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서퍼 (3)
북미 리그 2회 우승, 월드챔피언십 1회 우승, 정규 시즌 3회 연속 1위 달성까지.
S.솔리드는 스타서퍼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커리어를 지닌 팀이었다.
하지만 존은 스크림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생각지도 않던 비행기 티켓까지 보내주며 팀의 미국행을 지원했다.
이렇게 쉽게 시합이 성사된 것은 솔리드 팀원들의 적극적인 동의 덕분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옛 동료들이 나를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날씨가 왜 이래?”
“진짜 덥네?”
“난 오버하는 줄 알았어.”
한국은 더위가 한풀 꺾인 모양새였는데 애리조나는 여전히 뜨거운 햇볕을 자랑했다.
숙소에서 제레미가 신이 나 하와이안 셔츠를 챙길 때만 해도 가만있던 팀원들은 숨막히는 더위에 혀를 내둘렀다.
우린 서둘러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스크림 일정은 내일이었고 오늘은 온종일 휴식을 취하며 컨디션을 조절할 예정이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나면 아무래도 몸이 피곤했다.
그리고 살짝 피로를 느끼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슬 기운을 보충해야겠는걸.
무한 체력에 가까운 내가 피로를 느낀다는 건 자연의 기운이 바닥났단 뜻이다.
“혼자 괜찮겠어? 아니면 같이 가도 되는데.”
“걱정 마세요. 혼자가 더 편하니까. 원래 솔리드에 있을 때도 종종 갔거든요.”
“어디 가는데?”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코치와 얘길 하고 있으니 행선지를 궁금해 하는 팀원 몇 명이 주변으로 모였다.
결국 혼자 가려던 국립공원은 김민준, 유호영이 끼어 함께 가기로 했다.
대체 이 날씨에 왜 산을 가는지 모르겠단 제레미의 말이 있었지만 따라나선 팀원들은 나오길 잘했단 반응이었다.
“와. 넓은 거봐.”
“뭔가 기운이 틀리네. 땅이 넓어서 그런가···.”
열심히 공기를 마시는 두 녀석을 보며 나도 열심히 기운을 흡수했다.
발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푸른 기운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
이튿날, 피로를 털어낸 우린 존이 보낸 대형 밴을 타고 2군 숙소로 향했다.
1군 숙소로 가지 않은 이유는 접속기 숫자가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양팀의 인원은 각각 열둘씩 합이 스물넷.
S.솔리드에선 2군팀 훈련을 중단하고 오늘 우리를 위해 장소를 빌려주기로 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일 년만이죠.”
옛 동료들은 모두 1군 숙소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존은 2군 숙소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S.솔리드의 프런트를 책임지며 오랫동안 해링턴 대표의 수족으로 일했던 남자다.
“반갑습니다. 존 길버트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독을 맡은 박민석입니다.”
인사를 나눈 존은 우리 팀원들을 훑어보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어려 보이는걸. 자네가 뽑았다면 실력이야 두말할 필요 없겠고.”
존은 친구들의 재능이 기대된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경기는 쉽지 않을 거야.”
“쉬울거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전력 분석팀이 며칠에 걸쳐 분석을 마쳤거든.”
“우리 팀을요?”
오늘 스크림에 임하는 S.솔리드의 자세는 매우 진지했다.
객관적인 커리어로 볼 땐 솔직히 상대도 안 되는 게 사실이다.
세계대회 우승팀과 2부리그 팀의 스크림.
하지만 S.솔리드는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단 각오를 보였다.
2군 숙소의 접속기를 빌려 게임에 접속하자 반가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올 것이 왔군.”
“왜 이렇게 늦게와? 한참 전부터 기다렸다고.”
체격이 좋은 데니스를 필두로 옛 동료들이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오늘 경기 잘 부탁한다.”
“그래.”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시합 끝나고 한꺼번에 풀자고.”
주장 대 주장으로 악수를 하는 자리.
내가 떠난 뒤 S.솔리드의 새 주장은 데니스가 맡게 됐다고 했다.
그와 손을 맞잡는 순간 S.솔리드의 강한 투지가 전해졌다.
오늘 스크림을 벼르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살벌하겠는데.
감독간 인사가 끝나자 곧바로 연습 시합이 시작됐다.
장승표 코치는 진지한 얼굴로 1라운드에 누굴 내보내야 할지 생각 중이었다.
평소라면 부담 없이 내가 나갔겠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연습시합임에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무대 위를 흐르고 있었다.
“저쪽에서 우리 패턴을 알고 있다면 1라운드에 너나 제레미가 나올 걸 예측했을 수도 있어.”
1라운드에 확실한 1승 카드를 내보내는 건 평범한 엔트리 전략이지만 간파당했다면 카운터를 당할 수 있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일단 평소대로 가보죠.”
“그럴까···.”
결국 돌고 돌아 코치의 선택은 나였다.
전장은 망자의 광장, 나의 상대는 방패를 앞세운 빌이었다.
