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세계 최고인가 (3)
수많은 S.솔리드 팬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신나게 파도를 탈 때, 원라이프의 벤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카이사르에 이어 루나틱까지 패하고 말았다.
솔직히 유니크를 상대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버서커에게 1패를 당한 건 많이 아팠다.
올킬.
4:0 패배 스코어가 원라이프 선수들의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전투력으로 보자면 더원이 원라이프 최고의 어태커지만 아직 S.솔리드엔 제레미가 남아있었다.
엘레멘탈마스터와 무도가의 대결.
상성상 제레미가 유리했고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만약 더원의 상대가 제레미가 된다면 정말 올킬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찮아. 어떻게든 1승을 올려 5라운드로 끌고 가는 거야.’
선수들이 불안해하는 가운데 백은하는 냉정한 시선으로 남은 자원을 살폈다.
최고의 유망주들 속에서 고르고 고른 선수들이다.
세계에서 프로게이머 유망주가 가장 많이 나온다는 한국에서 말이다.
1라운드는 유니크의 실력이 갑작스레 향상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2라운드 역시 마찬가지, 실력에선 루나틱이 밀릴 게 없었다.
백은하는 엔트리에 실수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운까지 컨트롤 할 순 없어. 다음 라운드는 다시 랜덤···.’
3라운드에선 어떤 전장이 나올지 모르기에 상대 선수 클래스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 데이터로 볼 때 확률이 높은 선수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헤븐메이커, 아그니, 오디세이아. 이 셋 중 하나겠지.’
무도가 한 명에 마법사 둘.
여기서 더원을 냈다가 상성을 먹히고 들어가면 정말 대참사가 날 수도 있었다.
짧은 작전 시간 동안 심사숙고한 백은하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
“나가고 싶은 사람?”
선수 기용은 본래 코치가 할 일이지만 그 스타일은 팀마다 달랐다.
백은하처럼 전적으로 주도해 판을 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브라이언처럼 선수의 의견을 수용하는 쪽도 있었다.
“제가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레미의 답에 코치가 되물었다.
“촉이 어때? 더원이 나올 것 같아?”
“글, 글쎄요. 거기까진.”
만약 제레미를 더원의 순서에 맞출 수만 있다면 4:0이 가능한 상황.
코치는 제레미를 이번에 내보낼지 한 번 미룰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나쁘진 않은데요? 어차피 저기 실력있는 탱커 라인은 전멸했으니까.”
“더원 저격에 실패해도 제레미가 1승을 가져올 확률은 높잖아요.”
“그냥 내보내시죠 코치님?”
팀원들이 합당한 의견을 내자 코치는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내게 최종 의견을 구했다.
“한솔이 네 생각은?”
“지금 저쪽은 우리 팀에서 누가 나올지 대충 예상했을 겁니다. 정보는 가지고 있을 테니 제레미나 제리, 마이클. 셋 중 한 명이 나온다고 생각하겠죠.”
“그렇겠지.”
“무도가 한 명, 마법사 둘. 상대 엔트리가 이렇다면 누굴 내보낼까요?”
“실력있는 암살계가 있으면 암살을 보내는 게 제일이겠지?”
정답이다.
무도가를 내면 어느 직업을 만나도 불리한 그림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라이프의 암살자 실력이 어느정도냔 건데···.
분석팀이 정리해준 자료에 따르면 원라이프는 시즌 중에도 암살계에 큰 비중을 두는 운영을 하지 않았다.
더원이 워낙 강력한 카드고 나머지 아크나이트 두 명이 캐리를 하는 그림이 자주 나왔기 때문이다.
“원라이프는 엔트리 도박을 벌이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리그 데이터를 훑어봤을 때 아마도 이번 라운드에 무도가를 낼 확률이 높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엔트리 패턴까지 분석했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워낙 힘든 훈련이다 보니 다른 팀원들은 상대 선수 패턴 분석을 하는 데만도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내가 상대 팀 엔트리 분석까지 마쳤다고 하니 다들 신기하게 보기 시작했다.
“코치님 월급 한솔이 대신 줘야···.”
“조용히 해! 다들 주목! 이번 라운드는 빌이 나간다.”
“예?”
“저요?”
2라운드에 존이 나갈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선수들.
이번엔 뜬금없이 빌을 내보낸다고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빌 머레이, S.솔리드 유일의 아크나이트.
그의 출전 횟수는 존이나 애덤보다도 훨씬 낮은 편이었다.
“코치님 오늘 어디 아프세요?”
“죽고 싶···.”
빠드득 소리가 들리자 팀원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강렬한 헤드락을 선사했을 테지만 오늘은 지켜보는 눈이며 카메라가 너무 많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코치가 큰소리로 외쳤다.
“엔트리의 정석이 뭐냐!”
“···?”
“상대가 암살을 내보낸다면 우리도 탱으로 잡는 게 정석 아니겠냐. 그리고 너희들! 빌도 모든 훈련을 함께한 S.솔리드의 일원이다! 팀원끼리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야 되겠냐!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기분 나쁘지 않겠냐고!”
