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즌 (3)
시즌 리셋 3일 차.
개척이 한창 진행 중인 최전방에선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질 않았다.
캐릭터를 강화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공헌도를 가장 쉽게 벌 수 있는 시기이다 보니 랭커라면 신경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체급이 비슷한 길드가 같은 장소에서 마주치면 대뜸 무기를 꺼내 들고 보는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만약 전쟁지역이라면 폭력은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주변에 다른 팀이 없다면 미개척 지대의 최초 발견, 숨겨진 던전의 최초 공략 등등, 공헌도를 독식할 수 있었다.
나는 괜한 충돌을 피하고자 고지대를 넘을 때마다 누가 따라붙진 않았는지 주의를 기울였다.
만약 누군가 우리 뒤를 쫓아온다면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미개척 지대의 깊은 곳까지 편하게 이동하고 싶거나 우리가 지쳤을 때를 노려 뒤통수를 치려는 속셈일 터였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야간 산행 중인 내 눈에 작은 불빛이 움직이는 게 눈에 띄었다.
“저 뒤에 보여?”
“불빛인가?”
“누군가 우리 뒤를 밟고 있어.”
“왜?”
“우리랑 한판 붙고 싶은 사람들이거나 편하게 이동하고 싶은 팀이겠지.”
뛰어난 현실감을 자랑하는 가이아는 그 현실감 덕분에 게임으로선 불편한 점이 몇 가지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루트 확보였다.
유명 대도시와 일부 필드를 제외하면 가이아의 모든 필드는 미개척 상태, 그것을 개척하는 건 전적으로 유저의 몫이었다.
문제는 미개척 지대와 새로운 던전을 발견한다고 해서 유저들이 휙! 하고 이동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점에 있었다.
예를 들어 스타서퍼가 A급 던전인 서리고룡 둥지를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그것도 중앙도시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깊숙한 전쟁지대에서 말이다.
우리가 유저를 위해 이 정보를 쿨하게 푼다 한들 웬만한 유저는 서리고룡 둥지 가까이 오는 것조차 힘들었다.
왜냐고? 길이 없으니까.
현재 스타서퍼는 서버 내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해 길을 뚫었다.
이제 겨우 시즌이 리셋된 지 3일 차지만 과장을 좀 보태면 다른 길드가 보름 이상 걸려서 뚫을 거리를 주파했다.
그 과정에서 마주친 몬스터중엔 흉악한 놈들도 즐비했다.
성인 남성 키를 훌쩍 넘기며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대형 몬스터들 말이다.
만약 던전을 방문하고 싶은 팀이 있다면 누구든 이 몬스터들을 다시 잡아내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이아의 유명 도시들은 텔레포트 스크롤, 전송 마법진이 준비되어 있지만 이런 고위 던전이 도시 근처에 있을 리 없기에 유저들은 매번 루트 확보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도시와 던전 사이를 여러 팀이 반복해서 오가다 보면 어느새 그 루트는 진짜 길이 되어 몬스터들이 배회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시즌이 한창 진행됐을 때의 이야기.
A급 던전을 돌파할 실력이 있는 유저들도 던전까지 가는 길이 험해 B급을 전전하다 나중에야 입던하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로 루트 개척은 어려웠다.
단, 아직까진 우리가 길을 뚫은 지 얼마 되지 않기에 근처를 배회하는 몬스터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지금이라면 우리처럼 인원이 많지 않아도 얼마든지 미개척 지대의 깊숙한 곳까지 따라붙는 게 가능했다.
“뭐야 그럼. 무임승차야?”
처음 봤을 때와 인상이 전혀 달라진 밀러는 눈을 부릅떴다.
산타할아버지가 화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필 배경도 눈밭 아닌가.
“따라오지 못하게 가서 박살 내버리면?”
“그게 좀 애매하거든. 저쪽이 우리에게 직접 피해를 준 건 없으니까.”
“그럼 그냥 놔두자고?”
제레미가 뿔난 태도를 보이자 내가 고갤 저었다.
“그건 안 되지.”
나도 남 좋은 일만 할 생각은 없거든.
*
자정이 다 되가는 시각.
사나운 짐승이 울부짖는 설산을 통과하며 스타서퍼의 뒤를 쫓는 이들의 정체는 한국리그 1부에 속한 스파클 팀이었다.
아직 길드레벨이 낮아 인원은 열두 명으로 조촐하지만 전원이 프로 선수이니만큼 그 전투력은 웬만한 상위 길드를 가뿐히 뛰어넘는 전력이었다.
“체력 하난 무식하게 좋네.”
스파클의 주장 남영민은 스타서퍼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주변에 있는 팀원들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스타서퍼는 벌써 사흘째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게임을 주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심지어 스타서퍼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몬스터를 처리하며 이동중이지 않은가.