S.솔리드 유일의 아크나이트인 빌 머레이는 여전히 팀의 세미 탱커를 책임지고 있었다.
월드챔피언십 결승에서 원라이프를 상대로 1승을 거둔 노련한 실력자다.
‘은신은 쓸 필요 없겠지.’
은신 상태에서 빠른 스텝을 밟으면 프로 선수라도 막기 어려운 형태가 된다.
1, 2시즌에서 제법 쏠쏠하게 써먹었던 전략이지만 공동묘지인 망자의 광장은 먼지가 겹겹이 쌓여 아무래도 흔적이 많이 남았다.
은신 스킬의 효율이 떨어지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시즌은 스킬의 마력 소모비가 커진 탓에 함부로 스킬을 사용하기 부담스러웠다.
“옛 생각 나는데!”
빌은 그렇게 외치며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터진 강공.
아크나이트의 연속 찌르기가 터지며 내 앞에 검의 환영이 쏟아졌다.
너무 빨라 잔영처럼 보이지만 하나하나 실제 데미지가 있는 스킬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체력이 깎여나갔다.
당하기만 하는 취미는 없는지라 쏟아져 들어오는 검을 받아내며 프론트 킥으로 빌의 허벅지를 쪼갰다.
신체 어디로든 스킬을 뿜어낼 수 있는 용의 충격, 쩍하는 타격음이 울렸지만 빌은 아랑곳않고 추가타를 이어왔다.
이대로 공방을 주고받으면 손해를 보는 건 나였다.
‘실력이 더 늘었어.’
빌은 벌써 프로 3년 차, 처음 팀에 왔을 때 봤던 어리숙한 모습은 이제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세계 최고의 어태커를 잡기 위해 보낸 자객이 분명했다.
운룡비형을 밟으며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열양지를 쏴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공격은 빌의 방패에 모두 가로막혔다.
연이은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나도 함부로 공격을 내기 애매한 상황이 됐다.
마력의 소모량이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빌은 아크나이트라 기본적으로 물리 방어력이 높은 클래스다.
똑같이 공격을 주고 받으면 내가 완벽히 손해를 보는 구도였다.
나는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며 빌의 주변을 맴돌았다.
체력은 근소하게나마 빌의 우위, 빌의 눈동자는 수시로 전방 위쪽을 향했다.
자신과 상대의 체력 바가 표시된 투명창이 있는 위치였다.
양쪽 플레이어의 체력은 게임 내에서 공개하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정보다.
어림없지.
장기전으로 가려는 빌의 빈틈을 노려 열양지와 마환지를 시간차를 두고 쏘아냈다.
아크나이트의 방패는 실드나이트의 것에 비해 작은 편이다.
작정하고 노리고 들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시 체력의 우위가 뒤집히자 빌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아마 빌은 왜 내 마력이 마르지 않는지 궁금할 터였다.
1라운드가 시작된 지 어느덧 1분, 스킬의 사용횟수를 볼 때 내 쪽이 두 배는 더 많은 스킬을 사용했다.
2시즌도 아니고 진즉 마력이 떨어질 타이밍이었다.
‘평범한 무도가라면 말이지.’
빌이 간과한 것은 바로 장비였다.
내 장비는 명실상부한 전세계 최고 레벨이었다.
전세계 어느 무도가를 데려와도 나보다 장비가 좋은 플레이어는 없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한국 서버에서 공헌도를 가장 많이 쌓았다는 건 그만큼 레어 던전을 더 많이 공략했단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스타서퍼는 최고의 정보 세력인 헤르메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우리의 주 무대는 북쪽이었기에 아무래도 다른 방면에 대한 정보는 약할 수밖에 없었는데 헤르메스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는데 큰 도움을 줬다.
레어 던전이 발견됐다는 정보가 있으면 우리에게 제일 먼저 들어왔고 희귀등급의 장비, 스킬이 입수되면 스타서퍼 프런트를 통해 거래가 이루어졌다.
‘어서 들어오라고, 빌.’
가만히 있어서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내 체력이 우위가 됐기에 이대로 시간 초과가 되면 나의 승리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빌이 먼저 달려들었고 단단한 방어에 차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빌의 공격이 조금 커진 그 순간,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운룡비형과 그림자발자국을 발동했다.
이번 시합에 나오기 전 자색팔찌의 효과로 강화해둔 스킬은 운룡비형.
갑작스레 사라진 나의 모습에 빌은 눈을 부릅뜨고 검을 휘둘렀다.
전방을 향해서가 아닌 후방을 향해서.
내가 뒤를 잡을 거라고 예상해 휘두른 공격이었다.
“잡았어!”
180도 회전한 빌은 땅바닥 먼지에 내 발자국이 찍히는 걸 보며 소리쳤다.
