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시즌 (1)
면접을 마치고 발탁한 팀원들과 함께 가이아를 플레이한 첫날, 던전 공략과정을 지켜본 나는 이 팀은 분명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이아 프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선수, 지금 스타서퍼엔 이미 기량이 만개한 선수와 곧 잠재력이 폭발할 특급 원석이 섞여 있었다.
가능성을 눈여겨 데려온 유호영이나 김정환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이런 선수를 뽑을 수 있냐는 평을 받았던 유성철조차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저 친구, 생각보다 움직임이 좋네?”
“괜히 나쁘게 말한 것 같아서 미안하네.”
“평소 긴장을 많이 하는 스타일인가 봐.”
마스터 티어 끝쪽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유성철은 무대 긴장감이 심했다.
특히 대인전에서 그 압박을 많이 받았는데 놀랍게도 필드 플레이에선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현재 팀에 합류한 인원은 여덟 명.
성격도 다들 무난하고 보기만 해도 배부른 친구들을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한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바로 힐러였다.
‘팔라딘을 대체 어디서 찾지.’
힐러 클래스엔 총 세가지 직업이 있다.
1인 위주의 극대힐, 부활을 장기로 삼는 비숍.
다수에게 버프를 걸며 중규모 힐을 뿌려주는 하이프리스트.
마지막으로 저주해제와 짤딜, 짤힐을 담당하는 팔라딘.
다른 두 클래스에 비해 팔라딘은 가장 인기가 없는 힐러였다.
설명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힐러인데 힐이 애매하다.
딜을 할 수 있지만 짤딜이란 수식어에 걸맞게 미미한 수준.
그나마 장기는 저주해제인데 근 2년간 제대로 활용할 곳이 없었다.
특성을 살릴 수 없는 클래스가 외면받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이 모든 평가는 내년 시즌을 시작으로 전부 바뀌게 된다.
팀 게임에서 승패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대형 오브젝트, 자이언트 가디언과 오우거 로드가 저주를 뿌려대는 탓이다.
안 그래도 공략이 힘든 대형 오브젝트를 팔라딘 없이 잡는 건 어불성설, 조만간 프로 레벨에선 팔라딘은 물론이고 힐러의 몸값이 전체적으로 뛰는 결과가 나타난다.
차라리 밀러한테 클래스 체인지를 부탁해 봐?
프로 선수가 두 개 이상의 클래스를 육성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무도가와 아크나이트처럼 아예 종류가 다른 클래스를 키우는 일은 드물었지만 동일 클래스 내의 전환이라면 아무래도 적응하기 덜 까다로웠다.
“밀러!”
“응?”
웨이트를 하고 땀을 훔치는 밀러에게 넌지시 클래스 체인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혹시 팔라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팔라딘은 갑자기 왜?”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음. 팔라딘이라···. 힐량도 쥐똥만 한데 성능도 구려서 전혀 내 타입이 아니야.”
밀러의 단호한 대답을 들으며 생각했다.
새 친구를 찾아보자.
*
1월 1일 시즌 리셋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내가 예상했던 사항 대부분이 이미 운영진의 공지로 올라온 상태라 세기말의 서버는 몹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선수들은 물론이고 일반 유저들도 내년엔 뭔가 많은 게 바뀐다는 흐름을 직접 느끼고 있었다.
다가오는 새 시즌을 어떻게 해야 슬기롭게 맞이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연습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채린이였다.
“오빠. 우리 길드 언제 만들어요?”
“이번 시즌은 다 지났으니까 서버 열리면?”
1부 리그에 속해있는 팀이라면 길드 활동에도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1군 엔트리 열두 명, 2군, 연습생들까지.
레벨이 높은 길드의 경우 수십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데 소속인원을 채우고도 남는 자리는 대개 열성 팬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선수를 위해 일 년 내내 필드를 공략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다.
자신의 손으로 얻은 장비를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써준다.
팬으로선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
그렇게 얻은 고가의 장비는 전부 팀의 프런트를 통해 선수에게로 건네진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팬심이라도 착취가 되기에 프런트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보수를 제공한다.
채린이는 내 팬클럽의 부회장.
그리고 회장은 이미 내 옆에서 던전 공략을 같이하고 있는 상황, 그녀의 말에 따르면 팬클럽 회원들 중 일부는 길드에 들고 싶어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부 다 받아줄 순 없는데···.”
