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인가 방패인가 (3)
2라운드 맵은 원신의 수림.
커다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수림을 보는 순간 저쪽에서 누가 나올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크레인저.’
보법 스킬을 이용해 나무 위를 날아다니며 저격하기론 최적의 맵이다.
“누굴 내보낸다···.”
코치는 신중한 얼굴로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단 제리는 패스, 기동력이 암살계에 비해 떨어지는 마법사를 굳이 수림에 내보내는 건 1패를 자진해서 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남은 카드는 나 아니면 제레미 뿐, 나는 코치의 고민을 덜어줄 겸 살짝 손을 들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다크레인저에게 있어 원신의 수림은 자기집 마당 같은 곳이다.
여기서 승부를 보려면 최소한 빠른 기동력이 필요했다.
제레미는 얼마 전에 대승보라는 전설급 보법을 장착했지만 중(重)에 가까운 묵직한 스킬인지라 아무래도 운룡비형보다 민첩함은 떨어졌다.
“여기선 제레미가 낫지 않을까?”
코치는 아무래도 나를 쓰길 꺼리는 눈치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만에 하나라도 내가 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실제로 게임이 그리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분석팀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저쪽 다크레인저는 기동력이 굉장한 수준이었다.
장비에 달린 스킬까지 이용해 오직 기동력에만 올인을 했으니 빠를 수밖에.
“치고 빠지는 작전으로 나오면 아무리 한솔이 너라도 한 대도 못 때리고 질 수 있어.”
“그건 제레미가 더 심하죠. 제가 제레미보다 훨씬 빠른데요.”
짧은 답문이었지만 팀원들은 코치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지금 브라이언 코치는 이번 라운드를 내주고 2:2로 가려는 심산이란 걸 말이다.
다이나믹 G.C의 남은 인원풀을 고려할 때 이번만 넘기면 더는 나에게서 변수를 창출할 카드가 없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제레미는 이기면 좋고 져도 어쩔 수 없는, 버리는 카드가 된다.
기분이 나쁠법한데 제레미의 표정은 덤덤했다.
“뭐, 코치님 뜻이 그러면 제가 나가도 상관없어요. 까짓거 제가 이길 수도 있고요.”
“반댑니다. 제가 나가는 게 낫습니다.”
“이유는?”
“제레미가 나가면 질 확률이 5할이 넘습니다.”
라플라타나 망자의 광장 같은 작은 맵이었다면 한주먹 거리도 아닐 테지만 하필 원신의 수림이다.
맵이 크고 둥글어 상대를 구석으로 모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기동력을 살려 치고 빠지면 정말 한 대도 못 때리고 질 수 있었다.
“자신 있어? 네가 여기서 지면 오늘 어렵게 간다.”
흐름이라는 게 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지면 안 그래도 상당한 다이나믹의 기세는 하늘 끝까지 치솟게 된다.
제리나 제레미는 어디에 내놔도 훌륭한 카드지만 2:0으로 몰린 상황에서도 제 실력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직 S.솔리드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코치님. 저 유니크예요.”
“크으.”
내 말에 제리는 조용히 박수를 치며 거들었고 코치도 고갤 끄덕였다.
“좋아. 그럼 한번 해 봐.”
*
“양 팀 작전 시간이 모두 끝났습니다. 지금 막 제게 다음 라운드 명단이 들어왔는데요.”
잠시 호흡을 고른 캐스터가 목에 힘을 주며 말한다.
“많은 팬 여러분들이 기다렸을 바로 그 매치···.”
여기까지 말했을 때 팬들은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고 누군가는 목이 터져라 선수의 이름을 외쳤다.
들불처럼 번지는 환호는 스크린에 양 선수의 사진이 올라온 순간 절정에 달했다.
“와아아아-!”
[2라운드 - 원신의 수림]
[S.솔리드 무도가 vs 다이나믹 G.C 다크레인저]
-유니크!
-유니크!
-유니크!
“엄청난 환호에 제가 잠시 한눈을 팔고 말았습니다. 경기 시작됐습니다!”
“오늘 처음 보고 계실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해 드리자면 남쪽에서 검정 무복을 입고 질주하는 저 선수가 바로 유니크 선수입니다. 가이아 최고의, 아니 e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선수입니다.”
“설마 모르는 분이 계실까요? 아직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무패의 선수를 말이죠.”
-빠르다 빨라.
-1인칭으로 봐봐. 어지러울 정도임.
-근데 원신의 수림이면 질 수도 있잖아. 그냥 무난하게 제레미나 내지.
