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OS 소설 아닌데요-89화 (89/170)

증명하는 자 (2)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가이아 배틀 아레나.

지오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세계대회를 위한 무대.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도착한 선수들의 얼굴엔 떨떠름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게 경기장이야?”

“생각했던 거랑은···많이 다르네.”

왜 아니겠는가.

이건 경기장이라기보단 흡사 커다란 자재 창고 같은 분위기다.

관중도 없고 오로지 관계자와 선수만 돌아다니는 삭막한 공간.

이 넓은 경기장에 모인 건 A조 선수들뿐이었다.

공간도 터무니없이 넓어 다들 마주칠 일이 없었다.

굳이 시합 전에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찾아가 인사를 나누는 건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

‘너무 긴장하지도 않고 딱 좋아.’

나는 팀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풀어지거나, 크게 긴장하거나.

어느 쪽도 경기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가장 좋은 건 그 가운데 선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거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오늘 경기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S.솔리드 선수분들! 이쪽으로 오세요.”

가끔 연락을 주고받던 니콜라이, 그리고 진행요원들이 우릴 맞이했다.

그들의 안내에 따라 다수의 접속기 앞으로 자릴 옮겼다.

대회 동안 오로지 S.솔리드를 위해서만 쓰일 물건이었다.

PC방에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접속기를 번갈아 사용하면 찜찜해 하는 선수들이 있기에 아예 따로 배정을 한 것이다.

“사전촬영이 한 시간 뒤에 시작되니 접속부터 체크하겠습니다.”

접속기 안에 몸을 누인 팀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을 꺼냈다.

“새것 냄새난다.”

“이게 더 성능이 좋나요?”

“아니요. 성능은 기존에 쓰시던 것과 동일한 제품입니다.”

떠들기도 잠시, 접속을 마친 선수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압도당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끝도 없이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경기장이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월드챔피언십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배틀 아레나입니다. 유료관중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죠.”

개발자가 자부심을 담아 설명한다.

기술의 집약이라느니 하는 설명이 그 뒤로도 이어졌으나 다들 경기장 둘러보기에 바빴다.

자그마치 30만 명, 일반 시즌의 네 배도 넘는 인원이다.

이 넓은 경기장에 가득 찬 관중의 환호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정말 많은 프로 경험을 쌓았지만 월드챔피언십 무대는 내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7년을 활동하며 1군 말석이 이적할 수 있는 팀 레벨엔 한계가 있었고 당연히 그 팀들은 월드챔피언십 진출과는 거리가 먼 곳들이었다.

‘드디어 이곳에 왔어.’

이 자리에 오르길 얼마나 바랐던가.

월챔은 모든 선수가 원하는 꿈의 무대다.

나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무대의 바닥을 매만졌다.

단단한 돌 바닥이 내 감각을 더욱 일깨우는 기분이 들었다.

감상에 젖어있는 것도 잠시, 진행요원이 테스트 시작을 알렸다.

“그럼 테스트 진행하겠습니다. 스킬, 장비를 확인해 주시고 이상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곧 풍경이 변하며 병사들의 함성이 울렸다.

오림의 성채였다.

NPC 병사들이 우릴 향해 달려드는 맵이기에 테스트를 하기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결과는 순조로웠다.

선수들은 아무 이상이 없음을 전했고 테스트를 마친 우리는 촬영을 위해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찍는 영상은 시합 인트로 부분에 조합해서 나갈 겁니다.”

“이러면 제작비가 좀 더 싸지나?”

“오히려 이쪽이 더 멋있는 거 같기도 하고.”

결승전을 대비한 촬영물은 대부분 현실을 배경으로 제작이 됐지만 가이아는 달랐다.

VR게임의 장점을 살려 이번엔 모두 게임 속에서 촬영이 시작됐다.

선수들의 잡담을 듣고 있던 니콜라이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쪽이 훨씬 많이 들어갑니다. VR 맵을 제대로 꾸미는데 들어가는 금액은 생각보다 높거든요. 선수들 비행기 태워 보내서 찍는 거보다 비싼 일을 시도하는 건 우리 게임의 상징성, 그리고 시간 절약 때문입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이 나열한 통로, 로마시대 건축물을 떠올리게 했는데 현실 로케이션을 했으면 시간을 며칠은 잡아먹었을 터다.

고작 30초 남짓한 영상을 찍기 위해 진행한 촬영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런 촬영이 처음인 선수들의 얼굴이 어색했던 탓이다.

“긴장들 푸세요. 이렇게 화면에 나가면 정말 바보처럼 보일 겁니다. 다시 한 번 가겠습니다.”

촬영팀은 계속 수정을 요구했고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야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팀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무전을 주고받는 감독을 통해 다른 팀 촬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선수들을 부른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네 개 팀 스케쥴을 맞추자 얼추 시간이 맞았다.

