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의 자격 (3)
역시 3강 팀인가?
순간 진형을 바꿔 나를 노리고 들어오는 기세가 무척 매서웠다.
정상현을 상대하던 와중에 이제는 마법사 둘까지 동시에 맡아야 했다.
최대한 많이 데리고 가자!
찰나의 순간에 제일 많이 데미지를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을 때 다급한 표정으로 압박을 들어오는 정상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의 남은 체력은 3할 정도.
아직 6할 안전선을 지키고 있는 내게 비하면 피해가 심한 편이었다.
놈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협공을 통해 날 잡아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자체 힐이 가능한 언밸런스 플레이어, 이대로 놔두면 게임이 터지는 것을 직감했을 터다.
정상현이 시간을 끄는 사이 DT의 마법사 둘의 지원이 시작됐다.
마법사라고 하면 흔히 멀리서 마법을 쏘는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협공할 땐 그런 전략을 취하기 힘들었다.
아군도 함께 쓸려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저들이 멀리서 마법을 쏴대면 난 정상현을 방패 삼아 버티는 게 가능했다.
팀킬을 방지하기 위해 거리를 좁히고 달려든 마법사 둘, 그리고 정상현까지.
세 명이 펼치는 협공이 어지럽게 날아든다.
체력이 쭉쭉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초인이라도 무도가로 세 명의 협공을 받아내는 건 무리다.
붉은 광선이 내 어깨를 때리는 순간, 나는 고통을 참아내며 교룡뇌조를 아크위자드 얼굴에 내질렀다.
퍽! 하는 통쾌한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지는 순간 들어오는 전상현의 검이 내 다릴 스쳤다.
허벅지에 화끈한 통증과 함께 남은 마법사 한 명이 마력탄을 쏟아낸다.
나는 처음으로 자색팔찌의 힘을 이용해 항마장을 강화했다.
우직한 모양새로 뿜어진 장풍이 마력탄의 일부를 막아내는 한편, 전상현의 허벅지를 향해 있는 힘껏 용의 충격을 찼다.
다른 선수였으면 자세가 흐트러졌을 텐데 전상현은 작은 신음 하나 없이 내 옆구리를 찔렀다.
집중력이 대단한 놈이었다.
허벅지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었을 텐데 용케 치명타를 날린다.
하지만 집중력은 나도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다.
검을 찌르기 위해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의 어깨에 교룡뇌조를 후려쳤다.
“큭!”
정상현의 손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검이 떨어졌다.
교룡뇌조에 담긴 벼락의 힘이 근육을 순간 마비시킨 것이다.
교룡뇌조로 팔이 마비될 확률은 기껏해야 채 1퍼센트도 되지 않을 터, 생각지 못한 행운에 나도 모르게 씩 웃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검은 땅에 떨어지기 직전, 내 발을 맞고 나가 상대 마법사의 복부를 향해 날았다.
다른 클래스였으면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마법사는 얘기가 달랐다.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근접전투에 취약하다.
근접, 원거리 전부 강하면 전부 마법사를 할 게 아닌가.
이렇게 가까이서 공격을 받아낼 만한 마법사는 전성기 시절의 김민준이나 유호영 말곤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검이 아군을 공격하는 광경에 정상현의 집중력이 순간 흐트러졌다.
이게 결정적이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은 마력을 모두 짜내 일격을 퍼부었다.
교룡뇌조를 연타하는 순간 녀석의 눈에 좌절이 물들었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정상현은 웨폰마스터, 이름 그대로 무기의 달인이다.
손에서 검이 떨어졌어도 끝까지 정신력을 집중했다면 그는 얼마든지 내게 반격할 수 있었다.
1라운드에서 김정환과 대결할 때는 잘만 썼던 단검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더 이상 공격을 잇지 못한 건 그저 집중력 부족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내 목숨을 가져갔을 테니까.
정상현의 다운, 운룡비형으로 시간을 벌고 다시 힐을 돌리기까지.
이 모든 게 DT게이밍의 포메이션 가동 수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상현의 공격과 마력탄으로 떨어진 체력을 다시 회복시킨 뒤 곧바로 두 마법사를 처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거리를 좁히고 마법을 지원하는 김민준까지.
지역 예선전 마지막 경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스타서퍼 팀의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쩌면 도서관이 될 수도 있었던 최종전, 생각보다 많은 팬들이 우리의 월드챔피언십 진출을 응원했다.
