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여름 (3)
시즌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5월부터 시작하는 시즌은 9월이면 포스트 시즌에 돌입한다.
여름이 끝나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가을 무대에 설 팀의 윤곽이 드러났다.
S.솔리드는 워낙 승률이 높아 진즉 매직넘버를 달성한 상황.
이 매직넘버란 1위 팀이 자력으로 우승을 확정 짓게 되는데 필요한 승수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남은 경기를 모두 져도 정규시즌 1위는 바뀌지 않는단 뜻이다.
우리 뒤를 이어 블랙이글스, 레드불스, 슈퍼호넷도 가을행 티켓을 일찌감치 따내는 데 성공했다.
남은 건 와일드카드 자격을 받는 5위.
와일드카드로 올라온 팀이 결승전 문턱을 밟는 경우는 없다지만 가을 문턱을 밟느냐 못 밟느냐는 팀 입장에서 상당히 큰 차이였고 팬들도 제발 포스트 시즌 구경 좀 해보자며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이집 경기가 그렇게 재밌다며?
-강건너 불구경잼
여유 있는 상위 팀 팬들은 누가 막차를 탈지에 대해 의논하며 팝콘을 뜯기 바빴다.
슈퍼호넷을 상대로 3:0 경기를 마치고 간식을 집어 먹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지?”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거의 없는 편.
전화를 받자 웬 중년남성이 자신을 길드장이라며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유니크 선수 맞으시죠? 저는 엠파이어 길드의 길드장을 맡은 사람입니다.”
“누구래?”
“엠파이어 길드장이라는데?”
옆에서 같이 빵을 집어 먹던 팀원들이 귀를 세우고 누구냐며 속닥거렸다.
“거기 랭크 10위권 길드 아닌가?”
“맞아.”
길드랭킹은 서버 개척에 따른 공헌도로 결정이 되는데 사실 순위가 높다고 해서 유별난 혜택은 없었다.
해당 년도 1위를 하면 중앙 도시의 대(大)비석에 금색으로 이름을 새겨주는 특전이 있긴 한데 올해는 이미 압도적인 점수 차를 벌려놔서 S.솔리드 이름이 새겨지는 건 거의 확정이었다.
아마 북미서버가 망할 때까지 비석 제일 첫째에서 S.솔리드의 이름이 빛날 터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명예를 중시한다면 탐낼만한 혜택이었다.
“그런데요?”
“그 얼마 전에 공략하신 자색궁전의 장비 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이야길 들었을 때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을 잘랐다.
“다시는 이런 일로 전화하지 마세요.”
“잠, 잠시만요. 이야길 들어주세요. 5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장비가 안 된다면 공략법 만이라도···.”
나는 전화를 끊어버린 뒤 주변에 앉아있던 팀원들에게 당부했다.
“혹시 이런 전화 걸려오면 이야기 들어줄 필요도 없어. 바로 전화 끊어버려. 인생 말아먹는다.”
프로 생활을 하다 보면 선수는 많은 유혹에 노출되곤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건 승부조작.
수억원 이상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왜 고작 수천만 원에 선수 인생을 날아갈 위험을 감수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사실 모든 선수가 풍요로운 선수생활을 누리는 건 아니다.
게다가 유혹에 넘어가는 선수들이 얻게 되는 금전적 이득은 고작 수천만 원이 아니다.
브로커에게 받는 돈 외에도 자신이 직접 판에 개입해 도박을 하면 훨씬 많은 이익을 얻는 게 가능하다.
그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건 장비 유출이다.
가이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팀에 속해있는 동안 얻은 장비를 상대 팀에 돈을 받고 넘기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단 거다.
물론 스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스킬은 한 번 배우면 계정에 귀속되기 때문에 그럴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장비는 거의 귀속되는 경우가 없어 쉽게 넘기는 게 가능하다.
생각해보라.
남들보다 좋은 장비는 시합의 승률을 올려주는데 직접 기여한다.
그런데 그런 장비를 상대 팀에게 유출한다?
이건 한 몫 챙기고 게임 말아먹겠습니다 하는 거랑 똑같은 소리다.
선수 표준 계약서는 시장이 커짐에 따라 계속 수정이 되고 있으며 장비 관련해선 전 세계 모든 팀이 엄격한 조항을 갖춰둔 상태다.
선수 생활이 끝나도 장비 분할은 물론 계정판매를 일정 기간 금할 정도다.
그럼에도 이런 장비 유출 문제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기사란에 등판하곤 했다.
장비라고 해봐야 고작 게임 데이터다.
상식적으로 그걸 얻기 위해 수억 원씩 붓는다는 걸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심지어 시즌 말미에 들어서면 장비 수준은 대체로 비슷해지는데도 말이다.