잠시 휴식을 갖고 다시 게임을 접속했을 때 우리는 뜨거운 열기를 목도했다.

이미 경기장엔 절반 넘는 인원이 들어찼고 수많은 관중이 입구를 통해 계속 들어오는 중이었다.

현장에선 이미 오프닝 무대가 진행 중이었는데 볼거리만으로도 티켓값은 뽑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룹 A조의 선수들이 벤치에 하나둘씩 빛과 함께 소환되자 환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발밑이 떨리는 거 같은데.”

“함성 때문에 그래.”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인 거 보는 적 처음이다.”

전신이 오싹오싹했다.

정규 경기가 진행되는 6만 명 관중이 지르는 함성도 엄청났는데 지금은 그 수 배에 이르는 관중이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언제나 압도적이었던 S.솔리드의 외침이 오늘은 약하다는 것이었다.

북미, 유럽, 중국, 남미에 이르기까지.

각 팀을 응원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접속한 관중들이 저마다 다른 응원팀의 이름을 목청껏 외쳤다.

“긴장하지 마. 사람 많은 거 빼면 다를 것도 없잖아.”

무대 울렁증이 심한 선수는 경기력이 엄청 떨어지기도 한다.

팀원들을 다독거리고 있을 때 노트를 들고 브라이언 코치가 들어왔다.

“얘들 안색이 왜 이래?”

“조금 긴장했나 봐요.”

“맘 편하게 먹어. 까짓거 한 경기쯤 져도 괜찮아.”

코치가 할 소린 아니지만 긴장을 풀기엔 괜찮은 멘트였다.

그룹 스테이지는 각 팀과 두 번씩, 한팀에게 여섯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오늘 우리는 총 세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다.

코치 말대로 한 게임을 내주고 나머지 게임을 다 잡으면 5승 1패가 되는 셈이니 자력 진출은 확정이다.

“얘들아.”

나는 가볍게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았다.

“불안하면 5라운드만 가자. 전부 박살 내줄 테니까!”

“그래. 한솔이가 누구냐. 팀전에선 우리 무패다. 너희가 긴장할 거 없어. 오히려 우릴 상대하는 팀들이 훨씬 긴장했단 말이야.”

브라이언 코치는 선수 시절 경험을 늘어놓으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조언이었다.

A조에서 가장 강한 전력으로 평가받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였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보다 다른 팀들이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1라운드는 누가···.”

“저요! 제가 나가겠습니다!”

“찬성이요.”

“찬성.”

“내가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걸 물어봤네.”

이견 없이 내가 1라운드 선수로 확정됐다.

나를 바라보는 팀원들의 눈빛엔 상대가 누구든 때려 부숴주리란 믿음이 담겨 있었다.

“자, 한 번 외치고 들어가자.”

“하나, 둘, 셋.”

“S.솔리드 GO!!"

팀원들의 외침, 수십만 관중의 응원 속에 그룹 스테이지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

네버다이 워리어.

중국 2시드를 받아 올라온 이 팀은 자국 리그에서 알아주는 전투광이다.

가이아 리그 자체가 전투로 승패를 겨루는 게임이니 전투광이란 표현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공격적인 전투를 즐기는 팀이란 뜻이다.

중국 1시드 R.D.C와 결승에서 7세트를 꽉 채울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한 팀.

지금 이 시각 경기를 시청중인 수많은 중국 시청자들은 네버다이 워리어의 선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차 적응을 위해 일찍 도착한 캘리포니아에서 상당히 높은 스크림 승률을 올렸단 이야기가 돌았을 때 중국 팬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중국 대회 결승에서 보여준 워리어의 전투력은 극강이었다.

그룹스테이지 A조 1라운드.

S.솔리드를 상대하기 위해 제일 먼저 무대에 오른 선수는 팀 워리어의 주장, 메테오였다.

이름만 들으면 마도사 같지만 그의 클래스는 웨폰마스터.

관중석 일부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붉은 파도타기를 시작했다.

-메테오!

-메테오!

-메테오!

선수 개인 인기로만 따지면 중국 최고라는 이야기가 진짜였다.

-우리도 질 수 없지!

-유니크!

비록 기존 북미리그만큼은 아니라지만 관중석엔 S.솔리드 팬이 적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북미 전체가 S.솔리드의 서포터였다.

메테오를 응원하는 소리를 덮으려는 듯 유니크의 이름을 외치며 무대의 막이 올랐다.

[1라운드 - 벽람 초원]

[S.솔리드 무도가 vs 네버다이 워리어 웨폰마스터]

양손에 한자루씩 검을 빼든 메테오는 눈을 번득이며 잔디 위를 질주했다.

장애물을 찾아볼 수 없는 오픈 필드.

벽람초원은 서로의 실력을 순수하게 겨룰 수 있는 장소였다.

