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알못이 과연 누구일까? (3)
마스터 디코이와 스타서퍼의 5라운드 마지막 게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승부속에 스타서퍼는 미리 준비한 작전을 꺼내 들었다.
이른바 미끼 작전의 시작이었다.
“왜 내가 이런 역할이냐고···.”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몽둥이가 주변의 사물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저 흉기의 주인은 오우거 로드, 스치기만 해도 탱커가 밀릴 정도의 괴력을 지닌 놈이다.
그런 강적을 상대로 밀러는 혼자 외로운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스타서퍼가 내세운 작전의 핵심은 미끼 역할을 맡은 밀러가 얼마나 오래 버텨주느냐에 달려 있었다.
건물을 방패 삼아 몸을 구르는 순간 몽둥이가 스쳐 지나가며 건물이 흔들거렸다.
밀러는 게임 시작 1분이 넘도록 오우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못 이기기만 해봐라!’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밀러는 건물을 가로지르며 뛰고 또 뛰었다.
*
밀러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마스터 디코이는 자신들을 향해 함정이 펼쳐지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오우거로드의 괴성과 땅이 흔들리는 진동으로 볼 때 스타서퍼의 오브젝트 공략이 시작됐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팀전에서 상대가 오브젝트를 공략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엔 뭐가 있을까.
답은 간단했다.
적의 공략을 저지하러 가거나, 아니면 반대편 오브젝트를 잡는 것이다.
미리 길목에 마법사 듀오를 숨길 작정이었던 스타서퍼로선 디코이 팀이 따라붙지 않을 시 낭패를 겪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상대 팀 경기를 쭉 훑어본 한솔은 저들이 가디언 공략을 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일단 디코이엔 비숍과 하이프리스트만이 있을 뿐, 실력 있는 팔라딘이 없었다.
오우거로드와 자이언트 가디언.
둘다 공략하기 까다로운 대형 오브젝트지만 그 난이도는 가디언 쪽이 훨씬 어려웠다.
오우거로드까진 팔라딘이 없어도 어떻게 공략을 시도해볼 만 하지만 가디언부터는 팔라딘 없이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디코이 팀은 스타서퍼의 공략 견제를 위해 빠르게 큰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렸다.
“정말 계획대로 됐네?”
“뜨거운 맛을 보여줄 차례야.”
건물 위쪽에 자릴 잡고 디코이를 기다리던 김민준과 유호영의 다인스킬 저격기가 빛을 뿜었다.
두 마법사의 손에서 뿜어진 붉은 섬광은 도로 위 차량은 물론이고 아스팔트까지 뚫고 들어갈 정도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헤르메스를 통해 확보한 전설급 마도사 다인스킬, 레이저볼트였다.
어찌나 강한지 스킬이 적중하는 순간 충격으로 주변 건물의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사실 레이저볼트는 실전에 쓸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준비 동작이 크고 스킬 충전 시간이 긴 탓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포인트를 선점하지 않고서야 실용성이 떨어졌다.
미끼를 이용해 오브젝트를 공략하는 척하고 유리한 위치에 적을 끌어들이기까지, 모든게 각본대로 이루어졌지만 한가지 빗나간 게 있었다.
상대팀 리더인 마스타라의 순발력이 예상보다 더 뛰어나단 점이었다.
당초 스타서퍼는 다인스킬을 이용해 상대 팀 체력을 터트릴 생각이었다.
탱커라면 무리겠지만 맷집이 약한 딜러라면 충분히 전장 이탈시킬 수 있는 위력이었다.
“저걸 막는다고?”
저격을 당한 마스터 디코이도 놀랐지만 마법을 쏜 당사자들이 더 놀랐다.
상황을 바꿔 모른 채 이 스킬에 당했다면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레이저볼트는 강력한 스킬이었다.
“이럼 우리가 손해 아냐?”
위력이 강하면 단점도 존재하는 법, 조금 전 펼친 레이저볼트로 인해 둘의 마력이 크게 소모됐다.
포션을 사용할 수 없는 시합 규칙, 게다가 마력의 유무가 타클래스보다 중요한 마도사 특성상 전력이 절반 아래로 뚝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솔이 형을 믿어보자.”
김민준은 단발 마법을 잇는 한편 점수 거점으로 달려간 유니크를 떠올렸다.
애초에 이 작전의 핵심은 마법사의 다인스킬 저격이 아니었다.
저격은 쓸만한 옵션일뿐, 작전 성공 여부는 팀의 리더에게 달려 있었다.
*
디코이의 발이 묶인 사이, 계획대로 중앙의 점수 거점을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팀전은 개인전보다 게임 시간이 다섯 배나 긴 라운드.