내내 DT게이밍을 응원하던 팬들도 작게나마 박수를 쳐주는 분위기였다.
“감사합니다.”
“먼저 팀의 주장인 유니크 선수와 인터뷰 나눠보겠습니다. 소감이 어떠세요.”
“아, 일단 아시는 분들이 많지 않으시겠지만 저희가 이번 예선전을 치르며 상태가 정말 많이 안 좋았었거든요.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팀원 모두 열심히 해준 덕에 진출했습니다. 저는 월드챔피언십이 이번에 두 번째인데요. 두 번째인데···생각보다 더 기쁘네요.”
-우승해!
-우리 이겼으니까 나간 김에 우승해서 돌아와라!
-아 스타서퍼는 불안한데;; DT가 나갔어야지.
-누가 벌써 초지고 있냐.
-눈치없는 넘 ㄹㅇ;
이제는 예선을 마치고 한국 대표가 됐으니 좋은 성적을 거둬 돌아오길 바라는 팬들이 많았다.
“이번 시즌 스타서퍼는 2부에서 시작하셨잖아요? 유니크 선수와 헤븐메이커 선수를 빼면 전부 신인이셔서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떠셨나요.”
“아, 2부에선 큰 어려움은 없었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가식없는 인터뷰
-저 실력에 2부는 반칙이긴 하지 ㅋㅋ
“저희 팀원들 모두 정말 재능있는 친구들이거든요. 더 성장할 수 있는 팀이니만큼 관심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유니크 선수. 여러모로 대단하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럼 우승견인차 역할을 해준 나이트버드 선수에게도 질문 드릴게요.”
-어 뭐야. 벌써 마이크 넘김?
-오늘 인터뷰 너무 얌전한 거 아님?
-이거 유니크 스타일 아니자너
관중은 뭔가 인터뷰가 아쉬운 모양이었다.
북미에서 캐릭터를 잡은 건 그게 북미 스타일이기 때문이지 나대기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닌데 말이지.
한국에서 똑같이 하면 버릇없다고 딜이 좀 많이 박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다.
그런데 관중의 흐름이 꼭 뭔가 강한 한마디를 터트려 달라는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한마디 해줘!
-아, 이런 인터뷰 노잼이야!
-시원하게 한 번 질러줘!
이런 요구가 선수들 인터뷰가 한 바퀴를 다 돌 동안 계속되자 결국 인터뷰어도 난감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시 마이크를 넘겼다.
“유니크 선수가 한마디 해주시기 전엔 관중분들이 안 돌아가실 것 같은데요. 월드챔피언십 진출 각오를 들려주신다면요.”
“저희 팀이 나이는 어리지만 연습 정말 많이 했습니다. 북미 예선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요. 컨디션 관리 잘해서···.”
좋은 성적 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평범한 끝맺음인데 말이지.
사실 그렇게 끝내고 싶었다.
이번 시즌 월드챔피언십은 변수가 너무 많았다.
당장 S.솔리드와의 일전만 봐도 그랬다.
아직 세계 최정상급 팀들과 자웅을 겨루기엔 우리 팀의 부족한 면이 많았다.
올해가 내가 월챔 우승을 하지 못할 확률이 가장 높은 해였다.
입 털어놓고 그에 걸맞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것처럼 쪽팔리는 일이 없다.
질러, 말어.
열두 번 정도 고민한 끝에 결국 결정을 내렸다.
“···다 쓸어버리고 오겠습니다!”
-키아아아아
-이거지!
-다 쓸어버려!
***
S.솔리드에서 월드챔피언십을 준비하던 기간엔 훈련 말곤 할 게 없었다.
리그 우승팀은 하위 예선을 패스할 수 있는 시드권을 받아 곧바로 본선 직행이었기에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그러나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작년 이맘때, 캘리포니아의 배틀아레나는 텅 빈 공간에 접속기만 놓여 있어 삭막한 느낌이 있었는데 올해는 선수들이 자릴 채우고 있었다.
4대 메이저 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크고 작은 리그에서 티켓을 거머쥔 팀들.
온화한 분위기로 사교성을 자랑하는 팀보단 굳은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는 선수들이 훨씬 많았다.
“왜 이렇게 다들 얼어있어? 긴장 풀어.”
