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인가 방패인가 (5)
S.솔리드의 진격.
성난 코뿔소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이걸 혼자서 어떻게 막아!’
혼자서 막을 수준이 아니란 걸 깨달은 엘레멘탈 마스터는 망설임 없이 뒤로 빠지는 선택을 했다.
이곳을 사수하지 못하면 저 괴물 같은 녀석이 다시 되살아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부 죽어 피케 혼자 4:1을 감당하게 하는 것보단 잠시 물러나 4:3을 노리는 게 낫지 않겠는가.
‘점수는 많이 땄어. 시간을 벌면 해볼 만 해.’
엘마는 하이프리스트를 호위하며 물러났다.
제리가 마법을 퍼부어대는 판국이라 후퇴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거의 기세만으로 상대를 몰아낸 S.솔리드는 곧바로 유니크가 쓰러진 자리 위에서 부활을 준비했다.
케빈의 손끝에 영롱한 빛이 모여들기 무섭게 회색으로 변해있던 초상화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유니크가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니크의 첫 패배는 아직인 모양입니다. 승부의 향방은 다시 안갯속으로 향합니다.”
케빈이 내민 손을 잡으며 일어난 유니크는 다급히 말했다.
“저 녀석들, 피케하고 합류하기 전에 잡자.”
부활 스킬로 인원수의 우세를 점했지만 방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초반에 다이나믹이 거점을 수월하게 가져간 탓에 자칫 네 명을 전부 쓰러트리고도 게임을 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었다.
함께 움직이며 뒤를 쫓는데 다이나믹 선수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다 따라잡은 유니크는 열양지를 냅다 갈겼는데 모퉁이 뒤로 휘어져 들어간 열양지가 따닥 하고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같이 쫓던 제리도 걸음을 멈춰 서서 주의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지?”
“건물 안에 피케가 있는 것 같은데.”
피케는 아크나이트, 방패로 열양지를 막아낸 게 틀림없었다.
짧은 순간, 유니크는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이대로 건물 안으로 몰려가 싸우는 그림을 상상했다.
난전을 펼쳐 승리를 따내지만 총점이 밀려 패배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예측에 불과하지만 이대로 싸우면 이번 판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이 섰다.
“데니스. 지금 당장 중앙으로 가서 거점을 점령해 줘. 아무도 없을 거야.”
“내가 중앙으로 가라고?”
“시간 없어! 빨리!”
“알았어.”
워낙 다급해 보였기에 데니스는 군말 없이 중앙으로 달려갔고 제리가 의문을 표했다.
“남은 시간 생각하면 데니스는 다시 못 돌아올 텐데?”
“알아.”
“네가 갔으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잖아?”
“그럼 남은 세 명을 잡을 시간이 부족하겠지.”
데니스를 보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승리로 가기 위해선 중앙의 거점을 다시 따냄과 동시에 상대 셋의 목을 치는 게 가장 확실했다.
“3대 3을 해야 하는데 데니스가 가는 게 가장 낫잖아?”
지금 녀석들이 들어간 저 건물은 통로가 제법 좁은 편이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처음부터 예상해둔 장소인 게 틀림없었다.
싸움이 혼전으로 치달으면 굳이 근접 둘이 통로를 차지하는 것보단 원거리 딜러인 제리와 함께하는 게 유리했다.
“가자.”
S.솔리드는 제리의 마법을 시작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상대를 찾기 바쁜데 위쪽에서 마법이 날아들었다.
“조심해!”
“억!”
운룡비형으로 간신히 피해내는데 살짝 말려 들어간 제리의 체력이 무섭게 깎여나갔다.
살벌한 위력, 제리는 십년감수 했단 얼굴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버프 때문에 위력이 크게 불었어.”
상대의 조합은 아크나이트 피케를 필두로 엘레멘탈 마스터와 하이프리스트.
피케를 제외하면 전부 버프를 줄 수 있는 클래스였다.
반면 이쪽은 개인 난전엔 강하지만 시너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 연습했던 상황이잖아? 차근차근 공략하면 기회가 올 거야.”
비프로스트를 데려와 연습할 당시, 아크나이트를 중심으로 두 명의 버퍼가 밀어주는 전략은 이미 연습 때 수차례 경험했던 바다.
건물 내부는 가운데가 뚫려 있고 외곽으로 통로가 둘린 구조, 제리의 체력이 다시 회복되자 유니크가 빠른 움직임으로 시선을 끌었다.
“움직인다! 못 올라오게 해!”
다시 날아드는 마법의 포화, 그러나 이번엔 제리가 빨랐다.
빠른 뇌격으로 마법을 커트하는 틈을 타 유니크가 날 듯 지면을 박차며 2층에 올라섰다.
‘아까 기습은 훌륭했다. 그러니 이번엔 내 차례야!’
버프를 받고 정면을 지키는 아크나이트.
유니크는 눈을 빛내며 피케에게 달려들었다.
상대 엘레멘탈 마스터가 지팡이를 내밀어 협공하려는 걸 제리가 견제했다.