우리 팀은 예외로 치더라도 프로팀이면 다들 엇비슷한 공략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평준화가 되기 마련이다.
어차피 비슷해질 걸 알면서 수억을 태우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이 다르니까.
일반인에게 수억은 엄청난 돈이지만 든든한 지원을 받는 프로팀은 지를만한 액수인 것이다.
물론 엠파이어 길드는 프로팀과 연관이 전혀 없는 일반 길드다.
하지만 분명 통화를 끊기 전 길드장이란 양반이 50만 달러라는 언급을 했다.
길드장이 돈이 많은 양반일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필시 다른 프로팀의 물밑접촉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불의 정령과 스카라를 잡으며 얻은 장비는 숫자는 몇 개 되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전력상승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S.솔리드가 강한 이유엔 선수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장비 또한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스킬이나 업적은 슬슬 평준화가 이뤄지는 중이지만 장비는 여전히 격차가 유지되고 있었다.
물론 우리 팀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자색궁전을 클리어 한 팀은 아직 없었고 우리도 다시 도전하라면 못할 일이었으니까.
요점을 말하자면 현재 내가 지닌 팔찌를 포함한 자색궁전 장비는 프로팀이라면 큰돈을 써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 물건이란 뜻이다.
“50만 달러를 주겠대?”
“그 자식 돈 많네.”
“혹할 필요 없어. 여기서 열심히 생활하면 그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일 테니까.”
가이아는 급속 성장중인 시장이다.
시청자 수 억 단위 시대에 진입하고 대자본이 시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지금관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의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런 이야길 선수들에게 하면 꿈꾼다고 할지 모르나 몇 년만 지나면 도래할 현실이었다.
*
S.솔리드에 2군이 만들어졌다.
내년부터 북미에도 2부리그가 신설된다는 계획에 따라 인재 풀을 넓힌 것이다.
1군 숙소가 넓긴 해도 추가로 열두 명의 인원을 받을 정돈 아닌지라 근처에 2군 숙소를 따로 잡기로 했다.
평소라면 쉬어야 할 주말에 나는 새로 들어올 선수 체크를 도와야 했다.
감독, 코치, 대표에 이르기까지 내 안목에 대한 신뢰가 너무 두터운 탓이었다.
올해를 끝으로 떠날 선수에게 왜 자꾸 일을 맡긴단 말인가.
그럴 생각은 없지만 내가 나쁜 놈이었음 엉망진창으로 선수를 뽑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솔아. 네가 보기엔 이 친구 어떤 것 같아.”
“인상적이네요. 적응도 빠를 것 같고. 내년 시즌에 1군이 몇 명 바뀔 수도 있겠는데요.”
“그래? 그 정도라 이거지.”
내 말에 흡족한 감독은 미소를 지으며 합격 도장을 찍었다.
난세(亂世)에 영웅이 난단 말이 있다.
접속기 강제 변경은 가이아의 난세였고 초야에 몸을 낮추고 있던 인재들이 프로무대에 올라오는 계기가 됐다.
면접을 보러 온 유저중엔 깜짝 놀랄 정도의 재능러도 있었고 그들은 곧장 2군으로 합류했다.
전년도 우승 타이틀, 현재 리그 1위란 간판을 달고 있는 S.솔리드는 영입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인재가 우리 팀을 찾은 건 아니었다.
5위 자릴 놓고 피 말리는 승부를 거듭중인 다이나믹 G.C에 보석이 입단했다.
시즌 도중 1군 선수를 교체하는 승부수였다.
계약 위반에 관한 확실한 사유가 없으면 팀은 계약 기간을 준수해야 한다.
시즌 도중 선수를 바꿀 정도면 제법 큰 돈을 안겨서 내보냈을 거다.
그만큼 재능있는 선수를 찾았단 건데 경기를 지켜보니 확실히 그럴만한 실력이었다.
“저놈 저거. 오늘 데뷔한 신인 맞아?”
제임스 로웰, 닉네임은 피케.
다이나믹 G.C에 새로 합류한 아크나이트였다.
감독은 바지에 담뱃재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흥분해 소리쳤다.
왜 저런 놈이 우리 팀으로 안 오고 다이나믹으로 갔냐고 방방 뛸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었다.
“저런 놈이 어디 숨어 있었대?”
“빌. 분발해야겠다. 붙으면 지겠는데?”
“조용히 해.”
빌은 우리팀 유일의 아크나이트, 그가 퉁명하게 답할 정도로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피케의 실력은 발군이었다.
동료들이 투닥거리는 사이 난 시선을 화면에 두고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본 적 없는 최상위급 선수들이 지속적으로 판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미 미래는 바뀌었고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도 다분한 상황.
다이나믹의 경기를 보다 말고 난 민준이에게 문자를 넣었다.