실로 경이로운 체력이었다.
스파클은 바닥에 남은 흔적을 더듬으며 부지런히 뒤를 쫓았다.
추적스킬이 있기에 놓칠 염려는 거의 없지만 혹여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남영민은 문득 오한을 느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작은 짐승 소리뿐인 어두운 산속, 주변을 둘러보니 왼편의 바위 위에 자신을 주시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전투준비!”
챙하는 소리와 함께 팀원들이 무기를 빼 들자 바위에 있던 그림자가 스르륵 지면으로 내려섰다.
“계속 우릴 쫓아오던데 뭡니까.”
남영민은 그 말을 듣고선 조심스레 횃불을 들었다.
익숙한 실루엣의 주인이 눈에 띄었다.
월드챔피언십을 제패한 세계 최강의 공격수, 유니크였다.
“스파클 팀 주장을 맡은 남영민입니다.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유니크는 코웃음을 쳤다.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우릴 부려 먹으려고 든 건 못 참겠는데요.”
유니크가 날을 세우자 남영민은 손을 저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부려먹다니요.”
“부려먹은 게 아니라고요? 그럼 인벤토리 한 번 볼 수 있습니까.”
“예···?”
“빙룡 석굴에서 얻은 장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빙룡석굴, 어제 커뮤니티를 뜨끈하게 만들었던 8인 공략 던전의 이름이었다.
한솔은 이미 이들의 인원수를 훑은 뒤 대략적인 전투력을 도출해냈다.
프로 1부 팀 인원 열두 명으로 꾸린 길드라면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 하고 따라붙는 것도 가능했다.
새로 확보한 길이 다시 몬스터로 우글거리기까진 약 서너시간 정도가 걸린다.
다시 말해 그 시간동안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면 비록 공헌도는 먹지 못할지언정 편하게 신규 던전을 맛볼 수 있는 셈이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남영민은 알아들었음에도 모른 척 발뺌했다.
“최초 발견에 따른 공헌도는 포기하더라도 우리가 개척한 루트를 밟으면서 던전만 클리어하겠단 생각 아닙니까.”
“그럴 생각 없었습니다.”
“그럼 이제라도 다른 쪽으로 가시죠. 계속 따라붙으면 제 말이 맞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우린 원래 저쪽으로 갈 참이었습니다.”
남영민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스타서퍼가 앞서나가던 방향이었다.
한솔은 저 손가락을 붙잡아 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댁들은 양심이란 게 없습니까?”
“뭐요?”
“스파클은 남이 흘린 콩고물이나 주워먹으면서 거짓말을 일삼는 게 팀 컬러냐고 묻는겁니다.”
횃불에 비친 스파클 쪽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는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그 모습을 본 유니크의 얼굴 또한 차갑게 변했다.
‘이놈들은 안 되겠네.’
순순히 인정했으면 로테이션을 돌려가며 함께 루트 개척을 제안해볼까도 생각했다.
지금 스타서퍼는 32명에 달하는 인원을 둘로 나눠 16명이 교대로 길을 뚫고 있었다.
다른 팀이 길을 뚫는 동안 식사와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며 연속 작업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교대를 돌려도 작업이 작업이다 보니 다들 체력저하가 뚜렷했다.
뜻이 맞다면 그냥 이들을 받아들여 3교대로 북방 개척을 할 생각이었는데 조금 전 대화로 그럴 마음이 싹 달아나버렸다.
한솔은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굳이 유저를 상대로 힘 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더 따라오지 마세요. 경고했습니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니크를 보며 스파클 팀원들을 부르르 떨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이대로 물러날 거야? 저 말을 듣고도?”
“니들 자신 있냐?”
“우리가 불리할 게 뭐가 있어?”
스파클 선수들은 자신 있단 기색이었다.
상대는 이미 사흘 연속 강행군을 하느라 체력이 바닥을 쳤을 터, 반면 이쪽은 흔적을 쫓아왔기에 아직 체력이 쓸만했다.
하지만 찜찜한 건 상대 쪽에 괴물이 둘이나 있다는 점이었다.
유니크와 헤븐메이커.
북미리그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상대로 명성을 떨친 무도가 듀오의 파괴력은 솔직히 같은 프로 선수라도 꺼림칙했다.
스파클의 리그 성적은 작년 시즌 6위.
한국리그가 4대 메이저 리그 중에서도 경쟁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6위 팀 선수가 월드레벨 특급 선수와 비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퉷.”
남영민은 눈밭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여기까지 편하게 왔잖아. 괜히 힘 빼지 말고 우리가 이쯤에서 방향을 꺾자.”
“리더 의견이 그렇다면야.”