선수 본연의 실력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기회에 메테오는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얼마나 잘났는지 실력 좀 보자.’

캘리포니아 도착 이후 워리어는 여러 팀에게 스크림 제안을 했고 시합을 가졌지만 유독 S.솔리드와는 기회가 없었다.

여러 번 연습을 요청했지만 S.솔리드는 끝내 연습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워리어의 선수들은 실력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S.솔리드가 자신들을 피하고 있다며 떠들었다.

실제로 레드불스와 다이나믹 G.C를 스크림에서 꺾어냈기에 네버다이 워리어로서는 충분히 말할 자격이 있는 셈이었다.

‘강공으로!’

이미 무대에 오를 때부터 전략을 짜온 메테오의 선택은 기선제압이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마력을 투자해 흐름을 빼앗아오려는 시도였다.

그의 두자루 검이 붉게 빛나더니 뱀과 같은 곡선을 그렸다.

변칙적인 그의 검을 두고 중국은 사검이라 불렀고 이 검격에 수많은 선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두 선수 충돌합니다!”

수십 미터 거리를 좁히고 달려드는 메테오를 향해 유니크가 왼손을 뻗었다.

우직한 항마장이 터져 나오자 메테오는 망설임 없이 장력을 가르고 들어왔다.

붉은 기운이 맺힌 칼날의 예리함이 더 강하단 증거였다.

불꽃 튀는 공방전.

주먹과 검이 부딪치는데 금속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쩌적하는 파열음이 뒤를 이었다.

유니크가 발로 메테오의 정강이를 밟는 소리였다.

‘못 막았어?’

분명 수없이 북미 결승전을 돌려보며 대비했던 공방이다.

그런데 실전은 달랐다.

생각보다 상대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메테오는 하체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견디며 그대로 스킬을 시전했다.

고속으로 쏟아진 찌르기가 상대의 얼굴이며 어깨, 가슴을 뚫자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뒤를 점한 유니크의 손이 뇌전을 터트리며 등을 강타했다.

“이형환위로 공격을 피하는 유니크! 메테오! 무너집니다!”

무너질 듯 휘청거리며 앞으로 구른 메테오는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며 검을 휘돌렸다.

만약 유니크가 추가타를 넣으려 달려들었으면 분명 카운터가 날 만한 반격이었다.

그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니크는 거리를 벌리고 서서 일양지를 쏘아냈다.

퍼석 거리는 붉은 광선이 다시 한 번 정강이와 어깨를 때리자 워리어 코치의 안색이 노래졌다.

‘망할!’

이 날을 위해 얼마나 많이 준비했던가.

분명 장비는 호각이었다.

워리어는 이번 대회를 위해 거금을 들여 던전 팀을 꾸렸고 물량 공세를 쏟아내 스카라의 자색궁전을 클리어 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소위 A급이라 불리는 랭커 공략대가 100명도 넘게 갈려 나갔지만 원하는 장비를 손에 넣었으니 손해는 아니었다.

장비만 놓고 보면 우승팀도 한 수 접어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왜 밀리는 거야!’

메테오의 훈련을 도운 코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메테오가 누구인가.

5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 유저 중 공격력으로 정점에 오른 유저다.

분명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전설급 스킬 드래곤포트가 터질 때마다 유니크의 체력도 소모가 있었다.

문제는 상대의 노림수가 훨씬 더 교묘하게 메테오를 쥐고 흔드는 데 있었다.

같은 스킬도 게임 내에서 계속 주고받다 보면 눈에 익기 마련, 계속 이형환위로 공격을 피하고 후방을 점하는 패턴에 질린 메테오가 반격에 나섰다.

유니크를 압박하다가 상대의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뒤를 향해 공격을 내지른 것이다.

‘씨발! 씨발! 씨발!’

완벽한 반격이었다.

이보다 더 빠르게 반격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손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등을 지지고 들어오는 화끈한 통증이 계속됐다.

여지없이 후방 공격을 허용한 메테오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분명 모습이 사라지는 걸 봤는데! 뭐가 문제야!

그러나 답을 내리기엔 상대의 주먹이 너무나도 빨랐다.

한 번 뇌격이 터질 때마다 체력이 쭉쭉 빠져나가 순식간에 토막이 났다.

불과 30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문제를 파악하고 좀 더 나은 방어를 펼칠 수 있었을 터였다.

수많은 중국 유저 중 정점에 오를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재능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유니크는 그가 냉정한 판단을 내릴 여유를 줄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숨통을 끊는다!’

-ㅋㅋㅋㅋㅋㅋ

-다 죽여버려!

-킹.니.크!!!

이형환위를 쓰는 척하며 그림자발자국으로 모습을 숨긴 유니크의 주먹에서 강화된 교룡뇌조가 다시 한 번 폭발했다.

공격의 교본이라 해도 손색없을 깔끔한 클린히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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