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1)
트레이닝 때문에 코치가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년 만에 개인 휴가 일정을 잡아뒀다는데 당장 코앞으로 세계 대회가 닥쳤으니 트레이닝이 아니었더라도 휴가는 취소될 운명이었다.
“보너스 받아서 더 호화로운 여행을 할 거다!”
코치는 입버릇처럼 보너스를 받겠단 의욕을 내비쳤다.
이런 분위기엔 감독까지 가세했는데 숙소를 오가는 인원 중 그 누구도 S.솔리드의 우승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과거, 여러 팀을 전전했지만 이렇게 윗선부터 우승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면 선수들이 신경을 쓰기 마련인데 우리 팀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역시 원라이프가 경계 대상 1호인가.’
1회 한국 프로리그에선 예상대로 원라이프가 우승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시즌 초반엔 VT스타즈에게 살짝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어이 약점을 보완하더니 우승에 성공한 것이다.
시드권을 차지한 원라이프와 VT스타즈는 S.솔리드도 방심할 수 없는 팀이었다.
특히 원라이프의 기세가 무서웠는데 선수에게 필요한 장비와 스킬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 눈에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컨트롤은 우리가 좀 더 나은 것 같은데.
1년 일찍 프로 생활을 시작한 북미, 그리고 좀 더 일찍 전신접속기 적응 시간을 가졌기에 컨트롤 실력은 S.솔리드가 다소 우위였다.
다만 컨트롤이 좋다는 게 선수 자체의 포텐이 더 높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번 월드챔피언십이 끝나고 비시즌 기간을 통해 담금질을 마치면 아주 무서워 질 거란 예감이 드는 선수가 몇 명 있었다.
VT스타즈의 이세준 같은 선수가 그런 경우였다.
향후 2~3년 간 꾸준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해줄 한국 무도가 클래스의 정점.
물론 제레미나 타우러스, 피케 같은 선수들이 즐비하게 쏟아져 나오는 시대가 됐기에 미래가 바뀔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설령 그런 유망주가 또 나온다 해서 이세준의 클래스가 낮아지는 건 아니었다.
선수들과 일대일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감독님의 호출이 들어왔다.
요즘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2군 팀을 봐달라는 주문이었다.
워낙 유망주로 구성했기 때문에 다들 자질이 상당한 선수였다.
북미 전역에서 최고의 인재들을 쉽게 뽑을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다른 팀 같았으면 의아할 일이다.
한창 세계대회 준비를 앞둔 1군 선수에게 2군 팀 훈련을 도와달라니.
이런 흐름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시합에 오르면 제 몫을 해줄 거란 믿음이 기반에 깔려 있었다.
“감독님. 폴이랑 카일 디펜스 더 봐줘야 하는 데요.”
“알지. 알아. 그런데 일단 2군도 잠깐 봐줘. 막말로 카일이나 폴은 월챔 엔트리 들기도 힘들잖아.”
아니, 감독이란 분이?
카일이나 폴이 들었으면 큰일 날 소릴 하시네.
비록 엔트리에 들진 못하지만 그 친구들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S.솔리드는 여타 외국팀과 다르게 훈련량이 제법 많은 편이고 따라오지 못한 선수는 코치가 옆에 붙어 계속 관리를 해주는 스타일이다.
훈련을 버티지 못하고 빈둥거린다?
그럼 쫓겨나거나 방치될 운명이니 시합 욕심이 있는 선수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 팀은 성적에 비해 로테이션도 잘 돌려주는 편이지 않은가.
결승전 무대야 반고정이라지만 적어도 시즌 중에, 승률 100퍼센트를 내는 나를 비롯해 모두가 로테이션 대상이 되는 팀은 전세계 어딜 가도 드문 편이었다.
이번에 2군에 뽑힌 선수들은 대체로 한두살은 더 어린 선수들이 많았는데 내가 훈련에 참여할 때면 날 바라보는 시선에서 부러워하는 기색을 느껴졌다.
북미리그 최고의 선수, 거액의 연봉, 대표와 관계자들의 신임을 독차지할 정도의 굳건한 입지.
이렇게 말하니 좀 재수 없는 것 같은데 프로 선수라면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조건이었다.
강도 높은 훈련, 리그에서 쓸법한 팁을 나누며 땀을 빼는데 프런트 호출이 들어왔다.
예전엔 프런트 업무를 존이 혼자 다 도맡아 했는데 최근엔 인력을 충원해 숙소 1층은 평소에도 제법 부산한 느낌이었다.
문을 두드리니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에요?”
“훈련하고 왔다면서. 숨 좀 돌리게 마실 것 좀 줄까?”
“아뇨. 방금 냉장고에서 마셨습니다.”
