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의 자격 (1)
제대로 들어간 카운터 한방, 그 한방은 관중 모두에게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고작 2부리그 선수 아닌가.
스타서퍼가 유명한 건 팀을 이끄는 유니크의 명성 탓이지 다른 선수들 때문이 아니었다.
정상현이 누구인가.
국내 3대장으로 불리는 DT게이밍의 에이스다.
세계에서도 톱클래스로 꼽히는 이세준이 몇 번이고 인터뷰를 통해 인정했을 정도의 실력자.
그런 선수가 무명의 신인에게 일격을 허용했으니 DT게이밍을 응원하는 팬 입장에선 충격적일만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상당히 강한 고통이 있었을 텐데도 꾹 참아낸 정상현의 검이 무섭게 움직여 김정환의 전신을 휩쓸었다.
발악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냉정한 무기의 움직임에 정환의 체력 바가 삽시간에 바닥을 찍으며 터졌다.
“1라운드 종료! DT게이밍이 첫 번째 경기를 가져갑니다!”
-이거지!
-갓상현;;
-솔직히 내년엔 어떨지 몰라도 올해는 아직 이르다!
축제 분위기인 DT 벤치와 달리 스타서퍼는 다들 모여 의견을 주고받기 바빴다.
1라운드 패배로 빨간불이 하나 들어온 상황, 더 지면 2:0으로 수세에 몰리는 그림이었다.
“다음 전장이···오림의 성채네.”
오림의 성채, NPC 병사들이 득실거리는 전장이었다.
상대 플레이어의 움직임 외에도 병사들의 손에서도 오래 버텨야 하기에 빼어난 움직임을 필요로 하는 곳이다.
“한솔이 네가 나갈래?”
“그래야 할 것 같네요.”
여기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민첩하기로만 따지면 김민준도 나쁘지 않지만 DT게이밍엔 실력파 다크레인저가 대기중이었다.
김민준의 몸놀림은 마법사 중에선 분명 빨랐지만 스탯의 차이가 있어 상급 암살 플레이어와 비교하면 아무래도 불리한 점이 있었다.
게다가 다크레인저의 특기는 위장과 은신,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성채에선 상대가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왔나?
-왔다!
-왔다아아!
-킹니크!
-유니크 왔다!
내가 무대위로 오르자 내 닉네임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게 피어났다.
함성은 중계진이 나를 소개하는 시점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경기 시작이후 우릴 응원하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DT게이밍의 응원을 덮었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어태커 플레이어! 유니크가 다시 한 번 세계 무대를 향한 도전장을 내밉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유니크도 쉽지 않을 겁니다. 가이아는 엄연히 팀게임 아니겠습니까? 벌써 2년째 중계를 하고 있지만 오늘의 DT게이밍! 정말 기세가 좋습니다!”
젠장.
중계진의 멘트를 듣고 있을 때 상대 쪽에서 올라온 선수의 얼굴이 보였다.
좋은 선수들로 구성된 DT게이밍 1군 열두 명 중에서 신경 쓰지 않던 인물이었다.
우리가 1라운드에 김정환을 냈던 것과 마찬가지로 DT게이밍이 나를 저격한 것이다.
그것도 잃어도 부담이 없는 카드를 이용해서.
-먹었다!
-엔트리 먹었어 ㅋㅋㅋㅋㅋ
-아이고 꼬숩다.
-1승은 드릴게. 1승만 가져가 ^^
전상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강한 카드를 잡길 바랐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됐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분노를 눌러 담으며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버림 패로 나왔으면 순순히 죽어라.
눈빛으로 그리 말하며 상대 아크나이트에게 달려들자 거대한 충격음이 터졌다.
열양지와 동시에 용의충격이 상대의 방패 위를 때리며 나는 소리였다.
커다란 소음에 이목이 끌리자 상대방의 난처한 눈빛이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전투를 치르고 있던 성채 병사 중 일부가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프로 선수급에 맞춘 상당히 강한 NPC들이었다.
다수가 전장에서 얽히면 변수가 많아지는 데다 게임을 생각대로 컨트롤하기 어려워진다.
이게 싫은 선수 상당수가 병사의 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 결판을 짓기 원했지만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었다.
날아드는 화살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이제부턴 순수 피지컬 싸움, 이런 양상에서 승자는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몸놀림이 좋다면 NPC병사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정도급 선수였으면 버림패로 나올 일도 없었을 터였다.
-상대 선수를 요리할 줄 아는 주방장!
-이집 요리 잘하네;
-이게 세계 최강의 포스인가.