어차피 빙룡 석굴에서 달달하게 아이템도 루팅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쯤에서 독자적인 루트를 구축하기로 하고 방향을 틀었다.
북방은 까마득하게 넓었다.
어쩌면 저들보다 먼저 엄청난 보물을 발견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
방향을 꺾어 따로 루트 구축에 나선 지 이틀째, 스파클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헥헥거리고 있었다.
“제길!”
“윤호가 당했어!”
얼음송곳을 쳐내며 털원숭이를 향해 검을 박아넣은 남영민은 이를 악물고 검병을 밀었다.
주변엔 거대 원숭이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 유인원은 프로 선수에겐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멀리서 돌이 섞인 눈을 던져대고 진형을 이루기까지 하니 상대하는 입장에서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몇 명이나 뻗은 거야.”
이번 전투로 네 명이나 되는 인원이 필드를 이탈했다.
남은 인원은 여덟, 더는 이 위험한 곳을 헤쳐나갈 수 없을 듯했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스타서퍼와 갈라진 이후 지금까지 던전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빙룡 석굴 이후 전혀 수확이 없었던 것이다.
허탈한 심정에 중앙도시로 향하는 스크롤을 찢으려는 찰나 누군가 소리쳤다.
“저기 좀 봐!”
팀원이 가리킨 방향엔 기이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가 있었다.
보통 물안개라면 하얗고 투명한 그림을 떠올릴 텐데 이 안개는 금빛을 띠었다.
최전선을 공략한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이건 분명 월척의 조짐이었다.
서둘러 호숫가로 다가가자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스파클 길드, 북해삼신 영묘 최초 발견!>
‘영묘?’
뛰어난 위인이나 명성이 자자한 영웅을 모신 묘지.
더 살펴봐야겠지만 이런 외진 곳에 숨겨진 영묘라면 분명 쓸만한 아이템이나 스킬이 잠들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스파클 선수들은 조심스레 앞을 살피며 호수 위의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혹시나 얼음이 얕아 물에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워낙 얼음이 두껍게 얼어 그럴 위험은 없었다.
“아무래도 금색 안개가 중앙 쪽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지?”
“저기가 영묘의 중심인 모양이야.”
저기에 보물이 있을지 새로운 특급 던전의 입구가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저기에 무엇이 있든 그 가치가 낮진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부푼 마음을 다스리며 호수를 지나는데 팀원 중 한 명의 신호가 끊어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파티창의 동료 상태가 회색으로 변한 걸 확인한 남영민은 쌍욕과 함께 자세를 고쳐잡았다.
이 빌어먹을 북쪽 땅은 추위도 추위지만 한 번 유저를 물고 늘어지면 편히 쉬게 해주는 법이 없었다.
“안갯속에 적이 있다!”
“이, 이쪽! 아아아악!”
소름이 돋게 하는 아군의 비명이 안개 자욱한 호수를 흔들었다.
보물의 광채 같았던 금빛 안개는 이제 섬뜩한 느낌뿐이었다.
“뭉쳐! 이쪽으로 와! 둥글게 서!”
선수들이 리더를 중심으로 거리를 좁혔을 땐 이미 둘이 리타이어 된 후였다.
이렇게 기척 없는 적을 상대한 경험이 없는 스파클 선수들은 완전히 질린 얼굴이었다.
“으아아악!”
파직-
순간 불꽃과 함께 등을 맞대고 있던 동료가 안갯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남영민은 너무 놀라 입만 벌리고 동료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이게 뭐야. 씨발!”
감당할 수 없는 필드에 들어온 것인가?
정보가 너무 부족해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영묘는 자색궁전처럼 유저들이 돌파하기 어려운 곳일런지도 몰랐다.
특히 짙은 안개속에서 아군을 해치우는 괴물의 민첩함은 실로 두려울 정도였다.
찰나의 순간에 남영민은 쥐가 날 정도로 머릴 굴렸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개죽음당하기 전에 필드에서 탈출하잔 것이었다.
지금 죽으면 데스패널티 하루를 받지만 이 패널티가 누적되면 시즌 말미엔 열흘 이상 누워있을 수도 있었다.
“공략 중단이다. 스크롤 찢어. 중앙도시에서 보자.”
리더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파클 선수들은 순간이동 스크롤을 찢어 즉시 탈출을 실행했다.
남영민을 포함한 스파클 공략대가 사라진 자리엔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다른 이의 그림자가 그들이 사라진 자리 위를 채웠다.
‘멍청하긴, 여기까지 왔으면 못 먹어도 고했어야지.’
검은 무복을 걸치고 나타난 암살자는 스파클 선수들이 사라진 자릴 보며 씩 웃었다.
‘북해삼신아!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