“당연히 지원은 마스터 티어 이상이죠. 이미 선 그어놨어요.”
길드가 어떤 일을 하는지 생각하면 당연했다.
길드간 충돌, 최고 난이도의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데 허수아비와 함께할 순 없었다.
“데뷔가 코앞이라면서 어째 게임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저는 아무래도 게임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채린이의 말에 따르면 본래 연예인을 할 생각이 없는 그녀를 설득한 게 아버지, 서준혁 대표라고 했다.
보통 부모님들이 먼저 권하는 법은 드문 것 같은데 신기했다.
“아버지가 저는 연예인할 운명이라고, 그냥 공부만 하는 건 재능낭비랬거든요.”
그 말엔 백 번 동의했다.
그녀가 아이돌이 아니면 대한민국에 아이돌 할 인재가 없을 테니까.
“게임이야 겸사겸사하면 되지. 아직 마스터 티어랬나?”
“아니요! 저도 그.마.거든요?”
“···미안.”
그랜드마스터.
서버불문, 각 대륙 상위 천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가이아 최고의 경지.
여성 그랜드마스터라니. 안 그래도 경쟁이 심한 한국 랭크계에선 정말 보기 드문 레벨이었다.
축하한다는 말을 하려던 그때,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여성부 리그가 곧 있으면 생기지 않나?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한 레이디스 리그의 설립.
사실 선수 수급과 수익적인 여러 부분에서 넘어야 할 산이 있기에 레이디스 리그가 자연 발생하려면 꽤 시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올림픽 종목 채택은 세계적인 인지도, 남녀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스포츠여야 가능하기에 지오에서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것이 기억났다.
국내 그랜드마스터에 여성이 몇 명이나 되는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최소한 채린이를 포함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인 건 확실했다.
대표님에게 말은 해봐야겠네.
이걸로 오래 준비한 그룹 활동을 접는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채린이에게 있어 또 다른 선택지가 될 것은 분명했다.
***
“장승표라고 합니다. 전에는 레전드 오브 챔피언 선수로 활동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 박수, 장코치도 애들한테 편하게 얘기하고.”
1월 1일 새해, 스타서퍼의 코치가 확정됐다.
장승표, 올해 나이 스물여덟.
그는 가이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AOS계를 주름잡던 메이저 게임 프로 선수 출신이었다.
나는 가이아를 시작하기 전까지 주로 RPG류의 게임을 다뤄왔기에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팀원 중 몇 명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어쩌다가 우리 팀에 오셨어요. 원래 VT게임단에서 활동하셨던 거로 아는데.”
정수 형의 말에 그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거긴 자리가 없거든.”
현실적인 문제였다.
일성이나 VT처럼 국내 대기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종목에 대해 프로팀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팀을 운영해온 기간이 길수록 해당 팀 소속이었던 선수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 중엔 한 팀에서 커리어를 마감하거나 그에 준하는 프랜차이즈 스타가 있는가 하면 단순히 1, 2년 반짝하는 선수도 있다.
장코치는 그사이에 애매하게 낀 사람이었다.
레전드 오브 챔피언 VT 팀에서 3년을 활약했지만 은퇴선수는 많고 코치 자리는 적으니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1군 엔트리 자리 일부가 비긴 했지만 이제 팀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모든 구성원은 전부 모인 셈이었다.
장승표 코치의 합류로 스타서퍼의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팀을 움직이는 스케쥴에 대한 의견은 주로 나와 제레미가 냈다.
세계 정상을 차지한 톱클래스 팀에서 2년간 쌓은 경험을 흡수하고자 함이었다.
“비시즌 기간에 할 일은 어차피 정해져 있습니다.”
개막전까진 시간이 한참 남아 스크림도 없는 상황, 지금 준비해야 할 건 시즌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체력, 그리고 장비였다.
스킬은 운이 따라줘야 하는 영역인지라 어쩔 수 없지만 장비는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파트였다.
“심지어 오늘은 시간이 좋거든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지오 본사의 시계가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 전세계의 가이아 서버가 새 시즌을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미 많은 프로팀, 공격대가 기여도 업적을 위해 공략을 준비 중이었다.
그중엔 방송을 준비하는 인원도 제법 됐다.
새로운 고위 던전을 누가 정복하느냐에 유저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다.
팬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오후 다섯 시.
점검으로 잠겨있던 서버의 문이 열리는 순간 엄청난 수의 인원이 대기실로 쏟아져 들어왔다.