무슨 이야길 할까 궁금해하고 있을 때 뜸을 들이던 존이 입을 열었다.
“대표님과 처음에 얘기를 나눌 때 했던 계약 말이다. 올해를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간단 뜻엔 변함없니?”
“예.”
“문제가 좀 생겼다.”
“문제요?”
혹시 계약 연장 얘길 꺼내려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솔이 네가 올해까지만 뛰는 걸 감독이 알게됐다.”
“예? 어떻게요?”
감독이 계약서를 확인할 사안이 있어 지원이 캐비넷 키를 넘겨줬는데 하필 그때 존이 자리를 비운 때였던 모양이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팀은 액수뿐만 선수마다 계약 조건이 전부 달라. 그중에서도···.”
“제 계약이 제일 특이하겠죠.”
“감독이 화가 좀 났다는 모양이야.”
계약 건에 대해선 최근까지도 해링턴 대표가 아무 말이 없기에 별말 없이 이대로 시즌이 끝나겠구나 싶었다.
팀 사기를 생각해서라도 떠나는 걸 끝까지 비밀로 부탁하지 않았던가.
만약 잡음이 생긴다면 적어도 월드챔피언십이 끝난 이후여야 했다.
“혹시 문제가 될까요?”
“문제는 이미 생겼을 것 같다. 한 시간 전에 코치와 분석팀 선수들 모두를 호출했거든.”
“웁스.”
감독이 쓸데없이 숙소 내 모든 사람을 불러 모을 일이 있을까.
프런트에서 화를 내고 나간 뒤에 집합을 시켰으니 무슨 말을 했을진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99퍼센트 내 이야기일 확률이 높았다.
“이런 일이 생기게 해서 미안하다. 나 혼자 업무를 담당했을 땐 이런 일이 없었는데···.”
“어쩔 수 없죠. 지나간 일인데요.”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게 조율해보마.”
말은 하지만 그도 자신 없는 눈치였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팀의 에이스가 떠난단 사실을 감독이 알았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존과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팀 분위기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연습실로 돌아갔을 때, 감독은 직접 팀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코치에게 전담했을 일이었다.
곁에 서서 훈련을 지켜보던 코치는 나를 보고선 손짓했다.
“2군 들렀다 오는 길이냐?”
“네.”
“피곤할 텐데 일단 좀 쉬어.”
“저 괜찮은데요?”
“그냥 잔말 말고 의자에 앉아 있도록 해.”
평소와 다른 무미건조한 목소리.
힘들어서 배려해주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훈련 배제 쪽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세계 대회를 앞둔 시점에 코치가 팀의 에이스를 훈련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한다?
어떻게 생각해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습실을 나가려는데 감독이 나를 불렀다.
“어디 가?”
“휴식이라길래 씻고 오려고요.”
“아직 훈련 끝난 거 아니다. 그냥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어.”
“예···?”
휴식을 취할 땐 간섭하지 않는다.
선수가 간식을 먹든, 씻고 낮잠을 자든, 휴식 시간은 오롯이 선수 개인의 것이다.
내가 유별난 게 아니고 지난 2년 동안 S.솔리드는 그렇게 훈련해왔다.
훈련할 땐 하고, 남는 시간은 알아서 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쉬라더니 의자에 앉아서 다른 팀원들 훈련을 지켜보라고 강요를 한다.
이건 누가 봐도 맥이겠단 뜻 아닌가.
난 그렇게 꼬박 2시간을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고 훈련을 마치고 나온 팀원들은 당황한 눈칠 보이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훈련 끝났으면 다들 가서 씻고 쉬어.”
하루아침에 팀 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 됐다.
“뭐해. 훈련 끝났는데 가서 쉬지 않고.”
누가 보더라도 이건 사람 하나 바보 만들기가 분명했다.
기분이 나빴어도 그렇지.
대표가 직접 함구해달라고 한 사안에 대해 왜 떠벌이고 나선단 말인가.
내 계약기간은 처음부터 최대 2년, 이걸 지키겠다는 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리라.
계약 기간을 비밀로 한 것에 관해 감독과 코치가 상처받을 수도 있단 점은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팀의 에이스다.
에이스가 이번 대회를 끝으로 팀을 떠나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허탈할 수 있다.
이번 해프닝도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하면 이해 못 해줄 건 아니다.
문제는 이번 일이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단 점에 있었다.
내 계약 기간을 감독과 코치가 알았고 팀원들도 알았다.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떠난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사람도 있을 터였다.
감독과 코치까지만 알고 있는 선에서 멈췄다면 까짓거 한 달 정도 못 참아줄 것도 아니었다.
월드챔피언십은 나뿐만 아니라 팀원들에게도 매우 소중한 기회.
