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116화 (116/170)

스타서퍼 (4)

데니스의 손에 들린 무기는 글라디우스였다.

고대 로마군단병들이 사용하는 팔뚝보다 조금 더 큰 검이다.

거기에 커다란 타워실드를 들고 있으니 그의 몸이 단단한 성채처럼 보였다.

데니스를 마주한 김정환은 숨 막히는 압박감을 느꼈다.

스타서퍼에서 일대일 능력이 가장 뛰어난 건 두말할 필요 없이 한솔이지만 그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유니크를 다루는 정한솔의 위압감이 날카로운 검과 같다면 데니스는 무얼 해도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우직함이었다.

‘앗.’

이대로 굳어있음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데니스가 먼저 움직이며 치고 나왔다.

타워실드를 앞세워 검을 겨누고 들어오는 돌진은 흡사 코뿔소 같았다.

잠시 뒤, 방패와 방패가 부딪치며 정환의 밸런스가 무너졌다.

‘공격할 틈이 없어···?’

반격할 요량으로 공격을 꽂아넣었는데 쓸데없이 방패만 두들기며 마력이 소모됐다.

이렇게 단단한 상대와 마주친 적이 없던 정환은 발을 구르며 배를 흔들었다.

이대로 가면 뒤로 밀리다 물에 빠질 뿐이었다.

라운드 실드로 데니스의 공격을 쳐냄과 동시의 정환의 몸이 지면을 향해 낮아졌다.

역전을 위한 회심의 공격.

타워 실드가 아무리 커도 자세가 높다면 몸을 다 덮진 못한다.

그는 방패 가장 밑, 데니스의 발목을 노렸다.

침착하게 빠른 베기 스킬을 발동하자 속도에 불이 붙었다.

“먹혔다!?”

“좋아 그대로!···어?”

팀원들이 주먹을 쥐며 몸을 들썩이는 그때, 데니스의 방패가 산이 내려앉듯 쿵하고 내리찍혔다.

“윽!”

배 바닥과 방패 사이에 검을 물린 정환이 안간힘을 써보지만 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방패로 누른데다 발로 밟고 있으니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환의 비명.

데니스는 인정사정없이 실드 뒤에서 글라디우스를 내밀어 정환의 팔을 난도질했다.

잔인함을 덜기 위해 피는 튀지 않는다지만 정환이 느낄 고통이 어느 정도일진 충분히 짐작이 갔다.

경기를 지켜보는 팀원들의 얼굴이 찌푸려져 있었다.

결국 정환은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체력은 둘째치고 검을 잡고 있던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니 이미 승부의 결과는 나온 셈이었다.

“항복하겠나?”

데니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자 정환은 대답대신 허리춤에 달려있던 예비 무기를 꺼내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여전히 정환이 속행 의지를 보이자 데니스는 대포알처럼 튀어나가 검을 들이밀었다.

돌진스킬, 파워 스트라이크가 정환의 방패를 두들기며 커다란 충격음을 자아냈다.

묵직한 충격을 다 소화하기도 전에 비스듬한 타워실드가 하체를 치고 들어와 완전히 자세를 무너트렸다.

이번엔 방패 돌진기였다.

펑!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밀린 정환은 그대로 강으로 빠졌다.

라플라타는 장외패가 없는 맵이지만 강물에 빠지면 체력이 급격히 줄기에 사실상 게임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정환은 허우적거리면서도 다시 배에 오르려는 투지를 보였지만 데니스가 휘두른 글라디우스에 맞아 꼬르륵 소리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전보다 플레이가 더 좋아졌는데···?”

정환의 패배를 지켜보던 제레미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일 년 전과는 한층 다른 움직임이었다.

훨씬 더 노련했으며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3년 동안 흔들림 없이 북미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강팀.

그간의 경험이 이들을 노련한 베테랑 플레이어로 만든 것이다.

경기시간은 1분 12초.

스타서퍼가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당해본 적 없는 큰 격차의 패배였다.

“주목! 다음은···제레미가 나간다.”

제레미의 전투력은 명실상부한 스타서퍼 2위.

김민준이 무서운 기세로 기량을 끌어올리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프로리그와 월드챔피언십에 이르는 2년 치의 경험을 대번에 따라잡을 순 없는 일이었다.

“이기고 옵니다!”

“제레미 파이팅!”

스코어는 일대일.

오래간만에 팽팽한 경기를 하고 있으려니 긴장감이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대에 오른 제레미를 맞이한 건 S.솔리드의 에이스 카드가 된 제리였다.

“이게 얼마만이야!”

