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인가 방패인가 (4)
자칫 수그러들 뻔했던 S.솔리드의 기세는 내 활약으로 완벽히 되살아났다.
3라운드에선 운도 따라줬다.
맵 상성을 비교적 덜 타는 편인 제레미를 다음 경기에 내보냈는데 십만 대산이 나왔다.
십만 대산은 기동력이 뛰어난 암살계가 가장 선호하는 전장, 제레미의 승리는 시작부터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세를 몰아 4라운드, 정령의 화산에서 제리가 승리를 가져오며 스코어는 3:1로 접어들었다.
분위기 좋던 다이나믹 벤치는 순식간에 초상집으로 변했고 경기장은 솔리드의 이름을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드디어 게임이 5라운드로 접어듭니다.”
“S.솔리드를 상대로 경기하는 게 이렇게 힘듭니다. 벌써 매치포인트예요. 지금 다이나믹 G.C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할 겁니다.”
-이렇게 무너질 수 없다! 힘내!
-응~ 아니야. 끝났어.
-마지막 게임 ㄱ다.
-어.우.솔!
-솔리드으!
-솔리드!
일부 팬들이 다이나믹의 이름을 외쳐보지만 솔리드에 비하면 속삭이는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브라이언 코치는 상대 벤치를 슬쩍 보더니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띄웠다.
타 팀 에이스까지 불러가며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던가.
사전 인터뷰에서 비프로스트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지만 연습을 끝낼 당시 그는 우리 팀의 승리를 자신하는 눈치였다.
“이정도 연습했는데 S.솔리드가 진다는 건 상상도 못 하겠군요.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비프로스트가 누구인가.
최근 피케가 주가를 올리고 있긴 하지만 북미 최고의 실드나이트중 한 명이며 아크나이트까지 두루 섭렵한 재능러다.
그런 그가 절대적 신뢰를 보인 것이다.
“더 말해줄 건 없고 준비한 만큼만 하자. 그럼 이긴다.”
팀원들은 코치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단숨에 끝내버리자!”
“예!”
"하나, 둘, 셋!“
“S.솔리드!”
“GO!”
모여있던 손들이 번쩍 올라가며 5라운드의 시작을 알렸다.
*
스코어 3:1.
어쩌면 이 한판으로 승부가 끝날 수도 있는 상황.
운명의 전장으로 선택된 건 환영도시였다.
“하필.”
데니스가 커다란 빌딩 숲을 보며 중얼거렸다.
환영도시는 가이아의 여러 전장 중 유일한 대규모 맵이다.
게다가 높은 건물이 많아 저격 포인트가 사방에 널려 있는 맵, 다크레인저를 위주로 디펜스 운영을 하는 다이나믹에게 조금 더 웃어주는 상황이었다.
“준비는 다 끝냈잖아?”
“그건 그렇지.”
우리 팀은 가상의 디펜스 조합을 상대로 모든 맵에서 훈련을 진행했다.
환영도시나 원신의 수림처럼 장애물이 많은 맵이 다이나믹에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극복하지 못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그럼 먼저 간다.”
S.솔리드의 디펜스 조합 공략법은 염탐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일 발이 빠른 내가 은밀하게 움직여 적을 발견,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는 전략이다.
제리와 데니스, 케빈을 뒤로 하고 거점 중앙을 향해 달려나갔다.
환영도시의 중앙엔 점수를 자동으로 올려주는 거점 지역이 존재한다.
여길 선점해두면 전투 없이 이기는 게 가능하기에 환영도시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중앙은 문제 없고.’
중앙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건물로 올라가 주변을 훑었다.
아직 거점은 작은 변화 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진즉 달려가 거점을 활성화 시켰을 텐데 이번엔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수년 간의 프로 생활로 다져진 촉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 조용할 리가 없는데.
내가 좀 더 빠른 건 사실이지만 상대 다크레인저의 속도도 만만찮았다.
진작 저쪽도 근처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데 파티원 상태창에 변화가 있었다.
데니스의 체력이 줄어든 것이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어도 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어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럴 땐 팀원을 믿고 강행돌파 하는 게 최선이기에 난 곧장 1층으로 내려가 중앙으로 뛰었다.
팀원들이 공격받고 있으니 거점이라도 점령해둬야 후반 포인트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거점 점령으로 점수를 얻는 건 적의 체력을 빼앗는 것과 같은 효과.
점령을 위해 중앙의 원으로 올라서려는 순간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전신을 관통했다.
