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95화 (95/170)

누가 세계 최고인가 (2)

무대를 내려와 털썩 주저앉는 카이사르의 몸은 흐르는 땀으로 흥건했다.

리얼한 고통을 심어줄 수 있는 가이아는 게임 한 번으로 선수를 녹초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지친 카이사르에게 못마땅한 표정의 백은하가 다가왔다.

“계획대로 못한 원인은?”

“예측 실패죠. 보셨잖아요. 저 친구 오늘 날 잡았어요.”

한숨을 쉰 카이사르는 눈을 비비며 답했다.

그를 1라운드 카드로 내보낸 건 전적으로 코치의 판단이었다.

물론 카이사르도 백은하도, 이번 경기에서 유니크를 잡아낼 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이미 원라이프 분석팀은 유니크를 일대일로 감당할 수 없는 레벨이라 평했다.

하지만 이길 가능성이 아예 제로인 건 아니었다.

카이사르도 원라이프가 심혈을 기울여 컨택한 선수다.

게임 종류는 다르지만 프로게임단 운영 역사가 20년이 넘는 일성이 가이아 게임단을 창단한다고 했을 때, 전국의 수많은 유망주들이 입단을 희망했다.

일성의 이름값은 유망주를 선점하는데 유리했고 카이사르는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인재 중 하나였다.

팀에서는 카이사르를 한국 최고의 아크나이트가 될 수 있다 판단했고 실제로 그는 지난 한 해 동안 좋은 성적을 올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이번 결승전 시합 전까지, 카이사르는 유니크에 관한 정보를 빠트림 없이 수집하고 분석했다.

원라이프의 전력분석팀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만한 베테랑들이었고 그들의 손에 의해 유니크는 낱낱이 분석됐다.

데뷔 이후 2년간의 행적과 이번 월드챔피언십을 치르며 보여준 스킬, 장비스펙, 전략, 작은 습관까지.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걸 공략 자료로 삼았다.

이만하면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카이사르는 패배하고 말았다.

라운드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터졌을 때 유니크의 남은 체력은 9할.

압도적인 패배였다.

상성 우위를 잡았음에도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계속 전략을 구상해 온 백은하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패배였다.

“미리 전략을 짜뒀잖아. 이형환위를 써서 전후방 양동작전을 펼치는 패턴도 이미 충분히 익혔고. 근데 그 마지막 허무한 클린히트는 뭐야.”

“영상 확인해보세요. 반응속도가···다른 때랑 달랐어요.”

“선수들은 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몸이 가벼운 날요. 저런 급의 선수가 그런 상태에 들어가면 아무도 못 막죠.”

더원은 카이사르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옆에서 거들었다.

셋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전력분석팀은 끼어들지 못하고 입을 달싹거리기를 반복했다.

백은하는 자신이 얘기하는 도중 끼어드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팀 내에서 그녀의 직책은 코치지만 그녀가 회장의 손녀인 점을 생각하면 파워는 감독에 맞먹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2라운드 준비가 우선 아닌가.

3분밖에 안되는 작전 시간 중 이미 30초가 지나고 말았다.

“저, 코치님.”

“예?”

“시간이···.”

“하아.”

천만다행으로 백은하는 잠시 이 문제를 덮어두고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망자의 광장이네요.”

가이아의 다전제 경기에서 2라운드와 4라운드는 미리 정해진 맵 결과를 보고 선수를 기용하게 되어 있다.

망자의 광장을 확인한 백은하와 원라이프 선수들은 패배의 쓰라림을 조금이나마 다스릴 수 있었다.

망자의 광장은 라플라타 다음으로 크기가 가장 작은 맵.

맵이 작은 경우 다크레인저나 마법사는 아무래도 힘을 쓰기가 힘들다.

치고 들어오는 근접 클래스의 공격을 피하기 힘이 드는 탓이다.

심지어 망자의 광장은 마력조성 레벨이 1레벨이라 마력 효율을 중시하는 마법 클래스에게 치명적인 무대였다.

S.솔리드의 주력카드는 유니크를 비롯해 제리, 제레미, 마이클로 이뤄지는 암살과 마법사들.

반면 원라이프는 탱클래스의 비중이 단단한 편이었다.

덕분에 이세준에게 탱커 둘을 붙여 철저한 봉쇄 작전에 성공하지 않았던가.

망자의 광장은 원라이프에게 웃어주는 맵이었다.

“유철아. 준비해.”

“예.”

전유철, 닉네임 루나틱.

그는 카이사르와 더불어 원라이프의 탱커 라인을 책임지는 실력파 아크나이트였다.

