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즌 (2)
몸의 밸런스가 좋다.
한 번의 충돌이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선수였다면 지붕 위의 격돌로 균형을 잃을법한데도 이세준은 아무렇지 않게 반격을 해왔다.
쿵 소리와 함께 이번엔 도리어 내 쪽이 흔들렸다.
수년간 아크나이트로 몸의 중심을 잡는 훈련과 경험이 없었다면 수 미터 아래 도로로 떨어지는 것은 나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미끄러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세계 최강이 이런 곳에서 밀리면 창피하잖아.’
사실 지붕 위에서 빨리 달리는 것뿐, 정식 대결도, 시합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나와 이세준의 충돌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스타서퍼의 바람직한 출발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밀릴 순 없었다.
다시 한 번 힘을 주며 반격하자 살짝 틈이 벌어졌고 그사이 내 몸은 이세준을 앞질러 나갔다.
장비의 레어리티, 자색팔찌의 스킬 강화 효과를 생각하면 이 싸움은 처음부터 내게 유리한 승부였다.
“손님 받으시게!”
최종 거리 격차 100여미터.
여유롭게 길드개설소의 문을 열며 입장하자 이세준이 으르렁거리며 개설소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어느 쪽으로 갈 겁니까.”
“발길 닿는 대로 갑니다.”
길드 개설을 마치면 해야 할 일은 하나뿐.
동서남북 중 한 곳을 골라 개척을 시작해야 한다.
이세준은 우리의 방향이 궁금했던 모양이지만 나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상대의 멘탈이 흔들릴 게 아닌가.
“길드레벨도 바로.”
“재료는 준비되셨나요?”
미리 준비해둔 재료를 내밀자 접수원은 길드 레벨을 팍팍 올렸고 이내 대규모 인원의 합류가 가능해졌다.
이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이세준은 다소 황당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게 개설소에서 요구하는 재료 중 일부는 작년과 전혀 다른 것들이었고 그중엔 당장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도 있었다.
“그걸 어떻게 다 알았습니까.”
나도 시즌마다 무슨 재료를 요구할지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일 년 전에 먹은 반찬이 뭐였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일이니까.
다만 어떤 재료를 볼 때 길드 증축에 필요했지라는 느낌을 떠올리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재료들을 전부 인벤토리에 모아뒀었다.
무엇을 요구하든 전부 낼 수 있도록 준비한 셈이다.
“운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의 이세준을 지나치며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은 상상도 못 할 압도적인 운.”
*
작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첫 공략 방향은 북쪽이었다.
북쪽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공헌도 경쟁을 하기 유리한 지형이었다.
일단 플레이어간에 전투를 허용하는 전쟁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이 말인즉, 앞을 가로막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유저를 무력으로 치울 수 있다는 뜻이다.
프로팀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집단은 그리 많지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북쪽엔 다른 방면에 비해 공략대의 발길이 적은 편이었다.
원인은 살을 에는 추위, 남쪽으로 가면 열대우림을 거쳐야 하지만 냉정하게 비교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속보다는 낫다는 게 중론이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콧물을 흘리던 제레미는 달려드는 퓨마를 후려치고선 볼멘 소릴 했다.
“왜 또 북쪽이야?”
“방해꾼 없어서 좋잖아.”
사람이 몰리면 보상도 눈치를 봐가면서 주워야 한다.
먼저 잡는 게 임자라지만 아무래도 프로쯤 되면 외부 시선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꺼리는 북쪽이라면 타인의 시선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평범하게 동쪽이나 서쪽으로 갔으면 지금쯤 뒤쫓아오는 유저들 때문에 고생 좀 했을걸?”
차라리 시비를 걸며 붙어보자고 하는 녀석들은 상대하기 편하다.
방해꾼을 치우는 건 프로 선수에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괜히 도와준답시고 달라붙어서 공략을 방해하고 진행속도를 늦추는 무리들은 정말이지 처치 곤란이다.
방해되니 따로 움직여 달라고 부탁하면 대뜸 안티로 돌변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건 그렇지.”
사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폭설을 뚫고 지나가며 이미 몇 번이나 던전 입구도 발견했다.
전부 유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기에 공략했다면 최초의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최소 A급, 그 이상의 던전을 주는 곳을 발견하기 전까진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자, 그럼 계속 가보자고.”
*
가이아 공식 홈페이지.
평상시에도 패치나 업데이트 개요를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유독 사람이 많았다.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공헌도 랭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역시 프로팀한텐 안되네.
-당연하지. 프로가 PVP만 잘하는 족속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경기도 오산?
-나가 죽어;
서버 리셋 28시간째, 공홈의 랭크 페이지는 이미 프로팀 소속의 길드들이 자릴 잡은 상태였다.
현재 1등은 원라이프, 그리고 그 뒤를 VT스타즈와 DT게이밍이 바짝 쫓는 형태였다.
