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여름 (1)
“좋았어!”
금색 모래 위에 얼굴을 박고 쓰러진 황제에게서 아이템 루팅을 시도하자 레어리티 장비가 줄줄이 튀어나왔다.
현재 서버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비들이었다.
그렇게 장비를 전부 거둬들였을 때 하늘이 붉게 열리며 천둥소리가 울렸다.
로이는 또 한 번 불벼락이 쏟아지는 줄 알고 욕을 해대기 바빴다.
“썅! 정도껏 해야지!”
그러나 갈라진 하늘에서 내려온 건 불덩이가 아닌 밝게 빛나는 팔찌였다.
그 광채가 어찌나 영롱한지 남녀를 불문하고 그 빛에 마음을 빼앗길 정도였다.
난 조심스레 팔찌를 붙잡았고 그 순간 머릿속에 장비가 귀속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걸 로이가 먼저 잡았다면? 그럼 주인이 바뀌었겠지.
척 보기에 팔찌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로이도 관심을 보였다.
“보너스 장비야?”
“아마 그런 것 같은데?”
“특급 던전의 보너스 장비라니, 뭔가 좋을 것 같은 냄새가 난다.”
“···근데 이거 귀속돼버렸네?”
“어?”
본래 던전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장비는 한 명이 회수해 공략이 끝나고 나면 공평한 방법으로 분배하는 게 일반적인 룰이다.
애초에 가이아에 귀속 장비는 정말 드물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난 알고 있었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지!
자색 팔찌는 당분간 내게 큰 힘이 될 물건이었다.
특수 효과가 무려 스킬 강화.
게다가 스킬을 지정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스킬로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
[스카라의 자색팔찌 - 귀속]
등급 : A
종류 : 장신구
특수 효과 : 스킬을 지정해 위력을 강화시킨다.
[마력 +100]
확실히 네임드급 장비라고 하기엔 스탯 부여도가 다소 낮았다.
그러나 이 정도 기능이면 스탯이 0이라 한들 집고 갈만한 물건이었다.
"흐흐."
뿌듯한 마음으로 팔찌를 돌려보고 있을 때 로이가 마지막 공격에 관해 물었다.
“대체 마지막 은신은 어떻게 한 거야? 마력 다 떨어진 거 아니었어?”
파티를 할 땐 팀원의 체력과 마력을 수시로 체크할 수 있다.
당시 내 마력은 은신을 쓰며 공격하기에 부족한 양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이며 신발을 톡톡 두드렸다.
“아.”
그림자 서곡.
3초 가량의 은신스킬이 내장된 신발은 여전히 현역 장비였다.
작년 리그에서도 더원을 잡는 등, 쏠쏠한 재미를 봤는데 황제 역시 2단 은신의 뜨거운 맛을 본 셈이다.
“장비는 역시 스탯보다 기능이잖아. 안 그래?”
*
한솔이 황제를 쓰러트리기 전만 해도 유저들은 자색궁전에 관한 이야길 주고받는 중이었다.
-던전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놨더라.
-유저들 컨텐츠 소모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고민한다는 인터뷰 봤음. 그래서 일부러 더 어렵게 했을 걸?
-블랙이글스 맨날 솔리드한테 쳐발리기만 해서 몰랐는데 의외로 꽤 세더라?
-야! 2위도 잘한 거야!
-블랙이글스가 리그 2위였지?
-ㅇㅇ
-인성 쓰레기 놈이 2위라니···세상 말세다.
비록 공략엔 실패했지만 블랙이글스가 보여준 던전 공략 플레이는 여타 상위 길드와 비교해도 반 계단 이상 높은 수준이었다.
확실히 프로선수들이 이끄는 길드 플레이는 달랐다.
-S.솔리드도 길드 있지 않아?
-개척 공헌도 1위지 ㅇㅇ
-넘사벽 1위야.
-블랙이글스하고 비교하면 차이 많이 나려나? 아까 보니까 보스 피 제대로 까지도 못하고 몰살당하던데. S.솔리드면 공략 가능하려나?
-그렇게 유의미한 차이는 없을걸.
-이번 영상 보고 느끼는 게 있겠지. 제대로 준비해서 도전하면 깰지도 모름.
아무리 S.솔리드라도 당장 던전을 공략하긴 힘들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그때, 시스템 알림이 떴다.
자색궁전이 클리어됐다는 메시지였다.
블랙이글스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방송을 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대체 어떻게 클리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소식에 모든 프로팀 관계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블랙이글스 측, 특히 타우러스는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
도저히 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는지 곧장 방송을 킨 타우러스는 S.솔리드를 맹비난했다.
거의 다 깨 놓은 던전을 몰래 들어와 주워 먹은 얌체놈, 몰래 숨어서 우리 공략을 지켜봤을 거라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그딴 식으로 살지 마라. 더러운 새끼들아! 우리가 차려놓은 밥상이나 훔쳐먹는 도둑놈들!”
