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5)
나는 제레미를 설득하기 위해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S.솔리드를 떠나는 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2부부터 치고 올라가야 하는 시스템, S.솔리드와는 비교하기 힘든 열악한 지원,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 불확실한 게 너무 많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무슨 이야길 해도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실력이 짐이 될 수준은 아니잖아.”
“실력은 문제없지.”
근데 내 마음의 짐이 무겁다!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서로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스크림 도중이 아니었다면 종일 입씨름을 할 정도로 제레미는 강하게 동행을 주장했다.
연습이 끝난 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해결법을 제시했다.
“이건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내가 대표님하고 얘기를 한 번 얘기해볼게.”
“무슨 이야길 하려고? 그럼 괜히 더 복잡해지기만 하는 거 아냐? 그냥 내가 재계약 안 하면 깔끔하게 끝나는 거지.”
“우리 팀 계약조건이 말이 안 되는 건 알지?”
“말이 안 돼···?”
S.솔리드의 계약 조건은 선수 위주로 돌아간다.
프로게이머의 수명이 다른 스포츠 선수들에 비해 짧은 특성상 장기계약은 보기 드물다 해도 2~3년 정도의 계약은 제법 잦은 편이다.
하지만 S.솔리드는 무조건 1년, 계정 관리나 매매, 복잡하게 느낄 수 있는 여러 부분에서 선수 우대 계약을 체결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차이가 나는가 하면 한국에서 같은 계약을 요구하면 받아들일 팀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렇게 좋은 조건을 맺은 건 처음 계약한 내가 스타트를 잘 끊은 덕도 있긴 하지만 선수를 배려하는 대표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게 컸다.
“처음부터 그런 권리를 누렸으니 잘 모르겠지만 대표는 우리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해준 거야. 그나저나 너, 뭐가 최우선이야?”
“뭐가 최우선이냐니?”
“우리 지금 월챔이 코앞이잖아. 나랑 계속 같이 가는 조건으로 월드챔피언십을 포기하라고 하면? 그래도 상관없어?”
만약 제레미가 끝까지 계약연장 포기를 주장하면 S.솔리드로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다만 대표와 말하기 전, 녀석의 결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처음 열리는 세계 대회다.
게다가 S.솔리드는 월드챔피언십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지는 상황.
그나마 해외는 일부 강팀의 이름을 언급하기라도 했는데 북미는 다른 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S.솔리드의 우승을 외쳤다.
흐름이 이러하니 선수들 마음은 어떻겠는가.
말은 안 해도 다들 이미 우승 트로피를 손에 쥔 것 같은 기분으로 훈련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나가기만 하면 우승할 것 같은 월챔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만하면 진심을 들여다보기엔 충분한 질문이 아닐까 싶었다.
내 질문에 제레미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
해링턴 대표에게 다시 한 번 연락을 넣었다.
팀 생활을 하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연달아 대표를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대표를 만나러 간다고 하는 나를 브라이언 코치는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설마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싶었던 모양이다.
“걱정마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으, 응. 그래.”
코치를 안심시킨 뒤 약속장소로 향했다.
“계약 관련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서?”
“예.”
“혹시 마음이 바뀌었나?”
“그건 아닙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대표를 실망시킨 것 같아 왠지 조금 미안했다.
“선수들 남은 계약 말입니다. 빠르면 12월이죠?”
“그렇지. 월드챔피언십이 이번 달이면 끝나기 때문에 계약 연장을 그 뒤에 할까 싶어서 미루고 있었네만.”
“아니요. 저는 괜찮은데 다른 선수들은 지금 재계약 논의에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제레미와 있었던 일을 대표가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해 나갔다.
이건 자칫 잘못하면 내가 팀의 기둥을 뽑아가는 그림으로 비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으음.”
이야기를 듣던 대표는 신음을 흘렸다.
화를 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대표는 도리어 고맙단 인사를 했다.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네. 이 일을 또 누가 알고 있나.”
“아마 저랑 대표님. 그리고 제레미 밖에 모를 겁니다.”
“다른 선수들 의중도 모르는 상태고?”
“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수도 있겠다 싶어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 제레미 말고도 누군가 또 나를 따라오고 싶다고 하면 그건 정말 아찔한 일이었다.
S.솔리드 입장에선 핵폭탄을 맞게 되는 격이다.
“제레미의 가치는 자네가 없을 땐 물론이고 자네가 있더라도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맞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흔히 볼 수 없는 좋은 선수거든요.”
대표는 머리가 아픈 듯 끙 소릴 냈다.