-팬티장수 오늘도 대호황 ㅋㅋㅋㅋ
병사들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열양지를 뿜어 급소를 가격하자 어흑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의 무릎이 구부러졌다.
“맙소사, 55초입니다! 스타서퍼가 55초만에 2라운드를 가져가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립니다!”
-주모오오오!
-국가 대항전도 아닌데 주모를 왜 찾아!
-세계 최강의 사나이!
정상현이 김정환을 꺾은 것보다 훨씬 빠른 타임으로 2라운드를 마치자 DT를 응원하는 기세가 한풀 수그러들었다.
흐름이 넘어왔다고 판단한 코치는 자신 있게 3라운드에 김민준을 투입했다.
제레미가 아직 게임을 뛸 수 없는 상태인지라 스타서퍼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카드였다.
1승만 더 챙기면 설령 4라운드를 지더라도 팀전을 노릴 수 있었다.
-레이저 파이팅!
-레이저!
상대 팀에 비하면 숫자가 많진 않지만 직관을 나온 스타서퍼 팬들은 김민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그러나 열렬한 응원도 잠시, 경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민준이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2라운드에 나설 줄 알고 견제했던 상대방의 다크레인저가 3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젠장 내가 나갔어야 되는데···.”
상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게임이 기울어가자 제레미는 앓는 소릴 냈다.
하다못해 김민준의 컨디션이 정상이기만 했어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상성의 불리를 극복하긴 아무래도 무리였다.
3분의 시간을 다 써가며 경기를 치렀지만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점수 결과가 나왔다.
완패였다.
“오, 제발. 이렇게 떨어질 순 없어!”
제레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유성철의 손을 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 손을 잡아준다고 실력이 오를 것도 아닌데 말이다.
“형도 뭐라고 말 좀 해!”
제레미가 빼액하며 날 노려봤다.
“지금 이 상황이 걱정되지도 않아!”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최선은 아무 도움이 안 돼! 잘해야 한다고!”
제레미는 이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월드챔피언십에 못 나갈지도 모른단 사실이 녀석에겐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사실 S.솔리드를 떠날 때부터 이런 시기를 겪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분명 스타서퍼는 최고의 유망주를 모은 잠재력 있는 팀이지만 장기집권을 위한 그림을 그리다보니 팀원들 연령이 많이 어렸다.
다시 말해 선수들이 재능을 꽃피우는데 꼭 필요한 물리적 시간이 아직 모자랐다.
내년 정규 시즌이 끝날 때쯤이면 스타서퍼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어있을 테지만 아직은 미숙한 점이 많았다.
“안되겠어. 코치님! 저 내보내 주세요.”
“어어?”
오늘 4라운드는 상태가 제일 멀쩡한 유성철이 나설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레미가 출전을 요구하자 코치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적당히 해. 네가 지금 게임 할 수 있는 몸 상태야?”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코치를 대신해 내가 나섰다.
안색으로 보나 뭐로 보나 지금 제레미의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간신히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제부터 열심히 준비한 성철이는 뭐가 되냐.”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개인전 비중이 높아도 가이아는 팀게임이야. 누구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게임이 아니라고. 우리끼리 못 믿으면 누가 우릴 응원하겠어?”
“으으···.”
결국 다시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제레미는 코를 만지더니 성철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마음만 앞서서 헛소리 한 거야.”
“아니에요. 형이 저보다 잘하는 거 사실인데요 뭘.”
유성철은 정말 괜찮다는 듯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오늘은 한 번 믿어봐 주세요.”
“자, 다들 모여서 응원 한 번 하고 가자.”
코치는 팀원들을 모아 결의를 다졌다.
유성철이 진다면 3:1로 패배, 올 시즌은 여기서 끝이었으니 응원이라도 열심히 해야할 판이었다.
“유성철 파이팅!”
“잘해라!”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어!”
“유 캔 두 잇 보이!”
팀원들의 격려를 받으며 무대 위로 향하던 성철이 내앞을 지나갈 때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믿어보세요. 오늘은 왠지 감이 좋거든요.”
감이 좋다고?
무대에 올라서는 그의 뒷모습은 왠지 모르게 듬직해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 유성철을 영입한 건 그에게 개인전 능력을 기대하고 서가 아니었다.
유성철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음양사 스페셜리스트인건 사실이지만 과거의 그는 팀전에서 역량을 발휘하는 존재였다.
애초에 음양사란 직업은 개인전보단 단체전에서 시너지를 발휘하는 클래스였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녀석의 말대로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4라운드 전장은 망자의 광장, 피할 곳이 마땅찮은 좁은 전장에서 두 명의 적색 클래스가 맞붙었다.