“아,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저 기분 안 나쁜데요.”
황당해하는 팀원들의 말을 싹둑 자른 브라이언 코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더원이 나올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제레미를 내보내는 게 맞겠지! 하지만 이번 라운드에 더원이 나올 가능성은 낮다! 왜냐고? 한솔이가 보증했기 때문이다!”
아니? 여기서 날?
코치님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려는데 팀원들 표정이 이상했다.
야야. 거기서 이해한단 얼굴을 하면 안 되지!
그리고 잠시 뒤, 다시 한 번 배틀 아레나가 무너질 듯 들썩거리며 S.솔리드의 이름 아래 초록불 하나가 더 올라갔다.
*
‘이건 말도 안 돼.’
원라이프 선수들 얼굴엔 그늘이 가득했고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백은하는 입술을 앙다문 채 말이 없었다.
이미 4라운드 맵도 결정된 상황.
황금같은 작전시간을 침묵으로 버리는 건 멘탈이 이미 왕창 깨졌단 뜻이다.
‘어째서 아크나이트가 나오는 건데. 몇 번 뛰지도 않은 선수잖아!’
백은하는 허탈한 심정으로 원라이프 아래 들어온 빨간 동그라미 세 개를 바라봤다.
3패.
7판 4선승제 게임에서 내리 3번을 지고 이길 확률은 너무나도 낮았다.
이미 아레나에 모인 팬들은 결과를 예상하는 것처럼 S.솔리드를 외쳐대며 파도를 타기 바빴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거야.’
작년 북미 리그 결승.
백은하는 더원과 함께 레전드크루에서 S.솔리드와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레전드크루는 더원의 활약으로 팀을 5라운드까지 끌고 갔다.
비록 게임은 4:1로 패했지만 그땐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니크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는 S.솔리드에 비해 이쪽은 지원이 빈약했으니까.
한국으로 서둘러 돌아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일성의 지원만 받쳐준다면 북미 모든 팀을 능가하는 슈퍼팀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원라이프는 그렇게 출발한 팀이었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선수들을 데려왔고 장비와 스킬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월드챔피언십을 위한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백은하는 우승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S.솔리드? 유니크 빼면 별거 아냐.’
실제로 유니크 바로 다음 선수라고 불리던 제리를 더원이 결승에서 잡아내지 않았던가.
다전제에선 선수 전체의 평균이 더 중요한 법이다.
VT스타즈는 이세준이란 걸출한 선수를 지녔음에도 결국 원라이프에 무릎을 꿇었다.
이러한 흐름은 월드챔피언십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프로리그 1년을 치르며 선수들은 더욱 성장했고, 괴물을 상대로 두 명이서 마크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했다.
처음 상대를 봤을 땐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출전 경험도 별로 없는,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선수였으니까.
하지만 정작 시합이 시작되고보니 그것이 큰 오산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S.솔리드의 아크나이트는 기본기에 강했고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근접공방전에서 빈틈을 찾기 힘들었다.
고작 일 년도 안되는 시간에 선수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선수였다.
‘이해가 안 돼.’
작년까지만 해도 S.솔리드는 분명 약점이 있는, 유니크와 일부 선수에게 많은 무게를 둔 팀이었다.
하지만 올해 월드챔피언십의 S.솔리드는 달랐다.
모든 선수가 강력했고, 성채 같은 단단함을 갖춘 팀이었다.
오늘 나선 선수는 모두 작년부터 S.솔리드에 있었으니 결국 팀이 선수를 키워내는 역량이 엄청나단 결론이 나왔다.
감독과 코치의 역량이 뛰어날수록 선수도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유니크의 정보를 캐낼 당시 대니얼 전감독은 브라이언 코치에 대해 선수들 멘탈 관리는 곧잘 하지만 특별한 능력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감독도 아니고, 코치도 아니다.
그럼 답은 하나밖에 없다.
‘유니크.’
백은하의 시선 끝에 손을 활짝 들어 하이파이브를 하는 유니크의 모습이 보였다.
뛰어난 선수는 팀을 어떤식으로든 변화시킨다.
팀원들이 해당 선수의 플레이에 자극을 받아 게임을 보는 실력이 높아지는 긍정적인 순환이 있는가 하면, 압도적 실력에 벽을 느낀 팀원들이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유니크의 경우엔 아무래도 전자인 모양이었다.
다소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S.솔리드 선수들은 크랙의 존재를 보며 실력을 극한까지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S.솔리드는 유니크 혼자만 강한 팀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용재.”
“나갈 준비 됐습니다.”
백은하의 부름에 더원이 답한다.
“지면 올킬인데 멘탈 안 깨질 자신 있어?”
“지금 안 내보내 주시면 그게 더 멘탈 깨질 것 같은데요.”
“그래. 한 번 보여주고 와.”
