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3)
△△ 브랜드 카페 테이블.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백은하의 얼굴은 어딘지 달라 보였다.
조금 가라앉아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분위기를 읽고 있는데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계약, 틀어졌어요.”
계약이 틀어졌다고 말하는 그녀는 스스로 말을 꺼내는 게 몹시 거북해 보였다.
“이야기가 잘 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의 말에 그녀는 빈 테이블만 쳐다볼 뿐 반응이 없었다.
종업원이 아무리 방긋방긋 웃고 있어도 말 없는 손님의 속내까지 읽어낼 재주는 없다.
평소 카페인을 잘 먹지 않는 관계로 대충 맛있어 보이는 걸로 골랐다.
“초콜릿 크림 프라푸치노로···두 개 주세요.”
“아뇨. 그거 말고 하나는 아이스 토피넛으로 주세요.”
침묵을 고수하기엔 내 선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종업원이 사라진 후에도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몸을 의자 뒤쪽으로 깊숙이 밀고 나서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영입에 관한 속내를 처음 드러낸 건 작년 레전드크루와의 결승이 끝난 뒤였다.
당시엔 내가 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생각이 바뀌었는지 월챔 이후엔 직접 숙소를 찾아오며 긍정적인 대화를 이어나갔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공항에 나를 데리러 온 그녀를 봤을 때만 해도 나 역시 한국에서의 생활은 원라이프에서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갑작스레 일을 추진한 채린이와 달리 이쪽은 계속해서 영입의 뜻을 알려왔으니 말이다.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토피넛 잔을 쥔 그녀는 속사정을 풀어놓았다.
올해 한국 리그부터 월드챔피언십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원라이프의 브레인으로서 코치의 권한을 아득히 뛰어넘는 일들을 해왔다.
그 원인은 역시 그녀의 배경.
재벌 3세라는 강력한 배경이 그녀가 하는 일의 모든 브레이크를 풀었다.
그녀가 마음먹고 추진하는 일은 감독이 아니라 단장이 와도 말리지 못한다고 했다.
“적어도 이번 월드챔피언십까진 그랬거든요.”
“갑자기 사정이 바뀐 겁니까?”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가 내게 꺼낸 안건이 제대로 문서화 되어 올라가긴 했던 모양이다.
“알고 있겠지만 S.솔리드에서 선수들에게 해준 계약은 한국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에요. 아마 북미라 해도 마찬가지일 걸요? 하물며 30년간 자체 시스템을 견고하게 구축한 팀이라면 더 그렇죠. 굳이 시스템을 바꾸지 않더라도 성적이 받쳐주니까.”
“그런데도 제안이 통과될 거로 생각했어요?”
“지금까진 태클 걸려본 적이 없었거든요. 마지막에 가서야 엎어질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영입이 실패에 대해 화가 난다기보단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보였다.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답해줄래요?”
“치부만 아니면 뭐든지요.”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가 뭐예요?”
“이 이야길 그때 카페에서 하지 않았던가요?”
“안 했어요. 확실해요.”
기억력에 무척 자신 있는 눈치다.
생각해보니 안 했던 것도 같고.
“당연히 자국리그에서 한국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마음 아니겠습니까.”
“누굴 바보로 알아요? 진짜로 이유가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 솔직하게 답해줘요.”
안 속네. 해링턴 대표는 믿어주던데.
“커피값은 계산하시는 겁니다.”
“안 그래도 내려고 했거든요?”
“그럼 질문하나 해보죠. 지금 세계 최고의 팀이 어딜까요.”
“놀리는 거 아니죠?”
“아니니까 생각해 보세요.”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말이죠. S.솔리드잖아요. 월드챔피언십 우승팀이 세계 최고가 아니면 어느 팀을 고르죠?”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볼까요. 저를 빼면 최고의 무도가는 누굴까요.”
내 질문에 그녀는 어렵지 않게 VT스타즈 선수 한 명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세준?”
“아마 맞을 겁니다. 저와 맞대결은 불발됐지만요. 그 재능에 의심할 여지는 없죠. 그럼 마법사는 누굴까요.”
“당연히 용재죠.”
“아닙니다.”
