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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97화 (97/170)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1)

우릴 향해 손을 내민 건 며칠 전까지 월드챔피언십의 우승을 놓고 다투던 백은하였다.

진짜 사람이라도 붙였나?

그렇지 않고서야 저 바쁜 사람이 평일 오전 인천공항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백은하 아니야?”

“맞네!”

“유니크 보러 온 건가?”

“유니크는 S.솔리드 소속이잖아?”

휴가차 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자들의 수군거림이 귀를 간질였다.

이대로 손이라도 잡으면 당장 대문짝만하게 ‘유니크 한국으로 복귀? 다음 행선지는 원라이프?’ 등의 기사가 올라올지도 몰랐다.

이 손은 잡으면 안 되겠는걸.

“사람 이렇게 무안하게 할 거예요?”

그리 말한 백은하는 다시 손을 코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악수는 포기했어도 동행할 생각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집으로 갈 거죠? 가면서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

“음···.”

“형. 우리 원라이프로 가? 이건 내가 알고 있는 거랑 다른데?”

잠시 고민하는 사이 사태를 파악한 제레미가 속삭였다.

원라이프는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새 팀원의 자릴 보장하고 내가 거는 조건을 전부 수용한다면 굳이 다른 팀으로 갈 이유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백은하는 차를 타고 가며 계약 관련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때가 아니었다.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곤란합니다. 제가 차후에 따로 연락드릴게요.”

“설마 둘러대는 건 아니죠?”

백은하가 의심의 눈길을 보낼 때 나는 만나기로 한 인물을 찾아내고선 말했다.

“저기 오네요.”

내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는 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는 채린이가 있었다.

*

한국에 돌아오기 전, S.솔리드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짜가 확정됐을 때 채린이는 꼭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길 꺼냈다.

-저 그럼 오빠 마중 나가면 안돼요? 매니저 오빠도 같이 갈 거예요.

-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부모님 오시기로 했어.

-아, 할 말 있어서 그래요.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비밀이란다.

궁금했지만 오래 묵혀둔 소원권을 쓸 거란 말에 난 알았다고 답했다.

그녀가 내게 가져다준 그림자 발자국은 아직도 프로 씬에 한 개밖에 풀리지 않은 최고 등급의 희귀 스킬이었다.

당시 스킬을 받으며 뭐든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약속했는데 이제야 쓸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마침 시간이 적당해 대화는 점심식사를 나누며 하기로 했다.

약속장소로 향하는 동안 우리 셋은 결승전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제레미와 채린이 모두 S.솔리드 길드 일원으로 함께 활동했기에 어색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약속장소는 용산 근처의 고깃집이었다.

대체 고깃집에서 누굴 만나게 될까 궁금했는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중년 남성이 양복을 입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서준혁입니다.”

“정한솔입니다.”

꾸벅 고갤 숙이며 생각했다. 어디서 봤지?

초면은 아닌 것 같아 열심히 머릴 굴려봤는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마 눈앞의 남성이 유명한 국회의원이라 해도 못 알아봤으리라.

그만큼 프로게이머는 사회의 흐름에 둔감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내가 못 알아보는 걸 알았는지 그는 빙그레 웃으며 명함을 한 장 건넸다.

명함엔 검은색 글씨로 그린엔터테인먼트 대표 서준혁이란 문구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채린이 친구라고 들었는데 내가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우리 회사 이름을 들어봤으려나?”

“아뇨. 제가 게임 말곤 잘 몰라서요. 채린이가 소속된 회사인 거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회사를 이끄는 대표가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 자리를 마련한 걸까?

이유를 궁금해하고 있을 때 그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보였다.

팀과 선수의 계약 체결을 위한 표준계약서였다.

어라? 계약?

“이번에 우리가 가이아 팀을 하나 만들려고 하거든.”

“엔터면 가수나 배우분들이 일하는 곳 아닌가요?”

“맞는데 이번에 게임 쪽으로도 영업 확장하려는 거예요. 올해 가이아를 배경으로 제가 개인방송 한 거 있잖아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거든요.”

채린이는 옆에서 적극 설명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데뷔 전에 인지도 쌓기 용으로 개인방송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했지.

당시 채린이의 랭킹이 북미에서 마스터 최상위권이었으니 인기를 끌만한 요소는 충분한 셈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여성 유저는 언제나 관심을 받기 마련이니까.

