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인가 방패인가 (1)
기적만을 바라는 포지션에 있는 약팀이 업셋을 거듭하며 결승전까지 올라간다.
팬으로서 이보다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다이나믹 G.C에게 올여름은 그런 시즌이었다.
괴물 신인 피케의 영입, 그리고 그 뒤를 받쳐주는 선수들까지.
가이아에서 한 해 농사는 흐름이라는 말이 있다.
다이나믹 G.C는 제대로 흐름에 올라탄 상황.
슈퍼호넷에 이어 레드불스까지 무너지자 블랙이글스는 비상이 걸렸다.
슈퍼루키를 영입한 신예의 기세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작년엔 레전드크루가 돌풍의 주역이었는데 이번엔 다이나믹이 그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진짜 잘하네.”
제리는 피케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난 놈은 난 놈이었다.
피케의 실력은 한국 상위레벨에서도 충분히 통할 정도.
최근 무도가와 웨폰마스터를 비롯해 암살계를 저격할 요량으로 각 프로팀은 백색계열을 키우는 추세였고 그중 제일 두각을 드러내는 게 피케였다.
올해 데뷔한 신입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노련한 플레이, 제레미와 붙으면 6대 4로 피케의 우세가 예상됐다.
그나마 제레미나 되니까 이 정도지 다른 선수였음 어림없었다.
최근 상향평준화 된 장비와 스킬, 클래스 상성을 고려하면 4할도 대단한 일이었다.
만약 자연의 기운이 없었다면 피케는 내게도 닿을 정도의 실력자인 셈이다.
시즌은 약 반년에 걸쳐 진행되는 레이스.
수년 동안을 프로씬에 몸담았지만 언제나 컨디션을 최고로 유지하는 선수는 지금껏 본적이 없었다.
독감, 배탈 등의 극단적 예시가 아니더라도 사람이면 컨디션의 고저 차가 생기기 마련이다.
S급 선수도 어떤 때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다.
그런 경기가 쌓이고, 반복될 때 사람들은 그걸 슬럼프라 부른다.
S급 선수의 컨디션이 난조일 때 기세가 좋은 A급 선수와 붙으면 어떻게 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A급 선수가 S급을 잡아낼 수도 있다.
거기에 클래스 상성의 우위까지 더해지면 확률은 더욱 올라간다.
만약 피케의 기세가 가장 좋을 때, 그리고 나의 기량이 떨어져 있을 때 붙는다면 피케는 충분히 날 잡을 수 있을 만한 그릇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컨디션 기복이랄 게 없는 인간이다.
그런 선수들이 가끔 있다.
가장 잘할 때와 못할 때의 차이가 적은 선수들.
주로 톱클래스 선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인데 안타깝게도 회귀 전의 나는 1군 말석이었다.
덕분에 저격 카드 정도의 쓸모는 유지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시간을 거슬러오기 전에도 기복이 없던 편이었던 나는 자연의 기운이라는 압도적 능력을 얻은 뒤론 언제나 최고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생체리듬의 반복이 내겐 없었다.
항상 최고점을 쭉 유지할 수 있고 지치지도 않았으니까.
가끔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셔주기만 하면 되는 사기스러운 능력인 것이다.
덕분에 깨달았다.
내게 슬럼프 따윈 없을 거라고.
누가 결승 상대로 올라오든 S.솔리드 팬들은 최고의 경기를 볼 수 있을 터였다.
*
22일 토요일.
S.솔리드는 결승전 상대가 누가 될지 지켜보기 위해 접속기를 가동했다.
다른 사람들은 TV 앞으로 모일 테지만 선수단은 유료 관중석 티켓을 배부받아 좀 더 현실감 있는 경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1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유료 경기장은 오늘도 만석.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응원소리가 흐를 때, 스크린에서 영상이 시작됐다.
인터뷰어와 함께 히죽 웃으며 등장한 건 비호감 프로게이머 설문조사 1위를 차지한 타우러스였다.
“최근 돌풍의 중심에 서있는 다이나믹 게이밍 클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해본 적 없어서 모릅니다. 간신히 5위 따리나 하는 팀을 누가 신경 씁니까?”
-저놈의 입은.
-또또또 개망신 당하려고.
-쟤는 컨셉 아니더라. 레알이야 ㅋㅋㅋ
-저놈 얼굴만 보면 패고 싶은데 정상이야?
-정상.
한결같은 컨셉을 보며 관중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또라이가 또라이 같은 발언을 하는 건 크게 이상할 거 없다는 반응이다.
하지만 충격적인 데뷔전에 이미지가 바닥을 쳐서 그렇지 실력은 있는 놈이었다.