제레미는 제리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환호했다.

비록 암살계의 위상이 전만 못하다곤 하나 여전히 마법사를 상대론 위력적인 카드였다.

이번 경기를 이겨 리드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주변 풍경이 변하며 차가운 바람이 발밑에서부터 훅하고 몰아닥쳤다.

‘어어?’

찬바람을 맞는 순간 제레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푸른 창공의 광장, 농밀한 마력이 주변을 스미는 전장은 유구의 천칭이었다.

마법의 위력이 극대화되며 마력의 소모가 금방 복구되는 마력조성 레벨 3짜리 전장.

그런 제레미의 당황스러움을 읽은 것일까.

제리가 히죽 웃으며 그대로 인사를 돌려줬다.

“오래간만이네?”

*

제레미는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를 뒤바꿀 순 없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세계 정상급 무도가.

하지만 너무 뛰어난 실력 탓에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을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제리의 원소 마법이 광장 위를 수놓을 때마다 제레미는 얼고 녹기를 반복했다.

실력이 형편없는 선수였으면 회피 능력이 떨어져 더 빨리 결판이 났을 텐데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버티다보니 고통을 배로 받은 셈이었다.

먼지나게 두들겨 맞고 온 제레미는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무대를 내려왔다.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 도깨비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스타서퍼의 벤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해졌다.

제레미는 3분의 시간을 거의 꽉 채워가며 분전했지만 어찌 됐건 패배란 점은 마찬가지였다.

스코어 1:2,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불리한 전황이었다.

“4, 4라운드 맵이.”

코치는 당황한 듯 말도 더듬었다.

그리고는 전광판의 맵을 확인하고 나선 더욱 암울한 얼굴이 됐다.

큼지막한 글씨로 4라운드 맵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십만대산.

유구의 천칭이 마법사의 독무대라면 십만대산은 암살자를 위한 무대였다.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무너져 내리는 뾰족한 봉우리가 늘어선 전장.

문제는 지금 스타서퍼에 남은 암살자 카드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변이 있나.”

스타서퍼는 절대 암살계 전력이 약한 팀이 아니다.

월드클래스급 무도가를 둘이나 보유하지 않았던가.

고작 2부 리그 경기이긴 하지만 수많은 한국 팬들이 스타서퍼의 실력이면 충분히 1부에서도 통할거라 말했던 믿음의 근거가 나와 제레미였다.

하지만 이미 두 명 모두 출전 기회를 소모한 상태.

남은 건 김민준, 유호영으로 이어지는 마법사 라인과 유성철, 김정수 뿐이었다.

정대환도 있긴 하지만 육중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실드나이트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쪽엔 아직 암살계 남아있어요.”

전문 분석팀이 없는 탓에 S.솔리드처럼 경기를 철저하게 준비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 상대 팀에 어떤 선수들이 있는지는 확인해둔 상태였다.

S.솔리드는 나와 제레미의 빈자리를 2부 리그 연습생을 올려 채웠다.

우승 팀이라고 해서 매번 최고의 연습생만 발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S.솔리드의 신참들은 다시 한 번 기량이 폭발했고 팀의 세 번째 정규시즌 우승에 큰 공헌을 했다.

“누구였지? 스페셜이었나?”

“네.”

닉네임 스페셜, 이름은 데릭 슈미드.

올해 스무살이 된 선수로 현재 S.솔리드 1군의 유일한 암살자였다.

1군의 엔트리는 총 열둘.

어태커의 한 축을 담당하는 암살계가 한 명 뿐인 건 확실히 전력 불균형을 초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암살 클래스를 한 명만 보유한 건 아무래도 선수를 고르는 팀 내 기준이 높아진 것이 한몫했을 것이다.

나와 제레미 같은 선수를 금방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 S.솔리드는 이번 시즌을 단 한 명의 무도가로 운영했고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암살자가 마법사에게 가지는 상성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으나 신입 선수의 역량이 예상외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스페셜의 승률은 이번 시즌 6할에 달했다.

그것도 탱커, 암살자, 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두루 활약해 얻어낸 승률이었다.

“저쪽에선 무조건 남아있는 무도가 한 명이 나오겠죠.”

“골치 아프네.”

코치가 아랫입술을 깨문다.

십만대산에서 무도가를 상대로 하려면 이쪽도 암살자를 맞춰 내보내는 게 최선이다.

“여기선 정수 뿐인가···.”

코치가 김정수를 염두에 둔 건 일리 있는 선택이었다.

안 그래도 암살자에게 유리한 전장에 마법사를 내보낼 순 없고 몸이 무거운 실드나이트보단 아크나이트가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난 반대였다.

