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세계 최고인가 (1)
처음 보는 인사들이 호텔에 찾아와 우리에게 악수를 건넸다.
“인물이 훤칠하구만. 앞으로도 게임 산업 발전을 위해 꾸준히 힘써주게.”
“예.”
“자네가 유니크구만. 이야기 많이 들었지. 경기 잘 보고 있네.”
“감사합니다.”
“이 친구가 그 검은 옷을 입고 뛰어다니던 그 친구인가? 이렇게 보니 놀랄 정도로 이미지가 틀리군 그래. 멋진 경기 보여줘서 고맙네.”
“감사합니다.”
가끔 있는 식사 자리가 아니면 우승 때나 볼 수 있던 해링턴 대표는 물론이고 단장과 사무국장도 항상 자리를 지켰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 참석한 사람들은 북미 각지에서 활동하는 e스포츠계 중진들이었다.
니콜라이는 꼼짝도 못 할 가이아 상위 관리자들, 북미 e스포츠 협회 간부와 회장, 가이아 ESBN 스폰서십 주도권을 가진 결정권자들.
심지어 게임 산업에 흥미를 보이는 정계 인물도 있었다.
하나같이 영향력이 대단한 거물들이었다.
‘우리가 게임을 잘하긴 했나 보네.’
처음 열린 월드챔피언십은 S.솔리드의 활약과 더불어 흥행 가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도출한 결과 우리 팀의 우승 확률이 제일 높았고, 가이아 운영측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했다.
공격적인 마케팅이라 하면 다소 무리해 보일 수 있는 선전과 홍보로 관중을 더욱 끌어모으는 작업이다.
처음 열리는 세계대회에서 북미 팀이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고 매일같이 보도자료가 나갔다.
인터넷, TV, 라디오, 옥외광고를 통해 쉴 새 없이 S.솔리드의 활약상이 뿌려지니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뭐지? 하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돌풍의 중심에 검은 도복을 입고 활약하는 내가 있었다.
가이아를 처음 접하는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데 효과적인 건 역시 화려한 플레이.
그리고 그런 플레이를 해낼 수 있는 선수 중에 가장 돋보이는 게 바로 나였다.
그래도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이아 수뇌부까지 끼어있지 않은가.
지오가 글로벌 기업이라곤 하나 그 뿌리는 미국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게임을 호령하는 팀이 S.솔리드란 사실이 맘에 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주역인 내가 올해로 한국으로 간다고 하면 어떤 얼굴을 하겠는가.
안 봐도 똥 씹은 얼굴일 게 눈에 선했다.
이런 생각을 해링턴 대표에게 넌지시 전했지만 그는 그저 허허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뿐이었다.
뭐지? 마지막이니까 분골쇄신하라는 뜻인가···?
설마 아니겠지. 적어도 가이아 사람들은 알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계 인사까지 등장하자 설마 한국으로 출국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팀원들은 마지막까지 훈련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솔직한 친구들 같으니.’
그렇게 훈련이 싫다고 하더니 자발적으로 나서서 훈련을 하는 팀원들을 보니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빠져나가면 다소 공백은 생기겠지만 그 빈자리를 이 팀이라면 훌륭히 채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우승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한 세트 더 갈까요?”
“힘들 텐데 괜찮겠어요?”
“괜찮습니다.”
“그럼 갑시다!”
8강에서 원라이프에게 패배해 돌아갈 예정이었던 다이나믹 G.C는 계속 호텔에 남아 우리의 훈련을 도왔다.
미리 짐을 싸서 나간 레드불스를 비롯한 북미 유수의 팀들은 남는 상위 장비를 대여해줄 수 있다고 연락해왔다.
대회에서 한 번 사용한 장비는 기록에 남아 이동이 불가능하지만 팀이 들고 있는 여분의 장비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물론 장비 수준으론 우리만한 팀이 없기에 크게 도움은 안됐지만 적어도 북미의 우승을 응원하는 그들의 마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모두의 기대를 받는 입장이 됐으니 선수들도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조금만 더 힘내자!”
노력으로 모든 걸 이룰 순 없다.
프로 1군의 세계에선 노력만큼이나 재능도 중요하다.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단 말 또한 사실이다.
자신이 가진 역량을 최대로 끌어내는 데 필요한 게 바로 노력이니까.
“으아아아!”
