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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98화 (98/170)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2)

오래간만에 집이 시끄러워졌다.

아니, 내 기준에서만 오랜만이었다.

내가 북미로 떠난 이후 부모님은 한국에 남은 친구들을 자주 집으로 불러 살갑게 챙기셨다고 했다.

돌아오며 챙긴 선물을 드리자 부모님이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거기에 제레미의 선물도 함께였다.

내가 드릴 거니 괜찮다는 데도 굳이 사야겠다나?

생각해보니 이 녀석도 월챔 우승 보너스로 주머니가 제법 두둑한 편이니 이 정돈 괜찮을 것 같았다.

“이게 다 뭐야? 상다리 부러지겠네.”

“우리 아들 귀국 기념으로 엄마가 힘 좀 썼어~.”

조금 먹길 잘했지.

나와 제레미는 두 번째 점심을 시작했다.

그나마 고깃집에서 조금 먹어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오늘 완전 낭패를 볼 뻔했다.

“헝! 부미 생화 재미었어요?”

“제발 다 먹고 말해라.”

“이제 우리도 내년부터 프로 데뷔인가!”

“다들 몰라보겠는걸.”

호쾌하게 웃는 정수형이 가장 큰 변화의 주인공이었다.

일단 체격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하루에 5천 칼로리를 넘나드는 식단을 흡입하며 몸을 만들었다는데 현실에서 방패를 들게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스마트한 이미지였던 밀러 호프만.

그는 이제 스마트와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엄마 밥 더 남았어요?”

“남았어. 더 먹을래?”

“네!”

살을 조금만 더 찌우면 산타할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거 같은데···.

“한솔아. 그럼 오늘부터 우리 게임 들어가는 거야?”

“아니. 해야 할 일이 좀 남았어. 다들 배는 충분히 채운 것 같으니까 설명을 시작해야겠네.”

식사가 끝난 자리, 나는 테이블을 가져와 모두를 자리에 앉히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모님도 향후 계획이 궁금하셨는지 자리를 차지하셨다.

“이제 내년을 어떻게 보낼지 가닥을 잡아야 해. 나는 제일 나은 방법을 제시할 뿐, 결정은 우리 모두가 같이하는 거니까.”

“우린 당연히 2부부터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선택지가 하나 더 생겼거든. 잘 듣고 다들 솔직하게 의견 나눠보자고.”

한국은 북미와 마찬가지로 4대 메이저 지역에 속하며 1부 리그엔 총 열 개 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동안은 승격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제 2부 리그가 자릴 잡고 나면 더 치열한 순위 쟁탈전이 펼쳐질 터였다.

지오에선 각 메이저 리그 1군 팀 개수를 최대 10개로 제한했고 그 결과, 중국 같은 곳은 돈이 있어도 팀을 만들지 못해 2부 리그를 기다리는 기업이 줄을 잇는 상황이었다.

“첫 번째 의견은 원래 얘기했던 대로 2부리그부터 시작하는 거야. 이 경우엔 조건을 잘 쳐주는 팀을 골라야겠지.”

“어? 우리 그린엔터테인먼트로 가는 거 아니었어?”

“그린엔터···?”

제레미의 말에 팀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린엔터테인먼트면 채린이 누나 회사 아니야?”

“채린이네 회사가 팀을 만들어? 가이아 팀?”

“아들. 난 채린이 너무 싹싹해서 좋더라. 애도 착하고.”

채린이 이름이 나오자 부모님도 솔깃한 얼굴이다.

뭐지. 내가 없는 사이에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흠흠. 그린엔터에선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제안을 했어. 서류 드릴 테니 다들 한 번씩 읽어보시고. 결론부터 말하면 2부리그 팀 중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걸 수 있는 팀은 아마 없을 거야.”

“난 봐도 잘 모르겠네.”

“이거 다 검토 끝난 거니?”

“불안하면 따로 법률 자문해도 되지만 제가 봤을 때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어요.”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건 없는 그런 계약서.

팀원들은 고갤 끄덕이며 두 번째 선택지에 관해 물었다.

“두 번째는 바로 1부리그부터 시작하는 거.”

“1부?”

“1부는 자리가 마땅치 않을 텐데···?”

1부 이야기가 나오자 정수형이 눈을 껌뻑거린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가이아 선수만 해도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나 된다.