내가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커다란 타격인데 제레미까지 얹으면 팀 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지금 당장 선수들과 재계약을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월드챔피언십을 빌미로 들면 혹시나 하던 선수들도 마음을 고칠 겁니다.”
“제레미 문제는?”
“결심이 확고하더군요. 만약 대표님이 원하시면 떠나더라도 같은 팀에서는 활동하지 않겠습니다.”
해링턴 대표가 원한다면 나는 제레미와 함께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설령 녀석이 S.솔리드를 떠나 한국으로 온다 해도 나와 같은 팀에서 뛸 수는 없을 터였다.
이 정도가 내가 대표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조금 있으면 자네는 우리 팀 소속이 아니게 되지.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네. 마음만 고맙게 받지. 다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하게 답해주길 바라네.”
“예.”
“이미 한국에 알아봐 둔 팀이 있나?”
“없습니다. 아마···2부 리그에서 시작할 것 같습니다.”
대표는 생각도 못했다는 반응이다.
“자네 같은 선수가 2부에서?”
“만들어보고 싶은 팀이 있는데 아무래도 기존 1부 팀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인 것 같아서요.”
“사실, 자네와 이야길 주고받는 팀이 몇 군데 정돈 있을 거라고 생각했네.”
2년 연속 팀 우승에 기여한 공로, 리그가 다르다고 해서 시각이 뿌리부터 바뀌는 건 아니다.
유니크의 기여도를 생각하면 다른 팀에서도 충분히 좋은 조건을 걸만 했다.
“사실 이런 일이 흔치는 않아. 프로는 돈이 말해주는 법이거든. 제레미도 이 일을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예.”
“가이아가 개인 능력이 중요한 게임인 건 사실이야. 그렇다 해도 우리가 제공하는 모든 걸 포기하면서까지 자네를 따라간다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거야. 심지어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더더욱.”
오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제레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 어려서 그런건지 몰라도 너무나도 쉽게 결정을 내리던 그 모습을 말이다.
어쩌면 대표님 생각보다 훨씬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모든 조건을 마다하고 허허벌판으로 떠나는 자네를 따라나선단 말이지.”
응? 조금 전에 대표님 눈속에서 불꽃을 본 것 같았는데?
제레미에게 화가 나셨나 싶어 걱정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 선수들 계약 문제는 빨리 처리하도록 하지. 식사 마저 들자고. 이 집 고기는 특별하거든. 한국에 돌아가면 맛볼 수 없을 테니 말이야.”
“옙.”
과연.
대표의 말대로 끝내주는 스테이크였다.
*
“경기가 마무리 됩니다! 리그의 마지막 시드권을 가져가는 팀은! 레드불스입니다!”
-잘한다 불스!
-이대로 월챔 우승까지 가자!
-Go! 불스!
잘하네.
마치 리그가 계속되는 것만 같은 열기, 팀에서 구해다 준 자리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게 오늘 훈련 일과였다.
육체 단련, 일대일 트레이닝, 실력을 늘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항상 몸을 굴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어떤 것 같아?”
“포스트 시즌하고 비교해도 실력이 늘었는데?”
제리는 뭔가 아쉬운 듯 자꾸 입맛을 다셨다.
이게 진짜 경기장이었으면 한 손엔 팝콘, 한손엔 탄산을 들고 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그런 기능은 도입되지 않았다.
“우리와 같이 훈련한 게 도움이 됐겠지.”
시드권을 따내고 팀원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비프로스트의 모습은 매우 기뻐 보였다.
다이나믹 G.C와의 결승전 준비를 위해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 역시 얻어간 게 적지 않아 보였다.
관중의 축복을 받는 쪽이 있으면 쓸쓸히 퇴장하는 쪽도 생기는 법.
블랙이글스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 우울한 얼굴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분명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을 텐데 세계대회로 가는 관문에서 일격을 당했으니 충격이 클법했다.
북미의 시드권 결정전 경기 관람을 마친 뒤엔 다른 메이저 대륙의 시드권 경기를 분석했다.
코치는 오늘 하루를 보는 데에만 쓸 생각인 듯했다.
양질의 경기는 보는 것만으로 영감을 준다.
팀원들은 양손에 간식을 들고 경기를 시청했다.
“쟤들 잘하네.”
“난 북미가 최강인 줄 알았는데.”
“어디가 제일 잘하는 것 같아?”
“한국? 중국도 꽤 괜찮고.”
“한국 잘하네. 올해 1년 차 맞아?”
경기를 전부 시청한 팀원들은 비슷한 의견을 냈다.