-허어! 믿음이 부족한 자로다.
-믿습니다.
-유멘.
관중들이 경기에 집중하는 사이 한솔은 지면에 달라붙어 미끄러지듯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숀은 이 경기 어떻게 흘러갈 거라고 보십니까.”
“쉽지 않은 경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숀이 겜알못이었어?
-이분 겜볼줄 모르는 분이셨네 ㅡㅡ
어려워질 거란 예측을 입에 담자 S.솔리드 팬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실제로 지금까지 유니크에게 어려운 경기는 없었다.
굳이 꼽아보라면 작년 레전드크루와의 팀 매치가 박빙의 승부였고 나머진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연전연승을 거두길 2년째.
프로게이머의 세상 속에선 제법 긴 시간을, 그렇게 흔들림 없이 지켜온 셈이다.
이런 선수에게 쉽지 않은 경기를 예상하니 팬들이 받아들이기 힘들만 했다.
-사과해!
-유니크는지지 않아!
“팬들이 화가 잔뜩 났는데요.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보시다시피 원신의 수림은 맵이 넓습니다.”
“넓죠.”
“게다가 오버다이스 선수는 이미 여러 경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북미 최고의 이동속도를 말이죠. 유니크 선수는 오늘 시험대에 오를 겁니다. 특정 맵에서 그의 치고 빠지긴 이미 약점이 없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말하는 순간 두 선수가 중앙에서 마주칩니다!”
-박살 내버려!
이 외침은 S.솔리드 팬이 내는 게 아니었다.
한이 담긴 외침은 그간 유니크에게 당해왔던 상대팀 팬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모욕의 시간을 끝내줄 한 줄기 희망이 여기 수림에 있었다.
뚜두둑-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는 소리와 함께 마력을 머금은 화살이 나무 사이를 휘어들어가며 뻗었다.
오버다이스, 다이나믹 G.C를 지탱하는 암살 딜러.
본래 다크레인저는 가이아에서 가장 긴 사거리를 자랑하는 클래스다.
저격용 라이플을 든 포격사처럼 예외가 있긴 하나 포격사도 탄환을 꺾어 쏘는 묘기를 부리진 못한다.
빛의 꼬리를 달고 휘어져 들어오는 화살을 한솔이 피하자 폭음이 숲 속을 연달아 울렸다.
간발의 차로 피한 화살이 그대로 나무에 박히더니 폭발한 것이다.
-크. 대단해!
-스치면 간다!
다이나믹을 응원하는 팬들은 오늘도 위력적인 화살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한솔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위력은 그저 그러네.’
예상대로였다.
기동력을 중시한 세팅에 공격력까지 높긴 힘들었다.
대신 그 속도만큼은 대단했는데 시야에 잡았다 싶으면 상대 선수의 그림자만 남아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운룡비형이 굉장히 빠른 축에 속하는 전설급 이동 스킬임에도 거리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스무 발 정도 화살을 날린 오버다이스는 넓은 범위를 타격할 수 있는 공격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 먼 거리에선 도저히 맞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플래시 데미지를 노린 공격, 아무리 유니크가 빨라도 대놓고 대단위 타격으로 나오면 아예 데미지를 면하긴 힘들었다.
그렇게 체력이 1퍼센트가 빠졌을 때 관중의 웅성거림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천하의 유니크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체력이 3퍼센트까지 빠졌을 때 돌연 유니크의 모습이 수림에서 사라졌다.
“그림자 발자국! 수많은 선수를 패배의 무덤으로 보내버린 유니크 선수의 특기가 나왔습니다.”
이제 2년차 시즌도 어느덧 중반을 넘어선 시점, 장비에 비해 스킬은 풀리는 가짓수가 적어 장비에 비하면 훨씬 더 상향평준화 된 부분이 많았다.
한때 강력한 팀플 스킬로 각광을 받았던 드래곤웨이브나, 아크나이트 비장의 딜링 스킬인 인피니트 슬래셔를 이미 여러 프로 선수들이 쓰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그림자 발자국만큼은 리그에서 오직 유니크만이 가지고 있었다.
전설 스킬 중에서도 뽑기 힘든, 그만큼 성능이 받쳐주는 희귀 스킬이었다.
오버다이스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귀를 기울였다.
암살계는 본래 기감이 민감한 클래스, 바람소리 속에 섞여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다시 활시위가 당겨졌다.
80미터, 50미터, 30미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가만있던 나뭇가지가 살짝 구부러진 틈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촤르륵-
그물처럼 펼쳐진 화살비가 날아들자 유니크의 체력 바가 또 한 번 요동쳤다.