-누가 누구보고 더럽데.
-이 븅신새낀 아직도 계삭 안하고 입털어?
-물 흐리지 말고 꺼져 쫌!
-니가 S.솔리드 욕할 짬이야 ***야!
열이 바짝 오른 타우러스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다 버리고 진흙탕 방송을 진행하고 있을 때 레드불스와 슈퍼호넷은 훨씬 영양가 있는 생각을 했다.
‘말은 거칠지만 일리는 있어.’
아무리 S.솔리드라고 해도 곧장 던전을 돌파할 순 없었으리라.
던전 클리어 시간 격차가 방송과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S.솔리드가 공략하는데 블랙이글스의 힘이 제법 작용했을 거란 추측이었다.
“이제부터 자색궁전 주변에 인원 배치해주세요.”
“자색궁전에 사람 배치해서 24시간 감시해야 합니다.”
비프로스트와 대니얼은 서로 같은 생각을 했다.
S.솔리드가 해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다른 길드가 먼저 들어간 다음에 유유히 뒤를 쫓아가 던전을 클리어를 노리잔 생각이었다.
그렇게 웬만한 사람은 접근조차 힘든 자색궁전에 각 길드에서 파견한 인원이 배치됐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먼저 도전하는 길드는 한 팀도 없었지만 말이다.
***
2029년의 8월은 상당히 뜨거웠다.
날씨뿐만 아니라 유저도 함께 타오르는 시기였다.
헤드기어형 접속기 전면 차단.
약속했던 그 날이 도래하자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도시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지오에선 가이아 전용접속기를 예약판매해 미리 세계 각지로 배송했지만 워낙 가격이 비싼 탓에 보급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S.솔리드 길드 역시 영향을 받았다.
일반 길드원 중 접속기를 구하지 못해 당분간 게임을 못한다며 이탈하는 인원이 생긴 것이다.
커뮤니티마다 운영진에 관한 욕설이 밀물처럼 쏟아졌고 세계 각지에선 전용 접속기 결정을 철회하라는 시위가 일어났다.
지오라도 이 위기를 쉽게 극복하지 못할 거란 의견이 팽배한 가운데 가이아 운영진은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입장을 고수했다.
<이번 접속기 업그레이드는 한차원 높은 게임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전 세계에 저희가 보급한 접속기 가동률이 점차 오르고 있습니다. 전신접속기를 통해 게임을 해보신다면 많은 분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저흰 확신합니다.>
-얘들아 속지마! 기기 팔아서 돈벌려는 개수작이야!
-지금 혼자 캡슐룸 달려가면 동료를 배신하는 거다!
-유저의 의지를 보여주자!
-근데 지오도 기계 팔아서 이익 하나도 안 남는다던데. 접속기 팔아도 배송료 생각하면 손해보고 파는거랬는데.
-흑우새기 ㅋㅋㅋ 그말을 믿냐고.
-상인이 손해보고 판다는거 ㄹㅇ 믿으면 안돼
분노에 휩싸인 유저들은 참 거짓 여부를 미루고 지오를 욕하기 바빴지만 실제로 지오가 접속기를 팔아 얻는 금전적 이득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유저의 격렬한 분노, 이미지를 생각하면 엄청난 손해였다.
그럼에도 굳이 접속기 교체를 단행한 것은 정말로 다른 차원의 게임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욕구의 발현이었다.
일반 VR기어 접속 차단이 시행된 지 1주, 2주가 흐르자 긍정적인 의견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전신접속기로 하는 가이아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캡슐룸 다녀왔음. 이건 진짜 혁명이다.
-아 근데 고통까지 느끼는 거 너무 무섭자너.
-나 트롤 보고 트라우마 걸릴 뻔 했자너;;
-1만 달러짜리 이세계 접속기 ㅋㅋㅋㅋ
물론 긍정적인 의견은 여전히 소수였고 유저의 분노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리그 시청률이 생각만큼 낙폭이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선수가 무슨 죄냐?
-가이아를 잘한 죄밖에 없지.
-솔리드 우승하는건 봐야댐.
-프로리그 오늘 첨봤는데 생각보다 재밌네 ㅋ
가이아 유저중 PVP를 전혀 하지 않고 오직 PVE만 즐기는 유저는 은근히 많았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리그를 볼 일이 없었는데 당장 게임을 할 수 없으니 리그라도 한 번 볼까? 싶어 유입되는 인원이 제법 있었다.
애초에 리그 방송 타임에도 게임을 하는 사람은 게임만 했지 경기를 보진 않았다.
반대로 아예 게임은 안하고 리그만 시청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루라도 가이아를 안하면 미쳐버리는 게임 폐인들은 캡슐룸을 찾아 대이동을 시작했고 선수 모집 안하냐며 프로팀 문을 두드리는 유저들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주로 접속기를 살 여력이 없는 어린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프로게이머는 하루 종일 원 없이 게임을 할 수 있는 멋진 직업일테니 말이다.