중앙도시에 푸른 빛이 점멸하며 눈 깜짝할 때마다 인원이 불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길드개설소를 향해 달렸다.
최대 4인인 파티 인원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시스템이기에 길드를 개설하지 않곤 공략이 불가능한 상황.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같은 방향으로 뛰기 시작하는 인원이 보였다.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도로를 무시하고 지붕 위를 달리기도 했다.
그냥 천천히 가면 어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천, 수만 명이 길드를 만들려고 줄을 서면 그 대기시간만 수 시간에 달한다.
만약 개척 선점을 노리는 팀이라면 이 몇 시간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런 망할!”
“악! 밀지마!”
누군가 지붕 아래로 떨어졌다.
중앙 도시 내에선 서로 공격스킬을 사용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유저간에 몸을 관통해서 지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면 힘이 약한 쪽은 스륵 밀리기 마련인데 미리 정해둔 루트에서 밀려나는 유저들이 속출했다.
지붕 위를 가로질러 개설소로 향하는 최단거리 루트.
수십 명의 암살자가 앞다투어 경쟁자들과 충돌하는 사이, 나의 몸이 바람처럼 미끄러지며 쭉 뻗어 나갔다.
나와 나란히 달리던 인원은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하는 표정이었고 금방 뒤를 잡힌 사람들은 깜짝 놀라 스스로 길을 비켰다.
간혹 느린 속도로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으면 슬쩍 옆으로 밀어 골목 아래로 보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앞서가는 인원을 대충 제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전부 월드챔피언십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활약했던 한국 선수들이었다.
“유니크다!”
누군가 소리쳤을 때 황색 무복을 걸치고 있던 남자가 나를 쏘아봤다.
익숙한 시선이라 생각했더니 이세준이었다.
VT스타즈도 개척 경쟁에 뛰어들 모양이었다.
녀석이 나를 응시한 건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거리는 약 열 발자국, 그 리드를 지키기 위해 이세준은 벼락처럼 몸을 날렸다.
VT스타즈는 아마 방송을 했지?
많은 팀이 새시즌에 맞춰 공략 영상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비시즌 기간에 팬들에게 보내는 선물인 셈이다.
다수의 팀들이 이번 기여도 경쟁을 홍보 소재로 삼았기에 우리 팀 또한 자연스레 홍보에 대한 의논을 나눴었다.
“우리도 방송을 하면 어떨까. 우리 회사 애들은 종종 하거든.”
박감독은 스타서퍼의 시즌 공략 방송을 권유했다.
충분한 화제성과 팬을 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팀원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이었다.
엔터회사이다 보니 방송 장비 같은 건 다른 팀에 비해 훨씬 좋게 꾸릴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내 반대로 없던 일이 됐다.
“생중계도 좋지만 이번엔 영상 편집본 업로드가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별로인 것 같아?”
감독은 내가 달가워하지 않자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왜 아니겠는가.
스타서퍼는 비록 2부 팀이지만 화제성은 1부 못지않았다.
공략 방송을 보고 더 많은 팬이 유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때라면 상관없지만 이 시기는 좀 조심하는 게 좋거든요.”
공략을 한다는 것은 현재 팀의 상태를 많은 사람에게 노출한다는 의미, 팬들이야 당연히 순수한 마음으로 방송을 시청하겠지만 이 세상엔 꼭 사람 좋은 부류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무력 난입, 이유 없는 어깃장으로 새 시즌 공략이 개판 되는 경우를 수없이 보고 들은 나로선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꼭 방송을 켜야만 노출이 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멀어져 가는 이세준의 등을 쫓아 전력으로 운룡비형을 펼쳤다.
자색팔찌에 의해 강화된 운룡비형의 속도는 평소와 비교해 남달랐고 조금씩 이세준과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귀를 타고 넘어가며 날카로운 소릴 냈다.
이세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놈의 뒤통수에선 분명 시선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VT스타즈 방송에 내 존재가 노출됐을 터였다.
뒤에서 맹수가 쫓아온다고 해도 믿을 만한 속도전.
길드개설소로 향하는 모든 인원의 선두에 선 우리 둘은 상대의 속내를 꿰뚫었다.
지금 지붕을 무대로 벌이는 속도전은 월챔에서 태우지 못한 불꽃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나의 어깨가 충돌하며 이세준의 몸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