“다 때려부순다!”
“월.챔.우.승!”
팀원들과 훈련을 함께하며 나는 확신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세계 최고의 팀이었다.
***
-티켓 구했어?
-10초컷 실화냐고.
-10초면 개 넉넉한데?
-개소리마. 여긴 서버 다운돼서 티켓 구매도 불가능했어;;
-너두? 나두 ㅎㅎ···ㅠㅠ
무려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가이아 배틀 아레나.
만약 실물 경기장이었다면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경기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유저들이 결승 티켓을 구하는데 애를 먹었다.
상상 이상의 인원이 몰리는 바람에 티켓 예매 페이지가 다운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경기를 보기 위해 북미뿐 아니라 전세계의 유저들이 몰려들었으니 말이다.
-참 나.
-왜 돈을 주겠다는데도 자리가 없어!
-구매 대기에 희망을 걸어본다. 본인 세 자릿수 대기다···.
-나 4만 5천 번대 뜨는데 희망있냐?
-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4만 5천 ㅋㅋㅋㅋㅋ
-암표 없냐?
-가이아 로그인 자체가 생체 인식이라 암표 못 구한대.
-와 내가 살다 살다 암표상이 없어서 아쉬울 줄이야.
-나 지금 손발 떨린다 ㄹㅇ루.
이런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장엔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경기장을 점검하는 건 운영 시스템 담당 직원들이었다.
만에 하나 경기 도중 서버가 나가거나 불의의 사고라도 터지는 날엔 한두 명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대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메인터넌스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엔 진행 요원들.
가상 경기장이라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몰리면 혼란이 발생하는 건 당연한 일.
방위 여덟 개를 점하고 위치한 게이트로 들어올 관중들을 유도하기 위해 배치된 안전요원만 수백 명이었다.
그 다음 자리를 잡은 인원은 오프닝공연을 위한 엔터테이너들이었다.
주류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스타들이 본무대를 위한 리허설을 시작했다.
놀랍도록 현실적인 감각을 재현해낼 수 있는 게임,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체감은 현실을 뛰어넘는 사운드였다.
‘이거 장난 아닌데?’
미리 가이아를 접해본 사람들은 충격이 조금 덜했지만 처음 접하는 이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선 이런 거대한 경기장을 꽉 채우는 사운드가 물리적인 문제로 불가능했지만 이곳에선 얼마든지 구현이 가능했다.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으로만 그리던 사운드를 재현해낼 수 있는 공연.
뮤지션으로선 꿈과 같은 무대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냈을 때 관중이 입장하며 결승의 서막을 알리는 폭죽이 경기장 위를 형형색색으로 수놓기 시작했다.
월드챔피언십의 결승을 알리는 화려한 신호탄이었다.
*
“이상하다.”
“뭐가.”
“하나도 안 떨려.”
“이만큼 연습했는데 떨리면 나가 죽어야지.”
“케빈. 너 다리 떨고 있는데?”
“이건 그냥 습관이고!”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벤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연이 절정에 달하며 자아내는 진동이었다.
결승을 위해 대기 중인 양 팀 선수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은 지하였다.
지하 대기실이라고 하면 흔히 음침한 광경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어찌나 관중들이 열광했는지 진동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게 꼭 무너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이거 무너지면 어떻게 돼?”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결승전 중단. 대형사고지.”
케빈이나 제리는 긴장하는 내색 없이 잡담을 나눴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제레미는 목이 답답한 듯 계속 목 근처 의상을 매만졌고 로이는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빙빙 맴돌았다.
차라리 나갈 확률이 없는 팀원들은 아예 마음을 비운 듯 차분한 표정이었다.
누구 하나 게으름 피우는 일 없이 훈련을 해낸 것을 알고 있는 브라이언 코치는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경기 입장 1분 전입니다!”
대기실에 우두커니 서있던 스탭이 입장 1분 전을 알리자 다들 동작이 조금씩 빨라졌다.
케빈의 다리는 시동 걸린 엔진마냥 떨렸고 제레미는 이제 거의 제손으로 목을 조를 지경이었다.
“주목!”
난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선수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제자리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용의 충격부터 교룡뇌조까지 천상의 연주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은 팀원들에게서 1분의 시간을 빼앗기 충분했다.
“시간 됐습니다. 이동 시작합니다!”