예측 방어가 제대로 먹히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의 몸이 다시 한 번 갈라졌고 빌의 검은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빌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뒤를 잡은 것까진 좋았는데 내가 이형환위로 다시 한 번 뒤를 잡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나는 등을 훤히 드러낸 빌을 향해 벼락이 담긴 공격을 내질렀다.
교룡뇌조가 시원하게 터지자 빌이 신음을 흘렸고 나는 기세를 몰아 용의 충격을 소나기처럼 흩뿌렸다.
1초도 채 안 되는 시간동안 연달아 얻어맞은 빌의 체력은 4할 아래로 뚝 떨어졌다.
“아직 안 끝났어!”
먼지위를 굴러 지저분해진 빌이 악을 쓰며 몸에서 붉은 투기를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숨겨진 비장의 한 수임을 바로 간파한 나는 붙어주지 않고 요리조리 비석을 방패삼아 빌을 피해 다녔다.
“한솔!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야!”
시합에선 치사한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치고 빠지기도 엄연한 전략 중의 하나, 특히 상대의 스킬이 얼마나 무서운 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도저히 들어가고 싶은 맘이 들지 않았다.
내가 미쳤다고 들어가?
빌의 몸을 두른 붉은 투기, 용의 비늘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것은 드래곤 블러드가 틀림없었다.
아크나이트의 체력이 빠질수록 방어력과 공격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전설급 레어 스킬이다.
마도사의 마나드라이브 강화판인 셈이다.
다만 마나드라이브는 초월급이지만 드래곤 블러드는 전설급인만큼 두 스킬의 위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만약 내가 스킬의 용도를 모르고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달려들었다면 역전이 나올 수도 있을만큼 위험한 스킬이었다.
[YOU WIN!!]
결국 시간을 끌며 경기를 끝내자 빌이 허탈한 듯 땀을 훔쳤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날카롭네.”
“넌 작년보다 실력이 더 좋아졌는데?”
“그래?”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빌은 나와 주먹을 맞댔다.
최선을 다해 승부하고 난 다음엔 훌훌 털어버리는 것이 일류선수로서의 마음가짐이었다.
벤치로 돌아오자 팀원들이 환호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분위기를 살려 잽싸게 하이터치를 긁었다.
“플레이 어떤 거 같아?”
“끝내줬지.”
“움직임 환상적이었습니다!”
“나 말고 저쪽.”
“저 선수가 저쪽 에이스에요?”
“잘하던데?”
팀원들은 빌의 플레이를 칭찬했다.
나를 상대로 오래 버틴 것이 제법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빌은 분명 에이스하곤 거리가 먼 선수였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여전히 S.솔리드의 주력 카드가 아닐 터였다.
“빌이 무슨 에이스야.”
제레미는 어림없다는 듯 고갤 흔들었고 팀원들이 다소 놀란 반응을 보였다.
“진짜 잘하던데.”
“방패 돌리는 솜씨나 반격 타이밍도 잘 재고요. 실제로 초반엔 한솔 형 체력이 밀렸으니까.”
같은 클래스를 다루면 그 진가를 더 잘 알아보는 법.
아크나이트를 플레이하는 김정수, 김정환은 빌의 플레이를 끊임없이 칭찬했다.
그가 진 건 내가 규격 외였기 때문이지 결코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란 말도 덧붙였다.
“저런 선수가 팀 에이스가 아니면 누구야?”
“음. 나랑 한솔이 형이 빠졌으니까···.”
제레미는 슬그머니 상대 벤치를 훑었다.
“모르는 얼굴이 둘 있긴 한데 일단 빌은 절대 아니야. 솔직히 빌은 중간 아래였지.”
“말도 안 돼.”
“그럼 에이스는 얼마나 잘한다는 거야?”
그렇게 떠드는 사이 2라운드 맵이 전광판에 표시됐다.
라플라타.
가이아의 전장 중에서 가장 좁은 맵이 선택됐다.
“이건 뭐 선택지가 없네.”
제레미가 희게 웃으며 말했다.
라플라타는 드넓은 강 위에 떠있는 작은 목선, 원체 좁은 맵이라 마법사가 기피하는 맵이었다.
마법 클래스가 빠지면 상성 우위를 점하는 암살계의 이점도 사라지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선 탱커계열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상성 우위를 예측해 마법사를 역으로 내도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맵이 워낙 좁아 탱커가 불쑥 붙으면 마법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맵이었다.
우리 팀에 탱커는 김정수, 김정환, 정대환이 대기중이었다.
이 중 실력적으로 가장 완성된 선수는 김정환.
면접으로 발굴해낸 그는 열여덟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을 갖춘 선수였다.
“김정환, 파이팅!”
“이대로 연승 가자앗!”
연습성적이 가장 뛰어났던 김정환이 2라운드에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의 열띤 응원을 받으며 정환이 무대 위에 섰을 때, 커다란 바위 같은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북미 최강의 방패로 명성을 견고히 하고 있는 사내.
내가 직접 S.솔리드의 방패로 추천했던 재능러, 데니스 트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