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즌 (4)
세 번째 시즌을 맞이한 2030년은 과거의 내가 처음 프로팀 생활을 시작한 시기다.
지난 2년간 내가 S.솔리드에서 일군 커리어는 선수로선 더할 나위 없었으나 PVE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번 시즌부터는 내가 기억하는 정보의 양과 질이 지난 시즌들과 비교해 월등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들었던, 그 강렬했던 경험 몇 가지는 지금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번 시즌 첫 번째 목적지를 북쪽으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장비의 레어리티를 고려하면 서쪽도 괜찮았을 것이다.
스카라의 자색궁전을 시즌 첫 번째로 클리어할 경우 팔찌를 또 하나 획득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처음으로 문스톤 광산을 거점으로 삼는 드워프 왕국이 출현할 예정이었다.
손재주가 뛰어나 우수한 제련기술을 가진 종족 드워프.
퀘스트로 그들의 고민거리를 먼저 해결해주는 세력은 향후 1년 정도는 다른 팀보다 더 좋은 장비를 선점할 수 있었다.
전생엔 프로팀 소속이 아닌 랭커 길드가 드워프 왕국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도움을 독차지했다.
그 결과 많은 프로팀이 그들을 거쳐 장비 제련을 부탁했고 그들은 상당한 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자색궁전의 아이템 루팅은 한순간이지만 드워프의 조력은 시즌 내내 받을 수 있기에 이익의 크기를 따지자면 이쪽이 훨씬 파이가 컸다.
날씨가 조금만 더 온화했더라면 더 많은 상위 길드들이 북쪽을 향해 움직였을 터였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북방에 숨겨진 보물의 비중은 다른 대륙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환경 여건상 경쟁자가 적은 걸 고려하면 더 많은 보물을 차지하는 것도 가능했다.
북해삼신의 영묘 역시 그런 보물 중 하나였다.
우릴 멋대로 이용한 게 괘씸해 뒤를 밟았는데 용케 스파클 녀석들이 영묘를 찾아냈다.
만약 보물을 발견할 낌새가 없으면 녀석들이 철수하는 타이밍에 맞춰 다시 본대와 합류할 참이었는데 막판에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 중앙의 안개 중심부에 도달하자 호수 아래로 들어가는 구멍이 보였다.
차갑고 어두운 물속으로 이어지는 구멍, 웬만한 유저는 여기서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날 법한 그림이지만 난 그대로 코를 잡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의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어두운 호수 속, 나는 기억을 더듬어 곧장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바닥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조각상의 잔해가 깊이 박혀 있었다.
‘이다음엔 오른쪽.’
조각상을 더듬어 향한 곳은 수중 동굴의 입구였고 나는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주변을 살폈다.
빛을 발하는 야광주 덕분에 사물을 식별하는덴 문제가 없었다.
물을 털어내며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내 밝은 빛이 뿜어지는 다른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릉도원.
화초가 만발한 초원에서 본 적 없는 동물들이 뛰놀고 있었다.
그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잠시, 나를 부르는 조용한 목소리가 울렸다.
“손님은 이쪽으로 오시게.”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몹시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는 긴장하는 기색 없이 목소릴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을 직접 찾은 건 처음이었지만 삼신의 시험이 어떤 식으로 부여되는지 알고 있기에 두려움 따윈 없었다.
소나무가 좌우로 늘어선 오솔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허름한 객잔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손님이 찾아왔군.”
적색의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객잔안엔 총 세 명의 노인이 자릴 잡고 있었다.
각기 청색, 적색, 백색의 옷을 걸친 초로의 노인들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날 맞이했다.
“불쑥 찾아온 객을 환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NPC를 상대할 땐 항상 겸손하라.
가이아 유저들이 명심해야 할 격언이었다.
괜히 건방지게 굴었다가 본전도 못 찾는 경우는 게임 내에 수도 없이 많았다.
특히 눈앞 노인들의 얼굴은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지만 엄청난 고수들이었다.
이 영묘는 정체는 던전이 아니라 시험을 치르는 공간이었다.
조만간 주먹을 섞게 될 상대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었다.
“자네는 무에 관심이 있는가?”
만약 여기서 관심이 없다는 대답을 하면 차한잔 얻어 마시고 동굴을 나가는 엔딩이다.
“있습니다.”
“좋군. 그럼 우리 셋 중에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은가.”
노인의 옷 색깔로 알 수 있듯 이들은 각 전투 클래스를 대표했다.
백노인은 탱커, 청노인은 암살자, 적노인은 마법사.
이들 중 한 명을 지목하면 각 클래스에 해당하는 고급 스킬을 얻을 수 있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가이아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살며시 웃으며 가장 좋은 답변을 선택했다.