정수형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피지컬이 부족했다.

평범한 맵이었으면 모를까 전장 조건도 불리했다.

차라리 반전을 노릴 거면 포텐을 보고 뽑은 민준이에게 기대는 게 나아보였다.

천재과인 민준이라면 불리한 상황에서도 번뜩이는 수를 낼지 몰랐다.

“정수야. 출전할래?”

“저야 시키시면 다 하죠.”

그러나 난 침묵을 지켰다.

난 팀의 주장일 뿐, 코치나 감독이 아니다.

물론 내가 스타서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건 사실이지만 선수 혼자 휘두를 수 있는 팀을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코치의 선택이 김정수라면 나는 그 선택을 믿고 지켜보는 게 옳았다.

“화이팅!”

나는 정수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을 불어넣었다.

연습한 대로 해도 이기기 힘든 상대였지만 괜히 시작부터 초를 칠 필요는 없었다.

“형! 제발 연장전까지만 보내주세요!”

“팀전에선 이길 수 있어!”

남은 팀원들은 제발 5라운드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며 격렬한 응원전을 펼쳤다.

마치 연습전이 아니라 포스트 시즌 같은 애절함이 느껴졌다.

*

2분 25초, 패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긴 경기였다.

그만큼 김정수는 상대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했다.

생각지 못한 날카로운 수가 돋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다들 아쉬움에 허탈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 거였어···!’

난 조금 전 시합을 보며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기억하는 정수형의 레벨은 분명 지금보다 낮은 것이었다.

결코 S급 무도가를 상대로 십만대산에서 2분 이상 버틸 클래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듯 정수형 역시 바뀌었다.

조금 전 4라운드는 그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귀중한 한판이었다.

만약 내가 의견을 내세워 김민준을 내자고 했으면 절대 깨닫지 못했을 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많은 게 변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사람의 한계를 제멋대로 판단하는 실수는 두 번 다시 있어선 안 됐다.

나는 자신의 패배로 5라운드에 가지 못했다며 미안해하는 정수형을 위로했다.

“형. 이거 스크림이야. 부담가질 필요 없어. 지금은 그냥 실전 경험 쌓는다고 생각해.”

“맞아. 우리 팀이 워낙 이겨서 그렇지 이게 정상이야.”

“벌써 기운 빠지면 큰일 난다. 스크림 아직 안 끝났어.”

“형. 돈워리, 돈워리.”

코치도 팀원들도 그의 책임이 아니라며 한결 무게를 덜어줬다.

다음 게임을 준비하며 전광판의 스코어를 확인했다.

1:3 패배.

퍼펙트 게임을 밥 먹듯 하며 2부리그를 호령하던 스타서퍼에겐 충격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스크림은 이제 시작이었다.

선수들의 집중력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스크림은 반복해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는 전력 모두를 테스트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고 코치는 알겠다며 고갤 끄덕였다.

미국까지 먼 발걸음을 했으니 소외되는 선수가 있어선 안됐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스크림.

전력 모두를 테스트하려면 과감하게 나를 제외하는 것도 필요했다.

언제까지고 스크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 최대한 많은 기회를 줘야 했다.

내가 빠진 자리엔 유성철, 김민준, 유호영이 들어갔고 시합 양상은 여전히 불리하게 흘렀다.

한국 최고의 플레이어로 성장하게 될 두 명의 마도사가 S.솔리드의 주축 라인, 제리와 마이클에게 연달아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김민준과 유호영의 재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1부 리그 경험치를 3년이나 먹은 베테랑들의 실력은 과연 녹록치 않았다.

이게 뭐 별거냐 싶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타우러스나 사이클론, 피케 같은 북미 최상위 레벨의 선수들과 격전을 치러왔으니 토대가 튼튼할 수밖에 없었다.

실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경험치는 분명 존재한다.

내가 일대일 훈련을 돕는다곤 하지만 다양한 선수들과 겪는 실전경험을 전부 대신해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친구들이 연습실 패왕으로 머물진 않으리란 점이었다.

스크림 경기가 계속될수록 선수들의 몸놀림이 점점 좋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사실 첫 경기 역시 제레미가 전장 운이 보통만 됐어도 2:2로 충분히 연장전에 들어갈 수 있는 흐름이었다.

처음 겪는 패배에 멘탈이 크게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좋아. 빠르게 좋아지고 있어.’

선수들의 성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마침내 첫 5라운드의 문이 열렸다.

스크림 개시 이후 4번째 시합만에 열린 팀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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