북미에서 실력파 아크나이트라고 하면 최근 신성으로 떠오른 피케, 초기부터 활약한 비프로스트 정도가 있는데 원라이프의 탱커들도 이 둘에 전혀 밀리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으니 이 팀의 선수레벨이 얼마나 높은 편인지를 알 수 있었다.

다른 팀은 한 명씩 나눠 갖기도 바쁜 최상급 탱커를 한 팀에 두 명이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별 고민 없이 선수를 확정한 원라이프와 달리 S.솔리드 쪽은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썼다.

“왜 하필 망자의 광장이야?”

“저쪽에선 무조건 루나틱 나올 텐데.”

엿 같은 일이었다.

저쪽의 낼 패를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내보낼 패가 마땅치 않다니.

“한솔이 네가 볼 땐 어느 정도야?”

“루나틱이요? 특급이죠. 움직임도 좋고, 카이사르랑 비슷할 걸요.”

“제레미. 자신 있냐?”

코치의 질문에 제레미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같은 특급 선수끼리 상성을 무시하고 승리를 따낸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면 유니크의 명성이 이렇게 높을 일도 없었다.

“솔직히 3할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한솔이 형이면 모를까.”

“크흠.”

제레미는 S.솔리드의 필승 카드 중 하나.

그런 카드를 3할도 안 되는 확률에 소모하는 건 분명한 낭비였다.

그렇다고 제리나 마이클을 내보내면 3할 승산조차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제 선수를 결정해야만 했다.

1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코치는 팀의 맏형인 존을 불렀다.

“존! 준비해라.”

“예? 제가요?”

월드챔피언십은 물론이고 큰 무대를 뛰어본 적이 없는 존은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랐다.

“뭘 놀라고 그래. 망자의 광장에서 탱은 탱으로 잡는 게 기본이잖아.”

“그야 그렇죠···.”

“훈련 열심히 했잖아.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우리 팀에 엔트리에 못 들 것 같아서 훈련을 게을리 한 선수는 없었어. 동의하지?”

코치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 월드챔피언십을 위해 흘린 땀을 생각하면 욕조 하난 거뜬히 채우고도 남았다.

모든 선수가 엔트리 여부와 상관없이 같이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다.

“져도 괜찮아. 팀게임이니까. 다만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보여주는 거다.”

“예.”

“응원 한 번 하고 들어가자.”

“하나, 둘, 셋!”

“S.솔리드! GO!"

*

2라운드에 어떤 선수가 올라올지 조용히 지켜보던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 방금 양측 선수가 모두 결정됐습니다! 원라이프는 루나틱 선수를 내보냅니다.”

“예상 가능한 선수기용이라고 볼 수 있죠.”

“반면 S.솔리드에선 레인엑스 선수를 올렸습니다. 이건 좀 예상 밖이지 않을까요?”

“이것도 어떻게 보면 월드챔피언십의 묘미죠. 엔트리의 제한이 없다는 거요. 다소 염려하는 부분은 레인엑스 선수가 큰 무대 경험이 없다는 겁니다.”

-레인엑스? 존?

-저 선수 개인라운드 승률도 좀 낮지 않아?

-솔직히 S.솔리드에선 쩌리 라인임.

-선수 비하 자제해라. 애송이들.

-이거 아무리 봐도 선택 잘못한 것 같은데.

-큰무대 뛰어본 적이 없는데 첫등판이 월챔 ㅋㅋ

-긴장으로 망칠 거 같은데.

과연 그럴까?

배틀 아레나에 모인 수십만의 관중 중에 나보다 존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봐온 존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해낼 줄 아는 친구였다.

그의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지나친 떨림으로 경기를 그르칠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

가이아는 꼭 S급 선수가 이기는 게임이 아니란 점이었다.

존의 강철 군화가 무덤가의 돌 바닥을 밟는 순간 전투가 시작됐다.

상대가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경우, 무조건 선공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팀원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

2년에 걸친 스파르타 훈련을 통해 S.솔리드 선수들은 기선제압의 중요성을 몸으로 깨달았다.

존이 대검을 횡으로 펼치며 압박하자 루나틱의 상체가 뒤로 밀렸다.

존의 클래스는 버서커.

가이아에서 근접 공격 파괴력이 가장 뛰어난 직업이기에 데미지가 방패를 뚫고 들어올 정도다.

루나틱의 재능이 뛰어나 존의 공격을 크게 상쇄시켰지만 뒷걸음질을 시작한 것부터 게임이 꼬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걷는 것과 뒤로 걷는 것, 어느 쪽이 더 자연스러운지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갈라지는 존의 대검.

세 갈래로 검이 갈라지며 좌, 우, 중앙으로 우직한 공격이 펼쳐졌다.