“세 분 모두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내 답변이 의외였을까?
세 명의 노인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눈빛을 번뜩였다.
“그건 꽤 괴로운 가르침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나?”
“예.”
“밖으로 나가지.”
노인은 날 밖으로 데려갔고 나는 슬슬 몸이 긴장되는 걸 느꼈다.
전직시험 당시 구로관에게 신나게 얻어터졌던 일이 떠올랐다.
NPC 중엔 인간 한계를 시험하는 괴물 같은 이들이 존재했는데 이 북해삼신도 그런 자들 중 하나였다.
피똥 좀 싸겠는데.
구로관의 시험을 치를 당시엔 간이 접속기였기에 고통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전신 접속기가 주는 살벌한 고통을 생각하면 벌써 땀이 날 정도였다.
“방식은 간단하네. 우리 세 명의 협공에서 백 초를 버티면 되네.”
말을 끝낸 삼노인의 기세가 무섭게 퍼지기 시작했다.
북해삼신은 상대 실력에 맞춰 테스트를 조절하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압박감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프로 선수라면 그에 걸맞은 기세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노인들이 힘을 뿜어낼수록 보상이 좋기에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훅하는 소리와 함께 청노인의 발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시작한다는 말도 없이 삼노인의 맹공이 쏟아져 들어왔다.
치사한 노인네들이었다.
“영부! 자력술!”
“섬광쇄도!”
처음 계획은 운룡비형을 이용한 시간 벌이였다.
장소야 넓었으니 도망칠 공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적노인의 주술이 내 몸을 끌어당겼고 내 몸이 둔해진 틈을 타 백노인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날카로운 검이 내 허벅지를 꿰뚫었다.
이걸 깨라고 만들었나···.
불과 삼십 초였다.
나는 삼십 초 만에 떡이 되어 풀밭 위에 얼굴을 박아야 했다.
*
“안색이 영 안 좋네. 그거 꼭 지금 해야 해?”
“내가 꼭 깨고 만다···.”
북해삼신의 시험을 시작한 지도 벌써 3일이나 흘렀다.
솔직히 힘들어도 하루면 깰 줄 알았다.
현실은 시궁창이라더니, 노인의 주먹에 얼굴을 난타당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내가 알던 시험이 아니다!
전생에 내가 기억하고 있는 노인들의 몸놀림은 이 정도로 빠르지 않았다.
북해삼신의 영묘는 사나운 원숭이들의 서식지에 둘러싸여 접근하기 어려울 뿐, 시험 자체의 난이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 보상이 후하다고 정평이 난 퀘스트였다.
브론즈 티어부터 그랜드마스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저들이 삼노인을 찾아와 시험 등급에 맞는 스킬박스를 받아가곤 했다.
솔직히 노인 한 명을 상대로 백 초를 버티는 건 눈감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세 명을 상대로 버티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오죽하면 기획자가 유저를 엿먹이려고 수작을 부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시 난이도를 내려 노인 한 명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긴 아까웠다.
삼노인의 협공에서 100초를 버티면 다인용 스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인용 스킬.
협공 스킬, 시너지 스킬로도 불리는 이 물건은 이번 시즌에 처음 도입된 개념이었다.
다수가 손발을 맞춰 사용해야 하기에 운용이 어렵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단독 스킬보다 훨씬 효율이 좋아 우승을 노리는 프로팀이라면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이미 콜로세움엔 초월급 협공 스킬이 풀리기 시작했고 랭커들 사이에선 위력이 제법이라며 입소문을 탄 상태였다.
다인용 스킬의 입수 확률은 개인 스킬에 비해 더 낮았으니 삼노인의 보상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냥 나중에 다시 시험 치르면 되잖아? 장비랑 스킬 업그레이드 하고 나면 더 편할 거 같은데.”
“안 돼.”
전설급 협공 스킬을 얻을 수 있는데다 첫 업적을 따낼 좋은 기회 아닌가.
이대로 다시 본대와 합류해 북방을 개척하다 첫 업적을 뺏기면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이틀 내로 결착 지을게.”
내가 단호히 답하자 팀원들도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없어도 개척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고 시즌 초반이라 PVP보단 PVE 쪽에 한창 무게가 솔려 있었다.
게눈 감추듯 식사를 마친 난 바로 연습실로 내려가 영묘로 접속했다.
지난 사흘간 시간을 버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삼노인과 손을 섞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본래 실력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겨루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삼노인은 더할 나위 없는 연습 상대였다.
“저 왔습니다.”
“자넨 지치지도 않나?”
“괜찮습니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사흘 동안 이렇게 미친 듯이 시험을 치를 수 없었을 것이다.