“꽤 부담이 될 텐데요. 팀을 꾸리는데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거든요.”

가이아 프로리그는 건강한 리그의 유지를 위해 팀 창설에 제법 많은 제약을 뒀다.

그중 한 가지가 일정 규모 이상의 자본 보유였다.

갑자기 재정 악화로 인해 팀이 공중분해 되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름없는 B급 이하 선수만을 모아 팀을 운영하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유지가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팀을 꾸리면 인기가 있을 턱이 없다.

반대로 나나 제레미 같은 실력파 선수를 잡아두려면 개인 연봉이 수십억에 족히 이를 테니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연예기획사도 규모가 큰 곳은 상당한 수익을 올리겠지만 아무래도 대규모 자본을 댈 수 있는 대기업에 비하면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잠시 조용하자 채린이가 내 눈치를 살폈다.

“제가 너무 갑자기 얘기했죠···?”

“음? 아니야.”

“민준이한테 오빠가 2부에서 시작할 거라고 들어서요. 2부 신생팀 중에선 우리가 제일 좋은 조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팀 결성 이야기가 나온 게 얼마 안되기도 했지만요.”

하긴 민준이도 원라이프에서 연락이 왔단 사실은 몰랐으니 채린이가 급작스레 계약 얘길 꺼낸 것도 이해가 됐다.

“자본 문제는 걱정하지 않을 정돈 되네. 우리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거든. 지오 측에서 배포한 1군 프로팀 수익 보고서를 봐도 충분히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판단했고. 단,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스타 선수가 팀에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지.”

“오빠. 이것도 한 번 보세요.”

나는 잘 몰랐지만 채린이의 설명 덕에 그린엔터가 생각보다 꽤 큰 회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국내에선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규모라고 했다.

그런 큰 회사의 대표가 나를 직접 영입하러 자리에 나온 것이다.

열정만큼은 최고점을 줄 수 있지만 결정은 좀 더 신중하게 내려야 했다.

지금껏 프로 생활을 하며 여러 팀을 봐왔지만 자본이 탄탄하지 못한 팀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엔터 회사라면 자본 기준은 어느 정도 충족하겠지만 최상급 선수를 붙잡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나야 벌어둔 돈이 있으니 커리어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연봉 조절을 감내할 용의가 있지만 이제 팀에 데려올 선수들도 같은 마음일진 의문이었다.

국내의 모든 팀이 S.솔리드 같은 지원을 맞춰줄 순 없는 관계로 조절은 해야겠지만 그래도 모든 조건을 수용하겠다는 일성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순위가 밀리는 게 사실이었다.

“혹시 계약 이야기를 주고받는 팀이 있나?”

음, 이 자리에서까지 숨길 필요는 없겠지.

나는 확정된 건 아니지만 원라이프와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그들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밝히자 서준혁 대표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그걸 일성이 전부 수용한다면 확실히 다른 팀에 갈 이유가 없겠는걸.”

“···예.”

나와 제레미는 이제 프로 3년 차에 들어가는 선수다.

2부 리그부터 시작할 거라고 미리 언질을 줬으니 헐값 계약을 해도 불만이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다른 팀에 갈 이유는 없었다.

“소원은 이걸로 들어주시면 안 돼요? 오빠가 팀에 들어오는 거로요.”

“으음.”

“소원이라니?”

대표의 물음에 내가 대신 답을 했다.

그림자 발자국을 구해다 준 답례로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던 이야기, 전후사정을 알게 된 대표가 조그맣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중요한 결정을 소원으로 땜질할 순 없지.”

“오빠가 죽는 것만 아니면 뭐든 들어준다고 했어요.”

“내가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예.”

“혹시 다시 해외로 나갈 생각이라든지 계획이···.”

“없습니다. 이번엔 아예 뿌리 내리러 왔습니다.”

고갤 끄덕인 대표는 결정을 내렸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일성이 맞춰준다는 그 조건, 우리도 최대한 맞춰볼 테니 한 번 고려해주지 않겠나?”

아직 프로팀을 운영해본 가락이 없어서 그런가?

내가 내건 조건은 사실 어느 팀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해링턴 대표가 워낙 호인이니 망정이지 선수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팀을 떠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팀에서 열심히 투자한 장비와 스킬을 가지고 다른 팀으로 거액을 받고 옮겨버리면 팀에선 마땅히 제재를 가하는 것도 불가능한 조건이다.