아래서 대량의 마법이 솟구쳐 올라오니 상대도 유니크에게만 집중할 순 없었다.
첫 인사는 용의 충격이었다.
옆구리를 박살 낼 기세로 자세를 낮춰 훅을 돌리자 피케의 검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헤이스트를 비롯해 버프를 두르고 있는 터라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첫 번째 공격은 페이크였다.
손을 거둬들인 유니크가 그대로 몸을 기울이며 묵직한 하이킥을 꽂았을 때, 피케의 방패가 크게 흔들렸다.
‘반응 좋고!’
못 막을 줄 알았는데 두 번째 공격 역시 받아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피케는 한국에서도 탑클래스로 꼽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재목이었다.
교룡뇌조와 용의 충격이 번갈아 터지며 시선을 빼앗는 사이 날카로운 발차기를 엇박자로 집어넣었다.
피케의 몸을 둘러싼 갑옷에서 콩 볶는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
자질은 분명 세계 탑클래스 레벨이었지만 경험치가 모자랐다.
만약 피케가 3년 차쯤 됐더라면 이런 고속의 공방을 어렵지 않게 주고받았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유니크를 만나기 전까지 피케는 이런 고속 공방전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북미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통틀어봐도 공수 전환이 이렇게 빠른 선수는 유니크가 유일했다.
양손과 발까지 이용해가며 공방이 오가자 피케의 체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피케도 이따금 공격을 성공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케빈의 힐이 유니크의 체력을 도로 채웠다.
잔뜩 힘을 주고 쌍장을 펼친 유니크의 손에서 항마장이 방출돼 좁은 통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리에게 전음이 날아들었다.
<지금!>
1층에 있던 제리의 몸이 불길에 둘러싸여 솟구치는 순간 S.솔리드의 팬들이 주먹을 번쩍 쥐며 소리쳤다.
순간 화력으론 정점에 섰다 해도 무방한 아크위자드의 비기, 드래곤 웨이브.
불의용으로 변한 제리가 그대로 2층 플로어를 들이받았다.
기둥이며 외벽이 그대로 터져나갔고 건물은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쿠르릉-
붕괴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고층 건물이 무너지며 쏟아지는 콘크리트의 압력은 랭커의 스킬데미지를 아득히 상회했다.
유니크는 케빈을 붙잡아 창밖으로 내던지는 한편 다이나믹의 상태를 살폈다.
빈사 상태이긴 하지만 세 명 모두 숨은 붙어 있었다.
피케의 방패가 마법의 위력을 상당 부분 반감시킨 탓이다.
“빠져나가!”
피케는 소리 치며 제리가 뚫고 나간 벽을 향해 탈출을 시도했다.
곧 있으면 팀전 제한 시간인 10분이 끝나는 상황, 이대로 몸만 빠져나가 힐 쿨을 돌리면 이번 판은 다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 당연하게도.
이 건물에 남아있는 솔리드의 괴물은 이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망할!”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엘레멘탈 마스터는 코앞을 스치는 열양지에 뒤로 물러나야 했다.
만약 한 발짝만 더 나갔다면 골통이 뚫렸을 터였다.
쿠구구구-
건물이 무너지며 내는 굉음, 콘크리트 더미의 잔재.
이 어지러운 광경 속에서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무도가를 찾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이대로 건물에 파묻히면 게임은 패배.
궁지에 몰린 피케가 방패를 들고 길을 뚫는데 강렬한 뇌격이 머리를 때렸다.
“큭!”
아무리 S급 재능을 갖춘 피케라 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드는 공격엔 어쩔 수 없었다.
5초 남짓한 짧은 시간, 피케와 엘레멘탈 마스터는 동시에 강공을 쏟아냈지만 기어이 유니크는 통로를 막아내며 다이나믹 G.C 전원의 발을 묶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마지막 유니크의 움직임은 경기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움직임.
마치 힘을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무자비한 공격으로 다이나믹 G.C를 두들긴 유니크를 두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날 무신(武神)의 창이 유니크의 몸을 빌려 나타났다고.
***
시즌이 끝났다.
e스포츠와 관련된 곳은 어딜 가나 S.솔리드의 2회 연속 우승을 다루는 기사로 가득했다.
인터뷰 요청은 어찌나 많던지.
시즌 후의 일정을 알고 싶어하는 문의 전화도 엄청나게 쏟아졌다.
리그 일정도 끝났으니 시간 좀 내달라는 요구였다.
나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하는 곳이 생각보다 많았다.
본의 아니게 나의 인지도를 올려줬던 AFC에선 빅게임을 제안하기도 했다.
챔피언과 함께하는 이벤트 매치라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헐리웃에서도 나를 찾는 수요가 있었다.
까메오 수준을 넘어선 제법 분량 있는 단역이라고 했다.
무술을 익힌 동양의 신비한 청년, 초능력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 등등···.
당연히 거절했다.
일단 시간이 많아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곧바로 가이아에서 대대적으로 기사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1회 월드챔피언십 개막!
전세계 프로팀을 한자리에 모아 진정한 최강팀을 가리는 축제.