경기 시작 1분 30초째, 팀원들이 벌떡 일어나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뛰기 시작했다.
“잡, 잡았다!”
“조금만 더!!!”
“제에발···!”
-미쳤다!
-나이트버드 맞지?
-저놈 숨겨진 물건이었네!
-키아~!!!!!
-오늘부터 갓양사 합니다 ㄷㄷ;
-랭겜 갓양사 주의보;;
놀라운 일이었다.
유성철은 DT의 아크위자드를 상대로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았다.
실력이 없는 선수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최소 준 에이스급인 선수를 상대로 유성철은 견고한 플레이를 통해 착실하게 포인트를 쌓아올렸다.
이 호투에 경기를 지켜보던 모두가 놀랐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경기를 보고 있으면서도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경기였다.
내가 기억하는 유성철의 전성기는 지금으로부터 2년 뒤, 유성철의 나이가 열아홉이 될 때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유성철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경기력은 내가 기억하는 그때와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증수표를 잔뜩 모아둔 스타서퍼에서 제일 먼저 기량을 만개한 선수가 됐단 뜻이다.
저거 혹시 인생 2회차 아냐?
오죽하면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야 과거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니 경험치가 유지된다 치더라도 유성철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거물일지도···.
게다가 그의 나이 이제 겨우 열일곱.
내가 기억하고 있던 열아홉 당시의 실력을 지금 전부 피워냈다면 더 성장할 여지가 충분했다.
옛날의 유성철과 지금 모습을 겹쳐보며 소름을 느끼는 사이 그의 식신이 상대 아크위자드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식신 폭발로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을 텐데도 유성철은 신중하게 갉아먹기 전략을 고수했다.
-아이 답답하네!
-왜 식폭 안하는데!
-빨리 경기 끝내라고오!
훈수충들이 대거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식신폭발은 범위를 타격하는 스킬이기에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아크위자드를 단숨에 끝장낼 수 있었다.
상당수의 관중이 좀처럼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유성철을 보며 화를 내기 바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무 조심해서 플레이하는 거 아냐?”
“성철이가 잘 하고 있는 거야.”
“왜?”
“블링크.”
“블링크를 쓸지 몰라서 저러고 있다고?”
적색계열이 다루는 최상위 회피기인 블랭크.
다소 짧은 거리를 공간을 접어 사라지는 스킬의 사기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세상에 못 피할 공격이 없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아니 블링크가 있었으면 진작 쓰지 않았겠어?”
제레미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고갤 갸웃거렸지만 모를 일이었다.
DT게이밍의 아크위자드가 블링크를 가지고 있단 정보는 들어본 바가 없지만 월드챔피언십을 노리고 전력을 보강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제레미의 말대로 블링크가 나올 가능성은 작았다.
마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러나 정말 상대가 블링크를 지녔다면 식신 폭발 이후 공격 수단이 없어진 유성철은 역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상황.
경기는 어느덧 2분 30초를 넘어 타임오버인 3분을 향해 다가갔다.
유성철은 끝까지 단단한 경기를 고집했고 결국 체력 점수차로 인한 타임오버 승리를 거뒀다.
스코어 2:2, 5라운드로 가는 길이 유성철의 손에 의해 열린 것이다.
“우와아아!”
“잘했어!”
“크으! 끝내줬다!”
아픈 적이 없던 사람들처럼 팀원들은 기세 좋게 달려나가 유성철의 머리며 등을 두드렸다.
중계진이 호들갑을 떨며 5라운드 준비를 알릴 때, 나는 무대 위에 우두커니 남아있는 적 아크위자드를 주시했다.
과거 7년, 다시 태어나 3년, 합치면 10년에 이르는 시간을 전장 위에서 보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선수를 봐왔다.
경기가 끝나면 후련한 표정을 짓는 인간도 있고, 상대를 비웃는 선수, 패배에 분노하는 선수도 있었다.
근데 저 녀석은 아쉬워하고 있단 말이지.
그간 쌓아올린 경험을 토대로 볼 때 상대는 조금 전 경기 결과에 아쉬워하고 있었다.
경기 흐름이 조금 루즈하긴 했지만 일방적이었기에 당한 쪽에서 아쉬움을 토로할 정도의 시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런 표정을 지었다면 준비한 걸 다 보여주지 못했거나, 자신의 판단미스라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주의해야겠는걸.
5라운드에 다시 만날 확률이 높은 상대였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대한민국 최종 티켓의 향방을 가르는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