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하는 자 (4)
돌발 상황인가?
나를 바라보는 캐스터의 표정이 꼭 그랬다.
하지만 베테랑 캐스터에게 이런 상황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소소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부드러운 멘트로 아무일 없었다는 듯 지나가려는 찰나, 간신히 수습한 밥상을 이세준이 엎어버렸다.
“지금 저한테 한 얘깁니까?”
-오우야;
-분위기 살벌하네 ㅋㅋ
관중들은 이제 궤도를 벗어난 열차가 어디로 달려가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캐스터는 제발 사과 한마디로 넘어가주면 안되겠냐는 싸인을 애타게 보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까짓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이세준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관중석에선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리그 때 만큼은 아니라지만 이 수십만 관중에서 한국팬이 차지하는 비율은 극히 적은 편이었다.
애초에 인구수와 경기가 열리는 지역, 인프라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이 순간, 배틀 아레나는 S.솔리드의 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 잘하면 한 대 치겠는데?
불을 머금은 눈동자로 죽일 듯 노려보는 이세준에게 코웃음을 날렸다.
“아직 이세준 선수가 세계 최고를 논하기엔 이르다고 생각되는데요. 제 경기, 안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보고도 그딴 소릴 해!
-세계 최고는 십 년은 이르다!
-어우솔!
-저 새끼 저거 순 장님이네.
뭐 십 년 까진 아니겠지만 갑자기 초능력이라도 각성하지 않는 한 이번 대회에서 이세준이 날 이길 확률은 바닥에 가까웠다.
“별거 없던데요?”
이세준이 이를 악물고 반박하자 관중석에서 야유가 터졌다.
-뭐? 별거 없어?
-주제파악을 해야지 ㅋㅋㅋㅋㅋ
-어린애임?
이 순간만큼은 팬들도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세준이 한국에서 특별한 레벨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 경기를 보고 별거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내 레벨은 과거 7년 어치의 가이아 선수를 모두 합쳐도 톱클래스에 들어간 상태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자신과 나의 실력 차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유치하게 나오는 건 아직 어리단 뜻이다.
‘내년엔 훨씬 더 성장할 수 있겠지. 하지만 올해까진 너도 흔한 S급 선수에 불과해.’
흔한 S급 선수라고 하면 S카테고리에 들지 못한 수많은 선수가 눈물을 흘리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같은 티어여도 실력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내가 가이아를 새로 시작하며 높게 평가했던 선수들, 피케나 제레미가 이세준과 붙는다면 이기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저는 상관없으니까.”
“후-. 대결을 기대하죠.”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내 여유로운 태도, 관중들의 웃음소리가 합쳐지자 이세준의 얼굴이 약간 상기됐다.
논쟁이 더 격화되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캐스터는 재빨리 끼어들어 조 추첨 진행을 시작했다.
‘녀석의 진짜 속내는 뭘까?’
나를 인정하면서도 강한 척 하고 싶어 허세를 부린 걸까?
프로 선수는 원래 밀리는 걸 알면서도 종종 그렇게 말하곤 한다.
시합은 기세라는 게 워낙 중요하니 말이다.
어찌 됐건 이세준과의 대결은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테크니컬 선수, 그 실력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이 되리라.
*
작은 소동 이후 토너먼트 편성이 완료됐다.
[S.솔리드 vs 블랙포스]
[로열드래곤클럽 vs 타이탄실드]
[원라이프 vs 다이나믹G.C]
[VT스타즈 vs 네버다이 워리어]
8강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전력은 역시나 우리였다.
그리고 최약체 평가를 받는 팀은 타이탄실드.
우리 팀과 타이탄실드를 제외하면 다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실력 격차였기에 팬들은 대진이 퍽 맘에 드는 모양새였다.
-로열드래곤클럽은 꿀 빨았네.
-그래 봤자 최대 4강이라 기분 별로 안 좋을걸?
-ㄹㅇ 원라이프랑 자리 바꾸고 싶을 듯 ㅋㅋ
-내일부터임?
-내일부터 시작!
-빨라서 좋네.
e스포츠의 장점 중 하나.
리얼 스포츠와는 다르게 하드한 일정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7판 4선승제 시합을 치른다고 해서 극심한 근육통을 겪는 것도 아니고 피로해지는 것 뿐이니 연일 경기를 치르는 게 가능했다.
당장 우리 팀은 첫 경기를 치르게 됐지만 아무도 긴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브라이언 코치가 방마다 돌아다니며 연습 좀 하라고 닦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강한 반발에 코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코치님. 저희도 진짜 쉬고 싶습니다.”
“이제 맨투맨 훈련은 진짜 토나와요.”
“못해요! 못해!”
“선수의 휴식을 보장하라!”
필드 사냥을 했으면 했지 더는 개인 훈련은 못하겠다고 선수들이 떼를 쓰자 결국 코치가 두손 들고 포기했다.
어지간하면 목줄을 채워서라도 연습을 시켰을 텐데 그룹스테이지를 통해 보여준 S.솔리드의 경기력은 퍼펙트 그 자체였다.