실력 없는 선수가 7할대 승률을 기록하며 팀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할 순 없었다.
“아, 그래도 최근 피케 선수를 필두로 다이나믹이 엄청난 경기력을 보인 건 사실인데요. 사전 경기 예측 결과는 박빙으로 나왔거든요.”
“흥. 게임 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 같으니. 오늘 똑똑히 보여주겠습니다. 북미 최고 마법사의 실력을.”
사전 녹화 영상인 줄 알면서도 엄청난 야유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가 최고 마법사야!
-너 따위보다 제리가 더 나아!
-이기고 그딴 소리 해라 이기고오!
-일 년 내내 준비만 하냐고
팬들의 야유에 모자를 눌러쓴 제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뿌듯하구만!”
일방적인 야유 속에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 전에 중계진이 뽑은 핵심 선수는 타우러스와 사이클론, 피케였다.
리그를 좀 봤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초반 경기 흐름은 무난하게 흘렀다.
블랙이글스가 앞서나가면 다이나믹G.C가 스코어를 따라갔다.
관중들은 다이나믹을 원맨 캐리팀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진짜 원맨캐리 팀이었음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불가능했다.
피케가 팀 내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유한 건 맞지만 다른 팀원들도 최소한 평균 이상을 해주기에 이런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블랙이글스 인원은 인상을 쓰기 바빴다.
게임이 박빙이라 짓는 그런 표정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약체팀에게 당해 기분 나쁘단 느낌?
둘중 하나였다.
자기 객관화가 제대로 안 됐거나 분석을 엉망으로 했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건 분명했다.
와일드카드전을 제외한 포스트 시즌은 전부 7판 4선승제이며 5라운드부턴 팀게임으로 진행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팀플레이가 강한 팀일수록 더 강해질 수 있단 뜻이다.
‘약점은 고쳐 왔나?’
포스트시즌 돌입 이전부터 프로팀 관계자들은 블랙이글스의 팀플레이를 지적했다.
선수 개인 역량에 비해 팀플이 제대로 안 된단 지적이 여러 명의 입을 통해 나왔다.
애초에 타우러스같은 망나니를 끼고 팀플이 좋으면 그것도 이상한 노릇이다.
만약 약점을 보완하지 못했다면 팀전이 강하다고 평가받는 다이나믹에게 제대로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5라운드 시작부터 블랙이글스가 밀리기 시작했다.
사이클론과 타우러스의 두 쌍두마차는 확실한 위력을 가진 카드지만 팀게임은 시너지 효과를 강하게 누리는 쪽이 유리한 경기다.
“야이 새끼들아! 뭐해! 라인 더 올려!”
순간 거리를 재지 못하고 깊숙하게 들어간 타우러스에게 힐이 잠깐 끊기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이나믹 선수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프로라면 하지 말아야 할 실수 중의 하나.
5라운드를 시원하게 말아먹자 블랙이글스 벤치 분위기는 수류탄이 터진 듯 처참했다.
생중계인 것도 잊은 채 타우러스는 고래고래 소리쳤고 팀원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청을 높이며 삿대질을 하기 바빴다.
“야이 개새끼들아! 그거 하나 못 쫓아와? 이딴 놈들도 프로라고.”
“뭐라고? 네가 마법사지 암살자야? 이 또라이 같은 자식은 그냥 개인전 카드로만 썼어야 하는데.”
“뭐!”
삿대질이 주먹질로 변했고 관계자들이 달려나와 선수들을 붙잡아야 했다.
아직 제정신인 사이클론은 제발 집중하자고 부탁했지만 공허한 외침이었다.
저렇게 멘탈이 깨지면 단시간내에 회복하기 힘들다.
5, 6라운드의 잇따른 패배.
수많은 안티팬의 포화 속에서도 꿋꿋이 정규시즌 2위 자리를 지켜낸 블랙이글스의 돌풍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오만 욕을 받으며 퇴장하는 블랙이글스 선수를 뒤로하고 다이나믹 G.C를 결승에 진출시킨 공로자 피케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피케 선수. 길었습니다. 와일드카드부터 시작해서 드디어 챔피언 시리즈를 앞두고 있는데요. 기분이 어떠세요?”
“조금 긴장하긴 했지만 연습한 만큼만 하면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머싯따!
-세체아;;
-이바닥의 진정한 승자를 가릴 시간이다!
-응. 정규시즌 상대전적 0승~.
-어우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다이나믹 G.C의 원동력은 역시 팀플에서 나오는 시너지잖아요.”
“네.”
“디펜스 조합을 결승전에서도 쓰실 생각인가요?”