‘제기랄.’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검이 불쑥 튀어나와 전신을 베는 게 아닌가.
19세 게임이었으면 피가 사방에 튈 정도로 깊은 공격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일 났구나.
그다음에 든 생각은 더럽게 아프다였다.
실제와 같은 고통은 아니라지만 실제로 베이거나 활에 쏘일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복잡한 궤적을 그리며 휘어지는 검 끝은 바로 연계공격으로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날아든 강공, 곧바로 이어지는 연계는 물이 흐르듯 매끄러웠다.
다른 선수였다면 여기서 집중력을 잃고 무너졌으리라.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은 선수가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지기엔 지난 세월 동안 내가 쌓아올린 고통의 탑이 너무 높았다.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교룡뇌조로 받아치며 발을 내밀었다.
드래곤 테일이 상대 허벅지를 정확히 찍어누르자 반응이 있었다.
너도 아프지?
은신의 장막이 걷히고 검만 달랑 내밀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어떻게 막았나 싶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정체는 다이나믹 G.C의 기둥, 피케였다.
투명화 마법을 얻은 거였어!
적의 시야에서 모습을 완전히 감추는 절대 은신은 PVP 스킬 티어에서 최상단을 차지한다.
그런 좋은 스킬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클래스에 따라선 아예 연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
피케 같은 아크나이트 클래스는 그림자 서곡 같은 특수 장비를 쓰지 않고서야 은신을 쓸 수 없는 클래스다.
물론 장비의 도움은 아니었다.
A급 신발인 그림자 서곡도 은신 시간이 고작 3초다.
피케는 훨씬 더 긴 시간을 이곳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스킬이 내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다.
인비저블 스펠.
타인에게 투명화 마법을 걸어줄 수 있는 엘레멘탈 마스터의 전설급 스킬이다.
다이나믹의 엘마가 강력한 스킬을 손에 넣은 게 틀림없었다.
홀로 몸을 숨기는 그림자 발자국도 엄청난 대접을 받는데 팀원에게 투명화를 시전하는 인비저블 스펠은 어떻겠는가.
시너지를 고려하면 PVP에서 가장 압도적인 스킬이라 할 만했다.
‘이걸 어떻게 피하지?’
‘내가 짬이 얼만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며 재빨리 거릴 벌렸다.
피 대신 하얀 빛가루를 흩뿌리는 날 바라보는 피케의 눈빛은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그럼 내 것도 받아봐라!’
자세를 낮추며 달려들 듯하자 피케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빠졌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는 거리를 벌려 운룡비형으로 유유히 중앙지역을 이탈했다.
눈앞에서 나를 놓친 피케의 표정은 벙찐 얼굴이었다.
내가 왜 싸워줘?
서로 동등한 상태에서 치고 받았다면 모를까 기습으로 체력이 절반 넘게 깎인 상태에선 케빈에게 합류해 체력을 채우는 게 베스트였다.
강화된 운룡비형으로 쭉쭉 미끄러져 나가는데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빛줄기와 함께 건물을 점하고 사격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저쪽! 위!”
나를 발견한 제리가 데니스의 방패 뒤에 웅크리고 건물 위를 가리켰다.
아마 상대 다크레인저가 틀림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건물을 갈아차며 공중을 날 듯 튀어 올랐다.
그야말로 하늘을 날 듯한 움직임이었다.
*
“S.솔리드 처음으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오버다이스 선수가 계속해서 건물을 점하고 공격을 때려 넣고 있습니다.”
“피할수도 없어요. 모퉁이를 끼고 방어해도 화살의 궤적이 꺾여 들어옵니다.”
“심지어 유니크 선수마저 큰 피해를 보고 물러섰습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피케 선수가 중앙지역을 점령하는군요.”
-이거···지는 거 아냐?
-믿음이 부족하다!
-믿, 믿음이 흔들려;;
S.솔리드 팀전 역사상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린 적은 처음이었다.
믿었던 유니크마저 중앙을 점령하지 못하고 피케에게 밀려 도주했다.
거점을 내준 이후로 양 팀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지는 상황.
S.솔리드 팬들은 불안한 마음에 더 힘차게 깃발을 흔들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니크는 오버다이스가 저격중인 건물로 진입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미끄럼틀을 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건물을 오르던 그가 목표물을 발견한 순간 열양지를 뿜어냈다.
쾅!
손가락 굵기만 한 열양지를 화살로 맞춰내는 상대의 실력도 대단했다.