6전 전승도 대단한 결과였지만 그 내용물을 살펴보면 상대팀을 압도하는 경기력이었던 것이다.
사실 휴식도 훈련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e스포츠가 신체적 고통은 적은 편이라지만 경기 후 피로는 분명 존재한다.
특히 가이아 선수들이 겪는 정신적 데미지는 타 게임보다 강한 편이기에 확실한 휴식이 필요했다.
풀장에서 헤엄치며 몸을 풀고 지하에 준비한 캡슐 룸으로 내려갔다.
짧은 대회 일정 중에 호텔 플로어를 통째로 빌리고 지하 연습실까지 마련할 수 있었던 건 우리 팀이 묵는 숙소가 파라다이스 체인인 점이 컸다.
전세계 호텔 체인인 파라다이스는 북미에 파라다이스 게이밍을 운영하기도 했다.
비록 PG게이밍이 월드챔피언십에 진출하진 못했지만 파라다이스측은 북미 팀의 선전을 위해 영업이익 없이 숙소를 제공했다.
다른 해외 팀에 비하면 숙소 여건은 최상인 셈이었다.
많은 해외 팀이 호텔에서 머물고 있지만 연습실을 마련하지 못해 배틀 아레나로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반면 북미 팀은 식사를 마치고 지하로 내려가기만 하면 되니 그 차이가 상당했다.
다들 손에 망고 주스 하나씩 들고 캡슐룸으로 들어가는데 반대편에서도 사람들이 내려왔다.
다이나믹 G.C였다.
우리 팀이 간만에 필드 사냥을 하러 내려온 것과 달리 다이나믹은 여전히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블랙포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대전 상대로 치면 원라이프가 훨씬 강했다.
원라이프의 경기를 쭉 지켜본 다이나믹은 하루라도 더 연습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저···.”
“예?”
“연습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다이나믹 G.C의 신성, 피케가 어렵사리 내게 말을 붙였다.
간만에 애들하고 던전을 돌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도와주자.”
“그래도 북미 팀이 이기는 게 낫지.”
“어? 근데 한솔이는 원라이프를 응원할지도···.”
“아···. 한국 팀이라서?”
“아냐. 나도 원라이프 응원 안 해.”
왜 그런진 모르겠는데 VT스타즈도, 원라이프도 별로 응원하고 싶은 맘이 들지 않았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맘에 안들어서 그런가?
팀원들이 그러자고 했으니 나는 흔쾌히 피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대일 훈련 하실 거죠?”
“예.”
“쩝. 우리도 그냥 훈련이나 할래?”
“진심 토나오는데.”
“별로 놀 분위기도 아니잖아?”
서른 대가 넘는 캡슐이 놓여진 연습실.
같은 연습실을 공유하던 레드불스는 그룹스테이지 탈락 이후 짐을 싸서 빠져나갔고 남은 건 두 팀 뿐이었다.
“그럼 차라리 팀 게임을 하죠. 우리도 손이 남으니까.”
“그럼 감사하죠.”
놀라운 일이었다.
양 팀 코치들이 자리에 없는데도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MIT를 갔겠다.”
“진짜로?”
“···아니. 말이 그렇단 거지.”
제리는 투덜거리면서도 캡슐에 들어갔다.
그렇게 S.솔리드는 땀을 쏟으며 다이나믹 G.C와의 연습전에 들어갔다.
***
토너먼트의 첫째 날이 밝았다.
압도적인 무력을 선사하며 당당히 조 1위로 오른 S.솔리드를 보기 위해 북미의 수백만 게이머들이 스크린 앞으로 모여들었다.
우리의 상대는 유럽 챔피언 블랙포스.
블랙포스는 챔피언이었기에 그룹스테이지에서 1시드로 출발했지만 VT스타즈에 밀려 조 2위로 진출하고 말았다.
만약 1시드로 마감했다면 우릴 만날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블랙포스는 팀전에 더 강한 팀이다. VT스타즈랑 경기하는 거 봐서 알겠지만 개인 라운드에서 최대한 많은 점수를 따내야 유리해.”
블랙포스의 선수 면면을 들여다보면 특급 선수라 부를만한 인재는 별로 없었다.
선수 개인 역량만 따지면 블랙포스는 우리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특급 선수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게임을 이기는 건 아니다.
선수 역량이 다소 부족해도 선수간 케미가 좋으면 팀전을 통해 역전이 가능했다.
블랙포스는 아마추어 시절부터 함께 단련해온 선수들의 손발이 무척 잘 맞았고 그 강점은 8강전부터 도입되는 7판 4선승제 룰에서 강한 힘을 발휘할 터였다.
만약 그룹스테이지가 bo5가 아니라 bo7이었다면 그룹스테이지 1위 자리가 바뀌었을 거라 말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너희보다 연습을 많이 한 팀은 없다!”
코치가 자신 있게 말했다.
괜히 기운 심어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S.솔리드의 훈련량은 오래도록 프로 생활을 하며 이것저것 주워들은 내가 봐도 대단했다.
