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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S 소설 아닌데요-76화 (76/170)

격동의 여름 (2)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선수들은 자율 훈련을 위해 하나둘 접속기를 사용한다.

하지만 접속기 숫자는 1군 선수보다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잠깐 손님을 테스트하는 것 정돈 아무 문제 없었다.

어색해하는 밀러에게 접속기 사용법을 알려주고 곧바로 접속에 들어갔다.

“제 목소리 잘 들리죠.”

“예. 굉장히 신기하네요.”

“커스텀 게임을 한 번 해봅시다.”

콜로세움 형태의 로비로 들어오자 밀러의 몸이 넘어질 듯 흔들거렸다.

“지금은 많이 어색하죠?”

“와. 이거 생각보다···어렵네요.”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는 밀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S.솔리드에 전신접속기가 보급될 당시, 나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팀원들이 적응하는 모습을 지켜보진 못했다.

그러나 굳이 보지 않아도 그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접속기 변경 이후 커뮤니티마다 컨트롤이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글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그에 비하면 비틀거리긴 해도 어떻게든 서 있는 밀러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균형감각의 경우 체조 계열에 몸을 담았던 사람들이 유리했기에 그의 행적을 더듬어볼 겸 질문을 던졌다.

“바깥에선 무슨 일을 하셨죠?”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대학교요?”

“아뇨. 고등학교요.”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 얼굴은 아닌데.

이야길 들어보니 나이는 동갑, 체조 계열과는 아무 연이 없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접속기 적응력만큼은 프로 뺨치는 수준이었다.

“쭉 한 번 걸어보실래요? 왼쪽, 오른쪽으로요.”

좌우로 10미터씩 이동할 것을 요구하자 밀러는 신중한 발걸음으로 땅을 쳐다보며 걸었다.

“혹시 자정 전에 집에 돌아가야 한다든지 그런 건 아니죠?”

“괜찮습니다.”

새로운 접속기에 익숙해질 시간을 줘야 하니 테스트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TV로 봤을 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원래 집에서 편하게 시청하는 거랑 직접 뛰는 거랑 천지 차이죠. 계속 걸으면서 얘기를 해볼까요. 프로가 되고 싶은 동기가 궁금해서요.”

코치도 아닌 일개 선수가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대해 불만을 느낄 법도 하건만 밀러는 성실하게 답변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PVP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랭크 게임을요? 단 한 번도?”

“예.”

의외로 가이아엔 이런 유저가 제법 많았다.

사람과의 대결보다 던전 공략, 레이드를 선호하는 유저들.

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클래스가 바로 힐러였다.

개인전이 큰 비중을 차치하는 랭크 매치에서 힐러는 아무래도 재미를 보기 어려웠다.

“그전까진 프로리그에 관심도 없었죠. 그러던 와중에 접속이 막히고 처음 경기를 시청했습니다.”

“어떻던가요.”

프로의 경기를 처음 본 사람들은 가이아가 이렇게 수준 높은 격투게임이었나 충격을 받곤 한다.

스탯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최고의 장비와 스킬을 갖춘 선수들의 몸놀림은 일반 유저들의 것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러의 대답은 그런 일반적인 것관 거리가 멀었다.

“별거 없더군요. 딜러 클래스의 움직임은 조금 놀랍긴 했습니다. 던전에선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몬스터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힐러는 거기서 거기던데요.”

“거기서 거기요?”

“예. 적어도 제가 훨씬 더 힐을 잘 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죠. 아, 나도 프로 한 번 해볼까.”

허세인지 아닌지 표정만으론 구분하기 어려웠다.

케빈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북미 톱클래스 힐러다.

이미 과거에 명성을 날렸던 북미 S급 선수였기에 내가 S.솔리드로 그를 데려온 것이다.

실제로 케빈은 훌륭하게 서포터 역할을 해내는 중이었다.

힐러의 미덕이 무엇인가.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순발력이다.

꼭 필요한 때에 정확한 힐을 넣어줄 수 있어야 한다.

힐이 늦으면 동료를 죽음에서 구할 수 없으니까.

다음으로 중요한건 효율적인 마력 관리.

힐은 종류가 여러 가지고 소모되는 마력과 회복력이 천차만별이다.

뛰어난 힐러는 짧은 순간에도 상황에 맞는 치유마법을 사용해 오버힐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버힐이 일어나면 마력을 더 쓴단 얘기고 불필요한 마력 소모는 마력 포션을 쓸 수 없는 PVP에서 독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힐러에겐 전장을 살피는 넓은 시야도 요구된다.

꼭 필요한 인원에게 힐을 주되 자신을 노리고 사각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스스로 방어할 줄도 알아야 한다.

케빈은 이 힐러가 갖춰야 할 덕목 세 가지를 모두 다 갖췄다.

그런 케빈의 경기를 보고 별거 아니란 생각을 했다?

이건 둘 중 하나였다.

남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관찰력을 갖추지 못했든지, 정말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든지 말이다.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당장 S.솔리드엔 힐러를 받을 자리가 없지만 내가 구상 중인 팀은 달랐다.