삼노인이 가하는 고통은 정신력으로 버틴다 쳐도 몸이 버티지 못할 테니까.
‘시험 끝내면 산에라도 다녀와야겠네.’
삼노인이 그간 얼마나 날 몰아붙였는지 전신 가득 차있던 기운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쪼그라든 게 느껴졌다.
“그럼 시작하시죠.”
***
안개에 둘러싸인 호수 인근, 원숭이들과 사람이 내는 비명이 한데 엉켜 끔찍한 소릴 이루고 있었다.
“개새끼들! 다 죽여!”
길을 뚫기 위한 인간에 의해 이번에도 수많은 원숭이가 떼죽음을 당했다.
혈흔 효과가 극도로 제한되기에 망정이지 실제였다면 주변이 피로 물들 정도의 학살이었다.
“확실히 머릿수가 많으니 편하네.”
“보상은 확실하겠지?”
“가이아 하루 이틀 해? 이건 확실히 대박이라니까.”
남영민은 검에 묻은 혈흔을 털어내며 답했다.
호수 주변에 모인 40인의 랭커들.
며칠 전, 영묘 전투에서 호되게 당한 스파클은 분명 안개 호수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있을 거로 생각해 지원군을 불렀다.
그렇게 스파클과 함께 영묘 공략에 참여한 건 한국리그 1부 팀인 K퀘스트였다.
“여기서부턴 긴장해야 해. 안개 속에 괴물이 있어.”
“괴물?”
“쉿.”
길드원이 눈앞에서 끌려가는 걸 지켜본 남영민은 주변 사람들이 느낄 정도로 긴장했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40인은 방진을 구성해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혹시 우리 숫자가 너무 많아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K퀘스트 유저들은 못 미덥단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호수 중앙에 도달했다.
“이게 보물이야?”
물이 찰랑거리는 얼음 구멍을 본 길드원들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속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선뜻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건 아니잖아?”
“길 안내를 했으면 앞장서야지.”
“그게 무슨 소리야. 보상을 나누기로 했으면 위험 분담도 같이해야지.”
서로 먼저 들어가라고 티격태격하던 그때, 호수 속에서 불쑥 손이 올라와 물을 갈랐다.
“씨발!”
남영민이 깜짝 놀라 펄쩍 뛰었고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구멍 바깥으로 우르르 물러났다.
“뭐야 이건.”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의 남영민의 눈에 비친 건 물에 젖은 유니크였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
어색한 침묵도 잠시, 남영민은 무언가 떠올린 듯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혹시 너냐?”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며 팀원들을 참살했던 괴물의 정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장시간 은신 스킬을 다루는 유니크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아니, 이 녀석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가이아 최전선을 개척하며 갈고 닦은 랭커로서의 감이었다.
“이 개새끼···.”
남영민이 무기를 들자 스파클 인원이 일제히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스파클측 인원만 무려 스무 명,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구도였음에도 유니크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쪽은요.”
“응?”
“그쪽도 저한테 볼 일 있으십니까.”
유니크의 시선은 으르렁거리는 남영민이 아닌 K퀘스트의 주장, 유민환에게 향해있었다.
‘분위기 파악을 잘 못 하는 사람인가? 너무 태연한데.’
유니크의 실력이 뛰어난 거야 다들 인정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스파클 주력 스무 명을 상대로는 어림없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유민환은 그것이 신기했다.
“···우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하, 여기까지 와서 귀찮은 일은 피하시겠다?”
남영민은 투덜거리며 방해할 거면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경고했다.
K퀘스트가 뒤로 물러나자 스파클은 천천히 유니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럼 우리가 쫄은 것처럼 보이잖아.”
유민환이 팀원들을 뒤로 물리자 박민우가 다가와 속삭였다.
같은 팀원조차 미친개라 부를 정도로 성격이 괴팍한 선수였다.
“조용히 보기나 해.”
“뭘 보라는 거야. 얻어터지기밖에 더해?”
어차피 결말은 뻔했다.
유니크가 스무 명의 랭커를 상대하다 쓰러지는 결말.
일단 물러나긴 했지만 K퀘스트 선수들 역시 박민우의 의견에 동의하는 기색이었다.
‘과연 그럴까?’
유민환은 자세를 잡기 시작한 유니크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차마 팀원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그는 유니크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강렬한 예감에 휩싸여있었다.
인원수와 관계없이 일단 붙으면 처참하게 박살 날 것 같은 그런 예감.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겨우 한 명한테 쫄은거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유민환은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그리고 잠시 뒤, K퀘스트 팀원들은 그의 결정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스파클 사이를 누비는 검은 괴물이 공포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