 내렸다.
“이세준! 정신 차려! 너만 진 거 아니잖아. 아직 진 적 없는 선수한테 진 거는 창피한 거 아니야! 인마!”
평소 이세준이었다면 내가 평범한 애들이랑 같냐고 화를 냈을 대목이다.
그러나 이세준은 영 반응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나지막하게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코치님.”
“응?”
“저 이번 대회 끝나고 조금만 쉴게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쉬긴 왜 쉬어. 세준아. 너 없으면 VT는 안 돼!”
“···조금 지치네요. 게임이.”
이세준은 그 말을 끝으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릴 듣는 순간 코치는 직감했다.
VT스타즈를 지탱하던 에이스가 완전히 무너졌단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