그 시간 동안 꾸준히 거점에서 보내오는 점수를 챙기면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점수를 챙기는 게 가능했다.
거점을 점령하며 계속 상대 체력 바를 예의주시하던 내 눈썹이 살짝 떨렸다.
실패했나?
순간 적의 아크나이트 체력이 깎였다 차오르는 걸 확인했다.
그 말인즉 대기 중이던 우리 팀과 마주쳤단 뜻이다.
하지만 상대의 체력 바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최소한 빈사 상태 정돈 만들어서 상대 힐러 마력이라도 뺄 참이었는데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제법이라고 생각하며 난 재빨리 적들이 밟아나간 코스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뒤흔드는 폭발음이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김민준, 유호영의 마법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마법으로 인한 충격과 소음은 내 기척을 숨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적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보법에 마력을 부으며 전력으로 내달렸다.
주변에 위치한 고층 건물의 플로어를 오를 때마다 마력이 빠르게 소모됐다.
그러나 아깝지 않은 투자였다.
견제가 까다롭다며 떠들기 바쁜 적들의 머리 위를 잡았으니까.
원맨 팀이라고 무시했으면 최소한 원맨은 주의해야지.
안 그래?
은신을 풀고 번개처럼 외벽을 타며 달려들었다.
감이 좋은 마스타라가 날 발견했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대응을 하기엔 너무 늦은 포착이었다.
내 손을 두른 번개가 상대 비숍을 때렸다.
부활 스킬까지 갖춘 비숍은 다른 힐러보다 장기전에서 훨씬 성가신 존재였고 암살 대상 1순위 클래스였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힐러를 구하기 위해 마도사들이 지팡이를 들어보지만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급격한 체력 고갈에 경직이 온 힐러가 내 손에 잡혀 방패처럼 덜렁거렸다.
-저, 저런 잔인한 놈;;
-악마같은 녀석!
-복수해줘! 마스타라!
-뭐하는 거야. 멍청이들아! 유럽의 긍지를 보여달라고!
힐러를 방패삼아 달려든 나는 힐러의 옆구리 사이로 열양지를 방출, 마도사들을 양껏 두들겼다.
좁은 골목에 나 빼고 모두 적, 무도가가 날뛰기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제기랄!”
이를 악문 마스타라의 검에 디코이 팀 힐러가 쪼개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다소의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현명한 판단이야. 하지만 좀 더 빨리했어야지.
아군을 베면서까지 공격할 각오를 굳혔다면 내가 마법사들을 때리기 전에 나섰어야 했다.
열양지를 맞고 벽으로 튕긴 디코이 마법사들이 고통에 신음하는 사이 나의 주먹이 마스타라의 검신을 때렸다.
주먹과 검이 맞닿음과 동시에 터지는 불꽃.
소나기같은 용의 충격이 검면을 휩쓸며 그대로 마스타라의 손등을 때렸다.
-한국의 보물!
-킹니크!
-애송이가 어쩌구 하더니만 꼴좋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처맞기 전까진.
-ㅋㅋㅋㅋㅋㅋㅋ
바람처럼 날아드는 용의 충격과 교룡뇌조를 상대하는 마스타라의 움직임은 어딘지 어색했다.
당연했다.
원래 들고 있어야 할 방패가 없는 탓이다.
운좋게 막긴 했지만 웨폰브레이크 당했군.
이곳에 도착하기 전 상황을 보진 못했으나 상대 장비 상태를 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아크나이트는 자신이 자주 쓰는 손으로 검을 잡고 나머지 손으론 라운드 실드를 들어 공수 밸런스를 극대화하는 클래스, 한쪽 팔을 잃어버린 거나 다름없는 기사는 내 상대가 아니었다.
평소에 웨폰브레이크 상황까지 상정해서 연습했다면 지금보단 나았을 텐데.
연습을 부실하게 한 티가 난단 말야!
연속 공격이 들어가며 마스타라의 체력이 휘청거렸다.
몸을 추스른 마법사들이 반격을 꾀했으나 마스타라를 기둥 삼아 피하니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마력 아낄 필요 없겠어.
기세가 완전히 넘어온 상황, 남은 마력을 몽땅 쏟아부으며 내 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현란한 움직임에 마법사들의 지팡이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이형환위, 운룡비형, 그림자발자국까지.
회피와 동시에 이뤄지는 반격, 마스터 디코이가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킹니크!
-ㄷㄷㄷㄷ
-정수리 딱 대!
스타서퍼가 그룹스테이지로 가는 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
[유니크 ‘유럽 별 거 아냐.’]
[세계는 아직 나를 넘을 준비가 안됐다.]
[스타서퍼, 본선에서도 우리 팀의 무서움 보여주겠다.]