묵직한 대검이 잔영을 남기며 동시에 펼쳐지자 루나틱은 되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콰가각-!

가만히 있었더라면 삼점타격에 데미지를 입었을 텐데 루나틱은 몸을 들이밀어 한쪽 공격을 먼저 받고 나머지 둘을 방패와 검으로 쳐내며 방어했다.

보통 선수였다면 흔들렸을 법도 한데 루나틱의 반격엔 거침이 없었다.

-와우;;

-날카롭다. 날카로워.

-거봐. 레인엑스가 밀린다니까.

하지만 존도 그간 놀고 있었던 게 아니다.

S.솔리드에서 일대일 팀 훈련을 하는 동안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그나마 같은 암살계 재능러인 제레미가 치명타를 방어하는 정도?

존은 애초에 버서커였기에 나와 함께하는 훈련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버서커가 무도가나 웨폰마스터에 비해 움직임이 느린 탓이다.

하지만 훈련을 함께하며 확실히 향상된 게 있었는데 바로 눈이었다.

리그 최상위 레벨의 공격을 매일 받다 보니 게임을 보는 눈이 트인 것이다.

존이 공세를 착실히 받아내자 루나틱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존은 본래 원라이프의 경계 선상에서 제외됐던 인물이었다.

존이 무대 위에서 모습을 감춘 건 포스트 시즌 이전이니 벌써 석 달 가까이 지났다.

프로게이머는 하루아침에 게임 스타일이 변하기도 한다.

하물며 석 달이면 사람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다.

존의 분전에 루나틱의 검 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터진 데스카운터-!!”

존은 상대의 호흡이 흐트러지는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캐스터의 외침과 동시에 공격을 등으로 받아낸 존의 대검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바람을 가르며 들어온 사선베기는 상대의 전신을 휩쓸었고 루나틱은 엄청난 격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대로 뭉개버려!

-박살 내라고!

승기를 잡은 존과 그를 응원하는 팬들, 반대로 원라이프 벤치는 못 볼 걸 본 사람들처럼 머리를 쥐어뜯거나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아무리 실력 좋은 프로도 이렇게 단숨에 체력이 빠지면 게임을 뒤집기가 쉽지 않았다.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거나 가벼운 경직이 후폭풍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96퍼센트였던 체력이 순식간에 5할 아래로 떨어진 루나틱의 몸놀림이 둔해진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뭐야. 겉멋충 자식이었잖아?

루나틱의 플레이는 7년 동안 아크나이트를 다뤄온 내게 있어 보기 흉할 정도였다.

원라이프에서 뽑았다기에 기본은 된 녀석이겠거니 싶었는데 기본기가 형편없었다.

아크나이트가 실드나이트에 비해 공격력이 더 뛰어나다곤 하나 결국은 탱커 클래스다.

공격력보다 수비에 치중한 클래스란 뜻이다.

그런데 녀석은 방패 다루는 것보다 공격에 신경을 쓰는 느낌이 강했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로는 유효한 플레이가 될 지 모르나 날카로운 수를 낼 수 있는 선수를 상대로는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저럴 거면 아크나이트를 할 게 아니라 웨폰마스터를 하는 게 본인 적성에 더 잘 맞았을 텐데.

방어를 좀 더 신경 썼다면 체력이 저렇게 크게 빠질 일도 없었을 테고 당연히 경직 피해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크나이트를 들고 공격에 치중했으니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 셈이 됐다.

“밀어붙여!”

“힘내!”

좀 더 안쪽을 향해 파고드는 존을 보며 S.솔리드는 한목소리가 되어 외쳤고 루나틱의 체력 바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허우적거리는 몸을 가누며 루나틱은 방패를 움직였지만 이미 승기는 완전히 기울어진 뒤였다.

휘둘러치기.

몸을 한 바퀴 돌리며 힘을 받은 대검이 루나틱을 강타하자 대량의 빛가루가 터져 나왔다.

승부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YOU WIN-!!]

-waaaaaaaaaaaaaaa!!!!!!

-와. 이게 역배가 터져버려?

-약점이 없는 갓팀;

-무결점 근본!!!

환호를 터트리는 건 관중뿐만이 아니었다.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존을 향해 달려나간 팀원들이 그를 마구 두들기며 난리를 피웠다.

“믿고 있었다고!”

“해냈다! 존이 해냈다!”

“적당히 해! 아파!”

그 광경을 보며 미소 지은 나는 존을 향해 달려가다 말고 전광판을 바라봤다.

선명하게 빛나는 S.솔리드라는 글자 아래로 녹색 동그라미 두 개가 빛나고 있었다.

이제 우승까진 단 두 걸음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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