심지어 이런 조건을 나뿐만 아니라 팀 전체에 적용해 달라는 건 내가 봐도 무리한 요구조건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팀의 영입 의지를 보기 위함이지 실제 체결로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용케 S.솔리드에선 좋은 팀원들을 만나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여러 사람이 모이면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최소한의 안전장치 정돈 팀이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레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밥부터 먹고 시작하면 안 될까요? 배가 고파서···.”

“이거 먹으면서 할 이야기였는데 미안하게 됐군. 계약서 작성을 다시 하려면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하니 일단 식사부터 들지.”

“감사합니다!”

*

서준혁 대표는 추진력이 엄청난 인물이었다.

마침 식사 자리가 용산이었던 지라 기획사 사옥이 코앞이었다.

회사로 우릴 데려간 대표는 구경을 시켜주는 한편 법률 자문을 도울 인원을 불러 내가 원하는 조건의 신규 계약서를 눈 깜짝할 사이에 뽑아냈다.

살짝 난항을 겪은 건 연봉 규모였다.

내가 S.솔리드에서 받았던 금액을 그대로 받기엔 사측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2부 리그를 시작하는 선수마다 수십억에 달하는 돈을 안겨주려면 대체 운영비를 얼마나 준비해야 한단 말인가.

“어쩔 수 없죠. 계약 기간 일 년, 10억에 해드리겠습니다.”

10억이란 말에 변호사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제가 듣기론 최소 인원 구성에 필요한 선수가 6인 이상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다 같은 규모는 아니죠?”

“제가 그중 제일 잘하니까 다른 선수들은 좀 더 적게 주셔도 됩니다.”

“···예.”

“1부 리그에 올라가면 수익이 팍팍 붙을 테니 보너스는 이 정도?”

“크흠.”

옆에 서 있던 서준혁 대표는 조용히 우리 대화를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거는 기준이 아직까진 그가 처음 생각했던 허용범위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연봉 10억.

2시즌에 걸쳐 이뤄낸 활약상과 월드챔피언십에서의 퍼포먼스를 생각하면 헐값이지만 계약 조건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멋진 플레이를 선보여 대형 광고, 경기 입장 수익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팀은 생각보다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 계약서엔 그 수익의 일부가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방식이 적용되어 있었다.

팀이 큰 이익을 거둘수록 연봉이 불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규모 조절을 상층부에만 맡기지 않는 계약이었다.

“틀은 완성됐고, 이제 자네 결정만 기다리면 되는군?”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많이 배려해 주셔서 아마 다른 팀은 조건을 맞추기 힘들 것 같거든요.”

확실히 이 정도면 채린이 말대로 2부는 물론이고 한국에서 나오기 힘든 계약이었다.

흡족한 계약서를 마련했으니 남은 건 그린 엔터에서 준비한 계약서를 토대로 나의 영입을 원하는 다른 팀들과 한 번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채린이의 소원권, 선수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계약 조건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상태였지만 한 번 더 둘러볼 필요는 있었다.

이제 함께할 팀원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저, 대표님.”

“음?”

“그런데 이 조건들 말이죠. 아무리 봐도 후하게 잡아주셨는데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돈을 날리실 수도 있습니다.”

내 말이 의외였을까.

대표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전혀. 채린이가 자네를 정말 최고의 선수라고 극찬을 했거든. 그 애가 그렇게까지 남 칭찬을 하는 건 드문 일이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신뢰가 팍팍 생기는 것 같아.”

음.

아무래도 채린이에 대한 대표님의 신뢰가 유별난 모양이다.

연습생 생활을 한 기간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의외였다.

바로 그때 쿵쿵거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연습실 문이 열리더니 채린이가 땀을 훔치며 달려나왔다.

“아빠! 오빠! 이야긴 잘 됐어요?”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회사에선···.”

“아, 대표님이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채린이를 보며 생각했다.

서준혁, 서채린.

세상에, 어쩐지 연습생이 회사 대표님 앞에서 너무 편하게 군다 싶었다.

그걸 보면서도 전혀 몰랐다. 둘이 하나도 안 닮았거든.

살짝 당황해하는 나를 보며 채린이는 환하게 웃더니 조용히 입 모양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소.원.들.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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