실력만 있으면 외국인 선수를 쓰는데 거리낌이 없는 건 전 세계 공통이다.

나는 밀러가 충분히 전신접속기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넉넉히 시간을 줬다.

두 시간도 넘게 제자릴 뛰고 이리저리 움직이자 몰래 구경하던 팀원들도 다들 훈련을 하거나 휴식을 위해 사라졌다.

“어때요. 움직이는 덴 문제없죠?”

“예.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요.”

“그럼 게임을 한 번 해볼까요.”

커스텀 게임, 맵은 오림의 성채에다 최상급 AI 넷을 적으로 설정했다.

랭크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해서 성채 맵의 특징을 설명해주려 했는데 쓸데없는 배려였다.

최근 리그를 꾸준히 시청해서 어떻게 돌아가는진 알고 있다고 했다.

북소리와 동시에 주변이 성채로 변화했다.

성채를 지키던 수비군은 우릴 발견하고서 곧장 소리쳤다.

“적이다!”

창을 쥐고 달려드는 병사의 움직임은 날쌘 다람쥐 같았다.

이 병사들은 전장에 참여한 유저의 스탯에 비례해 강해지는데 나나 밀러는 이미 스탯 육성을 마친 상태였기에 병사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황제의 창격이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있어 아무렇지 않았지만 밀러는 아니었다.

누구보다 힐을 잘 넣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것과 달리 녀석은 허둥지둥 수레 아래를 구르며 도망치기 바빴다.

본래 이런 난전에서 힐러를 보호하는 건 딜러 몫이다.

항마장과 열양지로 성채병사들을 견제하는데 마법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적 팀으로 설정한 AI의 공격이었다.

이게 시합이었으면 보법을 밟아 피했을 테지만 일부러 공격을 맞아줬다.

실전이었으면 찔릴 일 없는 창도 몇 대 맞았다.

일단 체력이 닳아야 제대로 힐러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법인데? 오버힐도 없고.’

밀러의 힐은 깔끔했다.

공격에 스칠 때마다 잽싸게 힐이 들어와 체력이 가득 차올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항상 체력 바를 풀로 유지해주는 게 힐러의 덕목, 이 부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기본 재능을 확인했으니 이제 세부 확인에 들어갈 차례였다.

내가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적과 교전하기 시작하자 밀러의 눈빛에 당혹감이 어렸다.

던전에선 이렇게 빨리 딜러의 뒤를 쫓아 힐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일부러 적을 향해 달려들었고 밀러는 내 뒤를 쫓아와야 했다.

힐을 넣기 위해선 일정한 거리 유지가 필수였다.

문제는 나와 밀러 사이에 수많은 성채 병사들이 있다는 점.

케빈이라면 문제없이 달려와 힐을 넣었을 터다.

S.솔리드 팀원 중에 몸놀림이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들도 처음부터 다 좋았던 건 아니지만 일대일 훈련을 하면 실력이 팍팍 늘었다.

비명을 지르게 하는 무도가의 주먹에 매일 맞다 보면 NPC 병사쯤은 애교로 받아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팀원들이 날 피하게 된다는 점만 빼면 정말 효과적인 훈련이었다.

‘가르치면 쓸만하겠어.’

처음쓰는 접속기에 PVP 경험이 없는 밀러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보석급 원석인 건 틀림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법은 내가 고쳐줄 수 있는 문제였고 마력 배분이나 시야는 합격점이었다.

더 자세한 건 훈련을 해봐야 알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A급 역할은 해줄 것 같았다.

테스트를 끝내고 나온 시각은 새벽 1시.

밀러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처음 겪는 전신접속기 플레이는 상당한 부담이었으리라.

게다가 그냥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입단 테스트였으니 부담도 상당했을 거다.

연습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며 브라이언 코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스트는 다 끝난 거야?”

“예.”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밀러를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시간이 늦었지만 그래도 외부인을 숙소에 재울 순 없거든요. 밀러씨는 저희 기사님이 시내로 모셔다드릴 겁니다.”

“아닙니다.”

“늦었으니까 한솔이 너도 어서 가서 자라.”

“예. 배웅만 하고요.”

난 차량에 오른 밀러에게 종이와 펜을 건넸다.

“연락처 좀 적어주세요. 답장은 그쪽으로 하겠습니다.”

“아, 예.”

“밀러씨. 지금 저희 팀엔 자리가 없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내 답변에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솔직히 제 실력은 어떻던가요?”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움직임으론 북미 어느 팀을 가도 엔트리에 들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을 인정한다는 듯 밀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드기어 접속기로 플레이할 땐 자신도 프로들처럼 움직일 수 있었는데 오늘 처음 체험해 본 전신접속기는 완전히 다른 물건이었다.

“그래도 연습할 시간만 주어지면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꼭 프로선수가 되고 싶다면 다른 길도 있습니다.”

“다른···길이요?”

“오늘은 늦었으니 이 이야긴 다음에 하죠. 연락 드리겠습니다.”