“이게 다 입단하고 싶다고 온 것들이에요?”
“그래. 당장 모집할 생각 없다고 알렸는데도 그렇게나 많이 들어오더라.”
다이나믹 G.C와의 경기를 끝내고 분석실에 들른 난 수북하게 쌓인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전국 각지의 입단희망자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그럴만하죠. 2군 팀을 안 굴리는 건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자리 안 생기나 궁금했을 거예요.”
북미 10개 팀 중 2군을 키우지 않는 건 S.솔리드가 유일했다.
아직 2부 리그가 없는 상황에서 로테이션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를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해링턴 대표의 뜻이었다.
2군의 존재 목적은 재능있는 선수를 팀 컬러에 맞춰 육성, 1군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데 있다.
하지만 S.솔리드는 압도적인 리그 1위팀, 선수 부족 현상을 아직 겪어본 적이 없기에 아직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중에 보석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있으면 뭐하겠냐. 대표님이 새로 인원 충원 안 하신다는데.”
대표 스타일을 생각하면 설령 더 나은 인재가 있다 한들 기존 인원을 내치고 새 인원을 받진 않을 터였다.
“하긴···.”
그렇게 스쳐 지나가듯 서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리그를 치르던 어느날, 숙소로 처음 보는 사람이 찾아왔다.
“면접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미안하지만 우리 팀은 지금 인원 모집을 하지 않아요.”
“뭐야?”
“누구?”
외부인이 찾아오자 팀원들은 저녁을 먹다 말고 고개를 내밀었다.
스무살쯤 돼보이는 청년이 브라이언 코치와 얘길 나누는 중이었다.
“면접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데?”
“숙소에 직접 찾아온 건 처음 아닌가?”
“열정 넘치는 사람이네.”
제리와 제레미가 두런거리는 사이 코치는 청년을 돌려보내려 하고 있었다.
어디사는진 모르지만 애리조나에 사는 게 아니라면 제법 먼 거릴 이동했을 터였다.
“면접은 보게 해줘도 되지 않아?”
“내가 조금 전에 들었는데 저 사람 하이프리스트래.”
“아.”
데니스의 말에 팀원들은 어쩔 수 없단 표정을 했다.
힐러, 팀전이 아니면 제 몫을 할 수 없는 클래스.
심지어 우리팀엔 케빈과 로이, 두 명의 힐러가 버티고 있으니 추가로 힐러를 모집할 이유는 없었다.
“괜히 면접 보고 희망고문하는 것보단 그냥 돌려보내는 게 나을 수도 있지.”
그 사이 청년은 목소리가 조금 커져 있었다.
“테스트 한번만 보게 해주세요! 이 팀 힐러보다 더 잘할 자신 있습니다.”
“아, 글세 우리 팀은 지금 모집 계획이 없다니까요.”
“티르윙, 로스트 선수보다 제가 더 잘합니다!”
케빈과 로이의 닉네임을 언급하며 떨어질 생각을 않자 코치는 슬슬 짜증난다는 기색이었다.
큰소리가 나려는 순간 내가 나섰다.
“코치님. 그냥 한 번 보게 해주시죠.”
“응?”
내가 나서자 코치는 말을 잊은 사람처럼 입술을 뗐다 붙이기를 반복했다.
“어, 어. 면접을 한 번 보자고?”
“예.”
“우리 팀 지금 자리 없는 건 알고 있지. 한솔아?”
“네. 알고 있는데 그냥 실력이 한번 보고 싶어서요. 괜찮을까요? 어차피 저녁 먹고 나면 자율 훈련이잖아요.”
모퉁이에서 이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팀원들, 그리고 테스트 정돈 보게 해주자는 나.
코치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내 말을 들어줬다.
“그래라. 대신 제대로 설명해 드리고.”
테스트에서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와도 지금 자리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시즌 도중 선수를 갈아치울 게 아니라면 말이다.
설령 이 친구 실력이 케빈 뺨 때리는 수준이라 해도 잘 뛰고 있는 선수를 교체하는 건 대표 스타일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나를 보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갑자기 끌어당기는 손길이 있었다.
케빈과 로이였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운룡비형을 밟듯 날랜 발걸음으로 날 끌고 간 둘은 이유를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설마 저 친구 팀에 받으려고 그래?”
“그런 거 아냐.”
“진짜로?”
“진짜 아니야?”
둘은 정말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같은 힐러 클래스 아닌가.
대표가 시즌 도중 선수를 갈아치우는 타입은 아니라지만 내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아무렴, 믿고 있었지.”
믿었으면 날 안 끌고 왔을 텐데···.
둘을 안심시킨 나는 청년을 캡슐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제 이름은···.”
“정한솔이죠. 입단하러 왔는데 S.솔리드 스타를 모를 리가 있나요. 제 이름은 밀러입니다. 밀러 호프만이요.”
“반갑습니다. 밀러씨. 그럼 접속 한 번 해볼까요?”