제레미는 오랜만에 캘리포니아에 온 게 신이 났는지 한껏 여유를 부렸다.
“형은 두 번째잖아요. 우린 처음이에요.”
“나는 처음 올 때도 긴장 안했거든?”
제레미와 말씨름을 하던 유호영이 진실을 알려달라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진짜야. 눈치가 없어서 그런가 긴장 안하더라.”
“아니 긴장만 안 했다고 하면 되지! 왜 쓸데없는 소릴 해!”
“눈치가 없데 크큭.”
“아니야!”
올해는 작년보다 참가팀이 훨씬 많았다.
전 세계적으로 가이아의 인기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단 증거였다.
“휘유. 이게 다 몇 팀이야. 경기하다 겨울 다 가겠다.”
오늘 배틀아레나에 모인 팀은 모두 48개 팀.
여섯 개 팀씩 묶여 풀리그제를 치르고, 각 조의 상위 1개 팀이 다시 그룹 스테이지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전부 질이 좋은 거 아니야. 여기 모인 팀중에 DT게이밍과 비빌만한 팀은 겨우 세 팀밖에 없어.”
코치가 자신 있는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 세 팀이란 우리와 마찬가지로 4대 메이저 리그에서 마지막 티켓을 따내 올라온 중국, 유럽, 북미팀을 뜻했다.
예선전 조의 숫자만 여덟 개, 그 팀들과 같이 묶일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굳어있는 유호영의 뒷목을 주물러주고 있을 때 스크린에 등장한 진행자가 조 추첨을 시작했다.
“먼저 A조입니다! A조의 첫 번째 팀은!”
랜덤 방식으로 즉석에서 짜인 여덟 개 조의 비밀이 그의 손짓에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스터 디코이!”
그 이름에 주변에 술렁임이 일었다.
마스터 디코이, 유럽의 마지막 티켓을 거머쥐고 진출한 실력파 팀이었다.
시즌 초반엔 성적이 바닥을 쳤다가 후반부에 이르러선 작년 1시드 팀인 블랙포스를 이길 정도로 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팀이었다.
작년 월챔 그룹 스테이지 진출팀인 엑셀 게이밍도 마스터 디코이에게 패배,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최근 폼으로 볼 때 유럽 시드권 2위 팀보다도 강하단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힘겹게 이 자리까지 올라온 팀들은 A조에 들어가지 않길 빌기 바빴다.
그렇게 하나씩 디코이 아래로 명단이 공개될 때마다 희비가 교차했다.
살아남은 팀들은 강적을 피했단 사실에 기뻐했고 A조에 걸린 팀들은 벌써 전의를 상실한 모습이었다.
이제 남은 자린 하나, 누가 과연 예선전 최악의 조에 들어갈지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마지막 카드가 오픈됐다.
-왓 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악;
-와아아아아!
경기장을 흔드는 함성이 터졌다.
이름을 확인하기도 전에 경기장이 흔들리는 순간 직감했다.
우리가 뽑혔구나!
아니나다를까 A조의 마지막 자리엔 스타서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미리 맞붙어도 상관없었다.
예선전에 진출한 4대 메이저 팀의 경기는 미리 살펴본 상태, 마스터 디코이의 전체적인 경기력은 DT게이밍과 비슷해 보였다.
다시 말해 우리가 충분히 해볼만 하단 뜻이었다.
북미로 넘어오며 팀원들의 컨디션은 지역 예선 때와 비교해 훨씬 좋은 상태였다.
이제 충분히 기량을 살려 전략적인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그럼 상대는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게 궁금했던 난 슬며시 디코이 쪽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적어도 껄끄러운 상대 정돈 될 거로 생각했는데 마스터 디코이 쪽은 대진을 확인한 이후에도 킬킬거리며 여유를 보였다.
이 녀석들 봐라?
우릴 무시하지 않고서야 저런 여유를 보일 수가 없었다.
순간 상대 팀 선수와 내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이 씩 웃으며 입술을 오므렸다.
‘원맨.’
뭐? 원맨? 원맨팀은 별거 아니라 이거냐?
우리 팀이 아직 경험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저렇게 무시당할 클래스는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저건 나를 향한 무시이기도 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지, 멍청한 건지.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깐 누르며 생각했다.
원맨 팀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 번 보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