마지막 라운드가 될지 모르는 4라운드 전장은 벽람초원.
장애물이 없는 마력조성 2레벨짜리 무한맵.
마법사가 암살자를 상대로 화력을 뽐내기에 괜찮은 무대였다.
-올.킬!
-올.킬!
-올.킬!
-올.킬!
올킬을 외치는 목소리가 이미 배틀 아레나를 완벽히 잠식한 상황.
무대 위로 올라오는 양 팀 선수들은 관중 모두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한국 최고의 마도사라 불리는 더원.
유니크와 함께 S.솔리드의 더블에이스를 담당하는 헤븐메이커.
‘어린 놈이 건방지게.’
더원은 두팔을 번쩍 들며 관중의 환호성을 유도하는 어린 무도가에게 전의를 불태웠다.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제레미는 더원을 바라보더니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한국행 성공 기원을 위한 제물!’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이번 대회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월드챔피언십 4라운드의 막이 올랐다.
***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영광의 우승.]
[첫 월드챔피언십 우승의 주인공은 북미리그 우승팀인 S.솔리드.]
[북미, 세계 정상에서 최고임을 증명하다!]
[S.솔리드는 어떻게 강해졌는가.]
[지구 최강의 플레이어, 유니크에 대해 알아본다 (1)]
[놀랍도록 멋졌던 경기. IOC 위원장도 극찬했다!]
[e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흥행!]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됐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졌고 우리 팀은 다 세기도 어려울 만큼 축하를 받았다.
포탈 사이트 메인엔 금색의 거대한 트로피를 번쩍 들고 환하게 웃는 나, 그리고 색종이 다발 속에 파묻힌 우리 팀원들의 모습이 큼지막하게 올라갔다.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내 평생 최고로 기쁜 순간이었지만 이 행복이 영원할 순 없었다.
축하 파티가 끝날 즈음,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모두에게 인사했다.
“그동안 정말,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어쩌면 이상한 분위기가 될 수도 있던 자리, 제리가 먼저 다가와 나를 와락 껴안더니 팀원들이 다가와 대열에 동참했다.
“가서 우리 잊지 마!”
“넌 어딜 가든 잘할 녀석이니까 성공할 거다!”
“다음에 만나면 좀 봐주고!”
“아이고! 한솔이 가면 집은 누가 지켜!”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준다는 게 느껴졌기에 눈가가 시큰하게 차오르는 걸 느꼈다.
눈물을 보이긴 싫었기에 참고 있는데 케빈이 구석에 서 있던 제레미를 향해 손짓했다.
“너도 와서 축하해줘.”
“쟤는 아직도 꽁해 있어?”
“빨리 와 인마.”
아차!
아직 폭탄이 하나 남아있었다.
해링턴 대표의 허락을 받긴 했지만 아직 팀원들은 제레미가 팀을 떠난단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팀원들의 손짓에 입술을 우물거리던 제레미는 눈을 질끈 감더니 외쳤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쟨 왜 저래?”
“이 제레미도 갑니다. 여러분!”
영문을 모르는 팀원들은 단장이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너도 나간다고?”
“이 자식 보소.”
“비밀로 할 게 따로 있지.”
“괘씸해. 아주.”
“어어? 나한테 왜 이래요.”
“왜 이래요? 일루와. 넌 좀 혼나야 해.”
“아, 악!”
내가 인사할 때하곤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렇게 나의 인사에 조용히 묻어가려던 제레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그간 정말 수고 많았네. 자넨 최고의 선수였어.”
“대표님 덕분에 편하게 게임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북미로 돌아올 일 있으면 연락하게나.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제레미 자네도.”
“예.”
“넵.”
해링턴 대표의 인사를 받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꿈같은 시간이었다.
상상했던 모든 걸 전부 이뤄낸 시즌이었으니 말이다.
한숨 자고 일어났을 땐 인천공항이었다.
“한국리그는 어떠려나? 우리 둘이 같이 하면 리그 제패는 식은 죽 먹기겠지?”
“자만하면 안 돼.”
“자만이라니. 팩트야, 팩트.”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제레미가 해맑게 웃었다.
아무래도 과격한 이별 인사의 여파가 전부 가시질 않은 모양이었다.
게이트를 통과한 제레미가 헛하며 숨을 삼켰다.
“근데 한국 날씨 무엇. 개춥네.”
“집에 가면 뜨끈한 거나 먹자.”
간만에 집밥을 먹겠단 생각에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플래시 세례가 우릴 반겼다.
“정한솔씨! 이쪽이요!”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기자?
내가 들어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진 둘째치고 스무 대 이상의 대포카메라가 날 조준하고 있는 광경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내 인지도가 이 정도까지 올랐나 싶을 정도였다.
다소 당황해하고 있을 때 검은 양복의 수행원들을 낀 익숙한 얼굴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
상대를 알아본 제레미가 눈을 동그랗게 뜰 때 악수를 청하는 손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