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의 자격 (2)
“호영아 몸은 좀 어때···. 아니다.”
유호영의 대답을 기다리던 코치는 즉시 기대를 접었다.
비실거리는 폼을 보니 경기에 내봤자 제 실력을 반도 내지 못할 터였다.
코치가 유호영의 의사를 물은 이유는 간단했다.
팀에서 다인스킬 연습을 제일 열심히 한 게 김민준, 유호영 페어였다.
3시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다인스킬은 2인 이상의 플레이어가 합을 맞춰 시너지를 내는 스킬이다.
그 효율이 단독으로 움직일 때보다 좋은 편이기에 현재는 상위권 팀이 되기위한 필수조건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서브 옵션도 안 되고.”
김민준과 유호영 카드를 쓸 수 없을 때를 대비해 팀이 준비한 두 번째 옵션은 나와 제레미였다.
무도가 둘이서 펼치는 합격기는 상당한 데미지를 자랑했다.
개인전 실력을 생각하면 나와 제레미가 팀의 1옵션이어야 할테지만 팀전은 여러 요소를 고려해야 했다.
조합을 맞춰야 하는 5라운드에서 무도가 둘을 넣는 건 썩 좋은 그림이 아니었기에 나와 제레미가 2옵션이 된 것이다.
“답이 안 나오네.”
코치의 이마에 살짝 주름이 진다.
팀전에서 다인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필요 없는 큰 패널티였다.
코치뿐만 아니라 우리팀 모두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지만 결국 답을 찾는데 실패했다.
이제 남은거라곤 개인 역량을 믿고 승리를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힐러 없이 가야겠다.”
힐러는 개인전에선 나설 자리가 없지만 팀전에선 조합의 중심이 되는 클래스, 그러나 우리 팀 유일의 힐러인 밀러는 그날 제일 많은 도시락을 먹은 결과로 지금도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결국 오늘 개인전에 나섰던 조합 그대로 팀전 멤버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
나, 김민준, 유성철로 이루어진 딜러라인.
그리고 탱을 김정환이 맡기로 했다.
1년 전이었다면 클래식 조합이라는 말로 대충 포장이라도 가능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무래도 보기 힘든 조합이었다.
“부탁한다. 한솔아.”
엔트리를 제출한 코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코치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팀 모두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라면 뭔가 해주겠지 하는 그런 마음이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리 나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상대는 국내 3강 안에 든다는 강팀, 게다가 우린 제대로 전력을 낼 수 없는 상황.
시즌 초기 시절의 북미였다면 나 홀로 캐리가 가능했지만 지금 활동하는 프로 선수들의 실력은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에이스가 이 상황에 해야 할 말은 딱 하나뿐이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을 꺼냈다.
“맡겨만 주세요.”
*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함성과 함께 양 팀 선수들이 일제히 중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올시즌부터 5라운드 전용 전장으로 고정된 환영도시의 진행 양상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점수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서둘러 중앙으로 향하는 빌드, 다른 하나는 대형 오브젝트를 우선으로 노리는 전략이다.
한국은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스타일이 유행중인지라 아무래도 대형오브젝트 공략은 꺼리는 편이었다.
대형오브젝트의 위치는 좌우 양단, 오브젝트를 노릴 생각이 없다면 두팀은 중앙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상대 선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그순간, 유니크의 몸이 안개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림자 발자국이야! 스캔 때려!”
팀 선두에서 진형을 잡기 시작한 정상현의 얼굴엔 옅은 흥분이 어려있었다.
많은 프로 선수들이 자신보다 강한 선수와의 대결을 꺼리곤 한다.
자신의 능력 부족을 수만 관중 앞에서 증명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상현은 예외였다.
그는 강자와의 대결에 흥분하는 몇 안 되는 선수였다.
‘어디 실력 좀 볼까!’
DT게이밍의 조합은 웨폰마스터, 아크위자드, 엘레멘탈마스터, 비숍으로 이루어진 조합이었다.
보통 딜러 두명에 앞을 막아줄 탱커가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정상현급 선수를 썩힌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DT는 노탱커 조합을 자주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탱커가 없으면 원거리 공격에 취약한 법이지만 DT게이밍은 달랐다.