[유니크, 에이스의 품격을 증명하다.]
기사를 확인하던 감독과 코치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터뷰가 좀 강했구나···?”
“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그만.”
북미에 왔더니 다시 북미 분위기에 적응했나?
그래도 전에 비하면 살짝 순한 편이었다.
먼저 애송이라고 도발한 건 저쪽이니까 이 정돈 해도 괜찮았다.
A조 예선을 마치고 인터뷰어와 나눈 대담이 그대로 기사로 작성돼 e스포츠 기사란 메인을 휩쓸었다.
우리 유니크가 돌아왔다며 기뻐하는 북미 팬들, 원래 이런 캐릭이었구나 몰랐네 라고 말하는 한국 팬들이 섞여 제법 흥겨운 분위기가 됐다.
통화는 딱 두 번 했다.
부모님 그리고 채린이, 서준혁 대표는 경기를 보기 위해 북미로 온 상태였기에 직접 축하를 들을 수 있었다.
“본선 축하하네. 애 많이 썼어.”
“선수들이 잘했습니다.”
“장코치도 항상 고생 많아.”
“아닙니다. 대표님!”
“경기 잘 봤네. 다들 고생했어.”
감독은 대표 앞에서 보기 드물게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의 응원, 그리고 슬슬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본선에서의 호성적까지.
팀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스터 디코이는 유럽 1위와도 비빌 정도의 전력을 갖춘 팀 아닌가.
그런 디코이를 작전을 걸어 제대로 밟았으니 충분히 성적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넨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해.”
“어떤 점이요?”
한인식당에서 테이블을 잡아 회식을 하는 도중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지역예선을 치를 때도 그렇고, 단체로 아프단 소식을 들었을 땐 매우 놀랐거든. 근데 자넨 멀쩡했잖아.”
“성철이도 멀쩡했죠.”
“게다가 이번 5라운드 작전도 전부 짰다면서?”
“그 정돈 아니고요. 아이디어를 냈는데 팀이 적극적으로 수용한 거죠.”
“겸손하긴.”
5라운드에 쓰인 미끼 작전은 내가 이미 과거에 보고 들은 작전 중 하나였다.
당시에도 충분히 효과를 거둔 작전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있으니 앞으로도 써먹을 것들이 꽤 남아있었다.
“채린이가 정말 따라오고 싶어 한 거 아나?”
“네.”
통화로도 한참을 붙잡고 직관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말이다.
“데뷔가 코앞이라 어쩔 수 없었거든. 그나저나 이번 대회 도중에 이런 소식이 들어왔는데 자네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대표는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열어 보였다.
내년부터 여성부 리그가 열릴 예정이니 1부리그 운영 주체들은 선수 발탁 등을 참고해달란 운영 안내문이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어떤 생각을 물어보시는지···. 채린이라면 선수로 뛰어도 잘할 겁니다. 국내 여성 챌린저 티어는 손에 꼽을 테니까요.”
서채린의 재능은 성별에 관계없이 대단했고 여성으로 한정하면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원했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대표가 이마를 짚었다.
“채린이가 아이돌 연습생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다 돼가거든.”
“오래됐네요.”
“그런데 게임에 완전 푹 빠져버렸어. 누구 탓인지.”
왜 그런 눈으로 절 보세요. 제 탓 아닙니다···.
하지만 대표의 말을 들으니 무슨 고민인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룹 역시 단체생활 아닌가.
채린이가 그룹의 리더는 아니라 해도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면 기획사를 운영하는 대표 입장에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채린이는 서준혁 대표에게 있어 단순한 회사 식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 소식을 알려주면 꼭 하고 싶다고 할 텐데.”
“전 반대라고 생각하는데요. 채린이 성격이면 오히려 동료들한테 미안해서라도 속으로 삭이고 말 것 같거든요.”
잠시 같은 건물을 쓸 때도 연습 방해될까 봐 연락을 조심했던 녀석이다.
아마 여성부 리그가 생긴단 사실을 알아도 팀 활동에 지장이 생기면 조용히 넘어갈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원하는 건 어쩌면 이쪽 길이 아닐지 요즘 유독 고민이 되네.”
대표가 그리 중얼거릴 때 나와 대표 사이로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대표니임! 한 잔 받으십셔!”
“어어? 그래.”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데 1초 정도가 걸렸다.
“누구야! 미성년자한테 술 먹인게!”
“지가 훔쳐먹은 거야!”
“맙소사.”
고개 숙여 사과하는 감독과 코치, 괜찮다며 손사래 치는 대표, 잘 익은 사과로 변한 제레미.
제레미를 일으켜 뒤쪽으로 빼내는데 녀석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우-승!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