정수형에 밀러까지 챙기느라 요즘 민준이는 중학생답지 않은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누굴 찾으라고요?
왠지 메시지에서 날이 선 게 느껴졌다.
밀러가 음식이 입맛에 안맞는다고 투정을 부린단 얘기를 했었다.
내가 해야할 일을 맡겨놔서 미안하지만 꼭 중요한 일이기에 문자를 계속했다.
-킹슴도치랑 점보를 찾아오라고요?
-점보 말고 덤보. 찾으면 나한테 좀 알려줄래?
-랭크매치에서 한 번도 못 본 사람들 같은데. 어디서 무슨 소릴 들은거예요? 심해인이면 저도 찾기 힘든데.
-한 번 수소문만 해 봐.
-네.
닉네임 킹슴도치와 덤보를 쓰는 두 명의 유망주.
민준이보다 나이가 어려 몇 년 뒤에나 데뷔할 인재들이지만 만약 그들이 지금 가이아를 즐기고 있다면, 스카우트의 눈에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재능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만약 미래가 바뀌어 그들을 놓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헤르메스에도 도움을 구해볼까 생각했지만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당장은 감추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헤르메스는 서로 도움이 될 때 이용하는 관계이지 아군은 결코 아니었다.
***
2군 정비가 마무리되고 가을 티켓의 향방이 전부 가려지며
포스트 시즌이 도래했다.
와일드카드를 포함해 총 네 번의 경기로 한 해 농사가 마무리되는, 정규시즌보다 더 관심이 쏠리는 시즌의 하이라이트.
내 기억 속에 북미 2년차 우승 팀은 S.솔리드였다.
그림자 발자국을 탑재한 사이클론을 필두로 당당히 자국 리그 우승을 거머쥔 S.솔리드는 기세를 몰아쳐 월드챔피언십 1시드를 확정지었다.
북미 팬들의 열띤 응원 속에 유수의 강팀을 차례차례 격파한 S.솔리드는 마침내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여기까진 관심있게 월드챔피언십을 지켜봤던 유저라면 누구나 알만한 정보였다.
그럼 대체 포스트 시즌에서 S.솔리드와 싸운 팀은 누구였을까?
솔직히 북미에 살던 유저가 아니고서야 거기까지 기억하긴 힘들었다.
현재 가을 경기를 대기중인 곳은 성적순으로 S.솔리드, 블랙이글스, 레드불스, 슈퍼호넷, 다이나믹 G.C까지 다섯 팀.
과거 대로라면 누가 올라오든 우리의 우승이 확실하겠지만 이미 미래란 녀석은 이리저리 뒤틀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맙소사. 검으로 갈랐습니다! 보셨습니까! 피케의 검이 마법을 가릅니다!”
“다운! 다운됐습니다! 슈퍼호넷의 심장 대니얼 리타이어! 아, 승리의 여신이 호넷에게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1라운드 패널티를 갖고 시작한 다이나믹 G.C가 슈퍼호넷을 무너트리기 직전입니다!”
-피케!
-피케!
-피케!
경기장은 젊은 에이스를 부르는 목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5위로 가을문을 두드리는 팀은 경기에서 1패를 가지고 시작한다.
준플레이오프부턴 그나마 7라운드로 진행되기에 나을 테지만 와일드 카드는 평상시대로 5라운드 진행이다.
세 판만 따면 이기는 경기에서 1패는 아주 큰 패널티다.
경기 시작 전 승리팀 예측에서 슈퍼호넷은 70퍼센트에 달하는 지지를 받았다.
다이나믹 G.C가 강력한 뉴페이스를 영입해 불씨를 살렸다곤 하나 아직은 이르지 않냐는 의견이 대세였던 상황.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다이나믹 G.C의 신성 피케, 데뷔 한 달도 안 된 아크나이트는 물만난 고기처럼 움직이며 슈퍼호넷의 선수들을 하나씩 쓰러트렸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를 의식해 호넷의 주장 대니얼이 직접 전담마크에 나섰는데도 졌단 사실이었다.
마법 클래스가 탱커 클래스에 강하단 사실은 이미 입증된 바, 물론 상성이 언제나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는 건 아니라지만 올 시즌은 작년에 비해 더욱 상성이 도드라지는 시즌이었다.
그런데도 피케는 상대의 마법을 검으로 잘라내는 묘기를 선보이더니 기어이 대니얼을 쓰러트렸다.
레전드크루가 더원을 영입했단 기사 이후로 아주 오래간만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얜 왜 또 웃어?”
“놔둬. 걘 웃으면 더 무서워.”
S.솔리드의 결승전 상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한가진 확실했다.
만약 다이나믹 G.C가 결승전에 올라온다면 아주 흥미진진한 경기가 될 거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