재능있는 선수들이 그에 걸맞는 훈련량까지 갖추게 되었을 때, 그 파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 된다.
“4대0 올킬도 가능하단 소리야. 자신감을 가지고! 박살 내버려!”
“예!”
다함께 손을 모아 GO를 외치며 1라운드가 시작됐다.
선발 주인공은 나였다.
S.솔리드 1라운드를 내가 맡는 경우는 통계상 7할 정도.
워낙 내가 선봉을 맡는 경우가 많다 보니 상대 팀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버리는 패를 던지거나, 한 번 잡아보겠다고 유리한 상성을 맞춰 내거나.
블랙포스의 선택은 맞서 싸우는 쪽이었다.
[1라운드 - 망자의 광장]
[S.솔리드 무도가 vs 블랙포스 아크나이트]
저 선수 이름이 마노던가?
제법 실력 있는 선수로 결코 버리는 패는 아니었다.
실력있는 카드를 질 확률이 높은 경기에 내보내는 건 쉬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그것도 오늘 지면 더는 뒤가 없는 월챔 무대에선 말이다.
방패와 검을 양손에 나란히 쥔 아크나이트가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용기있는 선택을 한 상대에게 보내는 나의 진심이었다.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선수는 멋지지 않은가.
‘훌륭한 선택을 하셨군.’
상대가 결단을 내렸으니 나도 최선을 다할 참이었다.
오늘 시합 전에 강화효과를 부여한 스킬은 용의 충격.
전신 어디서든 공격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무도가 1티어 스킬이다.
오늘의 컨셉은 근접거리 고속 공방전.
발을 구르며 나의 몸이 힘차게 상대를 향해 튀어나갔다.
“어엇?”
처음부터 운룡비형을 강하게 밟으며 달려들자 상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진다.
본래 아크나이트는 다크레인저를 제외하면 암살계를 잡기 유리하게 설계된 클래스다.
다크레인저는 워낙 치고 빠지기에 능해 고유 특성을 통해 약점을 극복하는 게 가능했지만 무도가나 웨폰마스터는 그게 불가능했다.
때문에 많은 암살계 선수들이 시합에서 아크나이트를 만나면 일단 거리를 두고 열양지 같은 원거리 공격으로 승리를 노렸다.
그러나 오늘 전법은 달랐다.
쾅소릴 터트리며 방패를 두들기자 마노의 몸이 꾸준히 밀려나갔다.
-저게 뭐야?
-용의 충격 아니야?
-위력이 다른데?
용의 충격은 본래 견제기다.
그런데 견제기로 탱커의 몸을 밀어내고 있으니 관중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잠시 당황한 마노는 최대한 침착하게 공격을 흘려냈다.
방패의 각도를 조절해 상대의 공격을 흘림과 동시에 반격을 넣는 공수일체의 스킬이다.
불꽃이 튀며 검을 걷어찬 내 발이 그대로 떨어져 상대의 어깨를 찍었다.
왼쪽 어깨를 난타당한 마노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졌다.
이건 스킬이 아닌 순수한 공격이다.
가이아가 게임이라고 해서 모든 공격을 스킬로 떼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3분에 이르는 시간을 꽉 채운다고 치면 그 시간을 모두 스킬을 쓰는 건 불가능했다.
마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심지어 망자의 광장은 마력 조성 1레벨, 한 번 쓴 마력은 다시 보충되지 않았다.
가을철 낙엽을 쏟아내는 나무처럼 체력을 흘린 마노는 커다란 묘를 등지고 서서 공격을 받아냈다.
마노의 노림수였다.
뒤가 비면 이형환위로 기습을 받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뒤가 막혀 있을 땐 충격이 더 커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항마장과 교룡뇌조, 용의 충격을 적절히 배합해 눈 깜짝할 사이에 쏟아내자 상대의 등을 받치고 있던 묘지 벽이 쩍하고 갈라지며 몸이 파묻히기 시작했다.
만약 뒤가 비어 있었다면 그대로 몸이 밀려나 조금이나마 충격이 덜했을 텐데 반동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마노는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뭐 이런 괴물이!’
아크나이트가 무도가를 상대로 유리한 이유는 스탯 분배였다.
기본 방어 스탯이 높은 탱커 클래스는 근접 암살계와의 전투에서 데미지를 적게 받는다.
서로 똑같은 횟수로 공격을 성공시키면 무도가는 훨씬 큰 피해를 받는 것이다.
마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초기와 달리 암살계에 대한 패치가 이뤄진 이후엔 아크나이트로 무도가를 잡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소위 S급이라 불리는 톱클래스 선수들이 A급에게 상성으로 잡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아무리 용을 써도 공격이 전혀 먹히질 않았다.
방패를 두들기는 상대를 향해 검을 찌를 때마다 귀신같은 반격으로 공격을 차단, 다시 역공이 들어왔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답을 내리기도 전에 기대고 있던 회색 벽이 터져나가며 마노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길···.’
힘겹게 고개를 든 마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느새 상대의 발등이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빡!
충격적인 소리가 무대 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