이 인원을 한꺼번에 갈아치울 팀을 찾기란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인원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원라이프에서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원라이프?”

“원라이프에서 제안이 왔단 말이야?”

원라이프라는 말에 나와 제레미를 제외한 모두가 크게 놀랐다.

올해 월드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을 하긴 했지만 국내 리그 우승팀이고 스폰서도 e스포츠계의 거물인 일성그룹이다.

“원라이프라···솔깃한데?”

“거기 들어가면 부모님한테 일성 취직했다고 해도 되겠네.”

“아무래도 일성의 이름이 크긴 크지.”

아버진 일성쪽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이름 큰 게 무슨 소용이에요. 여기도 그럼 채린이네만큼 보장해주는 거니?”

“그건 아니고요. 두 계약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그걸 설명하려고요.”

일성과 그린엔터간의 결정적인 차이.

그것은 바로 팀 성장에 따른 대우였다.

“그린엔터쪽에선 팀이 수익을 올릴 때마다 그 이익을 선수들과 나누기로 했어요. 예를 들면 광고 혹은 입장 수익이 날 때마다 선수들이 돈을 더 벌게 된다는 뜻이죠. 그 최저한도는 10퍼센트. 1부리그 승급 3년간은 20퍼센트로 갑니다.”

“질문, 질문.”

민준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근데 선수들하고 돈을 나눈다고 연봉을 줄이면 그게 그거 아니야?”

“아니야. 연봉은 팀 성적에 맞춰서 무조건 업계 최고 대우를 해주기로 했어. 만약 말이 바뀐다고 해도 계약은 무조건 1년 단위 갱신이기 때문에 독박 쓸 일도 거의 없고.”

연봉으로 장난을 치면 선수들이 대거 팀을 이탈할 수 있기에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다음 질문은 정수형에게서 나왔다.

“가이아 프로 리그가 정말 수익이 나는 거야? 프로스포츠에서도 수익을 올리며 흑자 운영하는 팀은 몇 개 안 된다고 들었는데.”

“S.솔리드가 올해 우리한테 보너스와 연봉으로 엄청나게 뿌린 건 다들 알고 있지? 정말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도 올해 S.솔리드는 손실이 거의 나질 않았어. 시장이 빠르게 크고 있는걸 생각하면 이건 금광이나 다름없지.”

행복회로를 돌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과거에도 각 메이저 지역 상위권 팀들은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덕분에 리그당 열 개 제한인 1부 팀을 사들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부호들의 문의가 이어졌고 한국은 제법 뜨거운 관심을 받는 곳 중의 하나가 되리란 게 내가 알고 있는 미래였다.

“하지만 북미랑 한국은 시장 규모가 완전히 다르잖아?”

“이건 전 세계 팬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야. 지금은 당연히 북미가 더 크지. 월챔을 우승했으니까.”

하지만 그 판도는 오래가지 않는다.

북미는 1회 우승 이후 월드챔피언십 우승을 좀처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번번이 중국과 한국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아마 별일 없다면 이번 생에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설령 팀에서 수익이 나질 않더라도 최대한의 연봉을 맞춰주겠다 했으니 이건 우리가 손해 볼 게 없는 계약이네.”

“맞아.”

“원라이프는?”

원라이프는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내가 건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면 금액의 차이만 있을 뿐, S.솔리드와 비슷한 팀컬러였다.

“한솔이 네 생각은 어떤데?”

팀원들은 판단이 잘 서질 않는지 내 의견을 물었다.

“프로 팀에서 가장 중요한건 선수, 그리고 자본이야. 솔직히 국내에서 일성의 지원을 따라올 팀은 거의 없어.”

그린엔터가 버는 돈을 모두 게임단에 쏟는다 해도 일성이 맘먹고 바람 한 번 훅 불면 돈 싸움에선 밀릴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마켓에 좋은 물건이 올라올 때마다 경쟁이 붙으면 차이가 서서히 벌어지겠지.”

“원라이프 쪽도 계약 조건은 확정된 거야?”

“아니. 지금부터 확인해보려고.”

그린엔터측의 계약 조건은 대표가 있는 자리에서 체결됐다.

반면 원라이프의 조건은 아직 코치인 백은하의 의중만 담긴 상태, 이제 반대쪽의 진심을 확인할 차례였다.