괜히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팀 케미가 삐걱대면 S.솔리드의 경기력이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오후 훈련 시간, 팀원들의 시선은 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 활발하던 제리는 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고 몸은 힘들어도 웃음이 끊이질 않던 연습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는지 결국 훈련이 끝났을 때 제리가 할 말이 있다며 날 조용히 불러냈다.
“사실이야? 월드챔피언십 끝나면 떠난다는 거.”
난 대답 대신 고갤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왜 말 안 했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약속이었어. 누가 알아도 좋을 게 없는 이야기잖아.”
“그래도 우리한텐 얘기해줬어야지! 너도 그 녀석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릴 참이었어?”
‘그녀석’은 오래전 소리 없이 사라졌던 사이클론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떠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최소한 떠나기 전 인사는 할 참이었다.
“아니야. 대회 끝나면 말하려고 했어.”
“하, 진짜 섭섭하다. 처음부터 기간이 정해져 있다곤 하지만 같이 생활하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 그런데도 한국으로 꼭 가고 싶어? 이유가 뭔데?”
“난 한국 사람이야. 자국 리그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이상한 건 아니잖아.”
“나 혼자 생각해봤거든? 나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해외에서 뛰다가 북미에 리그가 생기면 돌아오고 싶기도 하겠지. 내가 섭섭한 건, 아니 우리가 섭섭한 건 네가 끝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단 사실이야.”
그리 말한 제리는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고개를 내밀고 대화를 엿듣고 있는 케빈의 모습이 보였다.
다 들킨 마당에 더 숨을 생각이 없던 케빈은 제리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래. 갈 때 가더라도 말은 해야지. 비밀로 한 건 심했어.”
“미리 말을 못해서 미안하긴 한데 말했으면 지금 같은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을걸.”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도 몰라.”
“감독님이 그러는데 네가 우릴 출세에 일방적으로 이용한 거라더라. 몸값 올리려고.”
이건 무슨 헛소리야.
계약을 맺을 당시만 해도 한국엔 리그도 없었다.
“물론 나는 감독님 피해망상이라고 봐. 떠나려면 작년에 떠날 수도 있었잖아. 한국도 리그는 작년부터 생겼으니까.”
“시즌 끝나고 더원도 바로 한국으로 떴지? 그때 갔으면 지금쯤 더원이랑 같은 팀 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나였으면 그때 갔다.”
제리와 케빈.
이 친구들은 서운한 감정은 있을지언정 나를 미워하진 않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좀 미안하기도 했다.
실제로 월드챔피언십 우승까지 염두에 두고서 게임을 했던 건 사실이니까.
S.솔리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건 부모님을 설득시키기 위한 이유가 컸다.
학업 중단과 동시에 더욱 일찍 프로 생활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던 시기다.
그래. 이용한 건 그렇다고 하자.
그래도 일방적이란 표현은 많이 거슬렸다.
그간의 활약으로 팀에 얼마나 많은 이익을 안겨다 줬던가.
자랑이 아니라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승률 100퍼센트를 찍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밥값 그 이상을 한 셈이다.
당시 계약은 나와 팀, 모두에게 득이 되는 거래였다.
이제 와서 일방적으로 이용했다느니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있었다.
“연습실 분위기도 헬이고. 이거 우리가 얘기한다고 될 게 아니야.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한단 말야. 차라리 대표님 찬스 써 봐.”
“너 없어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고 말한다니까. 이대로 가면 너 엔트리에도 못 들지 몰라.”
“너흰 괜찮아?”
“우리? 우리가 왜. 솔직히 이번 시즌 끝나고 떠나는 거 비밀로 한 건 좀 섭섭했지. 근데 계속 꽁해 있을 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너한테 받은 거 많아. 날 불러준 것도 너고.”
케빈은 본래 S.솔리드 영입 명단에 없던 친구다.
최고의 팀을 만들고자 그들을 추천한 건 나였고 그 사실은 케빈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뭐야. 나는 왜 추천 못 받았어?”
“넌 원래 영입 명단에 있었잖아. 바보냐···?”
아쉬워하는 제리에게 케빈이 핀잔을 준다.
“다른 팀원들은 뭐래?”
조심스레 팀원들 생각을 묻자 제리와 케빈이 입을 다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다 좋진 않아.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시간 지나면 걔들도 풀릴 거야.”
에둘러 말하긴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포스트 시즌과 마찬가지로 팀전 비중이 가중되는 월챔에선 팀의 화합이 중요한데 팀 내에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제리와 케빈 뿐인 모양이었다.
해링턴 대표에게 SOS를 칠까 생각해봤지만 일단 상황을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제리 말대로 선수들만이라도 다시 뭉칠 수 있다면 아직 버스를 놓친 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