그들은 탱커가 없는 조합의 약점 보완을 위해 매일 한계에 이르는 훈련을 소화했다.
그 결과, 그들은 리그에서 손에 꼽는 개인 디펜스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탱커를 쓰지 않는 DT를 잡기 위해 원거리 전략을 짜온 수많은 팀이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
한때 스나이퍼 조합으로 리그를 제패한 원라이프조차 DT게이밍을 상대론 조합을 바꿀 정도였으니 그들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를 알 수 있었다.
“스캔!”
DT의 마법사들이 주변을 빛가루로 밝히자 보이지 않던 유니크의 모습이 나타났다.
스캔으로 위치를 파악하긴 했지만 DT는 유니크를 쉬이 건드리지 못했다.
운룡비형을 펼치는 유니크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왜 저런식으로 플레이를 하지?’
그 순간적인 움직임을 눈으로 쫓던 정상현은 문득 어떤 생각을 했다.
유니크의 움직임은 분명 빨랐다.
하지만 이렇게 빠른 움직임을 위해 스킬을 사용한 대가로 유니크는 아직 얻어간 게 없었다.
세 번째 시즌에 이르러 가이아는 시합에 쓰이는 스킬의 마력 소모비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말인즉 이전처럼 게임 시간 내내 스킬을 난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니크는 계속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그러면서도 좀처럼 달려들려고 하지 않는단 점이다.
그러다 불현 듯 무언가를 떠올린 정상현이 팀원들을 향해 외쳤다.
“스캔 멈춰! 우리 마력을 빼놓을 속셈이야!”
스캔은 기본적으로 마력 소모가 크지 않은 스킬이다.
하지만 유니크를 포착하기 위해 아군 마법사 둘이 연달아 스캔을 쓰고 있었다.
마력의 소모비를 따지면 둘을 합쳐도 유니크가 지금 쓰는 마력량에 못 미치겠지만 어찌 됐건 이쪽도 마력을 쓰는 상황, 녀석은 양쪽의 마력이 고갈돼 피지컬 승부로 끌고 가려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사이, 스타서퍼 인원은 다시 쪼개져 다른 행동을 시작했다.
DT게이밍은 인원 넷이 한자리에 똘똘 뭉쳐 있었지만 스타서퍼는 달랐다.
유니크가 상대의 시선을 끄는 사이, 김민준은 김정환의 보호를 받으며 마법으로 견제중이었다.
삐빅-!
신호음과 함께 중앙 거점이 스타서퍼에게 점령됐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성철의 단독행동이었다.
“탱커와 마법사로 시간을 벌 속셈이야. 화력으로 밀어붙여!”
“유니크는?”
“놈은 내가 맡는다.”
DT의 마법사 페어가 다인스킬을 펼치는 사이, 정상현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 유니크를 향해 뛰었다.
검끝을 앞세워 빛꼬리를 물고 들어가는 정상현은 흡사 혜성같았다.
파바밧-!
날아드는 열양지를 전부 쳐낸 그의 검이 빛을 뿜으며 유니크가 서 있던 자릴 매섭게 갈랐다.
-우와아아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있었다.
은빛 검이 스치기가 무섭게 유니크의 체력이 조금이지만 깎여나갔다.
사실 빗맞은 정도의 체력 감소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관중들은 커다란 환호를 보냈다.
유니크가 그간 보여준 위용이 너무나 엄청났기에 마음속 어디선가 일대일은 도무지 이길 수 없는 괴물이란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정상현의 공격은 분명히 유니크의 몸에 닿고 있었다.
-갓상현!
-가랏!!!
-끝장내버려!
순간 정상현의 몸에서 팔이 솟아나는 듯한 이펙트와 함께 그에 손에 들린 검이 여섯자루가 돼 유니크에게 쇄도했다.
웨폰마스터의 전설급 스킬인 스톰블레이드였다.
이름 그대로 폭풍처럼 몰아붙이는 검격에 유니크의 체력이 후두둑 깎여 내려갔다.
정상현이 세계 최고의 어태커를 몰아붙이는 광경에 관중들은 목이 쉬어라 소릴 질렀다.