***

“네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눈매가 사나운 남성이 백은하를 앞에 세우고 호되게 질책을 가한다.

회색 정장을 걸친 남성의 얼굴은 어쩐지 그녀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백호원 부회장.

피비린내까진 아니었다지만 제법 충돌이 있었던 일성의 경영승계 구도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남자.

날카로운 경영 감각으로 손에 들어온 계열사를 전부 키워낸 그는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였다.

백은하의 서류를 바로 앞에 집어 던진 그가 소리쳤다.

“그만 나가. 더 듣기 싫다.”

“아니에요. 이번엔 아니라구요. 아버지!”

백은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무능력자.

일성을 물려받을 부회장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3남 2녀 중 막내, 다른 자녀들이 진즉 자릴 맡아 경영을 배우는 동안 백은하는 늘 겉돌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그때까진 그도 딸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마음도 있었다.

능력도 없는 녀석이 일에 욕심을 내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경영에 뜻이 없다면 적당히 돈을 쥐여주고 편히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쯤 그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랬던 딸이 언제부턴가 변하기 시작했다.

아마 재작년쯤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 대상은 e스포츠 사업부였다.

일성그룹 전체로 보면 그저 작은 부서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능력 없는 인사가 쥐고 흔들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부회장은 간섭하지 않았다.

아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분수 넘는 짓을 했다면 진즉 쳐냈을 테지만 제법 착실히 본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듯 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북미에서 돌아온 백은하는 사업부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다.

가장 큰 변화는 돈이었다.

경영에 관심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경영인다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상당한 돈이 일성생명 산하 e스포츠 사업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번 보고를 받긴 했지만 부회장은 굳이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중요 계열사를 포함해 일성을 지휘하는 그에게 있어 그 작은 사업부는 관심 밖의 존재였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막내딸의 장난을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조금 과하게 지원을 끌어다 쓴 감이 있지만 국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녀석도 잘하는 게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두려고 했던 부회장의 생각을 변하게 한 것은 사업부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경고 메시지였다.

일성이 e스포츠 업계에 발을 들인지도 어언 30년.

그간 e스포츠 사업부는 확고한 지휘 체계를 확립했고 곳곳에 필요한 인사를 배치해 팀을 꾸려왔다.

대기업 산하이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절차가 필요했고 절차를 따르지 않는 자는 밖으로 튕겨 나갔다.

일성의 컬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오래 버틸 수 없는 구조였기에 그동안은 문제가 될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굴러온 돌이, 아주 묵직하게 치고 들어온 돌이 내부에 있던 톱니바퀴를 깔아뭉개더니 체제에 변화를 주려 하고 있었다.

다소 수직적이었던 사업부에 반발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웬만하면 그들도 묵인했을 것이다.

그룹 내에서 백은하의 위치를 생각하면 말이다.

아무리 천덕꾸러기 신세라도 그녀는 로열패밀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사업부는 정말로 팀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보고를 쏟아냈다.

일이 이쯤 되자 부회장도 사정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고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원칙을 파괴한 물건을 그녀가 만들어냈다.

일성 입장에선 폭탄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오로지 선수에, 선수를 위한 계약서.

이 계약대로면 e스포츠 사업부의 일은 자선사업과 별다를 게 없었다.

“원칙을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그게 중요하다고 몇 번이나 네게 말했을 거다. 그런데 이게 다 뭐냐. 네 머릿속 꽃밭을 어디까지 끌어들여!”

“정말 필요한 선수···.”

“입 다물지 못해!”

살벌한 불호령에 그녀는 대꾸할 생각조차 못 하고 침묵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이건 정말 팀을 위한 일이라고,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입이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더 이상 봐주는 것도 한계다. 지금 하는 장난감 놀이라도 관두고 싶지 않으면 더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거라.”

“······.”

“나가.”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지하 주차장의 차량 운전석이었다.

눈앞은 뿌옇게 변해 잘 보이지도 않았다.

눈가를 훔치며 티슈를 찾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지금 시간 괜찮을까요? 우리 계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정말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 남자였다.

기분이 최악으로 치달은 이때 메시지를 보낸단 말인가.

멍하니 메시지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뒤, 얼굴을 소매에 슥슥 부비더니 시동을 걸었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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