3시드 팀의 전투력은 북미가 분명 밀리고 있었다.
유럽과 중국은 비빌만 했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레드불스의 열세처럼 보였다.
“야. 그래도 불스 실력 많이 올랐잖아.”
“보는 거 하고 직접 하는 건 다르니까. 결과가 바뀔 수도 있지.”
다들 의견을 분주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을 때 코치의 호출이 들어왔다.
“한 명씩 부를 테니까 이름 부르면 프런트실로 가라.”
“뭐지?”
“재계약 같은데?”
“월챔 끝나고 할 줄 알았더니 지금 할 모양인가 보네.”
혹시나 분위기가 이상할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다들 호명에 따라 하나둘씩 존의 방으로 향했고 제레미는 잠자코 순서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왜 계속 내려가기만 하고 올라오는 애들이 없냐.”
“그러게?”
1층에 가서 사인을 끝냈으면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계단은 조용하기만 했다.
대신 식당 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분위기는 좋은 것 같았다.
웃음소리가 이따금 섞여들어 오는 걸 보면 말이다.
하나둘씩 팀원들이 빠져나갈 때 제레미에게 조용히 귀띔을 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잘 선택해. 네 인생, 내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내가 애야?”
애 맞지. 그럼 어른이냐···.
제레미까지 자릴 비우고, 가장 마지막으로 호출을 받은 건 나였다.
식당 쪽엔 이미 계약을 마친 팀원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했다.
프런트 실로 들어가자 존이 날보며 씩 웃었다.
“궁금하지?”
“뭐가요?”
“계약 어떻게 됐는지 말이야. 대표님에게서 얘기 들었다.”
“잘 풀렸나요?”
여기서 잘 풀렸다는 건 S.솔리드가 기존의 전력을 지켜냈는가를 뜻했다.
제레미는 과연 어떤 결정을 했을까.
혹시 추가로 전력이탈이 생긴 건 아닐까.
존의 표정을 보면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진 않았다.
“제레미를 제외하면 전원 재계약에 성공했어.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고.”
“제레미는 기어이 팀을 나가겠답니까?”
“어딜 가든 함께 할 생각이라던데.”
존의 손가락이 날 가리킨다.
“월드챔피언십 얘기는요?”
혹시라도 선수들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으면 월드챔피언십을 빌미로라도 팀에 주저앉히라고 조언했었다.
대회에 나가고 싶으면 재계약을 해야 한다?
S.솔리드의 월챔 우승 가능성은 어느 팀보다 높기에 선수들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월드챔피언십은 신경도 안 썼어.”
“정신 나간 녀석이에요.”
“한솔이 네가 할 소리야? 최고 대우를 해주는 팀을 떠나 한국으로 간다니. 그것도 2부부터 시작할 거라며.”
“그렇게 됐습니다.”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제시했어. 1군에 남는 선수들은 최소 100퍼센트 인상을 해주기로.”
“올해···기준인 거죠?”
“당연하지.”
확실히 파격적이었다.
올 시즌을 기준으로 내가 벌어들인 돈은 우승 옵션을 포함해 약 150만 달러.
만약 S.솔리드에 남아 팀을 한 번 더 우승시키면 300만 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한 번에 받는 셈이다.
“마음은 아직 그대로야? 생각을 바꾼다면 3배를 줄 수도 있어.”
세 배면 450만 달러다.
7년 동안 프로게이머를 하며 벌어들인 수입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이다.
괜히 팀을 떠난다고 했나 아주 조금 후회가 되긴 했지만 결정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돈은 먹고 살만큼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벌 거고요.”
“그렇게 말할 거 같더라.”
존은 내가 맘을 바꾸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는 눈치다.
그는 대신 이번 대회를 위한 옵션 계약을 제시했다.
월드챔피언십 우승을 따내면 기존에 지오에서 지급하는 우승상금 외에 따로 보너스로 200만 달러를 추가 지급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표님 통이 크시네요.”
“제레미 한테도 액수는 다르지만 같은 내용의 계약을 제시했어. 강력한 카드를 쓰지 않으면 우리만 손해니까.”
나는 잽싸게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존에게 건넸다.
계약서를 받아든 존은 내게 정중히 부탁했다.
“우승을 부탁한다.”
해링턴 대표는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했다.
그는 심각할 수 있는 여러 문제에서 싫은 티 한 번 낸 적 없었고 언제나 선수들에게 최선의 대우를 했다.
이젠 내가 보답할 차례였다.
“걱정 마세요. 반드시 가져다 드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