시즌 리셋 기념 공략 방송을 시작한 VT스타즈는 이세준을 앞세워 B급 이상의 던전을 차례차례 격파해나갔다.
길드 레벨이 리셋되는 바람에 한계 인원은 열여섯 명에 불과했지만 이정도 인원으로도 웬만한 던전은 한 시간 내로 공략할 수 있는 화력이었다.
-근데 유니크는 왜 이렇게 조용해?
-그림자도 안 보인다.
유니크와 스타서퍼.
그들은 이번 시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존재였다.
북미 대회를 2년 연속 제패, 월드챔피언십에서 당당히 세계 최정상을 차지하고 돌아온 유니크와 그를 영입한 스타서퍼.
항상 화제거릴 찾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대상임엔 틀림없었다.
-힘을 축적하고 있는 거지.
-무슨 개소리야. 아직도 길만 뚫고 있다고?
-자러 갔다고 하는 게 훨씬 설득력 있겠다;;
모든 프로팀이 공헌도 경쟁에 매달리는 건 아니었다.
공헌도가 장비를 강화하거나 스킬의 숨은 옵션을 뽑아내는 데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모든 팀이 이런 하드한 경쟁을 반기는 건 아니었다.
벌써 서버가 리셋 된 지도 하루가 훌쩍 넘었다.
공식홈페이지에 노출되는 공헌도 순위는 100위까지.
상위권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팀들은 이미 30시간 가까이를 버티고 있었다.
아직 100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는 건 스타서퍼가 경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단 뜻이기도 했다.
-유니크도 한국에선 힘든 모양이야.
-기반이 없잖아. 기반이.
-내년엔 더 잘하겠지.
-이번에도 늦게 랭크인 하는거 아님?
-포기하면 편해. 벌써 하루 넘김;
북미 첫 시즌 리셋 당시에도 단숨에 랭크를 치고 들어왔던 전력이 있기에 일부 팬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24시간이 넘어가자 다들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당시엔 15시간만에 역전에 성공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시간이 흘러 점수 차이가 훨씬 심한 탓이었다.
이번에도 유니크의 활약을 기대했던 팬들은 아쉬운 기색을 비쳤고 다른 1부 팀 팬들은 잘됐다는 속내를 맘껏 드러냈다.
-그러게 뭐랬어. 유니크도 팀빨이라고 했잖아.
-한국하고 북미하고 차이가 심하긴 하지 ㅋㅋ
-어쩌다 팀 잘 만나서 버스 탄 선수인 줄도 모르고 빨아댄거임 ㅉㅉ.
-버스는 누가 버스야?
-ㄹㅇ 유니크가 솔리드 캐리 한 건데. 무식한 소리 하네.
-캐~리? 캐리는 느그 닭집 할배가 했잖아. 스킬에 돈 무식하게 쳐발랐다면서? 돈 많다고 자랑함?
-부럽냐? 부자라서 투자하겠다는데 왜 ㅈㄹ이신지.
게시판에서의 충돌.
사실 유니크의 국내 여론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국 팀을 누르고 미국팀을 우승시켰다는 게 이유였다.
유니크가 한국인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S.솔리드가 한국 팀이 되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한국리그를 응원하는 팬들 입장에서 유니크는 한국 팀의 세계대회 우승을 가로챈 악당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 우승 이후 게시판마다 역시 유니크가 세계 최고다.
이세준, 더원은 유니크 발밑에도 못 미친다는 어그로가 번지는 바람에 이미지가 더욱 나빠졌다.
거기다 극성 팬들은 스타서퍼가 랭크 경쟁에서 선전할 거라고 맘껏 떠들고 다녔으니 타팀 팬 입장에선 이때다 싶었던 것이다.
-진짜 어디가서 나대지 마라.
-스타서퍼고 나발이고 깝치면 다 뒈지는 거야.
-쫄려서 방송도 못하는게 어딜 VT스타즈한테 비비냐.
-1부에나 올라오고 나서 최강팀 운운하라 그래.
-킹오브 몬스터? 쪽팔려서 진짜 ㅋㅋㅋㅋ
유니크가 뭔가 보여줄거라고 생각했다가 대차게 두들겨 맞은 팬들이 시무룩해있을 때, 게시물 하나가 높은 추천수와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스타서퍼 랭크인 했다아아!!!!
처음엔 낚시인 줄 알았다.
지난 24시간 동안 스타서퍼가 랭크인 했다는 낚시글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유저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하지만 이번엔 반응이 달랐다.
같은 제목으로 수십, 수백 개의 글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타팀 팬들이 설마설마하며 랭크를 확인하자 NEW라는 표시와 함께 스타서퍼의 이름이 17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대번에 17위까지 치고 들어오자 팬들은 물론이고 공헌도 경쟁중이던 팀들까지 깜짝 놀랐다.