그러나 정작 정상현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 자식, 스킬을 안 쓰잖아!’
가이아는 현실과 흡사할 정도의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지만 엄연히 시스템 위에 세워진 게임.
덕분에 이곳에선 현실에선 불가능한 동작과 스피드를 펼칠 수 있었다.
스킬을 쓰지 않고 움직여도 스탯의 보정을 받아 엄청난 무위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런 세계에서 스킬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이 도저히 보고 막기 힘든 수준의 공격이 펼쳐진다.
때문에 근접계 클래스간 전투에선 무기를 맞대면 일단 스킬을 쓰는 게 상식이었다.
도저히 보고 막을 수가 없으니 내가 쓰러지기 전에 적을 쓰러트리잔 마인드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공격을 받아내는 유니크에게선 아무 기술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인간이 가능한 플레이인가?’
오직 순수 반사신경 만으로 반격, 스킬의 위력을 감소시키며 버티는 플레이에 정상현은 혀를 내둘렀다.
분명 체력은 자신이 압도하는 상황이지만 이대로 가다간 되레 당할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력소모 차이 때문이었다.
솟구치는 불안감에 정상현이 거리를 벌리려는데 급작스레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역공이 시작된 것이다.
‘쉽게 놓아줄 줄 알고?’
정한솔은 그간 아끼던 마력을 펌핑하며 상대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용의 충격과 교룡뇌조를 뻗음과 동시에 이형환위로 방향 페이크까지 섞어넣자 정상현이 체력이 눈독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 저걸 못막냐고!
-맨날 똑같은 패턴이잖아 ㅅㅂ!
-아. 이형환위로 뒤잡고 기습하는 패턴인거 나도 알겠네!
팀의 에이스가 수세에 몰리자 DT게이밍 팬들이 분통을 터트렸다.
사람들의 지적대로 유니크의 패턴은 매번 비슷한 편이었다.
정면에서 용의 충격으로 압박, 상대의 방어가 좋으면 보법이나 회피스킬을 이용해 페이크 어택을 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단조롭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원패턴 전략, 그러나 이 원패턴을 깨는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이래서 못 막았구나.’
정상현은 진땀을 빼며 현실을 깨달았다.
유니크의 공격은 분명 원패턴이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여러 가지 변화가 섞여 있었다.
똑같이 정면을 향해 주먹을 뻗는 공격들도 미묘하게 타이밍이 달랐고 막자니 궤적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삽시간에 체력이 갉아 먹힌 정상현은 바로 남은 마력을 울리며 반격하더니 곧장 몸을 뒤로 뺐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후퇴 타이밍에 한솔은 크게 감탄했다.
평범한 선수였다면 기왕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더 데미지를 입힐 요량으로 달려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정상현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강공을 펴는 척하며 매끄럽게 후퇴에 성공했다.
이런 판단과 플레이는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포메이션!”
정상현의 외침에 상대를 압박하던 DT의 두 마법사가 방향을 틀어 유니크 처리에 가세했다.
평소 얼마나 훈련을 열심히 했는지 흡사 기계같은 움직임이었다.
원래 정상이라면 김민준과 유성철이 상대를 압박해 이런 일이 없게끔 해야하지만 아직 스타서퍼의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다.
두 마법사, 그리고 DT의 에이스 정상현까지.
세 명의 선수가 만들어낸 물샐틈없는 협공이 유니크를 덮치는 순간 관중도, 중계진도 할 말을 잃고 그저 눈을 부릅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곳이 오늘 시합의 승부처였다.
약 2초.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경기에 집중한 시간.
잠시 멈춰져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을 때, 정적에 잠겨있던 경기장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와아아아아아!!!!!!!
-ㄷㄷㄷㄷㄷ
-저, 저런 미친;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아! 아아아악! 아직 안 끝났습니다! 유니크! 살아남았습니다아!”
“난리났습니다! DT게이밍 난리났어요! 교룡뇌조오! 교룡뇌조오!”
허를 찔려 체력 바가 터지기 시작한 선수들, 목이 쉬어라 교룡뇌조를 외치는 캐스터, 입을 틀어막고 동공지진이 난 DT게이밍 팬들까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니크가 다시 한 번 어택을 시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