디펜스 조합. 다른 말로 하면 버티기 조합이다.
아크나이트, 다크레인저, 엘레멘탈마스터, 하이프리스트까지.
조합 면면만 보면 달리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조합이다.
이미 2년차를 마무리 지어가는 북미에서 몇 번 이상 등장했던 조합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조합을 완성도 있게 정착시킨 건 다이나믹 G.C가 최초였다.
상대와 거리를 벌리며 다크레인저로 체력을 갉아먹고 체력의 우위로 풀타임 접전을 이끄는 조합.
이 견실한 조합에 S.솔리드를 제외한 모든 포스트시즌 팀이 무너졌다.
우리 팀은 아직 디펜스 조합을 겪어볼 기회가 없었다.
피케가 워낙 후반에 합류한 것도 있고 3:1이나 3:0 스코어로 게임을 끝낸 적이 많았다.
“S.솔리드하면 다들 공격력, 창을 떠올리죠. 선수 개개인의 역량도 말할 필요 없이 뛰어나고요.”
-역시 바른 선수야.
-뭘 좀 아는 친구네.
-아무렴!
S.솔리드 팬들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남은 시간동안 디펜스 조합을 더욱 견고하게 다듬어 부딪칠 생각입니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네요?”
“예. 아직 부족하지만 멋진 경기 보여드릴 수 있도록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근본;;
-이게 옳게 된 선수다;;
-적이지만 응원한다.
-인터뷰는 이렇게 해야지.
-입만 산 블랙이글스보다 훨씬 재밌을거 같음. 대진표 만족한다.
관중들 말마따나 확실히 근본이 있는 녀석이었다.
인터뷰를 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는데 카메라가 하필 날 잡는 게 아닌가.
대형 스크린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어린 내 얼굴이 비치자 팬들이 환호를 보냈다.
“저기! 유니크 선수가 경기를 직접 지켜보고 있었네요. 뭔가 피케 선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유니크 선수?”
“뭐야! 우릴 잡은 거야?”
“아. 한솔이 머리 커서 걸렸나 봐.”
“···안 크거든.”
양옆에 앉아있던 제리와 케빈은 슬그머니 몸을 기울여 카메라의 시선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야! 가만 있어! 더 이상하다고!
카메라가 줌아웃 되더니 당황해하는 우리 팀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S.솔리드 선수들도 오늘 경기를 보고 긴장한 걸까요?”
“저는 저 선수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네요.”
중계진까지 거들고 나서자 관중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많은 팬들이 내 이름을 외치며 힘을 실어줬다.
S.솔리드 팬이 가장 많다더니 준결승임에도 우리 팀 지분이 제일 높은 것 같았다.
팬들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피케를 바라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상대에 대한 존중, 챔피언의 여유가 느껴지는 장면에 관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이거 엄지 척 아닌데···.
“아앗!”
“와아아아-!”
그리고 잠시 뒤, 내 엄지 끝이 바닥을 향하자 비명 같은 환호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
결승전까지 남은 약 160시간.
이 시간을 잘 쓰는 쪽은 우승컵을 가져올 확률이 크게 올라간다.
연습 첫째날, 귀한 손님이 커스텀 룸을 찾아왔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상부상조하는 거죠.”
브라이언 코치가 깍듯하게 반긴 초대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비프로스트였다.
올 시즌 아크나이트로 클래스 체인지 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북미의 탑클래스 올라운더.
최고의 아크나이트 중 하나란 평가를 받는 그를 초빙해온 이유는 다이나믹 G.C의 디펜스 조합을 상정한 스크림을 위해서였다.
빌에겐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떠오르는 신성인 피케의 실력을 그에게 카피해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였다.
연습이 되려면 상대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거나, 상대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어야 할 것 아닌가.
사실 스크림을 하는 경우는 있어도 연습을 위해 이렇게 엘리트 선수만 쏙 빼서 보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결승전 연습을 위해 비프로스트를 데리고 오잔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교섭은 전적으로 코치가 해냈으니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지 궁금하긴 했다.
“준비합시다!”
코치는 비프로스트를 중심으로 다이나믹 G.C와 똑같은 조합을 만들었다.
다크레인저 애덤, 엘레멘탈마스터 마이클, 하이프리스트 로이까지.
이 정도면 선수 밸류로는 막상막하. 아니, 오히려 더 나은 편이었다.
결승전 준비 상대로 더할 나위 없는 구성이었다.
이에 맞서는 우리 팀 조합은 실무아비.
S.솔리드의 팀전을 책임졌던 조합이며 트레이드 마크.
“그럼 어디, 얼마나 단단한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