“설마 제리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솔직히 팀 이름값 빼면 제리는 용재한테 안돼요. 열 번 붙으면 여섯 번은 이길 테니까.”
“제리를 말하려던 게 아닙니다.”
제리도 아니고 더원도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녀는 모르겠단 눈치다.
“제가 새로 꾸리는 팀에 좋은 유망주가 한 명 있습니다.”
“아, 김민준?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민준이를 잘 아시나 보네요?”
“제가 알려고 들면 모르는 정보는 없거든요. 지금도 봐요. 국내에 저 말고 유니크가 S.솔리드를 떠났는지 아는 사람 없잖아요?”
뭐지. 뒤를 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건가···.
“저도 들은 게 있어요. 유니크의 선수 보는 안목이 아주 탁월하다는 이야기. 제레미도 직접 발굴했다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용재를 데뷔도 못 한 선수랑 비교하면 안 되죠.”
”아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단호히 부정했다.
“장담합니다. 그 유망주가 빠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엔 한국 최고의 마도사가 될 겁니다. 자, 그럼 벌써 둘이나 됐네요.”
“뭐가요?”
“저를 제외한 각 클래스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 말입니다. 그런 선수가 한국에만 벌써 둘 있습니다. 물론 더 있겠죠.”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 세계 최고 레벨의 선수가 많아서 돌아왔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곧 실력으론 한국이 세계 최고의 리그가 될 겁니다. 더 많은 선수들이 월챔에서 이름을 알릴 테고요.”
“정말···그게 다예요? 고작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가 많다는 이유?”
“그게 왜 고작입니까. 가만히 북미에 남아있으면 그런 친구들이 뭉쳐 제 자리를 노리고 달려들 텐데. 그리고 최고를 노리는 선수라면 모름지기 최고 레벨의 리그에서 뛰어야죠.”
이게 된장인지 똥인지.
날 바라보는 백은하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라리 용병을 받지. 그랬으면 S.솔리드도 좋다고 환영했을 텐데.”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용병도 제한 생깁니다.”
그간 S.솔리드에선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백은하의 말인즉슨 유망주를 전부 기존 팀에서 데뷔시키면 되지 않느냔 건데 룰에 따르면 1군 12인 중 동시에 등록 가능한 국외 선수는 3명이 최대였다.
그것도 출전시킬 수 있는 선수는 최대 2명까지였으니 내가 구상한 팀을 꾸리기엔 슬롯이 적었다.
“그런 소식 아직 못 들었는데···.”
“제가 운영진하고 좀 친합니다.”
미래 정보를 바로바로 써먹기엔 니콜라이 핑계를 대는 게 가장 편했다.
실제로 그는 이런 이야길 한 적이 별로 없어서 사실을 알면 많이 당황스럽겠지만.
“한국에서 스타급 플레이어가 쏟아지니까 에이스 팀을 만들어 보겠단 건데···무슨 무당도 아니고, 아니지. 미리 자리를 비워달라고 했던 걸 보면 앞뒤는 맞네요.”
그녀는 일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더니 으스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혹시 신기(神氣) 같은 거 있어요?”
“없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우리 팀을 무너트린 상대가 이런 선수일 줄은···.”
“너무 비논리적이라 이상합니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다들 저랑 같은 생각일 테니까.”
억울해도 어쩌겠는가. 전부 사실인데.
“계약은 엎어진 거고, 앞으론 어쩔 겁니까? 계속 원라이프에 남아있는 겁니까?”
“궁금해요? 나도 스카웃 하게요?”
“죄송하지만 백은하씨는 영입 대상에 없는데요.”
조합을 짜는 등의 능력은 분명 확실한데 말이지.
굳이 이야기해줄 필욘 없지만 원래 세계에선 그녀가 코치로 활약한 원라이프가 월드챔피언십 우승컵을 들어 올린 해도 있었다.
원라이프의 코치는 백은하.
이런 이미지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서인지 그녀를 데리고 와야겠단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됐어요. 머리 아파서 이후 문제는 천천히 생각할 거니까. 아무튼 계약이 이렇게 엎어져서 미안하게 됐어요.”
“괜찮습니다. 원래 계약은 도장 찍기 전엔 모르는 거니까요.”
미안하긴, 나로선 좋은 점도 있었다.