이렇게 한 번에 치고 올라왔다는 건 이미 스타서퍼가 미개척지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A급 던전 중에서도 제법 굵직한 녀석을 공략했다는 뜻이었다.
-와 B급 열 개 공략한 것보다 점수 높은데?
-A급 던전 중에서도 최소 중간 난이도 이상일 걸?
-벌써 그런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고? 작년 길드도 없던 팀이?
-킹니크 수준 ㄷㄷ;;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저들은 또 한 번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었다.
스타서퍼가 SNS를 통해 공략 영상 편집본을 업로드한 것이다.
-이건 또 뭔데···.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영상은 이번 시즌에서 처음으로 공략되는 A급 중위 던전 공략이었다.
A급 던전이야 이미 작년 시즌에도 숱하게 공략이 됐으니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원수, 현재 스타서퍼 던전 공략을 진행하는 인원수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여덟 명?
-저 인원수로 공략을 한다고?
A급 던전의 막강한 강적들을 상대로 스타서퍼는 겨우 여덟 명의 엔트리를 가동중이었다.
이런 대형 던전에선 인원이 한 명만 차이 나도 난이도가 첨예하게 갈리곤 했는데 현재 경쟁중인 상위권 팀들에 비하면 인원이 절반 가까이 적은 셈이었다.
당장 원라이프와 VT스타즈만 해도 전선 공략에 열여섯 명을 쓰는 참이었다.
그런데 던전 공략에 여덟 명이라니.
공략 속도를 우선하는 시즌 초반이라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빨려들 듯 영상에 집중했다.
두배나 되는 인원으로 B급 던전에 우르르 몰려가 공략하던 플레이에선 볼 수 없던 날카로움이 있었다.
푸른 용의 입이 쩍 벌어지며 날카로운 바윗덩이를 쏟아낼 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고 압도적 냉기에 보스 방이 얼어붙을 땐 이걸 어떻게 깨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나 움찔하는 것도 잠시, 버프를 받은 유니크가 무서운 기세로 데미지를 넣는 대목에선 다들 넋을 잃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언젠가 머릿속으로만 그렸을 환상적인 움직임, 그런 움직임을 유니크가 직접 실현하고 있었다.
-와나, 보다 침 흘렸네.
-이건 솔직히 안티라도 인정한다.
-이 자식은 괴물 맞음.
-트루 몬스터;;
-올해는 스타서퍼 한 번 응원해볼까?
스타서퍼에 별 관심 없던 사람들조차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략 클래스.
어태커가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의 정점과 함께 용의 거체가 무너져 내렸다.
*
“벌써 9위라고 하네요. 한 개 정도만 더 까면 충분히 1등 할 거 같은데요?”
“1등까지 달립시다!”
“스타서퍼 파이팅!”
눈이 가득 내린 협곡에서 왠지 초췌해 보이는 무리가 손을 번쩍 들며 화답했다.
각지에 퍼지기 시작한 공략 영상엔 등장하지 않았던 이들.
바로 스타서퍼 길드에 합류한 내 팬클럽, 유니크노트의 랭커들이었다.
만약 이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작 여덟 명에 불과한 인원으론 여기까지 하루 만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여덟 명의 전력이 온전했던 것도 아니다.
S.솔리드와 달리 한국에선 아직 팀원들의 학업 문제가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김정환이 학교를 째고 공략을 전적으로 도왔지만 유성철과 유호영은 학교에 가야 했다.
‘어떻게든 정리를 해야겠는데.’
그래도 민준이나 유성철, 김정환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유호영은 중학교 3학년, 학업을 관두면 초졸이 될 판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원하고 돈도 좋다 한들 어린 나이에 학업을 완전히 배제하고 데뷔하는 걸 좋아하실 부모님은 없었다.
이번 시즌은 2부에서 보낼 예정이니 유호영을 학교로 돌린다 쳐도 내년부턴 분명 문제가 생길 터였다.
자, 그럼 그 문제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팀원들이 다시 합류했기에 공략대의 파워가 다시 풀로 차오른 상태.
이번엔 공략 영상을 올릴 게 아니었기에 인원 제한 없이 단숨에 던전을 돌파하기로 결정했다.
미리 길드 레벨증축을 위한 재료를 준비한 덕에 스타서퍼 길드의 공략 인원은 타 길드보다 훨씬 많은 32인에 달했다.
훨씬 더 빠르게 루트를 개척한데다 손대기 힘든 던전을 공략하니 순위가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진입합니다.”
A급 던전 8인 공략 영상의 열기가 정점을 찍고 사그라들 때쯤, 다시 한 번 랭크 페이지의 순위가 크게 요동쳤다.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건 이제 막 출범한 2부 리그 팀, 그린엔터테인먼트 스타서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