체력 포인트가 90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자 중계진, 관중 모두가 경악했다.
“맙소사. 오버다이스 선수! 정말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오버다이스 선수 눈엔 유니크 선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측샷 ㄹㅇ 돌았는데
-그 와중에 백스텝으로 빠지네; 사람인가;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은 오버다이스는 다시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확실해. 유니크는 내 속도를 못 쫓아와!’
항마장과 열양지가 날카롭게 쏘아지곤 했으나 일찌감치 바깥으로 미끄러지는 다크레인저에게 닿긴 역부족이었다.
“좋았어!”
“그렇게만 하면 돼!”
다이나믹 벤치는 오버다이스의 선전에 축제 분위기였다.
비록 데미지는 약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벌써 유니크의 체력은 1할 이상 깎여나갔다.
결정적으로 부드러운 운룡비형의 움직임이 다크레인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한다면 승리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115초요!”
개인전 시간 3분, 그중에 1분을 한 대도 맞지 않고 버텼다.
지금껏 유니크를 상대로 이런 흐름을 이어간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손에 닿지 않는데 뭘 어쩌겠어!”
다이나믹 G.C의 코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던가.
보이지 않는 적을 잡아내기 위해 오버다이스와 함께 했던 고된 훈련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어!”
그때였다.
잠시 감상에 젖어있는 사이 선수들이 탄성을 흘렸다.
“뭐야!”
이변이 일어났음을 깨달은 코치가 스크린에 집중한 순간 유니크의 신형이 번개처럼 쏘아졌다.
‘대체 어떻게?’
적당히 거리를 벌려 다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려던 오버다이스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저 멀리 있던 유니크가 은신을 해제하더니 벼락같은 기세로 거리를 좁히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너무 놀라 헛숨을 삼키는 데 화끈한 통증이 허벅지에서 일었다.
“윽!”
붉은 기운, 거리가 줄어들자 열양지에 당하고 말았다.
-안 돼!
-저 미친 새끼!
-도망쳐어어!
이것이 압도적 폭력의 서막임을 깨달은 다이나믹 팬들은 비명을 질렀다.
대위기임을 잘 아는 오버다이스는 어떻게든 유니크를 뿌리치려 애썼지만 상대는 한 번 잡은 먹잇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범위가 넓은 항마장으로 몰고 열양지로 꿰뚫자 오버다이스는 정신 못 차리고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정신력이 흐트러지면 몸도 맘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밖에.
유니크에게 완전히 따라잡힌 오버다이스는 용의 충격에 연타를 당했다.
‘젠장···!’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충격.
나뭇가지가 부러지며 추락하던 오버다이스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추락하면 영락없이 게임을 넘겨주게 된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낙법을 펼치려 했지만 전신을 옥죄는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름을 밟듯 부드럽게 다가온 유니크가 양팔을 벌려 자신의 몸을 감싼 것이다.
쿵!
십미터 높이에서 지면을 향해 머리부터 떨어진 충격은 상상이상.
강한 경직에 꼼짝도 못 하는 상대에게 떨어진 교룡뇌조는 승부에 마침표를 끌어냈다.
[YOU WIN!!]
-끼요오오옷!
-그럼 그렇지!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난 처음부터 믿음
-킹니크.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보셨습니까? 많은 시청자 분들이 깜짝 놀라셨을 듯합니다!”
“눈앞에서 본 저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습니다. 수세에 몰려있던 유니크 선수가 단숨에 2라운드를 가져갑니다!”
경기장과 관중석을 가로막던 막이 걷히고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래도 생각보단 제법이었지.’
처음엔 은신만 써서 상대의 시야를 빼앗고 거리를 좁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버다이스의 감이 생각보다 좋아 그림자발자국 만으로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아주 조금 흔들리는 나뭇가질 보고도 위치를 맞추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승부를 보기 위해 유니크의 선택은 자색 팔찌의 효과였다.
시합 도중에 갑자기 스킬이 강화될 줄은 생각도 못한 오버다이스는 그대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한솔이한테 사과해야겠다.”
“왜요?”
브라이언 코치의 중얼거림을 제리는 놓치지 않았다.
“그게···조금 의심했거든. 초반에만 말이다.”
“쯧쯧. 코치란 분이. 이렇게 신뢰가 없어서야.”
“뭐, 인마?”
“하이파이브나 준비하세요.”
벤치로 돌아온 한솔을 맞이해 선수들이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잘했다!”
“역시 우리 에이스! 가차없지!”
경기장은 여전히 유니크를 연호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한솔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