“어라.”
“와. 초능력이라고 해도 믿겠네.”
빛이 몸을 두르며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 이미 우리는 무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와아아아아!!!!!!!!!!
아래 대기실에서 느낀 진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쟁터 한복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함성과 진동이 우릴 덮쳤다.
이런 열기 속에서 몸이 오싹하게 달아오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목청 큰 중계진이 선수들을 맞이해 신나게 떠들어댔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초집중 상태.
이미 내 모든 신경은 1라운드로 향해 있었다.
경기 시작 전 각오를 물어본 것도 같은데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건 그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경기가 시작됐다는 사실 뿐이었다.
1라운드가 시작됐나?
잠깐 기절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처음 겪는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몸은 게임을 시작한 이래 가장 좋은 컨디션을 뿜어내고 있었다.
-유니크!
-유니크!
-유니크!
이미 경기가 시작돼 바깥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데도 어쩐지 팬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다.
[1라운드 - 잊혀진 사원]
[S.솔리드 무도가 vs 원라이프 아크나이트]
챙- 하는 소리가 아름답게 울리며 아크나이트의 검이 검집에서 뽑혔다.
정말 멋진 소리지만 나는 녀석이 자세를 잡을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나의 발이 바닥을 차자 구름처럼 몸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자색팔찌의 스킬 강화 효과는 한 번 시전하면 긴 딜레이가 생긴다.
오늘 경기를 위해 어젯밤에 미리 강화를 선택한 스킬은 운룡비형, 그야말로 구름을 타듯 날랜 움직임으로 섬전을 뻗었다.
교룡뇌조의 날카로운 강공이 상대의 검과 충돌했다.
백색 검이 분신을 그리며 공격을 차례로 방어하는데 그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원라이프가 나를 잡기 위해 준비한 카드는 아크나이트.
닉네임 카이사르를 쓰는 상대 선수는 내 기억 속에 없는 선수였다.
이만한 실력을 가졌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카이사르 또한 타우러스나 피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미래가 만들어낸 원석 중 하나였다.
파-캉!
내 공격을 방어하던 카이사르의 눈썹이 역으로 휘어진다.
오른쪽에서 들어오나 싶었던 공격이 어느새 왼쪽으로 들어오더니 체력이 무섭게 깎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못 막겠지? 못 막을 거야.
나보고 막으라 해도 못 막겠다.
가끔 경기를 치르다 보면 이런 날이 오곤 한다.
뭘 해도 이길 것 같고 도무지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날이.
일 년에 하루 있을까 말까한 절호의 흐름을 결승에서 맞이하다니, 이거야말로 승리의 여신이 나를 지켜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카이사르의 방패를 폭격했다.
이형환위에 강화된 운룡비형을 전력으로 펼치자 방어에 송송 구멍이 뚫렸다.
카이사르의 실력이 부족한 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백은하가 이세준의 대항마로 선택할 만큼 실력 있는 선수였다.
이 대 일이었다곤 하나 어중간한 선수가 이세준을 상대로 작전을 완수하는 건 힘든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당신은 아직 이길 준비가 안 됐어!
드래곤 테일로 방패를 밑단을 후려치자 끝내 카이사르의 방패가 들리고 말았다.
실드나이트나 아크나이트처럼 방패를 쓰는 직업은 가드가 풀리는 순간이 제일 위험하다.
카이사르는 날 괴물 보듯 하며 열린 가슴을 막기 위해 검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터진 인피니트 슬래셔.
초근접거리에서 나의 전신을 노리고 전설급 공격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무한의 궤적을 그리며 휘어지는 검격을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팔랑거리는 검의 궤적이 두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평소였다면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날카로운 타이밍의 반격인데도 말이다.
너무 집중력이 올라 스스로 무서울 지경이었다.
-퍼킹!
-안돼에에에에!
-아아아악!!!!
무한의 검격에 갈가리 찢기는 나의 모습은 카이사르를 흥분케 했고 관중의 비명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흔들리는 잔상을 남기며 유유히 뒤를 잡은 나의 손에서 불꽃과 벼락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워어어어어!!
-와아아아아!!!
남은 마력을 전부 부어 펼친 혼신의 맹공!
감전이라도 당한 듯 몸을 파르르 떨며 카이사르의 무릎이 바닥으로 쿵 소릴 내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