내년 5월까지 대체 뭐하고 기다리나 싶던 프로리그 팬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우리 1시드래!”
“당연히 1시드지. 2회 우승팀한테 1번 시드를 안 주면 누구한테 줘?”
가이아 프로리그를 운영하는 국가는 여럿, 그중에서도 메이저라 불리는 곳은 총 네군데.
북미, 유럽, 한국, 중국.
이 네 곳은 모두 열 개의 프로팀을 갖춘 지역이며 다른 지역에 비해 체계적으로 리그가 정착된 곳이다.
하지만 꼭 메이저 지역에만 프로팀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세아니아, 남미, 동남아 지역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프로 선수들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선수가 많아지면 당연히 팀도 늘어나는 법.
S.솔리드가 받은 시드권은 이 수많은 팀 속에서 곧장 본선으로 직행하는 기회였다.
열여섯 개 팀이 모여 치르는 조별리그에 직행할 수 있는 특권.
시드권 팀을 제외하면 남은 본선 자리는 여덟자리, 이 자릴 두고 수많은 팀들이 험난한 예선을 치러야 했다.
“올해 11월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는 초회 월드 챔피언십 상금 규모는 총 4천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밝혀졌으며···4천만이라는데?”
“4천만!”
“한솔 님. 부탁합니다. 우릴 우승으로!”
팀원들은 기사를 보며 한껏 기대에 차오른 모습이었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팀 내에서 가장 많은 보너스를 받는 나의 경우, 우승 옵션으로 주어지는 금액이 대략 100만 달러에 이른다.
물론 100만 달러를 받는 선수는 팀 내에서 내가 유일하다.
그리고 가이아가 직접 주는 리그 상금은 대표님이 나눠주는 보너스보다도 훨씬 적은 편이다.
기껏해야 한 사람 앞에 1만 달러쯤이나 돌아갈까?
그에 비하면 월드챔피언십의 상금 규모는 엄청나다 할 수 있는 수준.
우승팀에게 주어지는 1200만 달러의 상금이면 n분의 1로 나눠도 100만 달러씩 받는 셈이다.
프로로서 가장 큰 동기를 연봉으로 꼽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이 정도면 제대로 한판 벌일 수 있는 무대였다.
“누가 보면 트로피 맡겨놓은 줄 알겠다. 다들 우승은 자신 있고?”
브라이언 코치가 말했다.
시드권을 받았어도 우승까진 쉽지 않은 길.
조별리그를 최소 2위 내로 뚫고 8강부터 시작하는 토너먼트를 전부 이기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다들 뭐가 걱정이냐는 얼굴이다.
“무신!”
“무신!”
“됐어.”
“무신!”
“그만해···.”
무신을 연호하는 팀원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희 다른 지역 경기는 본 적 있어?”
“다른 지역 경기? 너 그런 것도 챙겨봐?”
“니들은 한솔이 좀 본받아야 해.”
“코치님도 다른 지역 모니터링을 하셨다고요?”
“나, 나는 당연히 했지!”
“에이. 거짓말.”
“일로 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제리와 코치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미 팀원들 머릿속은 우승 상금을 어떻게 쓸까 하고 꽃밭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정신 바싹 차려야 해. 다른 메이저 지역 시드권 팀 중에 우리가 만만히 볼 팀은 하나도 없어. 특히 한국은 경계대상 1호고.”
“으음. 그 정도야?”
최근 S.솔리드의 분위기는 밝고 유쾌함 그 자체였다.
2회 우승, 북미 최고 팀의 자릴 굳건하게 지켜냈으니 다들 풀어지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월드 챔피언십 우승을 목표로 한다면 안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힘내보자.’
월드 챔피언십은 그 자체로 명예로운 무대이기도 하지만 내겐 이겨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모르지만 이번 월챔은 S.솔리드에서 치르는 마지막 대회였다.
2년간 함께해 온 팀원들과 같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자. 그럼 다들 목표는 월챔 우승 맞지?”
“당연하지!”
“세계대회 우승!”
“무신!”
“다들 주목! 오늘부터 월드챔피언십 우승을 대비한 스페셜 트레이닝 시작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오늘부터?”
“···스페셜 트레이닝?”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급격히 사그라든다.
“결승전 끝난 지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이틀이면 충분한 휴식이었으리라 믿습니다.”
“독한 놈!”
5개월 동안 훈련, 훈련, 훈련.
훈련을 입과 몸에 달고 살았던 선수들이다.
격한 반응을 보이는 팀원들을 잠시 뒤로 한 채 코치의 허락을 구했다.
리더라고 모든 걸 맘대로 주물러선 안 되는 법.
이럴 땐 감독님, 코치님의 이름을 내세우는 게 최고다.
“코치님은 이해하시죠? 다른 것도 아니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일 아닙니까. 하루라도 빨리 훈련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다. 이 악마야!”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코치님!”
“······.”
잠시 말이 없던 코치는 결국 우울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얼마 남지 않은 대회 연습을 위해 훈련하겠다는데 말릴 명분이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예약해둔 하와이행 티켓은 취소해야 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