밀러 호프만이라···.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타우러스와 마찬가지로 저 친구 역시 과거엔 본 적 없는 선수였다.

저만한 재능으로 프로 무대를 뛰었다면 얼굴 정돈 기억할 텐데 말이다.

어찌됐건 잘 된 일이었다.

밀러는 최소 2등 복권이었고, 운에 따라 1등을 노려봄 직했다.

현재 구상 중인 한국 팀에 합류시킬 수 있다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해외에서 프로 생활을 하는 건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니 나중에 따로 천천히 통화를 하며 미끼를 드리울 생각이었다.

밀러의 면접 건은 이렇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다음날, 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랜만이네. 그간 별일 없었나?”

“안녕하셨습니까. 대표님.”

“어제 면접을 보러 온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 자네가 직접 테스트를 했다고?”

“예.”

무덤덤하게 대답은 했는데 속으론 뜨끔했다.

코치가 테스트할 생각이 없던 걸 내가 굳이 불러서 테스트를 했다.

S.솔리드에 들기 위해 찾아온 인재를 팀을 떠나는 내가 데리고 가면 도의적으로 좀 그렇지 않은가.

“하이프리스트 클래스라고 들었네. 실력이 어떻던가.”

여기서 별거 없었다 말하면 대표는 아마 관심을 거둘 터였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말할 정도로 내가 철면피는 아니었다.

“재능은 쓸만한 친굽니다. 움직임이 엉망이라 엔트리에 올리려면 좀 다듬어야 하지만요.”

“흠.”

그나저나 이걸 누가 알려줬담.

해링턴 대표의 침묵이 길어졌다. 밀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케빈이나 로이와 비교하면 어떤 수준인가.”

“글세요. 그건 키워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당장은 써먹을 수 없으니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가. 그럼 그냥 내버려둬도 될까? 자네가 보장한 인재면 다른 팀으로 갔을 때 해가 될 수 있으니 말이야. 2군 팀이라도 만들어서 박아두려고 했네.”

2군이라니!

대표님. 이 친구는 제가 찍었단 말입니다!

“2군을 만드시려고요?”

“올해가 끝나면 팀을 떠나겠단 생각은 여전한가? 자네가 떠나면 우린 새로운 딜러가 필요하지. 자네만 한 인재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없으니 육성 차원에서라도 2군을 만들긴 할 생각이었네.”

아이고야. 내 업보란 말인가.

이럼 밀러 영입은 날아간 것 같은데.

2군 리그로 시작하는 한국행, 북미 최고의 팀인 S.솔리드 2군 입단.

같은 2군이지만 체급 차이가 너무 심했다.

내가 밀러라도 한국보단 이곳에 남을 것 같았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사기 차원에서라도 자네가 떠난다는 이야긴 끝까지 비밀로 해주게나. 감독도, 선수들도 많이 상심할 테니.”

“물론입니다.”

당장 팀원들에게 내가 올해를 끝으로 팀을 떠날 거란 사실을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분위기가 축축 가라앉겠지.

그걸 왜 이제까지 숨기고 있었냐며 화합도 흐트러질 테고.

사실을 밝힌다 해도 월드챔피언십 이후에나 말할 수밖에 없었다.

*

밀러가 테스트를 치른 지 며칠이 흘렀다.

이대로 놓치긴 다소 아쉬웠기에 난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다.

S.솔리드는 조만간 2군을 만들 계획이며 당신이 원한다면 솔리드 2군으로서 훈련하며 주전 자릴 노려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다른 방법으론 내년에 만들어질 한국 팀이 있는데 주전 힐러 자릴 보장해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이쪽도 2군이었기에 주전 자리 보장 같은 조항은 별 메리트가 없긴 했지만.

“하나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뭐든지요.”

“방금 주신 제안 말입니다. 간단히 생각하면 당연히 S.솔리드 2군으로 들어가는 게 합리적입니다. 전년도 우승에 올해도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하는 북미 최고의 팀이니까요. 심지어 그 한국팀,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셨죠. 누가 봐도 고민할 게 없는 이야긴데 대체 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밀러는 혹시 자신이 잘못한 게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뭔가 밉보였기에 이런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오해입니다. 한국행은 밀러씨를 골탕 먹이려고 제안한 게 아닙니다. 그 2군 팀이 향후 전세계 최고의 프로 팀이 될 지도 모르기에 그런 제안을 한 겁니다.”

“그럴리가요.”

농담이라 생각한 밀러는 깔깔거리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가벼운 침묵이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혹시 유니크 선수. 이번 시즌이 끝나면 한국으로 가는 겁니까?”

“드려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네요. 오늘 나눈 이야긴 비밀로 해주시고 신중하게 결정해서 답해주시면 됩니다.”

나는 밀러의 질문을 회피하며 통화를 마쳤다.

밀러의 감이 개똥이 아닌 이상에야 이것으로도 충분한 답이 됐을 터였다.

그렇게 며칠 뒤, 밀러에게서 답장이 왔다.

한국에서 프로 선수 도전을 해보고 싶단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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