오버다이스는 다크레인저답게 연막을 뿌리며 시선을 교란, 독이 발린 화살을 대거 쏘아냈다.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는 유니크의 손놀림엔 왠지 모를 짜증이 담겨 있었다.
멘탈이 강하다고 해서 아예 감정이 없는 로봇이 되는 건 아니다.
예상치 못한 피케의 기습, 쉬이 풀리지 않는 게임 양상은 괴물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운룡비형을 타고 오버다이스의 목을 치려던 유니크는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화끈함에 눈을 부릅뜨며 뒤로 빠졌다.
연기가 가득한 플로어에 거미줄처럼 얇은 강사가 펼쳐져 있었다.
거미지옥.
이 건물 자체가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 설계한 다크레인저의 전장이었다.
파바바밧-
여기서 멈춰 설 거라고 예상했다는 듯 화살비가 복도를 쓸었다.
“유니크 선수! 체력이 30퍼센트 아래로 떨어집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실제로 위기였다.
연막 속에서 꿈틀이는 무언가가 가공할 기세로 뻗어왔다.
정타로 맞으면 남은 체력이 대번에 날아갈 위력이 담겨있는 강공.
-와아아아!“
경기장을 들썩이는 만드는 환호성이 터졌다.
몸을 둘로 나눈 유니크가 상대의 일격을 넘기더니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괴물 같은 놈!’
악귀 같은 얼굴을 하고 달려드는 유니크를 보며 소름이 돋은 오버다이스는 주저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냥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최대한 멀리, 허공으로 날 듯 벽을 박찬 것이다.
-뭐지?
-자살이야?
고층 건물에서의 낙하, 지상으로부터 50미터도 넘는 높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리 방어력이 높아도 몸이 버티질 못한다.
그러나 오버다이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미 뛰어내린 쪽 아래로 아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레멘탈 마스터, 피케에게 은신을 걸어줬던 그가 이번엔 부유마법으로 자신을 살려줄 터였다.
건물로 유인해 적을 한 명 자르고, 작전에 실패할 경우 부유마법을 믿고 뛰어내린다.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고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체력 바는 이제 다이나믹의 확실한 우세, 싱글벙글하던 오버다이스는 저 아래서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팀원을 발견했다.
“뒤!”
“뭐?”
“뒤! 뒤!”
섬뜩한 느낌에 고개를 돌리자 유니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같이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이걸 쫓아와?’
반격하기엔 간격이 너무 좁았다.
화살을 겨누려는 오버다이스의 손을 꾹 눌러 제압한 유니크는 남은 손으로 용의 충격을 때렸다.
“켁.”
‘엄살은.’
첫 시작지는 얼굴이었다.
지면에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유니크는 손을 멈추지 않았고 이내 둘은 쿵소리와 함께 지면과 진한 키스를 했다.
*
삐이이익-
죽음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유니크, 오버다이스의 초상화가 회색으로 칠해졌다.
처음으로 유니크가 전장을 이탈하자 다이나믹 팬들이 기립하며 목이 쉬어라 소리쳤다.
-으아아아!
-미쳤다!
-다이나믹!
-다이나믹!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S.솔리드 팬들은 참담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아 유니크가···.
-안 돼.
양팀 모두 한 명을 잃었으니 3:3이지만 다이나믹 G.C엔 에이스 피케가 건재했다.
게다가 중앙 거점을 차지한 상태 아닌가.
솔리드 팬들이 패배를 직감하고 있을 때, 노련한 숀 해설은 맵이 보내오는 힌트를 놓치지 않았다.
“여러분! 보십시오!”
“아직 전장에 빛무리가 남아있습니다!”
-어?
-아아!
캐릭터가 사망하면 즉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전장을 이탈하게 된다.
그러나 유니크가 죽은 자리엔 여전히 반짝이는 빛이 자릴 맴돌고 있었다.
다시 전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수단이 주변에 존재할 때 생기는 바로 그 이펙트였다.
-부활! 부활이다!
정답을 떠올린 누군가가 소리쳤고 팬들은 애타게 케빈의 이름을 불렀다.
-케빈!
-케에빈!
-빨리 가서 살려내!
-유니크 살려!
-아직 안끝났다!
‘엿됐네.’
후방에서 S.솔리드를 견제하던 다이나믹의 엘레멘탈 마스터, 하이프리스트는 착잡한 얼굴로 거리 너머를 응시했다.
“돌겨억-!”
쿵쿵쿵-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흉흉한 기세.
타워 실드를 앞세워 도끼눈을 뜨고 달려드는 S.솔리드의 3인방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