그린엔터의 제안에 원라이프까지 살짝 난감했던 차였으니 말이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는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양반이었다.
-그런데 혹시 새 팀원은 어디 가서 구하려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그냥 궁금해서 ㅎㅎ;;
메시지의 내용이 평소 그녀의 이미지와는 달라서인지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말았다.
나는 곧장 답장을 넣고 이 모든 소식을 전하기 위해 집으로 향했다.
-어림없는 소리 마시죠.
***
가이아의 세 번째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정식 기사가 뜨진 않았지만 이번 시즌은 정말 많은 게 바뀌는 해였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스킬을 사용하는데 드는 마력의 변화였다.
운영측은 기존 시즌보다 스킬을 사용하는데 드는 마력 요구량을 훨씬 늘리기로 결정한다.
안 그래도 스킬 의존도가 높던 마법사 클래스가 직격탄을 받게 되고 마법사를 밥줄로 삼는 암살계 또한 휘청거리게 된다.
과거의 나에겐 매우 따뜻한 패치였다.
덕분에 아크나이트를 비롯한 탱클래스가 상대적으로 득세를 했으니까.
이전보다 적은 횟수의 스킬을 쓸 수밖에 없자 선수들의 플레이도 그에 맞춰 변할 수밖에 없었다.
스킬과 스킬 사이에 비는 시간을 순수 피지컬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중세 검술이며 킥복싱, MMA를 가르친답시고 선수들을 닦달하는 게 괜히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큰 변화는 바로 5라운드부터 이어지는 팀전에 있었다.
그간 랜덤하게 결정됐던 팀 게임의 전장이 환영 도시로 고정됐다.
오직 팀게임을 위한 전장은 사이즈가 좀 더 커졌고 팀배틀 한계시간이 10분에서 15분으로 증가했다.
단순히 전장의 크기만 커진건 아니었다.
중앙의 점수를 벌기 위한 거점은 그대로 유지, 맵의 좌, 우 끝단에 거대 오브젝트가 생겨난 것도 큰 특징이었다.
좌측의 대형 오브젝트는 골렘 형태의 자이언트 가디언.
우측의 오브젝트는 단단한 피부와 괴력을 자랑하는 오우거 로드였다.
이 둘은 공략하는 쪽에 특수한 버프를 제공했는데 오우거는 공략인원 중 랜덤 플레이어에게 특징에 맞는 버프를 제공했다.
탱커라면 방어력이, 암살자라면 공격력이, 마법사라면 마력량이, 힐러라면 치유량이 증가하는 식이다.
그리고 모든 가이아 프로팀의 골머리를 앓게 한 자이언트 가디언.
이 녀석의 버프는 바로 부활이었다.
만약 게임 도중 죽은 인원이 있다면 가디언 공략을 통해 쓰러진 플레이어를 되살리는 게 가능했다.
이 정도만 해도 강력한 버프였을 텐데 문제는 아무도 죽지 않은 상태로 공략을 마쳤을 경우였다.
만약 아무도 죽지 않은 상태에서 가디언을 잡아내면 해당 팀은 엔트리에 대기 중인 선수 중 한 명을 골라 불러내는 게 가능했다.
버프 컨트롤을 잘못 넘기면 단숨에 5:4 게임이 되는데 프로 레벨에선 한 명이 보태는 화력 차이가 상상 이상이니 다들 가디언 공략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다인용 스킬의 등장, 새로운 티어의 필드 아이템이 유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게 1월 1일과 동시에 패치될 업데이트였으니 이만하면 거의 대격변이라 해도 무방한 시즌이었다.
격변하는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헤매는 선수가 있는가하면 무명의 선수가 빛을 보기도 하는 시즌.
가이아에서 대규모 패치 내역을 쏘아 올리면 많은 선수들이 걱정에 잠을 설치겠지만 적어도 우리 팀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듯했다.
계약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린엔터테인먼트 사옥에 모인 팀원들의 얼굴엔 여유가 넘쳐흘렀고 그 중심에 내가 있었다.
선수 전원의 계약이 마무리되자 변호사 선생님이 팀의 출범을 확정 지었다.
“그럼 이 시간부로 팀 GE 스타서퍼가 정식으로 결성됐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